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정
큰나무는 2017년 대안학교과정을 끝으로 성인기 캠프힐로 들어섰습니다.
원래 있던 곳은 시흥시 계수동, 도시 변두리의 자그마한 뒷산을 배경으로 했던 학교였고,
학령기 이후의 삶을 위해 바다 건너 이곳 강화군 양도면 진강산 자락에 보금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이전, 2009년에 학교 영구터전으로 자리 잡은 부천시 옥길동 부지가
이명박정부의 보금자리아파트 사업 2차 지구지정에 포함되었고,
2011년 교육협동조합의 총회에서 농촌으로 이주하여 캠프힐을 이루는 걸로 결정하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고 힘에 부치는 상황도 있었지만 처음 하고자 했던 바 대로
시골에서 성인기 캠프힐을 지금 그대로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농촌으로 가고자 했을때 반대가 많았습니다.
그곳에 살아야 하는 가족들 입장으로 볼때 다니던 학교나 직장, 사업, 이웃을 놔두고서
통채로 옮기는 것도 그렇고, 또한 장애 자녀가 그런 환경에서 얼마나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느냐에 대한
걱정때문이기도 합니다. 누구나 떠나고자 하지만 쉽게 떠나지 못하지요.
새로운 곳은 희망이어서 기대가 되지만 실제로 손에 잡히지 않는 먼곳이고
그동안 가져왔던 세계를 끊어야 가능한 거였습니다.
특히 도시라고 하는 곳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무엇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어
잠시라도 벗어날라치면 공중에 의지할데가 없는 곳처럼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농촌이라는 지역으로 들어왔고
이곳에서 땅에 자리를 틀고 힘껏 일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 결정
부천시 옥길동 학교 부지는 자그마한 언덕을 뒤로 해서
왼쪽과 오른쪽에 수도원과 절당이 모셔진 곳 가운데 있었습니다.
광명시 하안동에서 시작된 학교 전세 건물이 그 지역 개발행위로 인하여
내줘야 할 상황이 되었고, 그래서 인근 일대를 샅샅이 뒤져서 찾은 괜찮은 땅이었지요.
당시는 초 중등 정도의 연령이었지만, 이후 청장년의 과정을 위하여 무언가를 도모하기에도
지리상으로 괜찮아 보였습니다. 2009년 7월에 첫 삽을 떠서 건축물을 올리기 시작하였고
시공사를 재촉하여 그해 11월 말에 입주를 앞두고 있던 차,
아파트 개발 지구지정으로 인하여 터전을 송두리채 내주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곳이 아파트 숲이 되어버려 흔적 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큰나무가 본격적으로 이주를 고민하게된 계기는 개발때문입니다.
막연한 그림으로 농사를 말하고 있었지만 또 한번 터전을 옮겨야할 상황에
성인기를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야했고, 보상금을 들고 무언가를 결정해 내야했던 거지요.
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하나의 지점으로 모두의 의견을 모아내는 것은 불가능한 거였습니다.
도시를 떠날 것, 농촌의 지역으로 함께 들어가는 것,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다양한 일거리로 자립의 기틀을 마련할 것, 체험홈과 같은 방식으로 시작을 하면서 정착할 것을
이야기 하였지만
미래는 불확실한 거였고, 그래서 알수없고 선뜻 나설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편으로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두가 다같이 할 수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다행이었습니다.
우선 도시를 떠나는 것은 동의가 되었고, 캠프힐과 같은 방식으로 하겠다는 선에서
결정이 되었습니다. 공통되는 지점에서 농촌으로 갈것을 정한 것이 2012년 총회입니다.
3. 부지 선정
농사를 이야기 하지만 실은 직업이고 삶이기도 해서, 부지선정은 이 모든 것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점이었습니다.
자녀의 가정이 살고 있는 곳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 마을에서 동떨어지지 않는 곳,
농사를 지어 나갈 수 있는 지역, 우리를 충분히 받아줄수 있는 곳을 대략의 기준으로 삼고
수도 없이 많은 땅을 보게 되었습니다.
