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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 방앗간에서 온 편지 [알퐁스 도데]
제 1편 황홀한 귀로
오래 전에 문을 닫은 풍찻간의 벽과 바닥에는 잡초들이 제멋대로 무성하게 자라 있었지.
내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한밤중이었다네. 그때 방바닥에 둥그렇게 둘러앉아서 흘러들어오는 달빛에 차가운 발을 녹이며 쉬고 있던 토끼가 스무 마리는 넘을 거야. 주위를 좀 더 밝히려고 천장에 빛을 들여 주는 창문을 반쯤 열었네. 화다닥! 야영 부대의 패주였다네. 토끼들은 모두 놀랐는지 꽁무니에 달린 짧고 하얀 꼬리를 떨 듯 세우고 숲 속으로 달아났지. 나는 그들이 돌아와 주기를 원했네. 돌아와 주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런데 나의 뜻밖의 방문에 토끼들 이상으로 놀란 것이 또 있었다네. 이십 년을 넘게 이 풍찻간의 이 층에 세 들어 살고 있던 올빼미지. 철학자 같은 근엄한 얼굴에 엄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이 많은 올빼미였다네.
나는 지금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수정같이 맑고 밝은 햇빛을 수없이 받으며 자네에게 편지를 쓰고 있네.
풍찻간은 무척 조용하고 평화롭네. 이곳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축복의 땅일세. 신문이나 거리의 마차 안개로부터 천 리나 떨어져 있는 포근하고 향기 가득한 시골이라네. 나의 주위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네. 내가 이 곳에 온지는 이제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네. 그렇지만 내 머릿속은 벌써 신기함과 즐거움이 가득 차 넘칠 지경이지. 아참, 그렇지! 바로 어제 저녁이었다네. 산기슭에 자리한 농가로 돌아가는 양떼[를 볼 수 있었다네. 이번 주일 파리에서 초연되는 연극 입장권을 모두 준다 해도 나는 절대로 이 광경과는 바꾸지 않겠네.
양들은 농가 주변의 로즈마리 향기로 그윽한 야트막한 잿빛 언덕의 풀을 수줍게 뜯어 먹게 되지.
2편 보케에르 승합마차 안에서
내가 이곳에 도착하던 날이었다. 나는 그때 보케에르의 합승마차를 타고 있었다. 아주 오래되어 낡아빠진, 털털이 마차였다. 풍찻간까지의 거리가 별로 멀지 않은데도 어찌나 뒤뚱거리고 느린지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도착했다.
마부 곁의 윗자석은 마부를 제외하고 모두 다섯 사람이 타고 있었다.
카마르그 친구는 어떤 양치기를 몽둥이로 때렸다는 이유로 예심 판사의 소환장을 닫고서 님므에서 오는 중이라고 했다. 카마르그 사람들은 툭하면 신경을 곤두세우는 다혈질들이다. 하물며 보케에르 사람들이야! 바로 이 순간, 여기에서도 두 보케에르 친구들은 성모 마리아에 관한 일로 칼부림을 하려는 판국이 아닌가?
여보슈, 당신들의 성모 논쟁은 이제 그만들 합시다. 마부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보케에르 사내들에게 말했다. 그런 예기는 여자들이나 하는 거지. 사나이들이 떠들 일이 되지 못한다우. 어서 그만들 두시오. 그렇게 말다툼은 간신히 끝이 났다. 하지만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빵집 주인은 남은 열을 다 발산하지 못하면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빵집 주인은 한쪽 구석에 침통한 모습으로 말 한마디 없이 가엾게 앉아 있는 토끼 모자를 향해 야유하듯이 열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여봐, 갈음장이! 자네 마누라 말일세, 응, 어느 교구였지? 이 물음의 진의는 갈음장이 마누라의 교구를 묻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좌석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모두 동시에 죽어라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당사자인 갈음장이만은 조금도 웃지를 않았다.
갈음장이는 조금도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머리도 들지 않고 죽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만둬 줘요. 빵장수, 제발…….
보케에르의 두 친구가 내리자 마차 안은 텅 빈 것 같았다.
내 귀에는 웬일인지 그만 좀 해요, 제발 그만……. 하는 비통하고 슬픈 목소리가 계속해서 메아리쳐 맴돌았다.
나는 등 뒤에서 갈음장이의 널따란 어깨가 잔잔히 경련을 일으키고 창백하고 힘이 빠져 버린 기다란 손이 의자 팔걸이에서 늙은이의 손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울고 있었다.
잘 봐 두시오. 내 얼굴을. 그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지 않아서 보케에르에 무서운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 사고를 저지른 범인이 누구인지, 당신은 알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겁니다. 핏기가 없고 윤기도 흐르지 않는 너무도 슬픈 얼굴이었다.
증오란 약한 자의 노여움이다. 만약 내가 저 갈음장이의 마누라였다면 우선 몸조심부터 했을 것이다.
제3편 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프랑세마마이라는 피리 부는 할아버지가 있다네. 그는 가끔 내게 왜서, 옛이야기를 하며 밤을 새우곤 하지. 어느날 밤, 포도주를 마시면서 마을에 일어났던 한 토막의 비극을 이야기해 주었다네.
옛날에는 이곳이 지금처럼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언제나 쓸쓸하기만 하던 곳은 아니었다네. 그때는 풍차 방앗간이 크게 번창해서 백리 사방의 농사꾼들이 모두 여기에 밀을 찧으러 왔었지. 마을을 둘러싼 언덕이란 언덕은 모두 풍차로 덮여 있었다네.
방앗간 안주인들은 레이스 달린 목도리와 황금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었다네. 마치 여왕처럼 아름다웠지.
그러나 불행히도 파리 사람들이 타라스공 길가에 증기 방앗간을 세웠지. 무엇이든지 새건 다 좋다는 식으로 사람들은 밀을 그 증기 방앗간으로 보냈다네. 그래서 이 풍차 방앗간 쪽은 가엽게도 일이 없어 놀게 되었지.
아름다운 방앗간 안주인들은 그들의 황금 십자가를 팔아 버려야 했지.
미스트랄이 아무리 불어와도 풍차는 움직이지 않았지. 어느 날 마을에선 폐옥이 된 방앗간을 허물어 그 자리에 포도와 감람나무를 심었다네. 이렇게 모두 넘어지는 속에서 한 풍차만이 제대로 남아 증기 방앗간의 코 앞, 언덕 위에서 꾸준히 힘차게 돌고 있었다네. 그것은 코르니유 영감의 풍차, 바로 지금 우리가 밤을 새우며 이야기하고 있는 이 풍찻간이라네. 코르니유 영감은 육십 년 동안이나 가루 속에서 살아왔지.
증기 방앗간이 세워지자 영감은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었네. 일주일 동안 꼬박 마을을 쫓아다니며 마을 사람들을 자기 주위에 모아 놓고 목이 터지도록 외쳤다네. 놈들은 이 프로방스를 방앗간의 증기로 독살하려는 거라고 말일세.
