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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數不用籌策(선수불용주책) : 셈을 잘하는 것(善數)에는 주판이 필요치 않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폐무관건이불가개) : 잘 닫은 것(善閉)은 빗장을 걸지 않아도 열리지 않고,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 잘 묶은 것(善結)은 매듭을 짓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是以聖人常善求人(시이성인상선구인) : 이런 연유로 성인은 사람을 언제나 잘 구하므로
故無棄人(고무기인) : 버리는 사람이 없고,
常善救物(상선구물) : 성인은 물건을 언제나 잘 건지므로
故無棄物(고무기물) : 버리는 물건이 없다.
是謂襲明(시위습명) : 이를 일러 습명(襲明) 내지는 ‘밝음을 터득함’이라고 하리라.
故善人者(고선인자) : 고로 선한 사람은
不善人之師(불선인지사) :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師)이요,
不善人者(불선인자) : 선하지 않은 사람은
善人之資(선인지자) : 선한 사람의 바탕(資)이라 할 것이다.
不貴其師(불귀기사) : 스승(師)인 선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不愛其資(불애기자) : 바탕(資)인 선하지 않은 사람을 아끼지 않으면,
雖智大迷(수지대미) : 비록 지모(智)가 있다 하더라도 크게 미혹된 것이다.
是謂要妙(시위요묘) : 이를 일러 '요묘(要妙)' 내지는 '신비로운 오묘함‘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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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행하는 것(善行)에는 흔적이나 자취가 남지 않고,
잘 말하는 것(善言)에는 허물이나 흠결이 남지 않고,
셈을 잘하는 것(善數)에는 주판이 필요치 않고,
잘 닫은 것(善閉)은 빗장을 걸지 않아도 열리지 않고,
잘 묶은 것(善結)은 매듭을 짓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이런 연유로 성인은
사람을 언제나 잘 구하므로 버리는 사람이 없고,
물건을 언제나 잘 건지므로 버리는 물건이 없다.
이를 일러 습명(襲明) 내지는 ‘밝음을 터득함’이라고 하리라.
고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師)이요,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바탕(資)이라 할 것이다.
스승(師)인 선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바탕(資)인 선하지 않은 사람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모(智)가 있다 하더라도 크게 미혹된 것이다.
이를 일러 '요묘(要妙)' 내지는 '신비로운 오묘함‘이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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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정말로 달리기를 잘 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습니다.
정말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나 티가 없습니다.
정말로 계산을 잘 하는 사람에겐 계산기가 필요없습니다.
정말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리지 않습니다.
정말로 잘 만들어진 매듭은 졸라매지 않아도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습니다.
물건을 잘 아끼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습니다.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요,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자資입니다.
스승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나,
자資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지혜롭다 자처하더라도 크게 미혹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막한 신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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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잘 가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은 흠을 남기지 않으며
셈을 잘 하는 사람은 산가지를 쓰지 않는다
잘 닫는 사람은 빗장이나 자물쇠를 쓰지 않지만 열 수 없고
잘 묶는 사람은 새끼나 밧줄을 쓰지 않지만 풀 수 없다.
이 때문에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여
그들을 버림이 없고
물건에는 재물을 버림이 없다
이것을 총명함을 가린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스승이요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을 돕는 자다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돕는 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니
이것을 미묘한 요체라고 한다.
善行者无徹迹, 善言者无瑕適, 善數者不以籌策. 善閉者无關籥而不可啓也, 善結者无纆約而不可解也. 是以聖人恒善救人而无棄人, 物无棄材. 是謂襲明. 故善人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也.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乎大迷, 是謂妙要.
[善行者无徹迹]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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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당 역>
정말로 달리기를 잘하는 사람은 달린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정말로 잘하는 말에는 흠이나 티가 없다.
정말로 계산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계산기가 필요없다.
정말로 잘 닫힌 문은 빗장이 없어도 열리지 않는다.
정말로 잘 맺어진 매듭은 졸라매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사람을 잘 도와주고
아무도 버리지 않는다.
물건을 잘 아끼고
아무것도 버리지 않는다면
이를 일러 밝음을 터득함이라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요,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귀감이다.
스승을 귀히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나
귀감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지혜롭다 자처하더라도 크게 미혹된 상태이니,
이것이 바로 기막힌 신비이다.
