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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26) - 2024 .08. 09(금)-16(일) |
2024 .08. 10(토)
아침 06시 기상. 풍수원 성당에 미리 가서 옥외 순례지를 돌아보고 10시 성당 문을 엶과 동시에 성전을 참배하고 서둘러 수원교구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내일까지의 일정을 오늘 하루에 마칠 수 있다는 신 모세의 의견이었다. 이에 따라 일찍 7시가 조금 지나 횡성 풍수원 순례지로 출발했다. 풍수원은 원주교구에 속한다.
풍수원 성당 - 자생적 교우촌에 세워진 강원도 천주교 신앙의 요람 |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리 1097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경강로유현1길 30
박해를 무릅쓰고 자생적으로 이룬 교우촌
풍수원(豊水院)은 한자의 뜻 그대로 하면 ‘물이 풍부한 곳에 있는 역원’이란 뜻이다. 역(驛)은 관원들이 공무로 경향을 오로내릴 때 말을 갈아타거나 쉬게 하던 곳이고, 원(院)은 관원들의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다. 오늘날 장호원(長湖院), 조치원(鳥致院), 마원(馬院) 등의 지역명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볼 때 강원도 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신유박해가 일어나던 1801년경으로 보인다. 당시 서울과 경기도 용인 등지에 살던 교우들이 박해의 칼날을 피해 강원도나 충청도의 산간 지역으로 숨어들게 된 것이 계기가 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복자 신태보(申太甫) 베드로(1769~1839)이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용인, 이천 지역의 순교자 유가족 40여 명과 함께 피신처를 찾아 떠돌다가 이곳 풍수원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옹기를 구워 팔며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첫 자리에 두고 열심히 기도하며 어려운 사람들을 형제자매로 여기며 보듬어주었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71년 신미양요로 또다시 수많은 교우들이 고향을 떠났는데 이때 풍수원에 정착한 교우들은 사방으로 연락을 취해 피난처를 찾던 신자들을 불러 모아 오히려 박해 이전보다 더 큰 교우촌을 이루었다. .
한국 천주교회의 특징은 첫째, 성직자의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창설했고 둘째, 학문 연구에서 출발한 것이 종교와 신앙으로 발전했으며 셋째, 신앙이 교우들에게 뿌리내리면서 성직자를 영입하려 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강원도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한 것도 역시 같은 양태로 이루어지게 되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풍수원 성당이다. 이곳 교우들은 성직자도 없이 신앙의 자유를 얻어 본당이 설립된 1888년까지 80여 년 동안 교우촌을 가꾸며 본당 설립의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강원도에서 설립된 첫 본당
188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확보된 그 이듬해 교우들은 목자가 없는 양 떼들을 위해 신부를 파견해 주기를 열망하고 간청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대주교는 1888년 6월 20일 풍수원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파리 외방전교회의 르 메르(Le Merre) 신부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 수는 약 2,000명에 이르렀다. 아직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했었다.
그러다가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신부는 중국인 기술자들과 함께 현재의 성당을 1905년에 착공해서 1907년에 준공했고 2년 뒤인 1909년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당시 신자들은 직접 벽돌을 굽고 아름드리나무 등 건축재를 스스로 조달했는데 그 열성은 가히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풍수원 성당의 대부 정규하 신부는 1896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어서 강도영, 강성삼 신부와 함께 우리나라 사람으로 세 번째로 사제품을 받았다. 또한 이 서품식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거행된 사제서품식이도 했다. 그는 47년간이나 풍수원 성당에서 사목하면서 척박한 강원도 지역 초근목피로 이어가는 교우들과 고통을 함께하며 착한 목자로서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다가 1943년 81세로 선종하여 이곳에 뼈를 묻었다.
풍수원 성당은 교세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1896년 원주 본당 분할을 비롯하여 1920년에는 춘천 죽림동 본당(당시 곰실공소) 본당을, 1948년에는 홍천 물굽이 본당(현 양덕원 성당) 을 분할 독립시켰다.
그후 풍수원 본당은 서울 대목구로부터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 1962년 3월 10일부터는 춘천교구가 설립되면서 춘천 교구로 편입되었다가, 1965년 3월 22일 원주 교구가 분리되면서 원주 교구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지 조성 과정
풍수원 성당과 횡성군은 2000년부터 강원도 유형문화재인 성당 일대에 유현 문화관광지(바이블 파크)를 조성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2002년부터 본격화된 유현관광단지 조성은 그해 5월 23일 십자가의 길 축복식을 거행하고 진입로 확장 공사도 마쳤다. 2003년에는 금대리에 있는 유현 초등학교 금대 분교(2001년 폐교)를 임대하여 생명학교를 운영하며 귀농학교를 설립하였다. 개인과 가정, 단체로 피정이 가능한 청소년 야영장도 마련하고,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산마루에는 성체 현양동산을 조성하였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사업이 지연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성당 뒤편에 성체대회 미사를 드리는 성모광장(강론광장)을 조성하고 그 옆에 신앙 선조들의 일상을 볼 수 있는 농기구와 민속품, 성물과 기도서 등을 전시하는 유물전시관을 건립하여 2013년 4월 30일 축복식을 가졌다.