그 말을 듣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네. 그래서 화가 머리끝까지 난 영감은 풍찻간 속에 들어 앉아, 맹수처럼 단 혼자서 살아갔네. 열 다섯 살 난 비베트라는 손녀가 있긴 했었지. 부모가 죽어서 이 세상에 오직 할아버지 한 분밖에 없는 그 계집아이까지도 곁에 두려고 하질 않았다. 불쌍하게도 이 애는 제 힘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네. 여기저기 농가에서 품을 팔아 살아갔지.
그런데 코르니유 영감의 생활 속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었네.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는 아무도 더 이상 그에게 밀을 가져가지 않았는데도. 영감의 풍차 날개는 여전히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거든.
안녕하세요, 코르니유 영감님! 방앗간은 여전히 잘 되나요? 암, 여전하고말고, 고맙게도 일감이 떨어지지 않는군 그래.
어느 날 젊은이들이 내 피리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데, 내 큰 아이와 비베트가 서로 좋아한다는 걸 알았지.
난 영감과 이 일에 대해 상의하려고 풍찻간까지 올라갔네.
안에 들어가 보니 이상했었지. 방아가 있는 방은 텅 비어 포대 하나, 밀 한 알 없었다네. 벽에는 거미줄에도 밀가루는 조금도 묻어 있지 않았지.
날개는 언제나 돌고 있었지만 빈 방아만이 돌고 있었던 거지.
난 지체 없이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 풍차 방앗간의 사정 예기를 대충 들려주었네.
영감이 말했다네. 불쌍한 녀석아! 이렇게 된 마당에 살아서 무엇 하나. 이제 풍차는 더렵혀졌어.
그때 막 나귀들이 앞마당에 도착했지. 농부들은 모두 방앗간의 경기가 좋았을 때처럼 고함을 질렀다네. 여어! 고르니유 영감, 부탁하오!
그리고 몇 해 후 어느 날 아침. 코르니유 영감이 죽었네. 우리들의 마지막 풍차의 날개가 이번에야말로 영원히 멈춰 버리고 말았지.
제 4편 별 (전문)
뤼브롱 산 위에서 양들을 지키고 있을 무렵, 나는 초원에서 혼자 라브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냥개와 양들을 데리고 사람의 그림자 하나 구경하지 못한 채 몇 주일을 지내고 있었다. 간혹 몽 드 뤼르의 수도사들이 약초를 구하러 이곳을 지나는 일이 있는가 하면 혹은 삐에몽 근처의 숯 굽는 사람들의 시커먼 얼굴을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혼자 살고 있는지라, 별로 말도 없고 이야기의 재미조차 잊고 있었다. 또한 아랫마을이나 읍에서 돌고 있는 풍문 같은 것을 전혀 모르는 순박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보름 만에 두 주일분의 식량을 가지고 오는 우리 농장 노새의 방울 소리가 비탈진 산 길 위에 들릴 때나, 언덕 위로 귀여운 미아로(농장의 머슴아이)의 생기 있는 얼굴이나, 그렇지 않으면 늙은 노라이드 아주머니의 밤색 모자가 조금씩 보일 때는 정말 기뻤다. 나는 아랫마을의 소식, 이를테면 어느 누가 영세를 받았다든가, 결혼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얻어 듣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흥미 있게 하는 것은 우리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 아가씨의 소식을 듣게 되는 일이었다. 이 지방에서 스테파네트보다 더 아름다운 아가씨는 없었다. 나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 체하면서, 아가씨가 만찬에 자주 초대되며, 파티에도 많이 참석하는지 혹은 여전히 새로운 멋쟁이 남자 친구들이 찾아오는지를 물어 보았다. 불쌍한 산의 양치기인 내게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당시 스무 살이었고 그 스테파네트는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로 처음 본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대답해 주리라. 그런데 어느 일요일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반 달치의 식량이 매우 늦어서야 도착했다. 아침나절에는 대미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점심때에는 심한 소낙비가 내렸음으로 길이 나빠 노새가 떠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윽고 세 시경이 되어 하늘은 씻은 듯이 개이고, 산이 이슬과 햇빛으로 반짝일 때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와 물이 불은 계곡물의 넘치는 소리 틈에서 나는 노새의 방울 소리를 들었다. 부활절날 울리는 커다란 합명 종만큼이나 빠르고 명랑한 방울 소리다. 그런데 노새를 끌고 온 것은 미아로도, 노라이드 아주머니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가씨였다. 다름 아닌 바로 아가씨 자신이었다. 버들 광주리 틈에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있는 그녀는 산바람과 소나기가 그친 뒤의 시원한 공기로 뺨이 말 그대로 장미 빛 이었다. 아름다운 스테파네트는 노새 등에서 내리면서 머슴아이는 앓아누웠고, 노라이드 아주머니는 휴가를 얻어 아들 집에 갔다고 내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오는 도중 길을 잃었기 때문에 늦었다는 것도 덧붙였다. 그러나 꽃 리본과 눈부신 스커트, 레이스 치장을 한 화려한 옷차림은 , 숲 속에서 길을 찾아 헤매었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어느 무도회에서 춤이라도 추느라고 늦은 것만 같아 보였다. 오, 귀여운 아가씨! 언제까지나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겨울이 되어 양떼가 평지에 내려와 있을 땐, 나는 저녁에 농장으로 돌아와 식사를 한다. 그때 그녀는 화려한 옷차림을 한 채 하인들에게 전혀 말을 건네지도 않고, 약간 으스대면서, 활발하게 홀을 지나가는 일은 가끔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아가씨가 여기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오직 나를 위해. 그래도 내가 정신을 잃지 않고 있을 수 있겠는가? 광주리에서 식량을 다 꺼내자, 스테파네트는 주위를 신기하다는 듯 둘러보기 시작했다. 쉽게 망가질 것만 같은 화려하고 고운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양 우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 잠자리와 짚을 넣고 양 가죽을 깐 침대며, 벽에 걸린 커다란 비옷, 지팡이, 돌 총들을 보고 싶어 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녀를 즐겁게 했다. 그러니까 당신은 여기서 사는군요. 가엾게도 언제나 혼자서 지내니 얼마나 쓸쓸할까. 아니, 무엇 하세요? 무얼 그렇게 생각하고 계시죠? 당신을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했다 해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 가슴이 두근거려 단 한 마디의 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그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장난스런 아가씨는 심술궂게 나를 더 골려 주고는 좋아했다. 그래, 그 좋은 친구는 가끔 만나러 오나요? 아마, 그건 틀림없이 황금 양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산꼭대기만을 뛰어다니는 천사 에스텔 일까. 그러나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아가씨 자신이야말로 머리를 뒤로 젖히고 곱게 웃는 것이나 유령처럼 왔다가는 이내 사라지는 것이 천사 에스텔과 매우 흡사했다. 안녕. 잘 가세요, 아가씨. 결국 아가씨는 빈 광주리를 가지고 떠났다. 그녀가 비탈진 길로 사라졌을 때, 노새 발굽에 채여 때굴때굴 구르는 조약돌이 하나씩 하나씩 나의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들고 있었다. 그리하여 해질 무렵까지 졸듯이 , 행여나 꿈을 깨뜨릴까 봐 꼼짝 않고 있었다. 저녁 무렵, 계곡 바닥은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고 양들이 메에 메에 울면서 서로 밀치며 우리 속으로 들어갈 때, 나는 비탈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다. 