인근 지역, 홍성, 해미, 안성, 평택, 화성, 문막, 남양주, 원주.... 등을 직접 돌아보았고
이곳 강화도에도 여러번 다녔습니다.
사람이 땅을 정하지만 실은 땅이 사람을 정하는 것이고
우리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다스린다고 하지만 또 한편에서 그 안의 미세한 것들이
우리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우리는 뿌리를 내린다고 하지만 땅은 뿌리를 받아준다고 하겠지요.
일구어 내지만 실은 자연이 우리를 만들고 다듬고 품어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건물을 짓지만 결국 건물과 공간의 영향 속에서 우리는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도시를 념두에 둔 통합이라는 개념은 인간사회의 통합을 주로 생각하겠지만
더 넓은 자연의 개념으로 본다면 햇살과 바람과 나무와 마을과 미생물과 땅과.... 수도 없이
많은 통합의 지점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이 중요하고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시대이지만
잘 보면 훨씬 넓은 것들이 있어서 그 안에서 우리는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는 거지요.
부지를 찾으며 땅을 볼때마다 그런 지점을 유심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들어섰을때 느껴져 오는 온기, 부드러움, 온화한 경관, 길과 돌담과 집과 나무들와 주변 산까지 해서.
어느 곳은 좋은데 너무 툭 터져있어서 불안하고
어떤대는 아름답긴 한데 부담스럽고
어떤 곳은 사람이 너무 떨어져있고
또 어떤 곳은 땅값이 너무 많이 나가고.
많은 중개업자분들은 한결같이 투자가치를 이야기 하고 있었지만
보는 지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분들과 비장애인들이
어울려서 살아갈 만한 따뜻한 곳, 맑은 느낌의 장소, 뭔가를 크게 벌이지 않아도 되는
조용히 앉아서 여가의 시간을 평온하게 보낼 수 있는 그런 땅을.
4. 진강산자락
2012년 초봄에 이곳 부지를 처음 찾았습니다. 주인 내외의 환대를 받으며
집과 주변을 둘러보니 찾고있던 곳이었습니다. 남향에 약간 올라온 지대, 서쪽으로 바람막이 숲,
남쪽에 병풍같은 마니산, 동쪽은 아침 햇살이 그대로 비쳐오는 반듯한 땅이었습니다.
마침 뒤쪽으로는 밭이 있었고 너머로는 숲이었습니다. 얼마든지 놀며 시끄럽게 해도
마을까지 닿지 않을 만한 위치였고, 우리 마음대로 뭘 해도 될거 같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래도 가격이 만만치 않아 몇개월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서울 인근 지역은 어디나 비슷하게 비싸게 불리고 있어서
왠만한 금액으로는 원하는 것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나 혼자 들어와 산다고 하면 상관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여러사람의 삶을 결정지을 수 있는 일이기에 신중하고 또 신중할 수 밖에 없는 거였습니다.
시골에 있는 땅을 매입할때는 몇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특히 잘 모르는 곳이라고 하면.
우선 바로 급하게 사면 반드시 후회합니다. 몇달간 길게 보면서
주변을 들러보고 위치를 보아야 합니다. 특히 나뭇잎이 떨어진 시기에
드러나는 모습을 잘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늘지거나 습한 곳인지,
주변의 물길이 어디로 나고있는지,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등등.
그리고 그곳에 들어오는 진입로와
땅 밑으로 나아가야할 하수를 행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하는 겁니다.
풍수지리를 이야기 하고, 아무리 명당이어도 진입로 없으면 복잡합니다.
잘 모르고있다가 하수문제 해결 안되서 건물을 못올리기도 합니다.
이런 일들 생생하게 겪고나서 말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2013년 2월에 잔금 치르고 등기를 마쳤습니다.