이로써 유현 문화관광지 1단계 조성 사업을 마친 원주교구와 횡성군은 2단계 사업 또한 지속적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성당 건축을 위해 벽돌을 구웠던 가마터와 말을 세워 놓고 쉬어 가던 원(院)터와 쉼터 등을 조성하였다. 2018년 6월 20일에는 본당 설립 130주년을 경축하며 유물관으로 사용하던 구 사제관을 복원하여 축복식을 갖고 역사관으로 새로 개관했다.
풍수원 성당에서는 1914년의 감곡 매괴성모성당에 이어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성체 현양 대회가 시작되었는데, 제1회 성체 대회가 1920년에 실시된 이래 6 · 25로 빠진 3년간을 제외하고는 매년 열려 왔다. 오랜 역사만큼 30여 명이 넘는 사제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로서도 풍수원 성당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 8시가 조금 못되어 풍수원 성당 도착. 주차장에 내려서 좁은 길을 올라가니 주민자치센터 같은 건물이 있는 큰 도로와 만난다. 바로 조금 돌아가면 풍수원 성당이다.
성당 입구에는 유현 문화관광지 안내 및 조감도가 게시판에 붙어 있다. 유현이란 이곳 마을 이름인 듯한데 관광 단지에 성당이 포함되어 있어 좀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횡성군에서는 유적지로도 전통이 있는 풍수원 성당을 포함시켜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뜻인 것 같다. 조감도를 보니 현재의 시설이나 건물이 아니라 그야말로 앞으로의 계획이라 순례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성당 입구 사무실로 가니 이른 시간이라 아직 문이 잠겨있다. 그래도 성전 길목 언덕의 예수성심상이 내려다보시며 팔을 벌려 환영해 주신다.
현재의 성당은 1909년에 낙성식을 가진 건축물로서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고, 강원도 최초의 서양식 벽돌 조적 건축물이자 한국에서 네 번째로 지어진 고딕 로마네스크 양식의 벽돌 성당이다.
이런 이유로 성당 건물은 1982년 11월 3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고, 사제관은 성당보다 5년 늦은 1912년 건립에 들어가 이듬해 완공하여 현재는 역사관으로 사용한다. 구 사제관 또한 2005년 4월 15일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구 사제관은 원형이 잘 남겨진 벽돌 조적 사제관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아직 문이 열리지 않아 다른 경내를 둘러보기로 하였다.
초가집 풍수원 성당
성당 앞마당에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초가집이 한 채 있다. 이것은 지금의 성당이 있기 전에 사용했던 초기의 초가집 풍수원 성당을 재현한 것이다.
당시에 심었던 두 그루의 어린 느티나무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 큰 나무가 되어 성당에 그늘을 주고 휴식처를 준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로 성장한 신앙 공동체의 변모 과정과 일맥상통한다. 두 그루의 나무를 두고 혹자는 교회의 두 기둥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초가 성당 뒤편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는 곳에도 예수성심상이 제대와 함께 자리하고 있다. 받침대에는 예수성심께 만민을 바치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은 예수성심상 뒤 산등성이로 나 있는데 14처는 검은 오석(烏石)에다 음각 판화로 새겨졌는데 이철수 판화가의 작품이다.
성체현양 동산(회개동산, 묵주 동산)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 대형 십자가 아래 묵주동산이 조성되어 있고 풍수원 성당의 대부 정규화 아우구스티노의와 3대 주임신부 김학용 시몬 신부의 묘가 있다.
이곳은 해마다 개최되는 성체현양대회 때 성체강복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정규하 신부는 1920년부터 6월 예수성심성월 중 성체성혈대축일에 힘든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을 위해 성체현양대회를 시작하였다.
다시 성전 부근으로 내려와서 성전 부근으로 내려오니 안내표지판에 산쪽 길로 골방기도처, 산책로, 유물관, 원터, 가마터가 있어 미리 가보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성전부근에 있는 돌담 성모동굴, 그리고 구사제관, 성체조배실을 거쳤다.
돌담 성모동굴
성모동굴 오른편 아래에 天主堂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각형 돌이 있는데 제 위치는 아니다.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다.
구사제관(역사관)
성당 왼쪽에는 고풍스런 2층의 벽돌조 건물이 있는데 구사제관((등록문화재 제163호).지금은 원래 이 건물은 1912년에 건립되어 사제관으로 이용하면서 1층은 산골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 ‘삼위학당’으로도 사용하였다. 또한 정규하 신부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도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고 동정녀들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난한 이들과 고아들을 돌보며 사목하였다.
