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발라(Kabbalah)….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단어입니다. 우리나라에 카발라가 정식으로 소개된 것은 불과 몇년 되지 않지요. 관련 책자도 서너 권에 불과한 실정이구요.
학술적으로 카발라는 ‘유대교 신비주의’로 정의됩니다. 세상의 모든 현교(顯敎)에는 그에 상응하는 내밀한 신비전통, 즉 비교(秘敎)가
존재하지요. 현교가 대중들을 위한 단순한 교리에 바탕하고 있다면 비교는 소수의 영적인 엘리트들이 신성과의 직접적인 교감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체계라 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이슬람교에는 수피즘, 불교에는 밀교, 기독교에는 그노시즘이 있죠. 이와
마찬가지로 유대교에도 비밀 전통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카발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카발라는 중세시대에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내밀한 전승으로 가르침이 이어져 왔습니다. 그것은
스승에게서 제자로 전해지는 구전 전승이었죠. 히브리어로 ‘카발라kabbalah’라는 단어는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카발라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영적인 ‘전승’ 또는 ‘전통’이라는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광의적으로 볼 때
카발라는 '서양 신비철학'이라 말할 수 있지요. 특정 종교(즉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기에는 서양의 정신사상에 미친 영향이 매우
광범위하니까요. 연금술, 점성학, 마법, 타로 등 서양 신비체계의 배후에는 항상 카발라가 존재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조차도
카발라의 열쇠 없이는 그 이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할 정도이지요.
카발라는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해 왔는데 크게 유대 카발라, 크리스천 카발라, 헤르메틱 카발라로 나뉩니다.
카발라의 초기 역사는 신비와 신화로 가려져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대천사 라지엘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에게 파라다이스로의
복귀를 위해 카발라를 가르쳤다고 하지요. 이러한 카발라의 가르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전해집니다. 일설에 의하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카발라의 비의를 가르쳤다고 하지요.
아브라함은 카발라 최고 경전 <창조의 서(세페르
예치라)>의 저자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는 이 경전을 통해 우주와 창조, 인간과 신의 신비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후대에 전하게 됩니다. 물론 문자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구전을 통해서 지만 말이죠.
아브라함에 이어 카발라 역사의 준령 가운데 또 하나의 커다란 거봉은 모세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가 처음 시나이 산에서 가지고
내려온 타블레트(돌판)에는 카발라 가르침이 씌어 있었다고 하지요. 하지만 유대인들이 황금 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을 보고 모세는
사람들이 아직 고급한 법(진리)을 배울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타블레트를 깨버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시나이 산에 다시 올라갔고
이번에는 단순한 율법 조항이 적힌 타블레트를 가지고 내려오지요. 오리지날 타블레트에 적혀 있던 카발라의 10가지 법칙은 구두로
대제사장인 아론과 장로들에게 전해졌고, 그 후 사제와 선지자들을 통해 전승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모세 이후 카발라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선지자는 엘리야입니다. 그는 하늘로부터 불을 끌어내려 왔을 뿐만 아니라 불의 전차를 타고
승천한 기적의 선지자였죠. 전차는 카발라의 중요한 심벌로, 생명나무와 동일한 개념을 함축하고 있지요. 그로부터 3백 년 후
선지자 에스겔은 환상 속에서 전차의 형상으로 나타난 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가 묘사한 전차 이미지는 훗날 엘리야의 불의
전차와 더불어 하나의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마세 메르카바(Ma'aseh Merkava)', 즉 '전차(또는 보좌)에
대한 지식'이라는 카발라 분과 하에 하나로 통합되게 됩니다. 이것은 창세기에 대한 신비적 해석을 다루는 ‘마세 베레쉬트’와 더불어
카발라의 양대 사상을 형성하게 되지요.
이메르카바(전차)에 대한 신비적 해석은 카발라
역사의 첫 시기(대략 기원전 100년에서 기원후 1000년의 기간)인 메르카바 신비주의 시대의 종석(宗石)이 됩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카발라 스승으로는 아키바(서기 40-160), 요하이(서기 150-230) 등이 있습니다.
