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황제의 칼을 꺾은 낡은 옷, 영광의 사형장
대리석 기둥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로마의 황궁 알현실. 절대 권력자 칼리굴라 황제는 번쩍이는 금관을 쓴 채 오만하게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그의 발아래에는 한때 로마 제국이 가장 총애했던 엘리트 호민관, 마르셀루스 갈리오가 서 있었다.
마르셀루스의 곁에는 로마 최고의 귀족 가문 출신이자 그의 사랑하는 연인, 다이아나가 그의 손을 단단히 쥔 채 나란히 서 있었다.
"마르셀루스."
칼리굴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차가운 대리석 벽을 타고 울렸다.
"네가 갈릴리의 촌구석에서 미쳐버렸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깟 십자가에 매달린 유대인 목수 따위가 무어라고, 가이사의 위대한 제국을 배신한단 말이냐? 지금 당장 그 죽은 자를 저주하고, 이 로마의 황제가 유일한 신임을 맹세하라. 그러면 네 지위와 목숨, 그리고 네 곁의 아름다운 여인까지 모두 온전할 것이다."
황제의 등 뒤로는 로마 제국의 무자비한 칼과 창을 든 근위병들이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이곳은 목숨을 구걸해야 할 두려운 심판대였다. 그러나 마르셀루스의 눈동자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가슴속에는 갈릴리에서 마주했던 그 피 묻은 낡은 겉옷, '주님의 옷'이 품고 있던 절대적인 평안과 영원한 생명이 고스란히 육화되어 있었다.
"황제 폐하."
마르셀루스의 목소리는 황궁의 그 어떤 금속 소리보다 맑고 단호했다.
"폐하의 제국은 칼과 창으로 세워졌으나, 제가 섬기는 왕의 나라는 사랑과 생명으로 세워졌습니다. 폐하는 제 육신을 죽일 수 있으나, 제 영혼을 다스리시는 진짜 왕은 오직 한 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알현실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정적이 흘렀다. 황제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세상의 모든 권력을 쥔 황제가, 사형을 선고받은 낡은 베옷 차림의 죄수 앞에서 오히려 한없이 초라하고 무기력해지는 순간이었다.
훗날 밧모섬의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 우주적 승리의 선언,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요한계시록 17:14)
이 위대한 계시의 말씀이, 1세기 로마 황궁의 한복판에서 물리적인 현실로 뚫고 들어오고 있었다. 어린 양의 군대가 제국의 칼날을 비웃으며 거대한 승리를 선포하는 기독론적 사건이었다.
"다이아나." 황제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당장 그 미치광이에게서 떨어져라!"
그러나 다이아나는 마르셀루스의 손을 더욱 꽉 쥐며 황제를 향해 맑게 미소 지었다.
"저 역시 마르셀루스가 섬기는 그 왕을 섬깁니다. 우리는 당신의 제국을 떠나, 더 위대한 나라로 함께 갈 것입니다."
"저들을 당장 끌어내라! 사형장으로 끌고 가라!"
칼리굴라의 발악에 가까운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근위병들이 다가왔다. 그러나 마르셀루스와 다이아나는 병사들에게 끌려가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혼인 잔치에 입장하는 신랑 신부처럼, 고개를 들고 스스로 웅장한 황궁의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발걸음은 로마 제국의 개선행진보다 더 위풍당당했다. 세상의 눈에는 형장으로 끌려가는 패배자였으나, 영원의 눈에는 가장 찬란한 생명의 면류관을 향해 진군하는 위대한 정복자, 영광스러운 '증인(Martyr)'들의 행진이었다.
황궁의 육중한 문이 그들 뒤로 닫히는 순간, 옥좌에 주저앉은 황제 칼리굴라는 알 수 없는 거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몸을 떨었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십자가의 낡은 옷자락이 세상을 정복하는 위대한 반전의 서막이 방금, 그 문을 통과했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