지금은 역사관으로 꾸며 성당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유물과 자료, 정규하 신부가 사용했던 제의와 제구, 오래된 신앙 도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문이 열리지 않아 나중 보기로 한다.
성전 뒤에 역사관 바로 옆에 성체 조배실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이 건물도 상당히 오래된 건물로 보인다. 역사관 뒤에는 식당 등 부속건물이 있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는 감실 안에 모신 성체를 개인이나 공동체가 기도하며 경배를 드리는 것을 말한다. 성체의 형상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현존한다는 믿음과 성체에 대한 공경을 표현하는 것이 성체 신심이다. 성체조배실은 잠그지 않아 바로 들어갈 수가 있다.
‘빛을 향하여’는 신태보 베드로 복자가 박해시대의 어둠 속에서 순교자 유가족 40여 명을 데리고 이리저리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가 8일 만에 강원도 깊숙한 두메 산골 풍수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오르는 길 가에 쉼터도 있다. 오르는 길은 곧게 이어진다.
갈림길 이정표가 나타난다. 바로 오르면 골방기도실, 수목원, 산책로이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가면 유물전시관, 그리고 원터와 가마터이다.
유물전시관
풍수원 성당의 설립 연도가 1888년이니 지금으로부터 136년이나 되는 역사를 자랑하는 횡성의 풍수원 본당은 박해를 피해 고향을 떠나온 교우들이 촌락을 이루고 신앙생활을 이어가면서 강원도 지역 전교의 중추적 구실을 한 신앙 공동체이다. 신앙선조들의 얼이 배어있는 성지로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연중 끊이지 않는 이유는 자연풍광이나 종교적 성지일 뿐만 아니고 전통 문화와 유물 유적이 보존 전승되기 때문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유물전시관이다.
풍수원 성당 유물전시관은 특이한 구조를 가진 현대식 건물로 반지하 형태로 낮게 자리를 잡고 있다. 오솔길 옆 구릉의 능선을 그대로 이어주면서, 성당의 조망에 최대한 누가 되지 않으려는 겸허한 설계라고 할 수 있다.
250평에 달하는 비교적 규모가 큰 이 전시관에는 농기구와 생활용품을 비롯한 1천2백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하지만 도자기나 서화 같은 비싼 용품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가난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느낄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생활용품들이다. 하루에 50-100명의 사람들이 찾는 이 전시관은 한 평신도의 기꺼운 기증으로 마련될 수 있었다. 원주 명륜동본당에 다니는 최수범 베드로 씨(76세)가 그 기증자다. 그는 30년 동안 열정적으로 수집한 자신의 분신과 같은 유물을 몽땅 기증한 것이다.
물론 아직 문은 닫혀 있다.
원터 · 가마터
이미 말했듯 풍수원(豊水院)은 관리가 공무로 지방 출장을 갈 때 말을 이용하거나 숙식을 하는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다.
횡성군과 원주교구는 유현관광단지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교우촌 당시 성당 건축을 위해 벽돌을 구웠던 가마터와 말을 세워 놓고 쉬어 가던 원(院)터와 쉼터 등을 조성하였다.
우리나라는 목조 건물을 주로 짓기 벽돌을 찍는 공인 기술자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 기술자를 초빙했다. 정규하 신부는 명동성당을 지은 진 베드로 등 중국 기술자 3명을 데려와 성당에서 500m 떨어진 ‘피미기 마을’에 가마터를 만들고 회색 분홍 등의 색소를 넣어 벽돌을 구워내게 하였다.
쉼터는 옛날 건물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성당에서 순례객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편액 글씨로 氷心蘭性(빙심난성)이라 걸렸다. 뜻은 맑은 마음 향기로운 품성을 말한다.
골방기도실
가마터와 원터 위로 오르면 오른쪽으로 작은 오솔길 하나가 나 있다. 오솔길 끝에는 아주 묘하게 생긴 원형 돌집이 하나 있다. 2m 남짓한 높이인데, 2층 지붕까지 있는기도소이다. 한 사람만 들어가 고적하게 기도에 몰입할 수 있도록 배치된 공간이다.
맨 꼭대기 골방기도실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오다 보면 넓은 잔디 광장이 하나 나타난다. 성모동산이다.