요하이는 아키바의 제자입니다. 아키바는 로마의 박해를 받아 그의 제자 24,000 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살아남은 자는 요하이와 네
명의 제자뿐이었다고 하지요. 아키바가 체포, 투옥되자 요하이는 자신의 아들 엘리제르와 함께 동굴 속에서 숨어살게 됩니다. 13년
후 그가 동굴 밖 세상에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영적인 완성을 이루어 기적적인 능력의 소유자가 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카발라의
이론적인 체계도 확립한 상태였다고 하지요. 그 사상 체계가 바로 카발라의 핵심 경전 중 하나인 <조하르>입니다.
중세에 카발라는 유럽으로 이주해 간 유대인들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지역으로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 독일, 폴란드라 할 수 있지요. 먼저 프로방스는 중세 카발리즘의 근원지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한 카발리스트들은
신적 본질의 구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그중 ‘카발리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장님 이삭(1160-1235)은 카발라 경전 중
하나인 <바히르>에 기초하여 세피로트 이론을 세련되게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한편 12-13 세기에 독일에서는 유다
하시드와 엘리자르 등에 의해 독일 카발리즘 또는 초기 하시디즘이 발흥하게 되고 스페인에서는 모세 드 레온, 아브라함 아불라피아
등에 의해 카발라가 흥성하게 됩니다. 모세 드 레온은 단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조하르>를 편집하여 세상에 내 놓은
카발리스트입니다. <조하르>의 출현은 이후 카발라의 보급과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요.
16세기에는 사페드 지방이 카발라의 중심지가 됩니다. 이른바 사페드 학파에서 가장 중요한 카발리스트는 라마크(랍비 모세 코르도베로,
1522-1570)와 아리(랍비 이삭 루리아, 1534-1572)입니다. 라마크와 아리는 공히 <조하르>를 토대로
카발라를 발전시키죠. 라마크는 많은 초기 학파들의 가르침을 통합하여 카발라의 근원적인 단일성을 증명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로
카발라에 일관된 철학체계를 수립하지요.
아리는 카발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으로
꼽히는 신화적인 존재입니다. ‘아리’라는 이름은 ‘신과 같은 랍비 이삭’의 이니셜을 따서 붙인 호칭이죠. 그 어떤 스승이나 성자도
이름 앞에 ‘신과 같은’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적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얼마나 위대한 존재로 존경을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리의 특별한 영적 능력들을 직접 목격 했던 제자 하임 비탈은, 그가 지극히 순수하고
금욕적이며 성스러워서 엘리야와 대화하고 그(엘리야)로부터 직접 카발라의 신비를 배우는 경지에 있었다고 술회합니다. 아리의 또 다른
제자 랍비 모세는, 아리의 전생이 랍비 요하이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선지자 에스겔이 브리어계의 메르카바 신비에 대해 계시해
주었다면 아리는 아칠루트계 차원(카발라에서 말하는 존재계의 최고 차원), 더 나아가 무한계 차원의 신비를 계시해 주었으며, 그는
아칠루트계의 케테르 차원에서 내려온 영혼이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가르침은 제자 하임 비탈에 의해 기록되었고 사후 10여 년 뒤 몇
권의 책으로 나오면서 그의 사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을 기록한 많은 부분들은 그의 유언에 의해
아직까지도 감추어진 상태라고 하지요.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자신의 가르침을 비밀로 붙이게 합니다. 아직 세상에 공표할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고 본 것이죠. 그러나 그의 가르침의 일부만으로도 그의 사상의 위대성은 충분히 인식되고도 남습니다.
18세기에는 그의 카발라 사상에서 연원하여 폴란드에서 바알 쉠 토브에 의해 하시디즘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유대
카발리스트들은 <조하르>의 가르침과 <조하르>에 대한 아리의 해석을 따릅니다. 아리의 카발리즘은 매우
복잡합니다. 그러나 그것의 기본 이론은 우주의 창조와 진화에 대한 현대 물리학의 설명과 놀랍게도 일치하며, 특히 아리의 카발리즘은
인간의 신성 실락과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너무도 방대하여 요약이 불가능하다고까지 말해지는 이 아리의 사상은 근대
카발리즘을 낳는 모태가 됩니다.
