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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쪽으로 계령산(桂嶺山)과 가내봉(佳來峯)이 마을을 에워싸고, 북서쪽으로 단장천이 휘돌아 나가는 곳에 독뫼인 경주산(競珠山)(216m)을 마주 바라보고 있는 아늑한 고촌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밀양도호부 관내에 도기소(陶器所) 한 군데가 있는데 그 소재지가 부동(府東)의 단장리라 하였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이존록(彛尊錄)'에는 세종 때 대마도 정벌을 하다가 전사한 그의 외조부 박홍신(朴弘信)의 유의(遺衣)를 묻은 가묘(假墓)가 단장리에 있다고 했다. 또 조선조 전기의 인물인 진사 변홍민(卞弘民)이 단봉정(丹鳳亭)이란 정자를 짓고 이 마을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단장리란 마을 이름은 조선 초기부터 있어 온 것임을 알 수 있고, 단봉정(丹鳳亭)에서 유래한 단정(丹亭)이란 다른 이름도 전해온다. 단장(丹墻) 또는 단전(丹田)이란 지명 표기가 있으나 이는 단장(丹場), 단정(丹亭)에서 음을 취한 것이며, 단구(丹邱, 丹丘)또는 조양(朝陽)이란 지명은 신선이 살고 봉황이 깃 던 마을이라는 뜻으로 아름답게 붙인 것이다. 1890년 경에 농은(農隱) 이종곤(李鍾崑)이 입촌(入村)하여 단구정사(丹丘精舍)를 짓고 거주지를 삼았으며, 뒤이어 금주(錦洲) 허채(許埰), 포헌(苞軒) 허대(許垈) 형제가 金海에서 이주하여 주산서당(珠山書堂)을 세워 후진을 敎育하기도 했다. 또 같은 시기에 주운 조훈(趙勳), 동추(同樞) 김만주(金萬胄) 등도 정착함으로서 마을은 여주(驪州) 이씨, 김해 허씨, 함안(咸安) 조씨, 김해 김씨. 밀성 박씨 등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다. 이 마을의 동쪽 산 너머엔 태용리가 이웃해 있고, 북쪽과 서쪽에는 단장천, 금수(錦水)를 사이에 두고 산외면과 면계(面界)를 이루었으며, 남쪽으로는 미촌리(美村里)와 경계가 지어졌다. 1906년 이래 단장면 사무소의 소재지로서 면행정(面行政)의 중심지가 되었으나 그 후에 사무소를 태용리(台龍里)로 이전한 뒤에는 그 자리를 확장하여 홍제중학교를 세워 지금에 이르렀다. 1920년 경에 우강(宇岡) 이병래(李炳來), 계동(桂東) 이병년(李炳年), 중와(中窩) 허석, 하인(何人) 허연(許鉛), 김문수(金文洙) 등이 동민을 규합하여 세운 조양서당(朝陽書堂)이 있었고, 참봉(參奉) 안홍원(安弘遠)이 금수(錦水)의 남쪽에 금수정(錦水亭)을 세우기도 했으나 지금은 모두 그 자취만 남았다.
(1) 단장본동(丹場本洞)(,단정(丹亭))
단장리는 본동과 창마(倉村)로 나누어져 있고, 본동은 다시 큰골(大谷), 가라골(정谷), 아래각단(下村) 등 세 땀으로 구성되어 있다.
■ 큰골(大谷)
단장 본동의 동남쪽에 있는 땀의 이름이다. 골짜기가 깊고 넓다 하여 큰골이라 한다.
■ 벼락디미(雷岩)
큰골 앞 개울 가에 있는 바위로 벼락 맞은 바위이다.
■ 구무방우골(穴岩谷)
큰골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으로 구멍이 뚫린 바위가 그 곳에 있다.
■ 삼시랑골짝(産神谷)
큰골 동남쪽에 있는 삼시랑바위의 골짜기 이름이다. 이 바위에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 하여 영험한 곳으로 생각했다. 삼시랑은 아이를 점지해 주는 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 호박방우(臼岩)
큰골 동남쪽 골짜기에 있는 바위로 호박과 같이 생겼다.
■ 소나무징이(松亭)
큰골 다원간 아래쪽에 있는 노송나무 정자껄이다. 그 곳에 있는 옹달샘은 가뭄에도 마르는 일이 없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 선방우골(立岩嶝)
큰골에 있는 구무방우 동남쪽에 우뚝 선 바위 아래의 골짜기를 말한다. 선방우가 있는 골짜기이다.
■ 아래서나무징이
아래서나무징이 동남쪽에 있는 고개 이름이다. 소나무 정자가 있어 생긴 지명이다.
■ 위서나무징이
아래서나무징이 동남쪽에 있는 고개이름이다. 소나무 정자가 있어 생긴 지명이다.
■ 왕방웃등(王岩嶝)
큰골 선방우등 서쪽에 있는 등성이를 말한다. 두 개의 둥글고 큰 바위가 있어 왕바우라 한다.