성모동산(강론 광장)
부채꼴 형상의 잔디 광장인데 아래쪽에는 깔끔하게 디자인된 무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집회며 세미나, 기도회 등을 거행하기에 ‘강론광장’이이라고도 한다. 지난날 이 광장에는 전국 규모의 행사가 행해져 왔다. 바로 ‘성체현양대회’라는 연례행사였다. 정규하 신부 주최로 1920년 처음 거행된 이래 6.25전쟁 때 잠깐 쉰 것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매년 6월 성체성혈대축일에 1만여 명이 풍수원 언덕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감곡 매괴성모성당 등 전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유서 깊은 성체현양대회로, 신도들의 호응이 크다 보니 최근에는 강원도 원주교구와 춘천교구가 공동으로 주최한다. 이곳에서 성체현양대회 미사를 봉헌하고 장엄한 행렬을 지어서 십자가의 길을 따라 성체현양 동산으로 올라가서 성체강복을 한다.
성모칠고 동산
성모칠고 동산은 성모광장 바로 위에 인접해 있다. 소나무 숲 사이에 원두막 같은 쉼터가 6-7개 군데군데 배치되어 있고 그중 기본 쉼터에는 성모칠고 7장면이 그려져 있고 이에 대한 설명이 부가되어 있다.
제1고 - 시메온의 칼날 같은 예언(루카 2,35)
제2고 - 아기예수님과 이집트로 피난 가심(마태 2,14)
제3고 - 성전에서 3일 동안 어린 예수님을 잃으심(루카 2,48)
제4고 - 예수님 골고타 언덕을 오르심(요한 19,17)
제5고 -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돌아가심(요한 19,25)
제6고 - 예수님의 성시(聖屍)를 십자가에서 내리심(요한 19,40)
제7고 -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요한 19,42)
성모칠고 동산을 통해서도 성체 현양동산에 가깝게 갈 수 있다 가는 도중에 무덤 하나가 나는데 조마리아 할머니 묘다. 납작한 묘와 옆에 할머니 소개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조 마리아 할머니는 오갈 데 없는 외로운 장애자인데 정 신부가 이곳에 살게 하였다. 그녀는 불구의 몸인데도 불구하고 열악한 조건에서 4명의 고아들을 거두어 돌보았으며 반신불수와 증증 치매 두 분의 할머니에게 밥을 떠 먹이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수발하였다. 6 25 때는 피난도 가지 않고 성당의 성물을 항아리에 담아 땅에 묻어 보관하였다.
다시 성전 앞 사무실 밖에서 성전 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9시가 넘어 9시 40분이 되어도 사무실 직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출입문에는 오전 9시에 열고 오후 5시에 닫는다고 적혀 있다. 청소담당자가 낙엽을 기계로 바람을 날려 치우는데 굉음소리에 귀가 따갑다. 꼭 순례객들이 내방하는 시간에 청소를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래서 어제 전화 통화에 성전과 역사관 문을 몇 시에 여느냐고 사무실에 물으니 10시라고 했는가 보다.
아무리 성지나 성당에 활동하는 사람이 봉사자들이어서 일반 관공서와 다르다고 해서 이는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런데 전교 수녀님인 듯한 분이 나오시길래 사정을 물으니 자신이 문을 열테니 들어가라고 하신다. 그래서 성전 참배도 하고 역사관도 내부 전시물도 좀더 일찍 관람할 수가 있었다.
성전 내부
성당 안에 들어서면 6개씩 좌우로 늘어선 기둥과 둥근 아치형의 천장이 조화를 이루고, 반원형의 제대 뒷부분에는 3개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은은한 빛을 발한다.
내부 신자석은 가운데 두 줄, 좌우 회랑에 각각 한 줄로 네 부분으로 정갈하게 꾸며졌다. 제대 후벽과 신자석 좌우 벽에는 추상과 구상의 유리화(2020년 최성호 제작)가 설치되었는데 구상화에는 구약과 신약의 주요 내용을 담았다. 제단에는 오래전에 사용하던 목조 제단과 현재 사용하는 제단이 함께 있어서 풍수원 성당의 긴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성좌우 벽면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 사이 사이에 액자형 성화 십자가의 길 14처가 배치되어 있어 성당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역사전시관 내부
역사 전시관의 주요 전시품은 이 성당을 지은 정규하 신부가 쓰던 책상을 비롯해 19세기말 당시 사용하던 촛대, 십자가, 성합, 기도서, 사진 등 유물들이다. 하나하나는 앞서간 신앙 선조들의 숨결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은 풍수원 성당의 역사와 한국 가톨릭 초기 성당의 건축을 풍수원 성당과 비교해서 설명하고 있다.
2층에는 미사 전례와 성체 거동과 관련된 유물, 그리고 정규하 신부 방에 신부님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풍수원 성당은 역사적으로나 복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당이다. 비록 신앙의 자유화 이후에 설립된 성당이라 순교의 피자국은 없을지라도 초기 교우촌 신앙 선조들의 피땀으로 일군 성당이다. 강원도를 대표하는 성당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순례를 마치고 나니 10시. 이제 수원교구 네 곳인 양근 성지, 수리산 성지, 손골 성지, 그리고 수원 성지 차례이다. 양근 성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