아가씨가 조금 전의 웃음은 흔적조차 없이 추위와 두려움으로 물에 젖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나타났다. 아마 소나기로 물어난 산 아래 소르그 강을 무리하게 건너려다 잘못해서 빠진 모양이었다. 밤이 되려는 지금 , 농장으로 돌아간다는 건 상상도 못할 두려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지름길을 아가씨 혼자 찾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양떼를 떠난다는 것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산 위에서 밤을 새운다면 무엇보다도 가족들이 걱정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가씨는 몹시 괴로워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녀를 안심시켰다. 칠월은 밤이 짧으니까……. 잠깐만 참으면 되지요. 그리고 나는 그녀의 발과 소르그 강물에 흠뻑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급히 불을 피웠다. 그리고 그녀 앞에 우유와 치즈를 갖다 놓았다. 그러나 가엾게도 아가씨는 불을 쪼일 생각도, 먹을 생각도 안했다. 눈에 고인 커다란 눈물을 보니 나도 그만 따라 울고 싶어졌다. 그러는 동안 곧 밤이 되었다. 여기저기 산봉우리에는 이제 먼지처럼 불그스럼 한 햇빛과, 서쪽에 안개 같은 빛이 조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가씨를 우리 안에 들어가 쉬도록 했다. 새 짚 위에 고운 새 모피를 깔고, 잘 자라고 아가씨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는 밖으로 나와 문 앞에 앉았다. 사랑의 불길이 내 피를 뜨겁게 태우고 있었지만 티끌만큼도 악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만은 알아주시리라 . 단지 이 우리 안의 한 구석에 잠든 아가씨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양들 곁에서, 주인집 따님이 - 다른 어떤 양보다도 더 소중하며 더 순결한 양으로서- 나의 보호를 받으며 마음 놓고 잠들고 있다는 자랑스런 생각밖엔 없었다. 갑자기 양 우리의 창살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스테파네트가 나타났다. 그녀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양들이 움직이면서 짚을 바스락대는가 하면, 꿈을 꾸면서 마구 울어대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어깨 위에 내 양 모피를 씌워 주고 불을 더 지폈다. 그리곤 둘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만약 당신이 별빛을 받으며 밤을 새워 본 경험이 있다면, 모두가 잠들어 있는 그 시각에 어떤 신비로운 세계가 고독과 고요 속에서 눈을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샘물은 한층 더 맑게 노래하고, 연못은 작은 불꽃을 밝히게 된다. 모든 산은 정령들이 오고가며 대기 속에서는 무엇인가 가볍게 스치며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소리가 마치 나뭇가지가 굵어지고 풀잎이 자라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낮이 살아 있는 것의 세상이라면 밤은 무생물의 세계이다. 거기에 친숙치 못한 사람들에겐 언제나 그것은 두려움을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 아가씨가 겁을 먹고 떨고 있는 것이며, 아주 작은 소리에도 놀라 내게 바싹 몸을 붙이는 것이다. 어떤 때는 아래쪽에서 반짝이고 있는 호수로부터 구슬픈 비명이 일어나 길게 물결치며 우리들을 향해 올라왔다. 바로, 그때 한 아름다운 유성이 우리들의 머리 위를 지나 그와 똑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흡사 우리들이 지금 막 들은 구슬픈 울음소리가 그 빛을 이끌고 가는 것만 같았다. 저게 뭐예요? 스테파네트가 낮은 소리로 물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영혼이랍니다. 그리고 나는 성호를 그었다. 그녀도 성호를 그었다. 그리곤 ㅈ마시 생각에 잠겨 하늘을 쳐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당신들 양치기들이 마법사라는 게 정말인가요? 천만에요, 아가씨. 여기서 우리는 별에 더 가까이 살고 있기 때문에 들에서 사는 사람들보다 별에서 일어나는 일을 훨씬 더 잘 알고 있지요. 아가씨는 계속해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양가죽에 싸여 있는 모습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귀여운 목동 같았다. 참, 많기도 해라! 정말 아름다워요. 이렇게 많은 별을 본 건 처음이에요. 저 별들의 이름을 아세요? 그럼요, 아가씨. 자, 보세요! 바로 머리 위에 있는 저것이 은하수예요. 그건 프랑스에서 곧바로 스페인으로 뻗었죠. 용감한 샤를르마뉴 대제가 사라센과 싸울 때, 갈리스의 성 야곱이 저 것을 만들어 길을 알려 주었대요. 더 멀리 있는 저것이 큰곰자리예요. 네 개의 바퀴가 반짝이고 있죠. 그 앞에 있는 세 개의 별이 세 마리의 야수 예요. 그 세 번째 맞선 아주 작은 별이 마차꾼이고요. 그 주위에 비 오듯 흩어져 있는 별들이 보이지요? 그건 하나님 곁에 두기를 꺼리는 영혼들이랍니다. 그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것이 갈퀴 혹은 오리온이랍니다. 우리들에게 시계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오직 저것만 보아서도 지금 자정이 조금 자났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거기서 조금 아래, 남쪽에서 반짝이고 있는 게 시리우스자리(장 드 밀랑)랍니다. 그것이 바로 별들의 횃불 이예요. 저 별에 대해서 목동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답니다. 어느 날 밤 장 드 밀랑이 세 명의 왕과 닭장(북극성좌)과 같이 친구 별의 결혼식에 초대받았대요. 닭장은 몹시 서둘러서 제일 먼저 길을 떠나 높이 올라갔답니다. 저것 보세요. 저 높은 곳, 하늘의 한 가운데에 있지요. 세 명의 왕은 낮은 길로 질러가서 닭장을 따라갔답니다. 그러나 느림보인 장 드 밀랑은 너무 늦게까지 자고 있었던 탓에 아주 뒤처지고 말았지요. 그래서 화가 난 그는 앞서 가는 두 친구를 멈춰 서게 하려고 지팡이를 던졌답니다. 그래서 세 명의 왕을 장 드 밀랑의 지팡이라고도 부르지요. 그러나 모든 별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 우리들의 별인 목동의 별이랍니다. 새벽녘 우리들이 양떼를 밖으로 몰아낼 때도 우리들을 비춰주고, 저녁이 되어 양들을 몰아넣을 때도 역시 밝게 비춰 주지요. 우리들은 이것을 마글론느라고도 한답니다. 아름다운 마글론느는 프로방스의 베드로(토성) 뒤를 따라가다가 칠 년 만에 한 번씩 그와 결혼을 한답니다. 어머나, 그럼 별들도 결혼을 하나요? 그럼요, 아가씨. 그리고 별들의 결혼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인가 부드럽고 싱그러운 것이 어깨 위에 가볍게 얹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머리는 잠이 들어 축 늘어진 채 내 어깨에 얹혔고 꽃 리본과 레이스 그리고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스쳤다. 그녀는 하늘의 별들이 솟아오르는 아침빛으로 지워져 버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약간 두근거렸지만, 아름다운 생각만을 보내준 청명한 밤의 신성한 보호를 받으며 잠들어 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 주위에는 별들이 양떼처럼 말없이 조용한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별들 가운데서 가장 곱고 가장 빛나는 별이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 위에서 잠들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제 5편 아를르 여인
내 풍찻간에서 내려와 마을로 가려면 팽나무를 심은 커다란 뜰안 깊숙이 길가에 세워진 농가 앞을 지나야 하네. 붉은 기와를 올린 밤색의 넓은 정면은 불규칙하게 창문이 달려 있고. 그보다 훨씬 뒤에 곡간의 바람개비가 있지. 그리고 건초를 걷어 올리는 활차가 보이고, 밖으로 불쑥 내민 흙색 건초 단이 몇 단 눈에 띄인다네. 이것이야말로 프로방스의 진정한 지주 저택일세.