■ 살맷등
큰골 선방우 남쪽 안법리로 넘어가는 고개 등성이다. 싸리나무가 무성한 산등성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위쪽에 있는 것을 웃살맷등, 아래쪽에 있는 것을 아래살맷등이라 한다.
■ 가라골(험곡, 가래곡(佳來谷), 정곡면곡)
본동의 북쪽 냇가에 있는 마을인데 가래봉 아래쪽에 있는 골짜기라 하여 얻어진 지명이다.또 가락(전정자)처럼 가늘고 기다란 골짜기란 뜻에서 가락골이라고도 하며, 옛날 이 냇가에 걸인들의 수용소가 있었다 하여 갈(면)골이 가라골로 변했다고도 한다.
■ 가래봉(험봉, 가래봉, 가라봉)
가라골 남쪽에 우쭉 솟은 봉우리이다. 산 모양이 가래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안법리와 태용리의 경계 지점에 있다.
■ 도걸뱅이 집터(도걸가지(都乞家址))
가라골 냇가에 있는 걸인 두목의 집터이다. 구한말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 이 마을 부농인 농은(農隱) 이공(李公)이 인근 마을의 굶주리는 사람을 모아 자기의 창고를 열고 이곳
에서 수 년 동안 죽을 끓여 구제 활동을 했다. 이 소문을 듣고 원근의 걸인들이 모여들자 그들 가운데서 두목을 뽑아 질서를 잡도록 했는데 이 집터는 그때 도걸뱅이의 지휘소였다고 한다.
■ 미안갓(묘내림(墓內林))
큰골 큰방웃등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묘 안쪽에 있는 밀림갓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선터비알(서듯비알.仙址)
가라골 동쪽에 있는 산비탈의 이름으로 이곳에 명당자리 곧 선터(仙墟)가 있다하여 생긴 지명이다.
■ 봉답(奉畓)
가라골 뒤쪽에 있는 들판의 이름으로 천수봉답, 곧 빗물을 받들어 모아 논농사를 짓는다 하여 봉답들이라고 한다. 위쪽에 있는 것을 웃봉답, 아래쪽에 있는 것을 아래봉답이라 하였다.
■ 챙이들겅(箕谷)
큰골 벼락드미 위쪽에 있는 바위 지대이다. 지형이 챙이(箕)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 주산정(珠山亭)
단장 본동의 앞산인 경주산(競珠山) 북쪽 기슭에 자리 잡은 김해 허씨의 정자이다. 이 마을에 입촌한 금주(錦洲) 허공(許供)이 제자들을 모아 강학(講學)하던 곳이라 하여 주산서당이라고도 하였다. 1898년에 그 아들인 중와(中窩) 허공(許公)이 지었다.
■ 정질미(경주산(競珠山). 慶州山)
단장 본동 북쪽에 있는 독산로 높이 216m이다. 경주산의 음이 바뀌어 정질미가 되었는데 경주(競珠)는 구슬을 다투어 뺏는다는 뜻이다. 이 독산를 둘러싸고 있는 산은 용암산(龍岩山), 또는 용회산(龍回山) 등 마치 용처럼 생긴 여섯 개의 봉우리가 구슬처럼 동그랗게 앉은 이 산을 다투어 빼앗을 것 같은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 얽힌 전설로는 아득한 옛날에 옥황상제의 명령을 받은 마고(麻姑) 할미가 이 산을 경주에 갖다 놓기 위하여 짊어지고 가다가 등글매의 밧줄이 끊어져 이 자리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경주산(慶州山) 또는 정질뫼, 등글메(山)라는 지명이 생겼다.
■ 등글매 양달
경주산 남쪽 비탈을 말한다. 낮 동안은 늘 햇빛이 있으므로 붙인 지명이다.
■ 판치양달
경주산 동남쪽에 있는 비탈의 이름이다. 햇빛이 늘 있기 때문에 목화, 곡식 등을 건조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판치는 판자로 된 도수로(導水路)가 있었다 하여 생겼다,
■ 개방우(犬岩)
주산정 동쪽에 있는 바위로 개가 웅크리고 있는 모양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잡앞들(家前坪)
단장 본동의 앞들인데 경주산 서남쪽에 있다. 단장천과 금수가 연결되는 강가의 들판으로 들 가운데 정자 마루껄과 지석묘가 있다.
■ 음달산(陰達山)
단장 본동 남쪽에 있는 산이다.
■ 절터골(寺址谷)
음달산 골짜기에 있다. 옛날 암자가 있었던 자리라 하여 지명이 생겼다.
■ 지나리끝(蜈蚣尾)
단장 본동 서쪽끝에 있는 산비탈 이름이다. 음달산에서 뻗어 내려온 지형이 마치 지네의 꼬리 부분과 같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또 쥐가 내려오는 형상과 같다하여 쥐내리끝이라고도 한다.