<임채우 역>
27 잘 다니는 이는 흔적이 없고
잘 다니는 이는 흔적이 없고,
잘한 말에는 흠잡을 것이 없고,
잘하는 계산에는 산가지를 쓰지 않고,
잘 닫으면 빗장이 없어도 열 수 없고,
잘 매두면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항상 남을 도와서 구해주므로 버리는 사람이 없고
늘 사물을 구제해주므로 버리는 사물이 없나니,
이를 일러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바탕이 된다.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바탕을 아끼지 않으면
지모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하게 되니,
이를 일러 현묘한 요점이라고 한다.
<James Legge 역>
1. The skilful traveller leaves no traces of his wheels or footsteps; the skilful speaker says nothing that can be found fault with or blamed; the skilful reckoner uses no tallies; the skilful closer needs no bolts or bars, while to open what he has shut will be impossible; the skilful binder uses no strings or knots, while to unloose what he has bound will be impossible. In the same way the sage is always skilful at saving men, and so he does not cast away any man; he is always skilful at saving things, and so he does not cast away anything. This is called 'Hiding the light of his procedure.'
2. Therefore the man of skill is a master (to be looked up to) by him who has not the skill; and he who has not the skill is the helper of (the reputation of) him who has the skill. If the one did not honour his master, and the other did not rejoice in his helper, an (observer), though intelligent, might greatly err about them. This is called 'The utmost degree of mystery.'
<Lin Derek 역>
Good traveling does not leave tracks
Good speech does not seek faults1
Good reckoning does not use counters
Good closure needs no bar and yet cannot be opened
Good knot needs no rope and yet cannot be untied2
Therefore sages often save others
And so do not abandon anyone3
They often save things
And so do not abandon anything
This is called following enlightenment4
Therefore the good person is the teacher of the bad person
The bad person is the resource of the good person
Those who do not value their teachers
And do not love their resources
Although intelligent, they are greatly confused5
This is called the essential wonder
<장 도연 역>
제27장 잘 행하는 자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잘 행하는 사람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말 잘하는 사람은 말에 흠잡을 데가 없고
계산을 잘하는 사람은 계산도구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문을 잘 닫는 사람은
빗장을 걸지 않아도 문이 열리지 않고
잘 묶는 사람은 노끈을 사용하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다.
성인은 백성들을 잘 구하므로 버리는 백성이 없고
만물을 잘 이용하기에 폐기되는 물건이 없다.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간직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 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귀감의 대상이 된다.
자기의 스승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의 제자를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혜롭다 하여도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그것이 바로 오묘한 이치이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잘 다니는 이는 흔적이 없고,
善行無轍迹,
스스로 그러한 대로 행하고, 조작하거나 베풀지 않으므로, 사물이 지극함을 얻어서(혹은 사물을 완벽하게 이용해서)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順自然而行, 不造不[施], 故物得至, 而無轍迹也.
참된 말에는 흠잡을 것이 없고,
善言無瑕讁,
사물의 본성을 따르고, 구별하거나 가르지 않으므로, 허물이 그 입구를 얻을 수 없다.
順物之性, 不別不析, 故無瑕讁可得其門也.
잘 계산하는 이는 산가지를 쓰지 않고,
善數不用籌策,
사물 자체의 수(數)를 따르고 외형을 빌리지 않는다.
因物之數, 不假形也.
잘 닫으면 빗장이 없어도 열 수 없고, 잘 매두면 밧줄로 묶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善閉無關楗而不可開, 善結無繩約而不可解.
사물의 스스로 그러함을 따를 뿐 (별도로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으니 빗장이나 밧줄을 사용하지 않았어도 열거나 풀 수가 없다.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억지로) 조작하지 않고 사물의 본성을 따를 뿐 형기(形器)로써 사물을 묶어두지 않음을 말한다.
因物自然, 不設不施, 故不用關楗繩約, 而不可開解也. 此五者, 皆言不造不施, 因物之性, 不以形制物也.