쉿 주인이랍니다. 아드님의 불행을 겪고 난 뒤부터 언제나 저 모양이지요.
미사에서 돌아오는 부인과 둘째 아드님이랍니다. 큰아드님이 자살한 후로는 매일 나가지요.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예요. 아버지는 죽은 사람의 옷을 입고, 아무리 벗길래야 벗길 수가 없답니다.
젊은이의 이름은 장이라고 했다. 색시처럼 얌전하고, 튼튼하고, 티 없는 밝은 얼굴을 한 스무 살의 훌륭한 농부였다. 그는 얼굴이 잘 생겨서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으나,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여자밖에는 없었다. 빌로드와 레이스로 온몸을 휘감은, 아를르의 여인이었는데 아를루의 투기장에서 단 한 번 만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집안에서는 처음에 이 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자의 품행이 좋지 않게 알려진데다가 부모가 이 고장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여자를 아내로 얻고 싶어 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가련한 건지. 아무리 상대방을 경멸해도 애정을 죽일 수는 없다네. 그건 너무 가혹한 일이지. 그날 아침, 마을 사람들은 저편, 에스티에브 농가 쪽에서 누가 그렇게 울부짖고 있는지 서로에게 묻고 있었다네. 그건 이슬과 피로 덮인 돌 탁자 앞에서 죽은 아들을 두 팔로 부여잡고 가슴이 미어지도록 통곡하는 어머니의 울음소리였다네.
제 6편 칠 년 만의 뒷발질
제 7편 상기네에르의 등대 (전문)
간밤에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네. 미스트랄이 미친 듯이 날뛰며 무섭게 몰아치는 소리에 아침까지 꼬박 뜬눈으로 새웠다네. 부서진 날개가 선박의 밧줄처럼 북풍을 받아 소리를 내며 무겁게 흔들리고, 풍찻간 전체가 삐걱거렸지. 기왓장은 뿔뿔이 흩어져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네, 멀리 언덕을 뒤덮은 빽빽한 소나무 숲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신음하고 있었지. 마치 바다 한가운데라도 와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네. 그건 내가 삼 년 전, 코르시카 연안의 작은 아작시오 만, 입구에 있는 상기네에르 등대에서 지낼 때의, 계속된 불면의 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주었다네. 그곳 역시 꿈을 꾸기 위해 그리고 혼자 있기 위해 발견한 아름다운 벽지였었지. 붉은 빛을 띤 살풍경한 한 섬을 상상해 보게나. 섬의 한쪽 끝엔 등대가 있었지. 내가 있을 당시에 한 마리의 독수리가 살고 있던 제노아 시대의 낡은 탑이 그 맞은 편 끝에 있었네. 아래쪽 해변에는 우거진 잡초 덤불 속에 통째로 묻힌 허물어진 격리소가 있었지. 협곡과 밀림, 커다란 바위, 야생의 염소, 갈기에 바람을 날리며 뛰어다니는 작은 코르시카 말들이 있었다네. 그리고 섬의 높은 꼭대기, 바닷새가 회오리치듯 날아다니는 곳에 등대지기의 집이 있었네. 그곳엔 위 아래로 돌아다닐 수 있는 돌로 만든 희 테라스와 아치형의 녹색 문, 무쇠로 만든 작은 탑, 그 탑 위에 햇빛을 받아 이글이글 타며 대낮에도 빛을 반사하는 커다란 파셋트 유리램프가 있었지. 이런 것들이 간밤에 언덕위에서 소나무 숲이 우짖는 소리를 낼 때 내가 다시 본 상기네에르였다네. 이 풍찻간을 알기 전까지 고독과 자연이 그리울 때면 종종 틀어박혀 지낸 곳이 바로 이 아름다운 섬이었지. 그곳에서 내가 하고 있던 일이 뭐냐고? 지금 여기서 하는 일보다 훨씬 적었지. 미스트랄이나 트라몽탄느가 그다지 심하지 않을 때는 갈매기와 개똥지빠귀, 그리고 제비들을 벗 삼아 수면에 가지런히 놓인 두 바위틈에 앉아 있었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잊고 나른하게 하루해가 지도록 앉아 있었다네.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네. 영혼의 아름다운 도취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닌 상태를. 몸과 마음이 송두리째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 날아올랐다가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지. 나는 물속으로 곤두박질하는 갈매기이자. 햇빛을 받아 두 파도 사이에 떠도는 물거품이며, 멀어져 가는 저 우편배의 새하얀 연기요, 빨간 돛을 단 산호선이며, 깨어지는 물의 진주요, 안개의 한 조각이며, 나 아닌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네. 이 섬에서 난 얼마나 몰아지경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걸까? 바람이 심한 밤은 해변에 있을 수가 없어서 격리소의 안마당에서 꼼짝 않고 지냈었네. 로즈메리와 야생의 압생트 향기가 가득히 풍기는 작고 한적한 뜰이었다네. 그 곳에서 나는 낡은 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황폐와 비애가 내뿜는 걷잡을 수 없는 향기의 급습에 포근히 몸을 내맡겼어. 그 향기는 옛날 무덤처럼 주위에 입을 벌리고 있는 돌로 지은 여러 방 속을 햇빛과 함께 맴돌고 있었네. 이따금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면서 풀숲에서 무언가가 가볍게 뛰었지. 그건 바람을 피해 풀을 먹으러 온 염소였다네. 나를 보자 놀라 멈칫 섰었네. 그리곤 꼼짝 않고 내 앞에 서 있었지. 활기찬 모습, 높이 솟을 뿔, 아기처럼 순진한 눈매로 나를 보면서…… 다섯 시경이 되면 언제나 등대지기들은 메가폰으로 저녁을 먹으라고 나를 불렀네. 그러면 나는 바다 위로 곧추 선 밀림 속의 자그마한 오솔 길을 따라 올라갔네. 발을 옮겨 오솔길을 올라갈수록 더 넓어지는 듯한 바다와 빛의 끝없는 수평선 위를 뒤돌아보면서 천천히 등대로 돌아왔지. 언덕 위는 퍽 마음에 들었네. 지금도 눈에 선하다네. 커다란 바위를 바닥에 깔고 참나무 널빤지로 벽을 두른 그 아담한 식당의 중앙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부이야베스 고기 찜이 있었네. 그리고 흰 테라스 위에 활짝 열어 놓은 문으로 하나 가득 석양빛이 밀려들어왔다네. 등대지기들은 저녁을 먹기 위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모두 세 사람이었네. 