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문전도사의 가정 편지> 사람은 할 수 없으나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막
10: 23 ~ 27)
요즘 들어서 제 편지글 읽는 분들이 많이 줄었어요. 제가 너무 길게
편지를 써서 그런가 봐요. 기존 생각과 다른 새로운 생각들을 적으면서 요약해서 적었다가 혹시라도 오해가
있을까 봐 조심스러운 마음에서 글이 길어진 것이니 양해해 주세요.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되도록이면 쉽고
짧게, 그리고 재미있게 적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본문의 내용은 많은 분들에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요.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은 굉장히 시각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그래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서 멀다는
것은 아주 일반화 된 신앙인의 교훈이 되고 있지요. 그런데 부자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에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깜짝 놀라고 있어요. 먼저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 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무척 놀랐습니다. “놀라다”는 말의 원문 단어가
매우 깜짝 놀랐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그리고 이어서 낙타의 비유를 하시자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했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왜 이렇게 놀랐을까요?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 당시의 사람들이 부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말에도 있지만 부자는 하늘이 내린다고 하지요? 예수님의 시대에는
그런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부자이면서 율법을 열심히 지켰다고 말한 청년을 보면서 제자들은
대단하다, 하고 감탄 했을지도
몰라요. 이 청년이 대단한 것이, 예수님 앞에 달려 나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통상적인 배움의 자세가 아니지요. 이 청년이 달려와서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영적인 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진 청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청년의 부함을 하나님의 특별한 복으로 보시지 않았고, 율법을
다 지켰다는 청년의 말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 들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에 이를만한 선을 인간이 이룰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부한 것은 오히려 구원에 지장을 준다는 것이지요.
사실 부자로 산다는 것은 과거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조선 중기 이후 무역과 장사로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돈으로 신분을 사서 양반이 되는 일이 시작되었는데요, 서양의 경우는 산업 혁명이 등장한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신분
제도를 벗어난 부자가 가능해 졌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업 혁명의 시대는 극심한 빈부 격차가
심화되는 시기였고, 도시를 떠난 농노들은 공장 노예로 신분이 전환되었을 뿐입니다. 결국 극심한 빈부 격차의 문제로 인해 산업 혁명은 공산 혁명을 낳았고 인류는 인류 전체를 담보로 하는 역사적
실험을 치렀습니다. 그 실험 결과 공산주의의 이상은 무너지고 지금의 세계는 돈에 대해서, 부자에 대해서 과거 어느 시대도 가지지 못 했던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있지요.
즉 신분에 의한 부, 세습에 의한 부에서 돈이 돈을 버는 자본주의의 시대로 전환했다가 공산혁명의 칼바람이
지나간 이후 이제는 부자와 부에 대한 예수님의 생각이 상당히 보편화
된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1)
신분이나 관계에 의한 부가 옳지 못하며
(2) 근면하게 일하고 창의적으로
도전하는 사람들이 부자가 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는 보편적입니다. 그리고
(3)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
즉 사회 속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가난에
대한 인식도 매우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4) 국가간의 부의 편중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움직임도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5) 부자의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책임에 대한 인식도 과거에 비해서는
매우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피터 드러커라는 최근에 작고한 미국의 경영학자는 앞으로 가난한 사람들, 중독으로
인해 시달리는 사람들 등을 돌보는 사회 보장 시스템은 국가에서 주도적으로 운영하는 형태에서 점차 민간 기업 주도로 옮겨갈 것이라고
진단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예상처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점차 중요해 지면서 이제는 기업은 어려운 사람들을
당연히 도와야 하는 것처럼 되어 가고 있지요? 이런 흐름들을 보면 과거에는 가난은 어느 누구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신분 구조로 여겨 지다가, 점차 부자들의 세습된 부에 대한 반감과
더불어 부자의 책임론이 강화되면서 이제는 부에 대한 구조적 이해에 기반하여 민간과 기업 주도의 기부 문화가 보편화 되어 가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님의 낮은
사람이 높아지고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섬기는 사회 구조에 대한 이상이 2000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에 있어 비로소 사회적 시스템으로 차츰 차츰 적용되고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더불어
어떻게 그처럼 오랜 옛날에 그런 새로운 사회 구조를 제시할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부자는 무조건 악하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지만, 또
한편으로 부자에 대한 미화나 지나친 동경도 금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처럼 돈을
모으려고 하는 동기에는 탐욕이 결합되어 있으며 탐욕이 지나칠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잘 가르쳐야지요. 그리고 돈에 대해서는 (1) 돈을 모으려는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점검하고 (2) 돈을 모으는 방법을 선하게
하며 (3) 쓰는 방법도
선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경제 교육의
예를 한번 나열해 보겠습니다.
부 자체를 죄악시 하여 돈을 모으려는 것을 악하게 보거나 부자를 경멸하도록 하는 것
부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이며 가난한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는 것으로 가르치는
것
그럼 돈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어떻게 가르치는 것일까요?
우리는 세상 가운데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으며 주신 돈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맡겨진 것임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음
선하게 돈을 모으고 선하게 돈을 사용해야 함
열심히 일해도 가난한 사람이 있음을 알게 할 것
경우에 따라서는 열심히 일하는 것 조차가 어려운 구조적인 가난의 환경들이 사회 내, 혹은 국가 간 형성되어 있음을
알게 할 것
빈부의 세습이 이루어지는 구조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세습 구조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도록
특히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인터넷 등의 정보로부터도 소외되어 가난의 영속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현실을 알게 하고, 국제 사회 내에서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함
제가 여기에 열거하지 못한 더 좋은 가르침들도 있겠지요? 자녀들과
이런 정도까지 깊이 있게 얘기할 수 있다고 하면 인성교육, 경제교육,
신앙교육 등 모든 면에서 100점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본문을 통해서 더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자인 청년이 구원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부를 이루었고 계명을 열심히 지켰으니 그 가진 부로 귀한 송아지 제사를 많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구원에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 부자 청년도
구원받기가 어려우니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성취로
구원이 임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저 피안에서의 구원을 이루는데
하찮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기부를 하고 많은 생명을 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이 없어도 단번에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참 가르침이지요. 어떻게 보면 재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려고 하는 모든 것이 결국 구원에는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바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임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죄책감으로
인해 구원 받지 못 할 것이라고 두려워 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또 많은 일을 했다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서도 안 되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어른들에게는 자주 들어온 말씀이지만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이런 말씀도 새로울 것 같아요. 그래서 오늘 설교에서는 부에 대한 교훈과 더불어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임하는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우리 부모님들도 자녀들과 본문을 가지고 좋은 대화 나눠 주시면 좋겠습니다.
광고 두 가지 드립니다. 11월 8일, 주일 오후 1시에 조이홀에서
2016년 모스크바 비전트립에 대한 설명회를 진행합니다. 간단히 뵙고 설명 드리려고 하니
관심 있는 부모님들은 참석해 주세요. 그리고 11월 14일(토)에는 리더, 부리더 어린이들을 위한 일일 캠프를 진행합니다. 리더, 부리더 학부모님들께서는 잘 챙겨 주세요.
감사합니다.
2015.
11. 05 문전도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