그래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하므로 버려지는 사람이 없고,
是以聖人常善救人, 故無棄人;
성인은 형명(形名)을 내세워 사물을 단속하지 않고, 나아갈 진도를 만들어놓고 불초한 이들을 차별하여 버리지 않는다. 만물이 스스로 그러하도록 돕되 (자신이) 첫머리가 되지 않으므로 ‘무기인’(無棄人)이라고 했다. 현명함과 능력을 숭상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지 않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적질하지 않으며, 욕심낼 만한 것을 보이지 않으면 민심이 어지러워지지 않는다. 항상 백성의 마음에 욕심이 없고 미혹됨이 없게 한다면 버려지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聖人不立形名以檢於物, 不造進向以殊棄不肖. 輔萬物之自然而不爲始, 故曰無棄人也. 不尙賢能, 則民不爭, 不貴難得之貨, 則民不爲盜, 不見可欲, 則民心不亂. 常使民心無欲無惑, 則無棄人矣.
항상 사물을 잘 구제해서 버려지는 사물이 없으니, 이를 일러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착한 사람은 착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며,
常善救物, 故無棄物, 是謂襲明. 故善人者, 不善人之師;
선(善)을 들어서 불선(不善)을 가지런히 고치므로(즉 똑같이 착하게 만들므로) 이를 스승이라고 한다.
擧善以[齊]不善, 故謂之師矣.
착하지 않은 사람은 착한 사람의 밑천이 된다.
不善人者, 善人之資.
자(資)는 취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선함으로 불선을 가지런히 다스리지만, 선하다고 해서 불선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 취하는 바가 된다.
資, 取也. 善人以善齊不善, [不]以善棄不善也, 故不善人, 善人之所取也.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밑천을 아끼지 않으면 비록 지모가 있더라도 크게 미혹하게 되니,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大迷,
비록 지모가 있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지모에만 맡기고 사물에 따르지 않으면, 그 도를 반드시 잃는다. 그러므로 ‘수지대미’(雖智大迷)라고 했다.
雖有其智, 自任其智. 不因物, 於其道必失, 故曰雖智大迷.
이를 일러 현묘한 요점이라고 한다.
是謂要妙.
<Stefan Stenudd 역>
A good wanderer leaves no trace.
A good speaker does not stutter.
A good counter needs no calculator.
A good door needs no lock,
Still it can’t be opened.
A good mooring needs no knot,
Still no one can untie it.
Therefore the sage takes care of all people,
Forsaking no one.
He takes care of all things,
Forsaking nothing.
This is called following the light.
So, a good person is the bad person’s teacher.
A bad person is the good person’s task.
The one who does not honor the teacher
And the one who does not honor the task,
Although ever so knowledgeable,
They are confused.
This is called the subtle essence.
Teacher and Student
The Eastern tradition is essentially focused on transmitting the wisdom of old to the coming generations. Everybody is primarily a student and a teacher, passing on knowledge and understanding in a chain without beginning or end. What we learn from our parents, we pass on to our children.
Nothing is more important.
In this chapter, Lao Tzu stresses this basic duty shared by all. The teacher must teach all he or she knows, the student must be devoted to learning what is taught. Whatever reason they might have for neglecting this duty, they are mistaken.
Teaching is not the same as indoctrination. That would be intellectual molestation. True wisdom doesn’t need force. It convinces by its own merit. Learning is no passive memorizing of the thoughts of others. It has to be done by active thinking, questioning, and coming to one’s own conclusions.
But if nothing is taught, then there is no basis for conclusions, and if nothing is learned there is nothing to conclude.
Good Skills
When Lao Tzu begins with a list of what good skills accomplish, he explains what can be reached by proper teaching. What we learn in the process is far from useless. Although teaching might be done mainly in theory, the benefits are practical as well.
We excel if we pay attention to just about everything, and we progress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by passing on our knowledge and our experiences.
Thereby, we follow the light of every new dawn, when days follow one another in the same cyclic progression that generations do.
The good and bad used in this chapter are not necessarily moral judgments on character, like we mostly use the words in the Western tradition.
The Chinese word for good, shan , relates to skill, excellence, and being in accordance with nature, but also kindness. The expression for bad is simply a negation of good, pu shan , which is somebody lacking these qualities. No ill will is assumed.
So, teaching is to help the student gain what was lacking.
<사봉 역>
善行無轍迹(선행무철적)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善言無瑕謫(선언무하적)
바른 말은 하는 사람은 허물을 남기지 않는다.