한 사람은 마르세이유인이고 두 사람은 코르시카 출신이었지. 세 사람 모두 작은 키에 수염이 있고 똑같이 황갈색으로 그을어 있었네. 주름진 얼굴에 똑같은 염소 가죽의 비옷을 입고 있었지만 성격과 태도는 전혀 달랐지. 이 사람들의 생활 대도를 보면, 두 지방 사람들의 차이를 곧 알게 된다네. 마르세이유 사나이는 재치 있고, 활동적이며, 언제나 바쁘게 쉴 새 없이 움직였다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섬 안을 뛰어다녔는데, 정원을 만든다, 낚시질을 한다, 그리고 구아이유의 알을 주워 모은다, 밀림 속에 잠복해 있다가 지나가는 염소를 붙들어 젖을 짠다, 하며 돌아다녔지. 게다가 아이오리나 부이야베스는 언제나 준비해서 다녔다네. 크르시카 사나이들은 둘 다 근무 시간 외에는 절대 일을 하지 않았네. 그들은 자신을 관리로 생각해서 종일 부엌에서 끝도 없는 스코바를 하며 지냈네. 쉬는 일이라고는 이따금 의젓한 몸짓으로 파이프에 불을 붙일 때나, 손바닥의 오목한 곳에다 커다란 연초 잎사귀를 가위로 잘게 썰 때뿐이었네. 그러나 마르세이유 사나이나 코르시카 사나이 셋은 모두 단순하고 소박하며 선량했네. 그들은 손님인 내게 극진한 친절을 베풀었지. 사실 그들에게 나는 퍽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지도 모르네. 그도 그럴 것이, 재미로 등대에 와서 틀어박혀 지내다니, 등대지기들에게는 하루가 천년같이 여겨지며 육지에 내려가는 차례가 되면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데 ……. 날씨가 좋은 계절에는 이런 큰 기쁨이 달마다 규칙으로 돌아왔다네. 삼십 일간의 등대 생활에 열흘간의 육지 생활, 그것이 규칙이었지. 그러나 겨울과 파도가 거칠 때는 규칙이고 뭐고 있을 수가 없었어. 바람이 휘몰아치고, 파도가 일고, 상기네에르의 여러 섬들이 물거품으로 뽀얗게 되면 근무 중의 등대지기들은 이삼 개월 계속해서, 혹은 어떤 때는 정말 무시무시한 사태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몇 달을 갇히고 말았다네. “내가 큰 변을 당한 적이 있었어요.” 어느 날 우리들이 저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바르틀리 영감이 매게 말했네. “오 년 전, 우리들이 앉아 있는 바로 이 식탁에서였습니다. 꼭 오늘 밤처럼 어느 겨울밤이었지요. 그날 밤, 등대에는 나와 체꼬라는 친구, 단둘이 있었답니다. 다른 친구들은 병이 나거나, 휴가로 육지에 내려가 있었거든요. 우리들은 조용히 저녁식사를 끝내려던 참이었어요. 그런데 이 친구가 별안간 밤을 먹다 말고 잠시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그만 팔을 털썩 앞으로 뻗은 채 식탁 위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재빨리 달려가 그를 흔들면서 이름을 불렀지요.”야! 체, 체! “ 하지만 대답이 없었습니다. 벌써 죽었던 거지요. 얼마나 놀랐는지 아시겠지요? 나는 한 시간 이상이나 시체를 앞에 두고 멍하니 떨고만 있었습니다. 그러자 문득 ‘등댓불은?’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요. 나는 곧 등화실에 올라가 램프에 불을 붙였습니다. 벌써 밤이었어요. 정말 지긋지긋한 밤이었지요!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는 벌써 심상치 않았습니다. 줄곧 계단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게다가 열이 나고, 목이 타고, 그렇지만 설사 내려오래도 내려갈 수가 없었을 겁니다. 시체가 무서웠던 거죠. 그러나 새벽녘엔 약간 용기가 났습니다. 나는 친구를 침대에 옮기고 천으로 덮어 주었죠. 그리고 잠시 기도를 드린 뒤, 급히 위급 신호를 보냈답니다. 불행히도 파도가 몹시 심해서 아무리 불러도 와 주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불쌍한 체꼬와 단 둘이 등대에 있었던 겁니다. 언제까지 그 상태로 마냥 있어야 하는지 알 수가 있나요? 배가 올 때까지 만이라도 그를 내 곁에 둘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요. 그러나 삼 일째 마지막 날에는 그것도 불가능했어요. 어떻게 하나? 밖으로 내갈까? 땅에 묻을까? 하지만 바위가 너무 딱딱하고 게다가 이 섬에는 까마귀들이 많거든요. 친구를 그 놈들 밥에 되게 내버려 둔다는 건 불쌍한 일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나는 격리소의 한 방에 그를 업어다 두자고 생각했습니다. 이 슬프고 힘든 일은 꼬박 오후까지 걸렸지요. 게다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도 얘기해 둬야겠어요. 정말, 지금도 바람이 몹시 심한 오후엔 섬의 그쪽 길을 내려가려면 언제나 시체를 어깨에 메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니까요.“ 불쌍한 바르틀리 영감은 그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마에 땀이 흐르고 있었네. 이렇게 긴 이야기 속에서 식사를 했다네. 등대, 바다, 난파선 이야기, 코르시카의 산적 이야기 등등. 그 사이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첫 번째 근무의 등대지기는 작은 램프에 불을 붙이고, 파이프와 수통 그리고 상기네에르의 유일한 책인, 빨간 테가 둘리고 커다란 블뤼타르크전을 들고 안으로 사라졌지. 잠시 후 쇠사슬과 활차 그리고 시계추를 올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등대 안에 울렸데. 그로는 동안 나는 실외 테라스에 앉아 있었네. 벌써 나직이 수면 위에 기운 태양은 수평선 전체를 뒤로 끌면서 점점 빠른 속도로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네. 바람이 차가와지고 섬은 보랏빛으로 노을 지고 있었지. 가까운 하늘에서 커다란 새가 무겁게 날개 치며 지나갔네. 집으로 돌아가는 제노아식 탑의 그 독수리였던 걸세. 조금씩 바다 안개가 일었지. 그러면 섬 주위를 철썩이는 파도의 포말이 만드는 뽀얀 가장자리밖엔 보이지 않았다네. 갑자기 내 머리 위로 부드러운 커다란 광선의 물결이 일시에 뿜어 나왔네. 등대불이 켜졌던 걸세. 섬 전체를 깡그리 어둠 속에 남겨둔 채 밝은 빛줄기는 멀리 바다 한가운데로 덜어져갔지. 지나가는 길에 간신히 비망르 튕기고 있는 그 커다란 빛의 물결 밑에서 나는 밤의 어둠 속에 싸여 있었네. 