보통 말로 주사위는 던져졌고, 뒤로 물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뒤로 물러 설수도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잘 되겠지 하는 느슨한 생각이 가장 위험한 독입니다.
어딘가를 여럿이 함께 옮겨간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것도 성인기에 이른 자녀의 삶을 보장해야할 과제가 놓여있는 일이어서
이전 학령기와는 전혀 다른 무거움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또 이야기할 수 있을거 같습니다.
5. 영농시범단
옥길동 지구지정된 학교부지의 보상금으로 강화의 땅 잔금을 치른 바로 다음날
그 집에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월이었고 마당에 덜 녹은 눈을 밟으면 부석거리던 시기였습니다.
농사철이 다가오고 있었고, 뭔가를 시작해야 할거라 여겨졌습니다.
중 고등과정에 있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해서 영농시범단을 꾸려
한시간 반 거리를 오가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주말에 다같이 모여 주변을 정리하기도 하고 임대한 땅에 슬슬 농사도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니깐 땅을 매입하고서 바로 건물을 올린것도 아니고 이사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2013년 2월에 매입을 확정지었지만 실제로 들어온 것은 2017년이었으니 4년간의
준비기간이 있었던 거고, 그 동안 농사를 지었던 것입니다.
아무나 원한다고 마음대로 들어가고 일구고 자리잡는게 아니지요.
텃새라는게 어디나 있지요. 좀더 나가면 님비현상을 자주 보게 됩니다.
낯선 대상을 경계하는 것이 동불의 본능이라고 하지요.
님비가 당연한건 아니지만 어딘가 정착하기 위하여 전략적인 노력이 한편에 필요합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에, 장애가 있는 여러 사람들이, 집을 지어서 자리를 잡고, 더불어 같이 살겠다고 한다면
시간을 필요로 하고 방식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4년간 농사를 지을때 이것은 어차피 기본으로 가져가야할 세계이면서
또한 정착을 위하여 꼭 필요한 지점이기도 했습니다. 그 마을은 시골이었고
농사를 짓는 어르신들의 고향이고 텃밭이고, 그래서 누군가 같이 살고자 한다면
농사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유리하고 당연하기도 하지요.
4년간 주변 농사짓는 분들과 똑같이 했습니다.
일찍 일어났고, 밭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작물에 알맞는 방법으로 해서 지어나갔습니다.
콩을 심으면 따라서 콩을 심고 고구마를 심으면 구해서 비슷하게 해 나간거지요.
농약과 제초제를 쓰지 않으니 일은 훨씬 많았고
땅도 돌이 많은 곳이라 힘들긴 했지만 그것이 방법이었고 전략이었고 기본이었던 거였습니다.
시골에 계시는 어르신은 농사에 관한한 박사로 여길 만한 분들이었으니 시도때도 없이 물었고,
나보다 어른이니 당연히 모셔서 대접을 하고
인사를 올리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정착, 전격적인 이주... 이런 것은 없습니다.
어느 곳이든 자연스러워야 하고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땅에 말뚝을 박을때는 망치로 때려 집어넣기도 하지만
실은 잘못하면 부러집니다. 적당히 흔들어대면서 구멍을 넓히고 받아주는 만큼
설설하면서 두드려가면 들어갑니다.
모종을 심을때는 좋은 것을 골라야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땅도 잘 준비를 해야합니다. 잘 받아들 일수 있도록 땅을 만들고 관계를 만들어넣고.
그래야 그 안에서 모든 것들의 성장이 원활하지요.
6. 이주
2017년 2월 시흥의 대안학교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최종 종료를 합니다.
그리고 바로 3월부터 강화에서 모든 것들이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족과 같은 형태의 생활, 자립을 실천하는 직업활동, 생명역동농법을 추구하는 캠프힐 농사를 중심으로
농촌에서의 삶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다음글 차례
2. 발달장애인과 사회적 농업 (직무 적합성)
3. 발달장애인과 사회적 농업 (성장)
4. 발달장애인과 사회적 농업 (자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