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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5 일요 가족법회 지안큰스님 법문
계묘년 설을 쇠고 오늘 처음으로 일요 가족법회를 여는 날입니다. 마침 정월대보름날이기도 합니다. 기도날로 정해진 그런 날이기도 합니다.
항상 우리가 절에 오면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내가 今生(금생) 한 생 동안 무엇을 원하면서 무엇을 이룰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내 주변에 맺어진 인연의 선을 탄다고 할까요, 그런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마음을 일반적으로 ‘비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비는 것은 사람마다 구체적인 것은 다 다르지만, ‘비는 마음’으로 우리가 더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설을 쇠면 나이가 한 살 올라가는데 나이를 먹는 것도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노년에 이르러서는 흔히 ‘늙어 간다’고 말하지만 늙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름답게 말을 바꾸어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楞嚴經(능엄경)』 2권에 나오는 부처님과 바사닉왕의 대화 장면이 나옵니다. 바사닉왕은 부처님 당시의 코살라국의 왕이었습니다. 왕의 범어 이름은 프라세나짙(Prasenajit)입니다. 부처님과 묘한 인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나이와 생일이 같았으며 부처님이 성도하시던 해에 이 왕은 왕위에 올랐다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또 코삼비국의 우전왕과 마찬가지로 바사닉왕도 부처님이 마야부인을 위해 설법하러 도솔천에 올라가 지상에 없을 적에 최초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하지요. 우전왕은 전단 나무로 불상을 만들고 바사닉왕은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바사닉왕이 부처님께 여쭙니다.
“덧없이 변하는 이 몸이 점점 늙어감으로 이 늙음이 쉬지 않아 반드시 죽을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압니다.”
나이가 들면 늙어가는 것이고 이것이 변화된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러 하외이다. 그러나 왕의 몸이 죽을 때에 왕의 몸에 죽지 않는 것이 있는 줄 압니까?”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왕의 나이 몇 살 적에 갠지스강물을 처음 보았습니까?”
“제가 세 살 때 어머니가 저를 데리고 기바천(耆婆天) 사당(祠堂)에 갈 때 처음 보았습니다.”
“세 살 때 보던 강물, 그 뒤 열 살, 스무 살, 그리고 지금 예순두 살에 보는 강물은 어떠합니까?”
“세 살 때와 같아 지금 예순두 살이 되어도 강물을 보는 것은 다름이 없다고 생각됩니다.”
“왕의 몸 늙어와 얼굴에 주름이 생겼지만, 강물을 보는 것도 늙어 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변하는 것은 없어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가리(末伽梨) 등이 말하는 죽은 후에 온전히 없어져 아무것도 없다는 말에 현혹되어 있습니까?”
왕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몸이 죽은 후에도 이 생(生)을 버리고 다른 생(生)에 태어나는 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六塵(육진)은 수시로 변해도 정신적 상태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정신적 심리상태
‘見(견)’ 한 글자로 표현 六根(육근) 중 眼根(안근)이 제일 먼저 나오니까 먼저 보는 것을 예로 드신 겁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마음(心體)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佛性(불성)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의 마음 - 佛性(불성)을 가장 중요시합니다. 가령 『涅槃經(열반경)』에도 佛性(불성) 이야기를 많이 해놓았고 다른 대승경전도 모두 佛性(불성)을 이야기해 놓았습니다. 『楞嚴經(능엄경)』에도 ‘如來藏了眞如性(여래장요진여성)’이라 하는데 길게 이름을 붙였으나 佛性(불성)을 말하는 것입니다.이 佛性(불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배가 고픈 것도, 화장실 가고 싶은 것도 모두 몸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변하는 몸 중심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몸 중심이 아닌 佛性(불성), 즉 마음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心體(심체)라 하여 성품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몸은 나이가 들지만 마음은 나이가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상의 만물은 전부 나이를 가집니다. 땅에 있는 나무들도 나이가 있고, 건물도 나이가 있습니다. 사람 뿐 아니라 동물들도 나이가 있습니다. 진안 천황사의 복길이가 12살로 사람 나이로 치면 90이 넘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가면 앞발을 세우고 포옹하듯이 저를 반기더니 요즘은 힘이 드니까 앞발을 조금 들다 말아서 안타깝습니다. 이처럼 천지 만물은 나이가 듭니다. 그러나 하늘은 나이가 들지 않습니다. 마음은 나이가 들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서산대사의 오도송(悟道頌)에 ‘머리털은 희어지지만 마음은 희어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금강산에서 내려와 고향인 남원에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다 지리산 아래 어느 마을을 걸어서 지나다가 – 율장에는 스님들은 말이나 소를 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지었다는 시입니다. 꼭 참선을 해야 오도(悟道)를 하는 것이 아니고 경전을 참구하다가도 길을 걸어가다가도 이처럼 한순간에 한 생각이 툭 터자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때가 자기 자신의 의식이 달라지면서 변화가 오는 때입니다. 서산대사는 닭 우는 소리를 듣고 마음이 시원해지면서 깨달으신 것입니다.
