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과 행복 / 손봉호(서울대 명예교수)
우리나라는 경제, 민주주의, 기술, 예술, 스포츠 등 중요한 분야들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선진국들 가운데서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행복은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추구하고, 그것도 최후 목적으로서 추구한다. 그런데 우리가 불행하다면 그동안 우리가 그렇게 애를 써서 성취한 모든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절대 빈곤에서 탈출하기만 하면, 민주화만 되면, 과학기술만 발전하면, 문화 선진국이 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상당할 정도로 성취했는데도 아직도 불행하고, 오히려 전보다 더 불행하다고 느낀다. 아직도 빈부격차만 좀 줄어지면, 사회정의가 조금 더 잘 실현되면, 통일만 되면, 정치만 정상화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은데 과연 그럴까?
국내, 국외 한국 전문가들 상당수는 한국인의 지나친 경쟁심이 한국인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불가능한 나라 한국 (Korea: the Impossible Country)』(2018)이란 책을 쓴 튜더(Daniel Tuder)는 자기가 아는 한 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경쟁심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거기다가 퓨 연구소(Pew Research Center)의 얼마 전 조사에 의하면, 모든 선진국 국민들은 예외 없이 가정을 행복의 바탕으로 보는 반면, 한국인만 물질적 안정 (material well-being)이 삶에 의미를 제공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즉 경제적 부를 행복의 조건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가정의 화목은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반면에 경제력은 가장 확실한 경쟁거리다. 그러므로 물질적 풍요에 대한 집착과 높은 경쟁심은 서로 손을 잡고 우리를 이렇게 불행하도록 만든다. 제도나 물질적 조건이 아니라 한국인이 서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면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불행하면 선진국이 될 이유가 무엇인가? 물론 필요하면 제도도 바꾸고 경제력도 키워야 하지만, 서로에 대한 태도, 인간관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없다.
인간관계를 조정하기 위해서 인류가 개발해서 이용하는 제도는 법률, 윤리, 예의란 당위다. 법은 공권력으로 강제되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데 우리의 법치는 일부 정치인들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후진적이지 않고,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세계의 부러움을 받고 있다. 부패도 많이 줄어졌고 윤리 수준도 그렇게 낮지는 않다. 휴대전화나 노트북을 카페 테이블이나 지하철에 놓아두어도 훔쳐 가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요즘 한국의 정직성이 세계의 칭찬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뒤떨어져 있는 것은 윤리와 예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교양 수준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 여의도에서 연출된 불꽃놀이는 세계적 수준이어서 수많은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부산의 불꽃놀이는 일본 대마도에서도 볼 수 있어서 그곳 주민들은 해마다 바다 건너 벌어지는 연례행사를 기다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장관에 감탄한 구경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는 불꽃 한 조각도 보지 못한 다른 시민들이 바친 세금까지 축내고 수많은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선진국들 가운데서 우리만큼 쓰레기나 담배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는 나라는 들어보지 못했다. 바로 이웃에 있는 일본에는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부들이 주어서 자기 집으로 가져간다고 한다.
그동안 교육기관이나 시민단체들은 준법이나 윤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교양에 대해서는 대부분 무관심했다. 심지어 교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많이 오해하는 것 같다. "학문, 지식, 사회생활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품위 또는 문화에 대한 지식"이라고 국어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베를린이 독일의 수도란 것을 모르면 교양인이 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양인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교양과목"이란 것이 그런 오해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지식이나 상식이 교양의 필수조건이라면, 세계에서 평균 학력이 가장 높은 한국이 가장 교양 있는 나라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The Economist》에 의하면 국회의원들 가운데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의 비율도 한국이 제일 높다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 국회의원의 교양 수준이 세계에서 가장 높아야 마땅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 국민의 교양 수준이 그만큼 높으며, 우리 의원들의 언행이 과연 그만큼 점잖고 고상한가? 교육 수준이 그렇게 높은 집단이 오히려 국민의 교양 수준을 떨어트리는 주범으로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법률, 윤리와 함께 교양도 인간에게만 가능하고 인간을 짐승과 다르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교양을 뜻하는 영어의 'culture'나 독일어의 'Bildung'도 짐승 세계의 약육강식 법칙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 세련된 인간의 모습을 얻게 되는 것을 함축한다. 물론 지식이 교양에 도움을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돌아갈 연구비를 착취하는 교수는 지식수준은 높으나 교양 없는 야만인이고, 길거리에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 가운데도 고학력자들이 없지 않겠지만 교양 없기는 마찬가지다. 교양이란 다른 사람, 특히 약한 사람을 배려하고 그에게 직접, 간접으로 해를 끼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행위를 삼가는 인품을 뜻한다.
"서로의 삶을 좀 덜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19세기 영국 소설가 George Eliot) 다른 사람의 삶을 조금이라도 덜 어렵게 만드는 것이 습관화된 사람이 교양인이다. 그리고 그런 교양인이 많아야 한국인이 행복해질 수 있다.
- 성숙의 불씨 912호(2024.11.2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