■ 땅껄(堂街)
단장 본동과 집 앞들 사이에 있는 들 이름이다. 동신(洞神)을 모신 당집과 당나무가 있어 생긴 지명이다.
■ 서당골(書堂谷)
원래 이 곳은 조선조 초기에 진사 변홍민(卞弘民)이 살던 집터였으나, 1920년경에 동민들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하여 조양서당(朝陽書堂)을 세웠다. 해방 직후 서당은 폐쇠되었고 건물은 마을 가운데로 옮겨져 현재 노인정으로 사용하고 있다. 조양재(朝陽齋)라는 현판이 노인정에 걸려 있고 서당계(書堂契)가 존속되고 있다. 음달산 아래쪽에 계곡을 끼고 있어 경치도 좋은 곳이다.
■ 다원갓(茶院林)
큰골 동쪽 솔듯비알 아래쪽에 있는 산을 가리킨다. 중간 산봉우리에 다원(산외면 다죽리)에 사는 밀성 손씨의 묘가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솔듯비알
단장리의 마을 뒤 다원간 위쪽에 있는 산비탈의 지명인데 마을의 주산이라 할 수 있다. 산정(山頂)에까지 소나무가 울창하고 여주 이씨의 집단 묘역이 있어 솔듯비알미라고도
한다.
■ 꼬깨들(고갯들. 치평(峙坪))
단장 본동에서 창마로 넘어가는 고개를 중심으로 펼쳐진 들판이다. 꼬깨들은 고갯들이 변하여 생긴 지명이다.
■ 농방웃등(농암등(籠岩嶝))
판치양달 아래쪽에 있는 등성이다. 농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등성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창마(倉村)
단장 본동에서 태용리 용회동으로 가는 길목 왼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조선조 후기 이곳에 밀양부의 외동창(外東倉)을 두었다 하여 창마(倉村)가 되었다. 그 후 창고를 산외면
금곡리로 이전했으므로 구동창(舊東倉)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한 때는 단장 본동과 아울러 법정리의 이름을 구동창리(舊東倉里)라고도 하였다. 해방 전후에는 불과 2, 3호의 주민이 마을을 지켰으나 지금은 수십 호의 민가가 들어서 있다.
■ 디밋들(뒤밑들, 후하평(後下坪))
창마 동쪽 강가에 펼쳐진 들판이다. 경주산 뒤편 아래쪽 들이라 하여 뒤밑들이었는데 디밋들로 변하였다.
■ 선숲(단장숲, 선수(仙藪))
창마에서 용회동으로 건너가는 단장천 남쪽 제방에 조성된 오래된 숲이다. 부엉디미에서 사당소까지 약 1000m에 이르는 긴 자연림으로 수백 년 묵은 잡목이 울창한 곳이다. 숲 한가운데로 관개용 수로가 푸르게 흘러 봄, 여름, 가을에는 동민들의 휴양처로서도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신선들이 소요하는 숲이라 하여 선숲이란 지명이 생겼는데 근래에는 관광지로서도 각광을 받아 단장숲으로도 알려져 있다.
■ 부엉디미(휴애, 부흥애(富興崖))
창마에서 태용리 연경으로 돌아나가는 단장천 남쪽 강가에 깎아지른 바위 절벽을 말한다. 그 곳에 부엉이가 서息하고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인데 경치가 매우 좋다. 절벽아래에는 깊이 물이 감돌아 흘러 부엉디미소라고 하며 그 산 밑 모롱이를 칭디미밑이라고 한다.
■ 우엣골(욋골, 瓦谷)
선듯비알 동북쪽 부엉디미 반대편 산비탈 골짜기를 말한다. 옛날에 기와를 굽던 자리라 하여 욋골(瓦谷)이라 했으나 음이 변하여 우엣골이라 한다.
■ 섬들(島坪)
창마의 서북쪽 경주산 기슭에 있는 들 이름이다. 동, 북, 서쪽 삼면(三面)은 단장천에 둘러싸이고, 남쪽은 경주산 기슭을 흐르는 개울물에 둘러 싸여 마치 섬처럼 고립된 들판이라는 뜻으로 생긴 지명이다. 이 마을에서는 가장 넓고 비옥한 농토이다.
■ 사당못(祠堂池)
섬들에 연결된 저수지로 주산정(珠山亭)에서 조성하였다. 주산서당(珠山書堂)에 있는 허씨의 사당 앞에 있는 못이라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마름모풀과 연꽃이 유명하다.
■ 홈굴다리
단장리에서 산외면 금곡리를 건너가는 단장천에 가설했던 잠수교를 말한다. 이 곳의 강폭이 넓고 수량이 많아 징검다리가 빈번히 떠내려가므로 근대에 잠수교를 만들어 다리 밑 홈을 통하여 물이 지나가도록 했다. 지금도 홈굴 다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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