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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사사기 5장은 우리 말로는 매끄럽게 번역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구약을 공부하는 사람에 있어서는 가장 해석하기 까다로운 장 중의 하나이다. 사용한 말 표현 중에 이해가 거의 불가능한 것이 많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내용에 있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대체적인 내용을 이야기 한다면, 첫째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구원을 찬송한 찬송시인데 이러한 말로 시작된다. 2절 말씀 중에 “이스라엘의 두령이 영솔하였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된다. 이해하기 힘든 단어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는 ‘플로아’란 말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 말은 나실인들이 서원한 기간 내에는 그 규례대로 머리를 장식하지 않고 늘어 뜨린 채로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머리를 풀어 헤치는 일이 있었을 때”인데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해석하기가 난감하다. 그런데 그 다음 말 그것과 짝을 이루는 말이 “백성이 즐거이 헌신 하였을 때”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과 관련시켜 보면 즉,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것이 백성들이 헌신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말이 헌신과 관계가 된다면 이스라엘이 시스라와 전쟁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생각 할 때 백성이 자원(헌신)했다고 하는, 즉 전쟁에 솔선해서 참여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것과 관련해서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것이 만일 이것이 나실인적인 배경을 갖는다면 나실인은 특별히 자신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성별해 드리는 기간을 이야기한다. 그 기간이 평생이 될 수 있고 일정 기간도 될 수 있다. 이렇다고 한다면 하나의 나실인의 그것을 상징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 할 수 있겠다. 나실인이 자신을 철저히 구분해서 하나님께 드리듯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위험을 돌보지 않고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자신을 철저히 헌신한 그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상상을 엉뚱하게 해서 하는 말이 나실인들이 머리를 풀어헤친다는 뜻이 있으니까 대개 전쟁을 할 때 이상한 모습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상대에게 공포감을 주고 자신에게 신적인 각오를 다지기 위해 머리를 풀어 헤친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즉, 민족에 따라서 얼굴에 페인트를 칠하든지(인디안 같이) 괴상한 탈을 쓰고 나간다든지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렇게 전쟁을 하는 모습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고 이야기를 한다.
여하튼 2절의 내용은 교회를 괴롭히는 대적과의 싸움에 있어서 헌신한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스라엘이 헌신했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우선 이것만 보면 온 이스라엘이 나서서 자원 했다는 정도로 들리기 쉬운데 그 이하의 내용을 읽어 보면 그렇지 않다.
「3-5절」
이 때까지 이스라엘을 선대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 역사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출애굽시대부터 하나님께서 어떠한 위대한 일들을 행해 오셨는가를 조금 언급을 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행하신 경이로움에 대해서 잠깐 말씀한다. 4절 “하늘도 새어서” 하늘에서 물을 내렸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경이로움을 갖게 하는 현상들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구원의 능력의 위대함을 나타내고자 하는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시대가 지날수록 쇄락의 일로를 걸었던 것이다.
6-7절에 “.....” 길이 그쳤다는 것은 통행이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상황이 위험해서 사람들이 길을 다닐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이다. 시스라가 굉장한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 땅에 상주하면서 포악한 정치를 베푸니 사람들이 길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는 그런 뜻이겠다. 길에는 통행이 없고 농촌의 삶이 불가능해졌다. 마을에 내려와서 사람 사는 곳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지으며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말이다. 나중에 기드온시대에도 나오지만 미디안이 쳐들어 왔을 때는 사람들이 동네에 거주하지 못하고 전부다 산에 굴을 파고 지냈다고 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드보라 시대에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퇴락한, 거의 폐허화 된 모습이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 계속되었다. 즉 드보라가 일어나기까지는 이스라엘이 그런 지경이었다는 얘기다. 8절에 이렇게 된 원인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무리들이 즉 백성이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전쟁이 성문에 미쳤다 외적들의 침입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적이 침입했는 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4만명 중에....보였던고” 4만명 가운데 방패와 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결국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전혀 전쟁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무력해졌다는 것이다. 교회가 능력을 상실해서 외적의 침입에 대해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이다.
