눅 22:63-71, 희롱과 조롱과 불법 심문을 받아내신 주님, 26.8.23, 박홍섭 목사
주님은 검과 몽치로 무장한 성전 경비대원들에게 잡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 심문을 당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 과정을 조금 더 자세하게 먼저 전임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잡혀갔다가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집으로 넘겨져 거기 모인 서기관과 장로들 앞에서 새벽까지 심문을 당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와중에 베드로는 밖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고 예수님은 성전 경비대의 하속들에게 밤새도록 희롱과 매 맞음과 모욕과 조롱을 당했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자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다시 심문을 받습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 71인으로 구성된 유대 사회의 최고 의결기관입니다. 당시 법은 사형에 해당하는 공회의 재판은 낮에 열려야 하고 하루 만에 유죄 판결과 사형 집행을 끝낼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불법으로 공회를 열고 새벽까지 밤샘 심문을 하고 아침에 되어 다시 공식적으로 예수님을 잡기 위한 심문을 재개합니다. 정상적인 회집이 아닙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주님은 무죄 추정의 원칙이 무시된 심문과 불의한 재판을 통해 신성모독과 로마 정부의 반역자로 유도 받습니다. 이 일을 주도하고 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하는 자들이며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 산헤드린 공회원들입니다.
이들이 주님에게 묻습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이렇게 묻는 것은 만약 그렇다고 하면 주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그리스도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메시아로 인식되고 있었기에 로마의 법정에 정치적 반역자로 끌어갈 빌미를 찾기 위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직접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 권능의 우편에 앉을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이 답변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 성경의 가장 강력한 두 예언인 다니엘서와 시편 110편을 결합하여, 자신을 역사와 우주를 통치하시는 참된 심판 주로 선포하신 대답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그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묻고 주님은 그렇다고 답하십니다. 이들은 주님을 신성모독과 정치적인 반란자로 빌라도의 법정에 세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온 우주의 통치자이자 심판 주인 예수님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불의한 재판과 심문을 당하고 계십니까? 해결할 힘이 없어서입니까?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천지의 모사이며 지혜의 원천이며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입니다. 무엇을 못 하겠습니까? 당장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싹 쓸어버리고 자신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 당하고 있습니다. 다 받아내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왜 무죄한 예수님이 이런 재판과 심문을 당해야 하고 수모와 곤욕을 당해야 합니까? 왜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 이들의 재판과 음모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합니까?
겉으로 볼 때, 이들이 힘과 권위와 여론을 동원해서 주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주님은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어쩔 수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은 주님이 이 모든 상황을 주도적으로 받아내고 있으며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를 보면 이들의 심문에 대부분 침묵하시던 주님이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에는 자신에게 불리한 줄 아시면서도 기꺼이 답하십니다. 그들의 의도대로 정치범으로 죽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다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심판의 주인 인자로 죽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주님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고 어쩔 수 없이 당하고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곤란한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통제하시면서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향하여 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고난은 억울한 고난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죽음은 부당한 죽음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은 아버지께서 맡기신 우리의 구원을 위한 메시아적 고난이고 대속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지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기 위해 십자가로 가고 있으며,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과 모욕과 희롱을 대신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용서와 구원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온 우주의 왕이며 인자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가 불러온 모든 결과를 죽음과 함께 다 짊어져야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 되고 우리의 죄가 용서됩니다. 죄는 죽음을 불러옵니다. 조롱을 불러옵니다. 모욕과 수치와 매 맞음과 손가락질과 비아냥과 온갖 수모를 불러오는 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죄는 그렇게 추악하고 더럽습니다. 왜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해야 합니까? 이 세상에 주님보다 더 선하신 분은 없습니다. 더 아름다운 분도 없습니다. 더 존귀하고 거룩한 분이 없습니다. 더 진실한 분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모욕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십니까?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주님을 배반한 유다,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주님을 희롱한 성전 경비대들, 음모로 주님을 잡아서 심문하고 있는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의 모습 안에 우리가 다 있습니다. 이들은 모든 종류의 인생을 대변합니다. 인생이 어떤 존재입니까? 참 빛이 세상에 왔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무지하고 미련하고 어두운 존재입니다. 자기 백성들이 자신의 구원자를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신하고 저주하고 부인합니다. 욕하고 조롱하고 때리고 침 뱉으면서 죽이려고 달려들고 있습니다. 인간은 진심을 동원하고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결국은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서슴지 않고 잡고 결박하며 죽음에 넘기는 존재입니다. 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고 악에 대해서는 한없이 유능한 존재들이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기 전의 모든 인간의 상태이고 본질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이 무슨 악한 일을 했다고 이렇게 조롱하고 모욕합니까? 주님이 무슨 해를 끼쳤다고 이렇게 죽이려고 합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사랑을 베풀며 복과 은혜를 주시고, 빛을 비추며 영생을 주러 오신 분입니다. 한 번도 나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며, 다친 자를 싸매며 병든 자를 고쳐 준 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주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배신하고 있고 부인하고 있으며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경외한다고 하는 대제사장이 그러고 있고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자부했던 제자들이 이러고 있습니다. 나머지 인생들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거기에 우리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오히려 정죄 받아 마땅한 우리를 위해 당신이 정죄 받고 욕을 먹고 침 뱉음을 당하고 조롱을 받아내고 있습니다. 주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완악한 인간의 부패함과 더러운 죄 성을 보십시오. 그 자리에 하나님의 아들이 기꺼이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말도 안 되는 희롱과 매 맞음과 침 뱉음과 조롱과 불법 심문과 죽음을 받아내십니다.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과 심문을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받아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이 놀라운 구원의 은총 앞에 우리가 내어놓을 것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감사와 감격으로 받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깨달은 자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후 5:13-14을 보십시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만들어내지 못하는 죄의 용서와 구원을 강권하시는 사랑으로 만들어냈습니다. 그 사랑을 아는 자는 항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삽니다. 고후 5:15입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누군가를 위해 돈을 갚아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지은 죄와 그 죄로 받아야 할 조롱과 모욕과 손가락질을 아무 죄도 없는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를 위해 내가 대신 죽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 모두의 참담한 죄에 쏟아져야 할 조롱과 모욕을 다 받아내시고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사랑입니다. 강권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보면 “오호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고 신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신 주님을 바라보면 새로운 삶의 방향이 생기고 소망이 생깁니다. 신앙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만 사랑하고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만 바라보고 나만 위해 사는 삶을 돌이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고 사랑하며 그분을 위해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