善數不用籌策(선수불용주책)
셈을 잘 하는 사람은 계산기를 쓰지 않고
善閉無關楗而不可開(선폐무관건이불가개)
문단속을 잘 하면 빗장을 지르지 않아도 열 수 없으며
善結無繩約而不可解(선결무승약이불가해)
잘 묶는 사람은 끈을 쓰지 않아도 풀 수가 없다.
是以聖人(시이성인)
그리하여 성인이라면
常善求人(상선구인)
언제나 사람을 잘 사귀되
故無棄人(고무기인)
그 사람을 버리는 일이 없고
常善救物(상선구물)
언제나 물건을 잘 얻되
故無棄物(고무기물)
그 물건을 버리는 일이 없다.
是謂襲明(시위습명)
이를 일컬어 밝음을 지녔다고 한다.
故善人者不善人之師(고선인자불선인지사)
선한 사람은 선하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고
不善人者善人之資(불선인자선인지자)
선하지 못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거울이다.
不貴其師(불귀기사)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不愛其資(불애기자)
거울을 아끼지 않으면
雖智大迷(수지대미)
지혜로워도 길을 헤매게 된다.
是謂要妙(시위요묘)
이것을 일러 묘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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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31
도덕경 26장 중정(重靜)의 도리와 십자가의 길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근본이 되며, 고요한 것은 조급한 것의 임금(주인)이 된다.>
重爲輕根, 靜爲躁君.
1. 중후한 삶의 철학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는 것은 중후한 삶이 경박한 삶의 뿌리가 된다는 말이다. 경박한 삶은 눈앞의 일시적인 이익에 따라 울고 웃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에 멀리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인생을 가볍게 사는 것과 경박하게 사는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무거운 인생길을 가볍게 사는 일이야 말로 도를 추구하는 자의 본래 모습일 수 있다. 예수가 일렀듯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면서, 내가 주는 멍에는 쉽고도 가볍다고 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한 왕필의 해석을 보면 재미있다. “무릇 사물을 보면, 가벼운 것이 무거운 것을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이 큰 것을 누를 수 없다. 행동하지 않는 것이 행동하는 것을 부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제어한다. 이로써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의 뿌리가 된다.(凡物, 輕不能載重, 小不能鎭大. 不行者使行, 不動者制動. 是以重必爲輕根.)” 여기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움직이는 것을 제어한다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不動)의 동자(動者)(the unmoved mover)’ 개념을 떠 올리게 된다. 자신은 움직이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움직이는 존재, 즉 제 일 원인(原因)을 연상케 하는 것이다. 참으로 큰일을 행하는 사람일수록 그 행동이 신중하고 중후하다.
고요함(靜)과 조급함(躁)도 같은 맥락이다. 고요함이 조급함의 주인이 된다. 조급한 사람이 고요한 사람을 이기는 법이 없다. 고요함은 중후함에서 비롯된다. 물이 깊을수록 고요함이 더한 것과 같다. 얕은 물은 언제나 바람에 찰랑거리게 마련이다. 뿌리가 깊은 나무일수록 폭풍에 잘 견딜 수 있는 이치와도 같다. 그리스도인의 영성도 이와 같다. 영성이 깊을수록 무게가 있고 영적 권위가 높아지며, 마귀의 궤계나 조급함을 멀리할 수 있다. 영성이 깊어지고 무게를 가지려면 겟세마네의 기도와 같은 고요함(靜)이 필요하다. 예수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고요한 기도에 들어갔다. 고요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고요함으로 하루를 마친 것이다.
2. 불리치중(不離輜重)과 천국의 과업
<그러므로 성인은 종일토록 행할지라도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비록 영화로운 일을 만나도 의연히 거하며 초연할 뿐이다.>
是以聖人終日行, 不離輜重, 雖有榮觀. 燕處超然.
성인(聖人)이 무거운 수레(輜重)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무거운 수레(輜重)’는 옛날에 임금이 행차할 때 수행하는 군사가 의식(衣食)과 기계(器械)를 실은 수레를 말한다. 이 때 임금이 행차하면서 늘 이 수레를 떠나지 않는 것에 대해, 노자가 성인의 행동 양식으로 비유 한 말이다. 이를테면 임금이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는 말과 성인이 중대한 과업을 멀리하지 않는 것이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天國)라고 하는 중대한 과업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생애는 한시도 이 과업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는 첫마디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마가 1:15)”라는 외침이었고, 결국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한복음 19:30)”고 말함으로써 예수는 그의 과업을 완성한 것이다. 천국의 실현, 이는 모든 성인이 일평생 치중(置重)한 ‘무거운 수레’ 곧 치중(輜重)이었다.
