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장례식 (창50:1-14)
(요약)
야곱의 평안한 죽음은 성도의 죽음의 예표임과 동시에 옛사람 처리의 진리를 보여준다. 즉 옛사람의 죽음은 고통과 갈등 없이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령의 은혜로 쉽게 이루어진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의 향이 충분해야 한다. 기도할 때 성령 충만함이 임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나님을 사모함과 죄악에 대한 슬픔이 가득하도록 말씀에서 깊이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내 마음에서 구체적인 열매를 맺는다. 바로 죽기만 하면 하나님의 가장 귀히 여기심을 받는다. 그러니까 기도와 말씀은 거룩함에 이르는 방법인 것이다.
향재료를 넣고 있는 애굽의 의사들
(강해)
이 시간에는 야곱의 장례식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야곱의 임종과 장례가 우리에게도 중요한 것은 그는 언약의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인 우리의 죽음을 대표적으로 예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가 죽어 열조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만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또한 야곱의 죽음과 장례는 예수 안에서 죽은 우리들의 옛사람 처리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성도의 죽음이 어떠함을 보여줍니다.
창49:33에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했습니다. 그 발을 거두었다는 것은 발을 가지런히 뻗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극히 평안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도의 죽음은 평안합니다. 야곱의 일생은 파란만장한 일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만큼은 지극히 평온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그렇게 약속하셨지요? 창15:15에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시는 임종의 축복입니다. 죽음의 뒤에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지요. 성도는 웃으면서 죽는다고, 성경 말씀합니다. 사57:2에 “그는 평안에 들어갔나니 무릇 정로로 행하는 자는 자기들의 침상에서 편히 쉬느니라” 이런 평안함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신령한 면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옛사람이 죽는 것은 쉽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정을 죽이고 해탈한 사람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을 다합니까? 그래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혜만 받으면 옛 사람의 처리는 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알지 못해 갈등하고 방황하는데 사실 이것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성도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에 태어난 적도 없고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그 신음 소리마저 듣지 못했고 주님이 받으신 그 고통의 억 만분의 일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그 분의 공로로 우리는 죽음을 당했습니다. 죽기는 내가 죽고 고통은 주님이 당하시고 이런 좋은 죽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음의 고통이 없는 죽음, 죽음의 순간이 없는 죽음 이만하면 할 만한 죽음 아닙니까? 남이 대신 죽어주는 죽음이라면 100번이라도 주겠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죽어야 할 문제로 갈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신 늘 은혜 아래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으면 다 끝날까요? 이제 성도는 신령한 장례를 해야 합니다. 장사가 무엇이냐? 세례가 장사입니다. 골2:12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물세례도 세례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물세례의 내용인 성령세례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성령 세례는 예수를 믿을 때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령 세례로 주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의 자녀도 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 세례의 의미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례가 물에 잠기듯 성령으로 잠기는 면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자와 후자 다 인정할 뿐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후자를 강조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장례인 것입니다.
2. 그러기 위해서 먼저 향 재료를 넣어야 합니다.