髮白心非白(발백심비백)
머리털은 희어지지만 마음은 희어지지 않는다고
古人曾漏洩(고인증누설)
옛사람들이 일찍이 말해 왔는데
今聞一聲鷄(금문일성계)
지금 닭 우는 소리 한 번 들고
丈夫能事畢(장부능사필)
장부가 해야 할 일 마쳐버렸네
髮白心非白(발백심비백)
몸은 늙으나(髮白)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땅 위에 있는 만물은 연륜이 있지만, 허공인 하늘은 연륜이 없는 것처럼 몸은 늙지만 마음은 늙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古人曾漏洩(고인증누설)
古人은 수행하여 깨친 사람, 즉 道人(도인)을 말합니다. 옛사람들이 일찍이 누설 – 말해오던 것 – 을 들었는데 라는 뜻입니다.
今聞一聲鷄(금문일성계)
丈夫能事畢(장부능필사)
장부가 능히 해야할 일은 내 공부입니다.
몸은 늙으나 마음을 늙지 않는다는 예 사람들의 말을 전해듣고 한 생각이 터졌다는 것입니다. 많이 인용하는 시입니다. 항상 불변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體用(체용)이 있는데 體(체)는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고, 用(용)은 변하는 것을 마합니다. 예를 들면 청산은 움직이지 않는 것, 즉 변하지 않는 것이고, 구름은 떠돌기도 하고 자취를 감추기도 하는 것이니 변하는 것입니다. 不變(불변)을 體(체)라 하고, 用(용)은 작용이라는 뜻으로 隨緣(수연 : 인연을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體(체)와 用(용)은 살펴 공부해야 할 두 가지 대목입니다. 비슷한 말로 理(리)와 事(사)가 있습니다.
한 생 살아가면서 숱한 삶의 애로를 겪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게 내 삶 속에 있습니다. 그냥 그대로 편안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있는 것, 이것이 바로 涅槃(열반) 또는 寂滅(적멸)·解脫(해탈)입니다. 인생은 도를 닦으면서 볼 때 성공도 없는 것이고, 실패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은 철학자들이 한 말 중에도 나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업을 하다가 돈을 많이 벌면 세속적으로 ‘성공했다’고 하고, 부도가 나서 회사가 망하면 ‘실패했다’고 세속적으로 말합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나 사회적인 활동하는 분야에서 잘 되고 못되는 상반된 경우가 나타나기 때문에 ‘성공’ 또는 ‘실패’라는 말을 쓰지만 인생 자체에는 성공도 실패도 없는 것입니다. 본래는 이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중국은 예전에 큰스님 호에 산이름을 넣어 많이 지었습니다. 예를 들면 天台智顗(천태지의) 선사도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지었고 霍山景通(곽산경통) 선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스님께서 아무렇지도 않게 임종하신 분입니다
우리는 임종 시에도 아무렇지도 않게 임종을 맞아야 합니다. 친구가 부인과 사별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 부인이 숨을 거둘 때 “나 가요. 잘 있으소”라고 하여 친구가 “그래, 알았다. 잘 가라”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임종을 맞이해야 합니다. 이 친구가 불교 비슷한 것을 가르치는 어느 처사님 밑에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렇게 부인의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한 생각이 문제입니다. 한 생각 속 貪瞋痴(탐진치 -욕심·성냄·어리석음)가 들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번뇌의 근본이 됩니다. 그런데 이 貪瞋痴(탐진치)가 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결석이 있어서 수술했는데 결석을 깨는 데 약 40분이 걸렸는데요, 이어폰을 했는데에도 그 소리가 마치 바위가 깨지는 소리 같았습니다. 이와같이 결석을 깨낼 때처럼 내 생각 속의 貪瞋痴(탐진치)도 깨내어야 합니다. 어는 정도 극복된 경계가 있는데 그런데 우리는 貪瞋痴(탐진치)를 가지고 삽니다. 그러므로 인연을 따르는 隨緣(수연)에만 신경을 쓰면서 본체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楞嚴經(능엄경)』 <序文(서문)> ‘像季已還에 道術이 旣裂(상계이선 도술 기열)’이란 말이 나옵니다. ‘말세가 되니 道(도)와 術(술)이 분열되어 서로 다툰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학문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고, 수행상으로도 설명할 수 있는데 근본인 道(도)를 등지고 技術(기술)만 익히려 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道(도)와 術(술)의 balance(밸런스 조화)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禪宗(선종)과 敎宗(교종)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道術(도술)이 balance(밸런스)가 맞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산스님의 悟道頌(오도송)에 나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질 못하여 내 몸과 마음을 압박하듯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생을 하게되고 걱정근심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항상 변하지 않는 내 마음 자리인 自性(자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금년 한 해를 새로 맞이하여 원력을 키우면서 인생을 성숙시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임종을 아름답게 맞이하자는 이야기에 덧붙여 이야기하겠습니다. 