그러나 바람은 더욱 차가와져서 난 방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네. 손으로 더듬더듬 더듬으며 가서는 커다란 문을 닫고 쇠빗장을 꽉 질렀지. 그리고는 계속 손으로 더듬으며 발밑에서 진동하며 까랑까랑 울리는 자그마한 무쇠의 계단을 올라가 등대 꼭대기에 도착했네. 여기야말로 광명의 나라였다네. 여섯 줄의 심지가 있는 거대한 카르셀 램프를 상상해 보게나. 그 주위를 서서히 돌고 있는 벽은 어떤 곳은 수정으로 만든 커다란 렌즈가 박혀 있고. 다른 곳은 불이 꺼지지 않게 바람을 막고 있는 커다란 고정 유리벽 위로 구멍이 뚫려 있었네. 난 잠깐 동안은 눈이 부셔 뜰 수가 없었다네. 그 동과 주석과 백색의 합금 반사기, 푸른빛을 띠고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오목렌즈의 벽. 그 모든 반사광과 심지 타는 소리에 나는 잠시 동안 현기증을 일으켰었지. 그러나 눈은 점점 빛에 익숙해져 갔네. 나는 불빛 바로 밑으로 가서 잠이 들까 두려워 커다랗게 소리 내며 불뤼타르크 영웅전을 읽고 있는 등대지기 곁에 앉았다네. 창밖은 암흑의 심연, 유리벽을 둘러싼 자그마한 발코니 위에 바람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날뛰고 있었지. 등대가 삐걱대고 바다는 신음했네. 섬 끝머리의 암초에 와 부딪치는 노도가 포성처럼 우렁차게 울렸다네. 이따금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유리창을 두드렸다네. 불빛에 홀려 날아와서는 머리를 수정 렌즈에 부딪치는 밤새들이었던 걸세. 강렬한 빛과 열을 내뿜는 등화 속에서 불꽃이 타는 소리, 그리고 데메트리우스 드 팔레에르(그리이스의 정치가)의 일생을 낭독하는 단조로운 음성……. 자정이 되자 등대지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 심지에 최후의 일별을 보냈다네. 그리고 우리는 내려왔네. 계단 중간에서 눈을 비비면서 올라오는 두 번째 근무의 친구를 만났지. 그는 수통과 블뤼타르크를 넘겨받았네. 우린 잠자리에 들기 전에 잠시 동안 쇠사슬이라든가, 커다란 추, 주석을 넣어두는 용기, 밧줄 등으로 가득찬 안방으로 들어갔네. 거기서 자그마한 램프의 불빛으로 등대지기는 언제나 펼쳐져 있는 커다란 등대일지에 기록을 했다네. ‘오전 영 시, 파도 극심, 폭풍, 먼 바다에 배가 보임.’
제 8편 세미양트 호의 최후
제 9편 세관원
제 10편 퀴퀴냥의 사제
제 11편 노인들
여보게,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네. 하루쯤 자네 풍찻간을 닫아걸고 곧 에이기에르로 가 주지 않겠나? 에이기에르란 자네 있는 데서 한 삼사십리 떨어진 커다란 시골 동네라네. 고작해야 소풍길이지. 도착하거든 수도 고아원을 찾게. 그 수도원의 바로 다음 집은 회색 덧문의 지붕이 야트막하고 뒤꼍에 작은 뜰이 있는 집이라네. 문을 노크할 필요도 없이 들어가게. 언제나 문은 열려 있으니깐. 들어가거들랑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 모두들! 저는 모리스의 친구예요!’하고 인사하게. 그러면 키가 작은 두 노인이, 아니 노인이라기보다, 아주 늙은 노인이 안락의자 속에서 양손을 내밀거야. 자네는 내 대신 자네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 하듯이 진심으로 그들을 안아주게. 그리고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들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아니 내 이야기만을 할 거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하더라도 웃지 말고 들어 주게. 웃으면 안돼! 그들은 나의 조부모야. 내가 있음으로 살아 계시는 분들이지. 게다가 십 년 동안이나 나를 못 만났다네.
그 분들은 고령이시지. 너무나 늙으셔서 나를 만나러 오기라도 한다면 도중에서 산산이 부서져 버릴 거란 말야.
두 시경에야 에이기에르에 도착했지. 모두들 들에 나간 모양으로 마을은 텅 비어 있었네.
나는 살금살금 그 문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네. 작은 방 안의 고요한 어스름 속에, 장밋빛으로 물든 광대뼈를 지니고 손가락 끝까지 주름진 호인형의 한 노인이 안락의자 깊숙이 앉아 있었지.
제 12편 산문의 발라드
제 13편 스갱 아저씨의 염소
제 14편 세 번의 독송 미사
손로를 넣은 칠면조가 두 마리나 된다구? “예, 사제님. 송로를 가득 넣은 아주 먹음직스런 칠면조가 두 마리예요. 제가 요리하는 걸 조금 도왔는데요, 고기를 굽는데 고기가 어찌나 팽팽한지 가죽이 터질 것만 같았어요.” “그게 사실이냐” 내가 송로를 얼마나 좋아한다구. 어서 법의를 다오, 가리구. 그래, 칠면조 고기 외에는 부엌에 다른 것은 없더냐? “ 닭이랑 들꿩 그리고 야생 닭들의 털을 뽑고 있었어요. 지금 밖에는 어딜 가나 새털 투성이예요. 그리고 연못에서는 뱀장어, 금잉어, 송어, 거기다가……. “그래, 송어는 얼마나 크던, 가리구?” “이만합니다. 사제님. 무지하게 크던데요” “눈에 선하구나. 쥬스병에 술은 담았니?” “예, 담았습니다, 사제님. 하지만 자정 미사 끝나신 후에 잡수실 술에 비하면 어림없지요. 사제님께서 성 안 식당에서 여러 가지 색으로 각자의 빛을 내면서 가득 담겨져 있는 술병들을 보셨다면…….또 은접시와 조각한 장식대에 놓여 있는 꽃병 속의 꽃과 쌍촛대! 이런 화려한 레베이요(크리스마스이브 자정에 먹는 식사)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실 겁니다. 거기다 후작님께서는 이웃 성주님들을 모두 초대하셨지요. 대법관과 공증인이 참석하지 않는다 해도 식탁에 나오실 분이 줄잡아 사십 명은 될거예요. 사제님, 사제님은 그분들 중에 한 분이시니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저는 그 먹음직스런 칠면조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도 그 요리에서 나는 송로 향기가 줄곧 저를 따라다니는군요. 음음. “자, 자, 그만하자. 너무 먹는 것만 밝히는 죄는 그만 짓자. 특히 오늘 같은 크리스마스 밤엔 말이다. 자, 자, 빨리 가서 촛불을 켜고 미사를 알리는 첫 종을 치고 오렴. 자정이 벌써 가까웠으니 늦지 않도록 하자.” “예, 알겠습니다.” 이것은 서기 16xx년의 크리스마스 ㅂ마에 오래 전부터 바르나비토 수도원장직에 있고 지금은 트랭코리아쥬의 성주들에게 지원을 받고 있는 발라게에르 사제와 그의 사동 가리구, 최소한 그가 사동 가리구라고 믿고 있는 사람과 주고받은 대화였다.