2-3절에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당시 애굽은 미라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는데 야곱의 입관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당시 애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즉시 매장하는 히브리인들과는 달리 시체의 부패를 막고 오래 보존하기 위한 방부작업이 유행이었습니다. 사람이 운명하면 뇌와 내장을 꺼내고 종려나무술로 행군 다음 그 속에 화학약품과 소금과 향료 등을 채워 넣고 봉합하여 며칠 동안 소금물에 담근 후 시체를 씻어 아마포를 입힌 후 관속에 넣었습니다. 이렇게 방부 작업을 끝낸 시체는 사람들이 큰 소리로 곡을 하는 가운데 긴 장례행렬을 이루며 묘지에 안치 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장사 지내져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예수와 함께 죽었다지만 흉칙한 죄악이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즉 신학과 신앙이 함께 어우러져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말씀과 성령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온전히 장사 지내지기 위해서는 신령한 향 재료를 넣어야 합니다. 향 재료가 무엇일까요? 계8:3을 보면 기도를 향이라 했어요. 이것을 잘 해야 시험에 들지 않게 됩니다. 이 말씀은 곧 기도로서 거룩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딤전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습니다. 바울이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릴 때 거룩해진다고 했는데(롬6:19) 이 드림이 곧 기도인 것입니다. 이 때 성령이 임하셔서 예수님의 공로를 적용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살다가 마음에 염려와 불신과 죄악이 가득 차거든 하나님께 엎드리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에 세상 욕망의 환상이 지워지지 않거든 좀 더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제 경험의 경우 한 시간 정도면 어떤 죄악도 다 지워지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평안과 기쁨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의로운 마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런데 향 재료를 넣는데 40일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향이 잘 배이도록 함입니다. 40은 훈련의 수요 연단의 수입니다. 즉 기도생활이 잘 훈련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루 잘했다고 천사가 되지 않습니다. 야곱의 몸에 향이 배이듯 기도생활이 우리 몸에 배여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 충만으로 영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기도의 향이 떨어지지 않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기도를 통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3. 다음에는 극한 사랑과 슬픔이 있어야 합니다.
3절에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대단한 장례식입니다. 이주해 온 히브리사람 하나 죽었다고 온 나라 애굽인들까지 애곡을 70일이나 했다니 이것은 애굽에서의 요셉의 위치가 어떠함을 잘 시사해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요셉을 애굽의 영웅으로 만드시고 그들의 은인으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야곱을 사모했으면 이렇겠습니까? 70은 완전수 7에 만수 10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에 대한 온전한 사랑이요 온전한 슬픔입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게 되면 우리의 회개가 더 구체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그 뜻대로 살지 못함에 대하여 후회하고 슬퍼하며 애통하게 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죄를 이기는 생명을 경험하지만 말씀을 통해서 더 깊이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과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이기는 법을 몰라서 넘어질 수도 있지만 알아도 진정 죄 무서운 줄 몰라서 넘어집니다. 그러나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으면 죄가 얼마나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를 망하게 하는 원수인지 철저히 인식하고 죄를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애통하며 가슴 치게 됩니다. 신앙 안에서 잘된 사람을 보고도 크게 도전을 받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실 때 말씀 듣기 이전에 기도만 있었을 때는 아 놀랍다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구나 혹은 새 술에 취하였다 등등의 반응이 나왔지만 베드로의 설교가 있고 난 후에는 형제들아 어찌 할꼬 하면서 애통하며 회개했던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와 말씀 속에서 참된 회개가 있을 때 십자가 아래 매장한 진정한 장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장사 지내지지 못한 시체들은 자꾸만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섰다고 자만하지 말고 더욱 영적으로 전진하여 완전한 하나님 사랑과 죄악에 대한 슬픔이 올 때까지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세상 끝 날까지 지속 되도록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4. 이렇게 바로 죽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큽니다.
9절에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했어요. 얼마나 바로 왕을 위시로 해서 온 애굽이 함께 해주었던지 호상 중의 호상이었습니다. 7절 이하에도 나오듯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갔다고 하면서 그 규모를 이야기하기 위해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다는 이야기를 싣고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그들이 애곡해 주었으면 그 땅을 가나안 사람들이 큰 애통을 의미하는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불렀을까요?
애굽의 의사들이 야곱을 입관하는 모습
이래야 죽음이 복되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죽기만 하면 하나님의 복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죽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십니다. 온전히 기뻐하십니다. 큰 능력을 주십니다. 큰 권세를 주십니다. 큰 사랑을 주십니다. 크고 귀하게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온전히 죽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래서 시116:15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했고, 계14:13에는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自今)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우리 옛 사람이 지금 죽는 이 죽음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장사된 사람이 됩시다.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죄에서 온전히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에서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더욱 성령의 은혜를 받으십시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공로를 믿고 열심히 기도의 향을 피우고 말씀 보십시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가장 사랑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