霍山景通(곽산경통)선사는 앙산혜적 스님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가장 아름답게 죽은 스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霍山景通(곽산경통) 선사가 산 밑으로 만행을 가는데 장작더미가 쌓여있었습니다. 들판에 마른 나무를 쌓아 놓고 스스로 불을 붙여 불 속에 들어가 앉아 자신의 몸을 태워 입적(入寂)을 하였습니다. 그런 경지가 바로 貪瞋痴(탐진치)를 깨 낸 경지라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저는 은사스님으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그중에 하나가 은사스님께서 해방되기 전 북한에서 도반 두 분과 같이 공부를 하시다가 은사스님께서는 해방 후 통도사로 오시고 20년 만에 도반 한 분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은사스님께서 나머지 도반 한 분의 안부를 묻자 “죽었을 것 같다.”고 하더랍니다. 스님이 돌아가시면 어디든 알려지는 세상인데 그런 소식이 한 번도 없었기에 은사스님께서 “스님이 돌아가셨으면 세상에 알려졌을텐데 전혀 그런 소식이 없었는데요?”라 하시자 은사스님과 만난 도반스님 이야기가 “그 분이 평소에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방법이 없을까?’라고 하더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방법을 알아 냈다.’면서 ‘걸망(스님들이 메고 다니는 배낭 비슷한 가방)에 돌을 잔뜩 넣고 한밤중에 강물 위의 다리 중간에서 뛰어내리면 된다’고 하시었습니다. 그 뒤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이 든 것입니다.”라고 하시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사를 추월한 경지가 있습니다.
또 40여 년 전, 범어사의 한 스님도 금정산에 오르시어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극단적이고 특이한 경우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임종을 초연하게 맞이한 경우들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임종을 맞이한 경우입니다.
인생 문제를 너무 힘들게 고민하는 쪽으로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한 생각 떼어내어 버리면 명예도, 권력도, 많은 돈도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새해부터는 마음을 밝게 가져야 합니다. 밝은 마음이 되면 운이 좋아집니다. 밝게 살면 선택이 잘 되고, 선택이 잘 되면 운이 좋아집니다. 결국 운이 좋다는 말은 나의 선택이 잘되었다는 말입니다. 올해 계묘년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좀더 신심을 고취시키고 원력을 키워 가면서 한 해를 잘 살아갑시다.
반야암 매화가 그 그윽한 향내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제 사진으로 담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첫댓글 _()()()_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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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 보는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나무아미타불_()()()_
고맙습니다 _()_
"몸 늙어와 얼굴에 주름이 생겼지만, 강물을 보는 것도 늙어 왔습니까"
멋진 문답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도 저와 같겠지요.
“나 가요. 잘 있으소”, 친구가 “그래, 알았다. 잘 가라”
언제나 여여하게 평상심으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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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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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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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