오늘날 유대 카발라는 그 오랜 잠에서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게르솜 숄렘과 아리예 카플란 같은 현대의 학자들이 카발라에 대한 유대의 정통성을 다시 일깨웠으며 유대 카발라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기여합니다. 거의 백여 년 동안 찬밥 신세였던 카발라가 다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고, 오늘날 이스라엘의
대학들에는 카발라과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히브리 전통에 영성의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유대 문화권에서 살았기 때문이죠. 일찍이
예수는 전통을 폐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토라)을 완성하기 위해 온 자라고 주장했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는 스러져 가는 고대 지혜를 새롭게 부활시키기 위해 온 개혁자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애초 예수의 가르침은
이민족들에 의해 수용되었고 헬레니즘적인 세계관의 필터를 거쳐 변형되어 갑니다. 그리고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배타적인 교리로
도그마화 되어갔지요.
그러나 오늘날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을 복원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전개되고 있고 이 과정에서 복음서에 대한 새로운 분석을 통해 그의 사상과 카발라 사상이 일치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지요. 하지만
이렇게 예수의 사상을 카발라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도는 현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을 카발라적으로 해석하는 크리스천 카발리즘의 시작은 종종 카탈로니아의 철학자이자 신비가인 레이몬
룰(1232-1316)의 가르침에서 찾곤 합니다. 그는 카발리즘을 라틴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의 신비
교의를 하나의 통합된 체계로 결합시키려는 시도를 하였지요. 하지만 레이몬 룰 이전에도 12세기 때 모세 세파르디(페드로 알폰소)가
기독교 교의(특히, 삼위일체설)를 카발라 사상으로 풀이한 적이 있습니다. 모세 세파르디 이후 13세기 말에서 15세기 말엽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유대인 개종자들의 그리스도론적 사변을 통해 예수의 가르침 속에 카발라의 교의가 비장돼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일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사상은 카발라를 통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비밀들을 풀 수 있다고 주장하는 피렌체의 플라톤주의자들의 사변에
의해 더욱 큰 힘을 받았고, 이러한 일련의 영향들을 통해 마침내 크리스천 카발라가 출현하게 됩니다.
스페인은 선택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전해지던 카발라가 대중에게 비밀의 베일을 벗기 시작한 나라입니다. 오늘날 생명나무(Tree of
Life)로 알려진 카발라의 대표적 심벌의 형태가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도 바로 스페인에서이지요.
15세기 말 스페인에서 유대인 강제 추방이 있자 그들은 유럽 각지로 퍼져갑니다. 자연스럽게 그들과 함께 카발라도 여러 지역으로
퍼져가게 되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은 이태리였습니다. 당시 이태리는 르네상스가 꽃피던 시기였고 지성인들 사이에서 고대지혜의
재발견이 유행하고 있었지요. 이런 시대적 조류를 타고 크리스천 카발라는 르네상스 사상이라는 건물의 주춧돌이 됩니다.
당시의 크리스천 카발리스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피코 델라 미란돌라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카발라를 공부한 그는 상당량의
카발라 문헌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기여하였으며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카발라를 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카발리즘과 헤르메티시즘의
통합을 시도합니다.
크리스천 카발라를 통해 기존의 카발라에 혁신적인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카발라 사상은 더욱 풍요롭게 발전하게 됩니다. 피코와 그 이후의 많은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 카발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카발라는
기독교와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진리성에 대한 증거의 원천이 됩니다.
17세기에
크리스천 카발라의 중심은 영국과 독일로 옮겨집니다. 그곳에서 크리스천 카발라의 위상은 야콥 뵈메와 크노르 폰 로젠로스의 저술들에
의해 더욱 올라가게 되지요. 폰 로젠로스와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는 카발라의 아담 카드몬을 기독교 신학의 원형적 인간인 예수와
관련지어 설명합니다. 이들의 작업은 훗날 헤르메틱 카발라의 형성과 발전에 강력한 영향을 주게 되지요.