이러한 중대한 과업에 치중하는 사람은 비록 영화(榮華)를 누릴 일이 있어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으며, 제비가 자기 둥지에 자리 잡아(燕處) 편안히 거하듯이 무슨 일을 만나도 초연함을 잃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부귀영화에 마음을 매어두지 않기에 오히려 안연(晏然)히 살 수 있는 것이다. 부귀와 영화에 마음을 매기 보다는 오히려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에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무거운 수레’가 소외된 자들의 양식, 곧 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는 이 수레를 떠나지 않는다. 한국에도 ‘밥퍼 목사’라는 별칭을 가진 목사가 있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노숙자에게 이 ‘밥 퍼’는 ‘무거운 수레’를 떠나지 않고 평생의 과업에 ‘치중’하고 있다.
3. 만승지주(萬乘之主)의 처신(處身)
만 대의 수레(전차)를 지닌 임금이 어찌 자기 마음대로 천하를 가볍게 여기겠는가? 경솔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하면 임금의 지위를 잃게 된다.
奈何萬乘之主, 而以身輕天下. 輕則失本, 躁則失君.
사람마다 그릇이 다른 법이다. 옛 로마 시대의 군법에 의하면, 백부장은 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자요, 천부장은 천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군대장이다. 소대장과 대대장의 차이가 다른 것과 같다. 농사를 짓는 일에도 쌀가마를 수확하는 양의 정도에 따라, 천석꾼과 만석꾼으로 나눈다. 그런 점에서 사람마다 일의 역량과 그릇이 다르다. ‘만승지주(萬乘之主)’라 함은 만대의 수레를 거느리는 임금을 말한다. 그만큼 인간의 역량과 지위에 따라 처신하는 방법도 신중해야 함을 말한다.
한 나라의 임금이나 되는 사람이 천하를 우습게 여기고 가벼이 처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경솔하면 곧장 근본을 잃게 되고, 조급한즉 임금의 자리를 잃게 되는 법이다. 누구나 만대의 전차를 거느리는 임금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만승지주’와 같은 마음을 지닐 수는 있다. ‘만승지주’의 마음을 가진 자는 언제나 홀로 신중하게 처신한다. 예수는 ‘만승지주’로서 이 땅에 천국의 실현을 위해 살았다. 그는 결코 천하를 우습게보거나 세상을 경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냈다(요한복음 3:16).’ 세상은 진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었다. ‘만승지주’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구원을 위한 사랑의 실천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가볍게 생각하여, 경거망동함으로써 근본을 잃게 되거나(輕則失本), 조급하게 행동함으로써 임금의 지위를 잃게 되는(躁則失君)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것이다.
무겁고(重) 고요한(靜) ‘중정’의 삶의 원리는 가볍고(輕) 조급한(躁) ‘경조’의 삶과 대비된다. 이 같은 대비는 <도덕경> 전체를 ‘얼나(道)’와 ‘제나(自我)로 풀이하는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의 해석을 따르는 것도 유익한 교훈이 된다. 이를테면, 중정은 ‘얼 나’의 소산이고 경조는 ‘제 나’(자아)의 소산일 수 있다. 무겁고 고요한 삶의 원리, 즉 도의 원리가 가볍고 조급한 인간적 자아의 원리를 통제하는 근본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비유를 따라 해석해 보면, 중정은 ‘영의 생각’이 되고, 경조함은 ‘육신의 생각’이 된다. 로마서 8장 5-6절에 의하면,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服從本性的人意向於本性的事, 順服聖靈的人意向於聖靈的事. 意向於本性就是事. 意向於聖靈就有生命和平安. 참조, 중국어 성경). 사망의 길을 갈 것인가, 생명과 평안의 길을 갈 것인가, 이는 중정의 길이냐, 아니면 경조의 길이냐에 달려 있다. 십자가의 길은 가볍고 조급한 길이 아니라, 무겁고 고요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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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잘 가는 사람은 자취를 남기지 않고, 말을 잘 하는 사람은 흠을 남기지 않으며, 셈을 잘 하는 사람은 산가지를 쓰지 않는다
善行者无徹迹, 善言者无瑕適, 善數者不以籌策
'철(徹: 勶)'은 부혁본을 제외하고 통행본에 모두 '철(轍)'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두 글자가 모두 '자취'라는 뜻이지만 필원에 따르면 통행본의 '철'은 옛날에는 없었던 글자다. 『음의』에서도 백서의 '철'자를 쓰고 있다. 백서에서는 "덕이 없는 사람은 그 행적을 살펴본다(79)"는 말에서도 역시 '철(勶)'이 자취〔轍〕라는 의미로 쓰인다.