이날 밤 악마는 신부님을 교묘하게 꾀어 두려운 탐식 죄를 범하도록 가리구를 둥그스름하게 유별난 것 하나 없는 젊은 성직자로 변화시켰다.
제 15편 빅슈의 손가방
사월의 어느 아침, 파리를 떠나기 며칠 전이었네. 아침 식사를 하고 있을 때였지. 다 헤진 누더기 옷을 걸친 어떤 늙은이가 나를 찾아왔네. X자 모양으로 다리가 굽은 데다 흙투성이가 되어 허리가 꼬부라진 이 노인은 털을 뽑힌 학처럼 기다란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네. 바로 빅슈였네!
나는 몹시 놀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네. 내가 말을 하지 않자 불안스러웠던지 그가 물었네. “일을 하고 있었나?” “아냐, 빅슈. 식사를 하려던 중이었네. 같이 좀 들까?”
제 16편 시인 미스트랄
지난 일요일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는 포부우르 몽마르트 가에 있는 집에서 잠이 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비가 오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이었고 풍찻간은 음산했다. 이렇게 비가 오는 추운 날은 집안에서 지내기가 두려웠다. 문득 프레드릭 미스트랄 곁에서 잠깐 몸을 목이고 오자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 위대한 시인은 내 소나무 숲에서 약 삼ㅅ비리 떨어진 마얀느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다. 마음을 정하자 곧 출발 준비를 했다. 고추나무의 굵은 지팡이 하나와 한 권의 몽테뉴를 들고 그리고 비옷을 걸치고 떠났다. 들에는 한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었다. 가톨릭에 열렬한 어진 프로방스 주는 일요일에 흙을 쉬게 버려두었다. 농가에는 강아지만 남아 있고 모두 문이 닫혀 있었다. 가끔 물이 줄줄 흐르는 포장 씌운 짐마차가 지나갔고 낙엽 빛깔의 망토를 머리에 덮어 쓴 노파가 보였다. 청백의 스파르타직 안장 방석을 깔고 빨간 술장식에 은방울을 달아 근사하게 차린 노새가 미사로 향하는 농가의 선남선녀들을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달렸다. 저 멀리 안개 너머에는 운하에 떠 있는 고깃배와 그 위에 서서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의 모습이 보였다.
몽테뉴가 다음처럼 말할 수 있었던 건 정녕 미스트랄을 두고 한 말이리라. “세상이 조금도 알아주지 않는 예술에 그렇게도 고생하며 일을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알아주는 사람이 적어도 좋아. 아니, 한 사람이라도 좋아. 아니, 한 사람도 없어도 좋아 하고 대답한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말지어다.”
이제 시는 그만, 축제 구경을 가야지. 미스트랄은 노트를 덮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집을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큰 길에 나와 있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북풍이 하늘을 깨끗이 쓸어 놓았다. 이제야 하늘은 비에 젖은 붉은 지붕위에서 청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제 17편 황금두뇌를 가진 사나이
아주머니께서 보내 주신 편지를 읽고 저는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가 써 보낸 이야기의 성격이 지나치게 어두웠던 것에 대해 고의성이 전혀 없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즐겁고 명랑한 것, 그것도 미칠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리라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슬퍼할 까닭이 뭐가 있겠습니까? 저는 파리 사람을 향수에 젖게 하는 안개를 수 천리나 멀리하고, 사향과 포도주의 나라, 그 속에서도 가장 양지바른 언덕 위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집을 둘러싸고 있는 건 오직 음악과 찬란한 햇빛뿐입니다. 지금 밖에서는 방울새들의 관현악과 깨새들의 합창이 한창입니다. 아침이 되면 ‘구를리 구를리!’ 하고 도요새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 줍니다. 곧이어 한낮에는 매미의 노래가 이어지고 목동들이 부는 정겨운 피리 소리가 화음을 맞춰 줍니다. 저쪽 포도밭에서 들려오는 아리따운 갈색머리 아가씨들의 화사한 웃음소리도 정겹습니다. 정말이지 이곳에 계시면 짜증이나 우울증에 빠질 염려가 없을 만큼 좋은 곳이랍니다. 정말, 아주머니에게 장밋빛으로 가득찬 시와 몇 광주리라도 가득가득 담을 수 있는 재미있는 애인들의 이야기를 잔뜩 보내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아직도 파리와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매일 심지어 저의 소나무 숲 속에까지도 파리는 슬픈 눈물을 뿌리고 있습니다.
예전에 황금으로 된 두뇌를 지닌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완전히 황금으로 이루어진 두뇌였습니다. 그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의사들은 이 애가 살지 못할 거라고 했고 모두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의 생각과는 달리 아름다운 감람 수처럼 햇빛을 받으며 잘 자랐습니다.
누가 너를 유괴해 갈까 봐, 그런단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그 애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 비로소 부모님 들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무서운 선물에 관해 알려 주었습니다. 부모님들은 이제까지 키우느라고 무던히 애를 썼으니 그 은혜의 보답으로 지니고 있는 금덩이를 조금만이라도 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지요. 아들은 거침없이 그 자리에서 -어떤 방법으로 떼어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만- 바로 두개골에 있던 묵직한 황금 한 덩어리를, 실제는 꼭 호두알만 한 덩어리를 하나 떼어내서 어머니의 무릎 위에 보란 듯이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릿속에 가득히 있는 값비싼 황금에 현혹되어 자기의 능력이 세상에서 제일인 것처럼 도취된 그 아이는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뒤로 하고 자기가 지닌 보물을 낭비하러 정처 없이 방랑의 길을 떠났습니다. 아낌없이 황금을 뿌리며 제왕같이 사치스럽게 생활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그의 두뇌에는 황금이 무진장하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쓰는 만큼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점점 눈에서 총명한 빛이 사라져 가고, 뺨은 야위어 앙상하게 뼈가 드러나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얼마 후에 이 가엾은 사나이는 미모의 금발 소녀와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반은 새이고 나머지 반은 인형인 이 소녀의 손에서 황금의 돈은 솔솔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이게 무슨 슬픈 일입니까. 소녀가 한 마리의 나약한 새처럼 죽어 버린 겁니다. 지니고 있던 황금도 이제는 바닥이 다 보일 정도였습니다.
결국 사람들은 이 가엾은 이가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거리를 걸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백화점의 장식들에 불이 켜질 무렵 그는 커다란 진열장 앞에서 발을 멈추었습니다. 진열장 안에는 질서 있게 진열되어 있는 직물과 장식품들이 불빛을 받아 눈부시도록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진열장 앞에 서서 백조의 부드러운 털로 가장자리를 두른 파랑 구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이 구두를 사다 주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는 혼자 중얼거리며 빙긋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순간만은 그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구두를 사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가게 내실에 있던 여주인은 가게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를 들었습니다. 허겁지겁 달려와 보니 한 사니아기 계산대에 몸을 의지한 채 실신한 것처럼 괴로워하며 자기를 바라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자 겁에 질린 여주인은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백조의 털로 가장자리를 둘러 입힌 파란 구드를 한 손에 들고 피투성이가 된 다른 한쪽 손톱 끝엔 황금 찌꺼기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 피에 물든 손을 여주인에게 내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자기의 두뇌를 잘 활용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 제일 가치 없는 일을 위해 자기의 황금, 말하자면 그들의 정수를 마구 낭비하는 가련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하나하나가 모두 고통을 안겨 줍니다. 게다가 그들이 한 번 그 고통에 빠지기만 하면 쉽게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제 18편 귤
제 19편 두 여관
제 21편 고셰 신부님의 불로 장생수
[Review]
“나는 지금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수정같이 맑고 밝은 햇빛을 수없이 받으며 자네에게 편지를 쓰고 있네.”