9절에 “......” 우리말 성경(개역성경 표기)은 이것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는데,“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말이 나오니까 그 앞의 내용이 긍정적인 내용이 되어야 할 것 같아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으나 그러나 여기 찬송하라는 것은 나중에 이와 같은 상태에서 행하신 일을 염두에 두고 찬송하라고 한 것이다. 오히려 그 안의 내용과 부합되게 해석한다고 하면 9절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관원(이스라엘을 통치한 지도자, 교회의 지도자)들이 특별히 백성들 가운데서 자신을 헌신한 자들에 대해 내 마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교회가 이런 위경에 빠진 때에 자원해서 교회의 위경을 해결해 보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내 마음이 간절했다. 다시 말하면 제발 좀 누가 나서서 이러한 교회의 위경을 해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사람이 없는가? 안타깝게 기다렸다는 그런 뜻이 될 것이다.
10-11절 “흰나귀를 탄 자들” 신분이 높은 그런 사람들 즉 귀인들이다. 직역을 하면 ‘흰나귀를 탄 귀인들아 생각을 해 보라 그리고 이하의 내용이 샘물가에 있는 자들의 음성을 좀 관심있게 들어 보아라 그리고 그들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의로운 일들 즉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들어 보아라. 또한 이스라엘에 행한 의로운 일들 하나님이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우물가에 모여서 이야기 할 때 들어 보아라’가 된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과거 역사 동안에 교회가 위경에 처했을 때 어떤 인물들을 일으켜서 그들을 통해 어떤 구원을 행하셨는가를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에 좀 귀 기울여 보라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무엇을 암시하는가? 결국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가 그 처럼 위경에 빠져 있는데 그것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지도자로서의 맡은 바 책임 의식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바락이여 일어나 포로를 잡을지어다”라고 이야기했다. 마땅히 이런 위경에 처했을 때 어떤 조처를 취해야 할 교회 지도자들이 가만히 손을 묶고 앉아 있으니 결국 백성들이 누구에게 갔느냐 하면 드보라에게 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드보라가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지도자의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노래에서만 나올 뿐 만 아니라 바로 앞에서도 이것과 비교 해 보면 상황이 대개 맞아 들어간다.
드보라가 먼저 바락에게 당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했지만은 바락이 꽁무니를 뺀다. 당신이 함께 가야 내가 하겠다. 그 때 드보라가 일어나니 남은 백성들 즉, 여러 지파들이 다 모였다. 15절에 보면 이렇게 많은 지파가 모인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이 지파들이 하나님의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전쟁에 아예 참여치 않은 지파도 있었기 때문에 책망하는 말이 나온다.
특히 ‘르우벤 지경에 대한 나의 마음에서 찾는 소원이 아주 컸다’는 말은 결국 이 전쟁에 르우벤(요단강 동편 지경)사람들이 와서 좀 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말이다. 옛날 여호수아 때 정복전쟁을 할 때 먼저 요단강 동편에 정착한 두 지파 반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앞장서서 전쟁을 수행했다. 그때 일을 기억했는지 모르겠으나 아직 거기는 별 탈이 없었다. 왜냐하면 지금 주된 공격로가 갈릴리 북쪽이다. 그리고 그들의 압제를 심하게 받았던 지역이 납달리, 스불론 즉 북부 갈릴리 주변 지파들이었다. 이들의 압제를 직접 받지 않은 요단강 동편지역 사람들이 와서 좀 도와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 “르우벤 시냇가에서 큰 결심이 있었다”(15절)라고 히브리 원문을 긍정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해석을 하면 그 다음 말과 전혀 연결이 되지않는다. 그들에 대한 마음이 컸다는 것은 그들이 좀 와서 어떻게 해 주었으면 하는 안타까운 소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16-17절 “......” 여기에 보면 특별히 르우벤과 요단강 동편지역과 아셀지파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들에 대해서 말하기를 “양 우리에 앉아서......어찜이뇨” 양 우리 옆에 편안히 앉아서 양 떼 부르는 휘파람 소리나 듣고 한가하게 앉았는가라는 말이다. 요단강 동편지역의 사람들아! 이 전쟁의 참화가 너희에게 미치지 아니하니 강 건너 불구경 하듯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어찌된 일이냐 하는 책망이다. 그런데 18절에 보면 스불론과 납달리는 자기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이들이 전쟁을 수행했는데 하나님이 크게 역사하셔서 이들을 통해 열왕을 쳐부셨다고 되어있다.
