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13. 발해진.돈화 - 발해를 그리며 ②
흥륭사 석불 참배…황성옛터 쓸쓸함 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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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사찰 흥륭사> |
사진설명: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에 위치한, 발해시대 석등과 부처님이 봉안돼 있는 흥륭사 입구. 눈덮힌 흥륭사 경내는 정리가 안돼 다소 혼란스러웠다. |
상경용천부 외성(外城) 벽의 잔해(殘骸)를 밟으며 발해를 그리다 발해진(渤海鎭)으로 출발했다. 그 때가 2002년 10월18일 오전10시. 어젯밤에 내린 하얀 눈에 쌓인 발해의 대지를 보며, 그동안 외롭게 만주에 버려졌던 발해왕국을 떠올렸다.
793년 발해의 3대왕 문왕이 죽은 후 성왕(成王).강왕(康王).정왕(定王).희왕(僖王).간왕(簡王)이 차례로 왕위를 계승했다.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從父)이자 태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 대인수(大仁秀)가 선왕(宣王)에 즉위했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 요하유역까지 진출, 그곳에 목저주.현토주를 설치했다. 이후 요동 정복을 본격화해 10세기 초 거란이 이곳에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했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의 강역은 최대 판도로 확장됐다. 이에 맞춰 5경(京) 16부(府) 62주(州)의 지방제도도 완비됐다. 당나라도 발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러야만 했다. 그러나 선왕이 재위 10년 만인 830년에 죽은 뒤, 약 100년간의 발해 역사는 뚜렷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발해가 쇠퇴할 무렵인 916년, 거란족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종족을 통일하고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중원지방으로 진출하고자 했고, 그렇게 하려면 배후세력인 발해를 제거해야만 했다. 마침내 925년 12월 말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공격, 보름만인 그 이듬해 1월15일 멸망시켰다. 당시 발해는 귀족 간의 권력투쟁이 극심해 거란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다. 15대 230년간 지속된 발해는 결국 내분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거란은 발해 고지(故地)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거란 황제의 맏아들에게 그곳의 통치를 맡겼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발해 유민은 200년 동안이나 곳곳에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발해유민 가운데 수만 명은 고려로 투항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주류를 이루었고, 대부분의 피지배층은 말갈족으로 구성된 나라였다. 현재 전하는 발해 귀족의 성씨 가운데 왕성(王姓)인 대씨(大氏) 다음으로 고구려계인 고씨(高氏)가 많았던 것에서 고구려유민이 지배층의 주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더구나 〈속일본기〉에 전하는 발해국서(渤海國書. 일본에 보낸 발해의 외교문서)에 의하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음 공식화했고, 일본도 이를 인정했다. 문왕은 스스로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칭했을 뿐 아니라, 과거 고구려 왕실이 주장한 ‘천손(天孫)’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들로 미뤄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옛 지역에서,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돼 세운 국가임이 분명하다.
눈 쌓인 上京城 유적지 애처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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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하르빈에서 목단강으로 가다 본 볏단 쌓인 논. |
상념에 젖어있는 사이 차는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에 도착했다. 눈을 밟으며 황성옛터를 거닐었다. 유명한 가수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1928)는 고려의 옛 도성인 개성의 만월대를 지칭하는 것이지만, 발해의 옛 도성이라고 어찌 황성옛터가 아니겠는가. 중국 북위시대(386~534) 역사가 양현지가 폐허로 변한 낙양을 돌아보고, 후인들이 낙양의 면모를 잊을까 두려워 〈낙양가람기〉를 지었다고 했는데, 우리 선조들은 왜 발해의 태평성대를 전해주는 자료를 남기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남긴 채, 언젠가는 다시 한번 더 오리라는 다짐을 한 채, 발해시대 불교유물의 보고인 흥륭사로 갔다.
흥륭사(興隆寺)의 첫 모습은 스산함 자체였다. 입장권을 구입해 경내에 들어가니 방치된 듯한 모습이 역력했다. 발해시대 창건된 사지의 기초 위에 청나라 강희연간(1662~1722)에 새로 지은 사찰이 흥륭사다. 도광(道光) 28년(1848)에 화재를 당해 사찰이 불타버렸다. 함풍 5년(1855)에 다시 수축했다. 흥륭사라고 하는 사찰 이름은 청나라 강희연간에 세로 지은 명칭이라고 한다. 발해진 현지 주민들에겐 흥륭사 보다는 ‘남대묘(南大廟)’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바로 이 흥륭사에 발해시대 조성된 석불이 남아있다. 석불의 높이는 2.35m, 대좌를 포함한 전체 높이는 3.3m. 거대한 부처님이다.