17세기에서 18세기 사이에 크리스천 카발라가 발전하는 최종 국면에서 마침내 연금술적인 상징들이 스며들게 되고 신흥의 우주론 교의들과
결합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로지크루시아니즘(장미십자 사상)과 프리메이슨리(프리메이슨 사상)의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요. 이렇게 볼 때 크리스천 카발라는 고대 유대 전통의 요약 반복이 아니라 그것의 창조적 리모델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생명나무에 기초한 마법사들의 오컬트적인
수행 체계는 종종 헤르메틱 카발라(Hermetic Kabbalah)로 불립니다. 일각에서는 헤르메틱 카발라의 기원을 카인의 아들
에녹이 쓴 <에녹의 13 열쇠 Thirteen Enochian Keys>를 비롯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기타
비(非)히브리 원천에서 나온 텍스트들에서 찾기도 합니다. <에녹의 13 열쇠>는 <마법사 아브라멜린의 신성 마법의
서> <솔로몬의 큰 열쇠> <솔로몬의 작은 열쇠> <아르마델> 등의 마법서들 속에 반영되어
있다고 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헤르메틱 카발라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고대 텍스트는
카발라 최고 경전인 <창조의 서(세페르 예치라)>라 할 수 있지요. 그러나 헤르메틱 카발라에서 사용되는 생명나무의
구조는 전통적인 유대 생명나무와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헤르메틱 카발라에서 사용하는 생명나무는 키르허 생명나무입니다. 키르허
모델에서 생명나무의 각 길에 배당되는 히브리 문자, 행성 대응 등은 전통적인 유대 생명나무의 그것과 다릅니다.
헤르메틱 카발라가 서구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에 창설된 황금새벽회를 통해서였지요. 비교적 최근까지 카발라와 관련하여
영어로 된 거의 모든 책들은 황금새벽회 멤버이거나 멤버였던 사람들에 의해 씌어졌지요. 주요 인물들로는 맥그리거 매더즈, 크로울리,
다이온 포춘, 폴 포스터 케이스, 이스라엘 리거디 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황금새벽회의 창설자인 매더즈는 헤르메틱 카발라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인물로 그의 책 <베일벗은 카발라>는 헤르메틱 카발라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또 크로울리는
카발라를 다른 여러 종교 체계(요가, 주역 등)들과 연결 지음으로써 카발라의 보편성을 제시한 공적이 있다 할 것입니다. 다이온
포춘은 저서 <신비의 카발라>를 통해 난해한 카발라를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한 인물이라 할 수 있지요. 그녀는
카발라를 ‘서양의 요가’로 정의합니다.
헤르메틱 카발라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카발라와 타로를 긴밀히 연관시키는 수행체계입니다. 헤르메틱 카발리스트들은 타로를 카발라의 생명나무와 연결시켰는데, 이에 비해 유대
카발리스트들 중에 타로를 생명나무와 관련짓는 사람은 거의 없지요. 이 부분은 유대 카발라와 헤르메틱 카발라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일 것입니다.
18세기 중엽 타로가 생명나무와 연결되기 전까지 그것은 하나의 점술 체계에
불과했지요. 1850년대 프랑스의 마법사 엘리파 레비는 저서 <고등 마법의 교의와 의식>에서 처음으로 타로와 카발라와
마법을 연결시킵니다. 이런 그의 시도는 황금새벽회에 의해 수정, 변형되어 수용되고 매더즈, 웨이트, 케이스, 크로울리 등에 의해
‘카발라 그림 텍스트’ 또는 명상 도구로서의 타로들이 계발되고 오늘날 일고 있는 타로 붐의 초석이 닦이게 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카발라가 대중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양에서는 기존의 종교들에 식상한 많은 이들이 카발라의 가르침에
관심을 돌리고 있습니다. 특히 마돈나, 데미 무어, 브리트니 스피어스 등 여러 인기 배우나 가수들이 카발라에 매료되고 주변에
전함으로써 카발라는 이른바 ‘스타들의 종교’라고 불리고도 있지요. 공식 무대에서 그들은 종종 왼쪽 팔목에 카발라의 레드
스트링(붉은 실로 된 팔찌)을 끼고 나오기도 하지요.
하지만 카발라를 이른바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지는 의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카발라는 기성 종교에 대한 반항적 성격을 띠고 있지요. 카발라가 서양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카발라가 서구 전통 사상(기독교)과 동일한 바탕 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인도의 요가 철학이나 중국의 도가 등 동양의 여러 체계들과 유사한 사상을 그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따라서 그들은 굳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지 않고도 카발라 속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영적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