19절 “......” 이 말은 그들이 어떤 유익을 바라고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참된 믿음에서 자원하여 참여한 이 전쟁은 하늘에서부터의 싸움이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셔서 싸우셨다는 말이다(20절).
23절에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메로스에 대해서는 저주를 받을지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야엘에 관해서 말하되 여자 중에 칭송 받을지어다. 야엘은 여인이다. 이것은 반대로 바락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남자가 전쟁에 나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남자가 나서지 않으니 여인이 나서서 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마땅히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감당하지 않고 있으면 여인이라도 나서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일을 감당해야 될 사람을 향한 경고요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그런 뜻이 속에 들어있다. 전쟁에 자원해서 참여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전혀 관심도 갖지 않고 뒤에 물러 앉았던 지파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고 있는가 하면, 이전에 옷니엘이나 에훗시대에는 에훗이 모압왕 에글론을 죽이고 에브라임 산지에서 나팔을 불었다. 즉 전쟁신호를 해서 온 이스라엘을 모아 모압을 쳤는데 아마 그때까지는 이런 전쟁에 있어서 각 지파간에 유대의식이 강해 합심해서 어떤 일에 대처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드보라시대에 오면서 사람들의 마음이 다 나뉘어져서 자기 앞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앉아있는, 그리고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교회가 처한 위기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자기할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여선지자가 나타난 이유
그런 위경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세우셨어도 그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에 자원하여 목숨을 걸고 나선 자가 별로 없었다고 하는 뜻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드보라의 노래에 단편적으로 암시된 내용에 비추어 보면 4장에서 시작되는 드보라에 관한, 서술체로 된 내용이 더 분명해 질 것이다.
왜 여선지자가 나타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었는가? 남자가 자기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남자의 일 여자의 일이라고 보기 보다는 상징적이고 암시적인 뜻을 갖는다고 생각된다. 전쟁이나 혹은 다스리는 직분이라는 것은 결국 남자가 갖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될 때 온갖 질서가 뒤바뀌게 되는데 뒤바뀌는 모습을 말하기를 여인이 남자를 다스리게 될 것이고 어린 사람이 노인에게 공갈을 하고 위협을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질서가 완전히 뒤바뀌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남자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이 많은 자가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 즉 남자가 남자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나이 많은 자가 나이 많은 자 값을 못하면 결국 질서가 전도되는 상황이 도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판의 한 형태다.
결국 드보라의 경우를 통해 암시하고자 하는 바는 그 당시의 그와 같은 교회의 위기 상황을 감당해야 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특히 바락과 같은 사람에게 그와 같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암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전쟁을 하라고 명하셨는데도 뒷꽁무니를 뺀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정복하기를 포기했다. 하나님께서 이 영역에서 그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예 포기를 해 버린다. 그리고 적당히 함께 살자고 했다. 그런데 함께 살 자가 될 수가 없다. 결국 옆구리의 가시처럼 찔려서 그들의 종교적 타락과 도덕적 타락에 오염이 되어서 이스라엘의 자세가 자꾸 변질이 되고 그러니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의 의미가 자꾸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 교회가 완전히 결단이 나버린 것이다. 말하자면 교회가 일반 믿지 않는 사람의 통제를 받는다고 생각을 하면 그 꼴이 어떠하겠는가? 바로 그런 모습이 된 것이다. 교회에 속하지 않은 세력에 의해서 교회가 좌지우지 되고 지배를 당하는 형편이 된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렇게 교회가 완전히 위경에 처했는데 당연히 나서서 싸워야 할 지도급 인사들이 무얼 하는지 전혀 손을 쓰지 않는다. 이와같은 일들이 교회 내에서 처리가 되어야겠다는 소리가 들릴 때에도 많은 사람들은 강건너 불구경 하듯이 내버려 두고 가만히 있었다. 드보라가 등장할 때까지 이스라엘의 형편이 결국 이러했다. 처음에는 함께 살자고 했다가 결국 그들에게 물들어서 교회가 완전히 변질이 되고 세상 사람들이 판을 치는 그런 세상이 되어 버렸고 그러다 보니까 그런 위경에 처했을 때 안되겠다고 이야기를 해도 그저 강건너 불구경이다. 다행히 목숨을 걸고 나선 사람도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교회를 다시 세우시는 은혜를 베푸시기도 헸다. 그것이 바로 드보라의 승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