대웅전에 모셔진 발해시대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발해시대 불교 유적을 대표하는 석등에 인사했다. 높이 5m. 웅장한 석등이었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석등 맞은 편 누각에 앉아 발해불교를 짚어보았다. “발해사에 대한 역사적 자료가 그러하듯 발해불교에 대한 자료도 거의 전무하다.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해 왔음에도 극소수의 글을 제외하곤, 한국불교사에서 발해불교를 거의 다루지 못해 온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 오히려 일본의 가마다 시게오(鎌田茂雄) 교수가 〈한국불교사〉(1988년 민족사에서 번역본을 출간했음)를 집필하며 간략하나마 ‘발해불교’를 다룬 것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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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하르빈 시내에 있는 러시아정교회 성당. |
발해불교는 이처럼 한국불교사 연구자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해 왔다. 1933년과 1934년 일본 동아고고학회가 발굴보고서인 〈동경성〉을 출간하자, 발해불교에 관한 논의가 그나마 시작됐다. 일제시대 일본은 만주지배를 본격화하면서 이 지역을 발굴했고, 따라서 일본인들은 발해불교에 관한 적지 않은 논문들을 남겼다. 반면 중국과 러시아는 1970년대 말부터 불교관계 유적.유물들을 정리.소개하기 시작했다. 북한도 1980년대 들어서야 비로소 발해불교 관련 논문들을 발표했다. 많은 사학자들이 예측한 것처럼, 발해불교는 건국초기부터 유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발해유적 조사 자료에 따르면 상경(上京. 흑룡강성 영안현 동경성), 동경(東京.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중경(中京.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 남경(南京. 함경남도 북청군 청해토성) 부근에선 불교유적이 다수 발견되지만, 첫 도읍지였던 돈화 부근에서는 한 곳밖에 발견되지 않았다 한다. 건국 초기엔 불교의 유포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 송기호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발해불교가 발전기를 맞이 한 것은 3대 문왕에 이르러서이다. 문왕 당시 조성한 상경성.중경성.동경성 지역에 절터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문왕은 특히 불교식 존호(尊號),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을 생전에 사용했다. ‘대흥’과 ‘보력’은 모두 당시에 사용된 연호이고, ‘효감’은 효행과 관련된 유교적 용어며, ‘금륜’과 ‘성법’은 불교적 용어다. 특히 금륜은 금륜왕의 약어로,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에서 유래된 것이 분명하다. 태조와 무왕 단계에서 건국 초기의 어려움이 수습된 뒤, 3대 문왕은 문치를 지향했고, 이에 따라 불교도 자연스레 확산된 것으로 추측된다. 문왕 대 확산된 발해불교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첫 번째가 고대 불교가 그러하듯 왕실과 밀접한 관련 속에 발해불교도 확산됐다는 점이다. 신앙이 지역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점은 발해불교의 또 다른 특징이라고 한다. “상경을 중심으로 한 지역엔 관음신앙이 중심을 이뤘고, 서경과 동경 지역엔 다보.석가의 이불병좌상으로 대표되는 법화신앙이 크게 흥했다(송기호 교수).” 무엇보다 고구려불교의 전통을 이은 것, 당나라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발해만의 독창적인 불교가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점이 세 번째 특징.
926년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불교는 발해 지역 내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928년 거란이 발해유민들을 요동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상경성을 불태웠고, 이때 사찰들도 모두 불탔다. 요동지방, 특히 현재의 요양(遼陽)지방으로 옮겨진 발해유민들은 여전히 불교를 믿었고, 그것은 200년 지나 금나라가 요양지방을 통치할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다. 발해유민들은 금나라가 불교를 받아들여 숭상토록 하는데 크게 기여했는데, 당시 활동했던 대표적 인물이 금나라에서 장관직까지 지냈던 장호(張浩. ?~1162) 형제, 불교에 심취했던 금나라 세종의 생모 이씨(?~1161), 윤공비 유씨(劉. 1139~1163) 등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교의 ‘불(佛)’자도 보이지 않았다.
발해엔 관음.법화신앙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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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발해’가 간판으로 붙은 발해진 거리. |
발해불교를 되짚으며 흥륭사를 빠져나왔다. ‘발해상경유적지 박물관’을 관람하고, 발해진으로 돌아왔다. 발해진 거리에 보이는 간판엔 ‘발해’라는 이름이 즐비했다. 발해는 간판 속에서나마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았다. 발해진에 있는 ‘발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발해의 첫 도읍지였던 돈화로 출발했다. 돈화(敦化)시. 연변의 서북부에 자리 잡은 돈화는 산하에 4개 사업소와 10개진, 10개 향, 391개 촌이 있으며 총면적은 11,886㎢, 인구는 48만 명. 교포(조선족)는 5%가 채 안되는, 조선족자치주 가운데 교포가 가장 적게 사는 곳이다. 목재와 삼림야생자원, 그리고 광산물자원이 풍부한 돈화시는 교통과 공업도 상당히 발달했다. 특히 장백산의 풍부한 토양자원을 이용한 의약공업이 발달했는데, 국내외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돈화 육정산풍경구엔 발해시대의 무덤들이 있으며 근래에는 정각사란 비구니 사찰이 건립돼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원래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연길.화룡.왕청.훈춘 등 4개현이었으나 중국의 소수민족정책과 관련해 조선족이 별로 거주하지 않는 안도현과 돈화현도 자치주에 소속됐다. 돈화는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해 특히 주목받는 곳이다. 1920년대 김좌진 장군이 ‘주중국 청년동맹’을 돈화에서 결성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돈화에 살았던 교포들은 주로 중국인 지주의 소작농으로 일했다. 그 결과 한인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도 했다. 돈화에 도착한 ‘한국불교 원류를 찾아’ 취재팀은 정각사에 참배를 하고, 고구려 불교의 흔적을 찾아 곧바로 연길(延吉)로 내달렸다.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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