짧은 문장 하나에 독자는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목가적 풍경을 떠올리게 된다. 바람, 해안, 잔잔한 산기슭에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들과 목동,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밭,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한 고흐의 수많은 그림이 떠오른다.
이 책은 도데가 20대 젊은 나이에 그의 고향인 프로방스의 풍물과 전설을 모아 쓴 단면들을 모은 첫 소설집으로 그의 대표작이 될 만큼 세상에서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바람둥이 아내 때문에 마을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마음 약한 사내를 그린 〈보케르의 합승 마차〉, 증기기관의 출현으로 망해 가는 풍차 방앗간을 처절하도록 지켜내는 이야기〈코르니유 영감의 비밀〉, 여인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살에 이르는 순정남의 이야기〈아를의 여인〉, 순진한 목동에게는 하늘의 별 만큼이나 먼 곳에 있는 주인집 딸 ‘스테파네트’와 우연한 기회에 찾아온 들판에서의 하룻밤 이야기 <별>, <황홀한 귀로>, <생기네르의 등대> <황금 뇌의 사내> 등 24편의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육지에 나갈 날을 ‘하루가 천 년처럼’ 기다리는 등대지기들의 단조로운 일상을 그린 <상기네에르의 등대>에서 오히려 그 고독을 대하는 자신의 심정을 극명하게 대조시킨다.
나는 물속으로 곤두박질하는 갈매기이자. 햇빛을 받아 두 파도 사이에 떠도는 물거품이며, 멀어져 가는 저 우편배의 새하얀 연기요, 빨간 돛을 단 산호선이며, 깨어지는 물의 진주요, 안개의 한 조각이며, 나 아닌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었다네. 이 섬에서 난 얼마나 몰아지경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걸까?”
우리는 한 가지에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사실 그 시간은 짧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들이 마치 두 개의 상반된 긍정과 부정의 극으로 나뉘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소도 그와 같아서 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바람이 있다. 항상 희망의 장소를 찾고 있지만 정작 그곳에서 바라던 희망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세상에는 평화로 가득 찬 풍차 방앗간과 같은 장소가 있는가 하면 현란한 네온사인과 굴곡진 감정을 느끼는 도시의 빌딩 숲이 있다.
<알퐁스 도데>는 그곳에서 오늘도 불안과 슬픔, 좌절과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곳에 있는 도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네는 심정으로 편지를 보내고 있다. 감성을 자극하는 특유의 예리함, 섬세하고, 세련되고, 미묘한 재치는 책을 읽는 독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는다. 침대 곁에 두고 잠 안 오는 밤 하나씩 읽기에 좋은 책이다.
“풍찻간은 무척 조용하고 평화롭네. 이곳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축복의 땅일세. 신문이나 거리의 마차 안개로부터 천 리나 떨어져 있는 포근하고 향기 가득한 시골이라네. 나의 주위엔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네. 내가 이 곳에 온지는 이제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네. 그렇지만 내 머릿속은 벌써 신기함과 즐거움이 가득 차 넘칠 지경이지.” (황홀한 귀로)
버들 광주리 틈에 꼿꼿이 몸을 세우고 있는 그녀는 산바람과 소나기가 그친 뒤의 시원한 공기로 뺨이 말 그대로 장미 빛 이었다. 아름다운 스테파네트는 노새 등에서 내리면서 머슴아이는 앓아누웠고, 노라이드 아주머니는 휴가를 얻어 아들 집에 갔다고 내게 알려 주었다. (별)
“안녕. 잘 가세요, 아가씨. 결국 아가씨는 빈 광주리를 가지고 떠났다. 그녀가 비탈진 길로 사라졌을 때, 노새 발굽에 채여 때굴때굴 구르는 조약돌이 하나씩 하나씩 나의 가슴에 떨어지는 것 같았다.“ (별)
“어머나, 그럼 별들도 결혼을 하나요? 그럼요, 아가씨. 그리고 별들의 결혼에 대해 설명하고 있을 때, 나는 무엇인가 부드럽고 싱그러운 것이 어깨 위에 가볍게 얹히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머리는 잠이 들어 축 늘어진 채 내 어깨에 얹혔고 꽃 리본과 레이스 그리고 물결치는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스쳤다. 그녀는 하늘의 별들이 솟아오르는 아침빛으로 지워져 버릴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나는 마음이 약간 두근거렸지만, 아름다운 생각만을 보내준 청명한 밤의 신성한 보호를 받으며 잠들어 있는 아가씨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 주위에는 별들이 양떼처럼 말없이 조용한 운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별들 가운데서 가장 곱고 가장 빛나는 별이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 위에서 잠들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별)
“미스트랄이나 트라몽탄느가 그다지 심하지 않을 때는 갈매기와 개똥지빠귀, 그리고 제비들을 벗 삼아 수면에 가지런히 놓인 두 바위틈에 앉아 있었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걸 잊고 나른하게 하루해가 지도록 앉아 있었다네. 자네도 잘 알고 있을 거네. 영혼의 아름다운 도취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꿈을 꾸는 것도 아닌 상태를. 몸과 마음이 송두리째 자기 자신을 빠져나와 날아올랐다가 산산이 흩어지는 느낌이지.”(상기네에르의 등대 )
“나는 불빛 바로 밑으로 가서 잠이 들까 두려워 커다랗게 소리 내며 불뤼타르크 영웅전(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읽고 있는 등대지기 곁에 앉았다네. 창밖은 암흑의 심연, 유리벽을 둘러싼 자그마한 발코니 위에 바람이 미친 듯이 소리치며 날뛰고 있었지. 등대가 삐걱대고 바다는 신음했네. 섬 끝머리의 암초에 와 부딪치는 노도가 포성처럼 우렁차게 울렸다네. 이따금 보이지 않는 손가락이 유리창을 두드렸다네. 불빛에 홀려 날아와서는 머리를 수정 렌즈에 부딪치는 밤새들이었던 걸세.” (상기네에르의 등대 )
“나직이 수면 위에 기운 태양은 수평선 전체를 뒤로 끌면서 점점 빠른 속도로 바다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네. 바람이 차가와지고 섬은 보랏빛으로 노을 지고 있었지. 가까운 하늘에서 커다란 새가 무겁게 날개 치며 지나갔네. 집으로 돌아가는 제노아식 탑의 그 독수리였던 걸세. 조금씩 바다 안개가 일었지. 그러면 섬 주위를 철썩이는 파도의 포말이 만드는 뽀얀 가장자리밖엔 보이지 않았다네.”( 상기네에르의 등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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