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18〉“부처 계급을 밟지도 말고, 남 쫓아 깨달으려 말라”
동방(東方)의 보살로 칭송받은 범일 선사
단오제 주신으로 사굴산문 개창
영동 지역인들의 영원한 안식처
고려 보조지눌도 사굴선문 출신
영동 지방의 강릉 단오제는 대표적인 문화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 단오제의 주신(主神)은 범일(梵日, 810~889)스님으로, 통일신라 말기 9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山門)을 개창한 선사이다.
당시 사굴산문은 굴산사(현 강릉)를 중심으로 범일의 문중을 형성했다. 즉 고성의 건봉사에서부터 양양의 낙산사, 평창의 월정사, 동해의 삼화사, 삼척의 영은사, 그리고 울진과 평해 지역까지 이른다.
사굴산문 통효범일(通曉梵日)은 품일(品日)이라고도 하며, 9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성주산문의 무염선사와 더불어 당나라에까지 그의 수행력이 널리 알려져 있다. 범일은 계림의 호족인 김씨(金氏)이며, 태어날 때 부처님처럼 나계(螺?)가 있었고 특이한 자태를 지녔다. 15세에 출가해 <능가경>을 공부하다 입당(入唐)을 결심하고 831년에 당나라로 건너갔다. 선사는 여러 곳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참문하던 끝에 당시 유명한 선사인 염관제안(鹽官齊安, ?~842)을 만났다.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 염관과의 문답이다.
“어디서 왔는가?”
“동국에서 왔습니다.”
“수로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두 가지 길을 모두 밟지 않고 왔습니다.”
“그 두 가지 길을 다 밟지 않았다면,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렀는가?”
“해와 달에게 동(東)과 서(西)가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동방(東方)의 보살이로다.”
“어떻게 수행해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더럽히지만 말라. 부처라는 견해, 보살이라는 견해를 만들지 말라.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다.”
범일은 스승 염관과 만나면서부터 그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범일은 염관 문하에 머물러 수행해 염관에게 법을 얻은 후, 중국 여러 지역을 행각하다가 16년만인 847년에 신라 땅으로 돌아왔다. 몇 년 후 범일은 명주(溟州) 도독 김순식의 지원으로 851년 강릉 사굴산에 산문을 열었다. 그는 굴산사에서 40여년을 보냈으며, 경문왕.헌강왕.정강왕 3제의 국사였다.
범일 선사 입적 후, 당시 강릉지역 사람들은 범일을 추앙했는데, 대관령 길목 성황당에 범일 선사를 모시면서 강릉 단오제의 주신(主神)이 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신라말기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사굴산문은 영동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쳐 불교라는 테두리로 하나의 문화권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력적(自力的) 수행의 선사가 타력적(他力的) 기도의 주신으로 섬겨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불교가 민중들에게 미친 영향과 선사의 자비심이 부합되어 영동지역 사람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된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사굴산문 문하에는 스님들이 많았으며, 후대까지 번창한 산문이다. 고려의 선(禪)을 부흥시킨 보조지눌(1158~1210)도 사굴산문 출신이니, 이 산문은 현 조계종의 산 역사이기도 하다.
어느 제자가 범일 선사에게 물었다.
“어느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선사의 답은 이랬다.
“부처의 계급을 밟지도 말고, 남을 좇아 깨달으려고도 하지 말라.”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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