'적(適)'도 『차해』를 제외한 통행본에 대부분 '적(讁)' 또는 '적(謫)'이다. 그렇지만 옛날에는 이 글자들이 모두 통하는 글자였으므로(고형) 백서의 글자를 그대로 쓴다. '하적(瑕適)'은 옥에 티다. 때로는 이것을 흠과 잘못(성현영) 또는 옥에 티와 잘못(초굉·설혜) 등으로 뜻을 구분하여 새기기도 하는데, 구태여 그렇게 구분할 필요를 못 느끼므로 여기에서는 뭉뚱그려 '흠'으로 해석한다. 만약 이런 식으로 구분한다면 '철적(徹迹)'도 구분할 수 있다. '철'은 수레바퀴 자국이고, '적'은 말 발자국이다(장석창). 주책(籌策)은 셈을 할 때 사용하는 산가지다.
이 문장에 대한 여혜경의 설명은 이렇다. "길을 가는 것이 가지 않는 데에서 나오므로 자취가 없고, ……말이 말하지 않는 데에서 나오므로 흠이 없으며, ……하나를 얻어 말〔言〕을 잊은 자는 능히 수리에 통달할 수 있으니 수리에 통달하면 그 헤아리는 데 막힘이 없다." 이 말이 좀 현학적이라면 이 모든 것을 '자연'에 따르는 행동이라고 파악하는 왕필의 설명도 참고할 수 있다. 곧 억지로 어떻게 하겠다는 자기 주장이 없이 상황에 따라 길을 가고 말을 하고 셈을 하기 때문에 흔적도 흠도 없고 산가지도 필요없는 그런 궁극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표준 해석이다.
왕진은 길을 잘 가는 사람에게 "자취가 없다는 것은 행군하려고 하여도 진영이 없다(69)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곧 왕진은 이 문장이 교묘한 행군술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노자』에 따르면 통행본 69장은 용병가의 말이다. 왕진은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흠이 없다는 것은 가운데를 지킨다는 말이고, 산가지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전쟁하면 반드시 이긴다는 말이며, 열 수 없다는 말은 수비가 견고하다는 말이고, 풀 수 없다는 것은 단서가 없다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잘하는 것〔善〕은 훌륭한 임금이 은밀히 도모하고 고요히 움직여서……군사가 움직이기 이전에 병기를 거두고 싸우기 이전에 전쟁을 그치게 하려는 것이다." 설명에 큰 무리가 없으므로 이렇게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지금 『노자』는 뛰어난 전략가를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탁월성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행군 능력, 흠 잡을 데 없는 언변, 정세를 살피는 치밀한 계산 능력,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는 훌륭한 진법에서 나온다.
잘 닫는 사람은 빗장이나 자물쇠를 쓰지 않지만 열 수 없고, 잘 묶는 사람은 새끼나 밧줄을 쓰지 않지만 풀 수 없다
善閉者无關籥而不可啓也, 善結者无纆約而不可解也
'관약(關籥)'은 모든 통행본에 '관건(關鍵)'으로 되어 있다('건'은 판본에 따라 다른 글자를 쓰기도 한다). 범응원에 따르면 관·건은 모두 성문의 빗장인데, 가로대가 '관'이고 세로대가 '건'이다.
그런데 양웅의 『방언』에서는 "자물쇠는 산해관 동쪽과 진·초 사이에서는 건(鍵)이라고 하고, 산해관 서쪽에서는 약(籥)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곧 건·약은 서로 통하는 글자로 모두 자물쇠를 가리킨다. 백서의 '약(籥)'은 '약(鑰)'과 같은 글자다. 대죽변이기 때문에 대나무로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쇠로 만들었는데 악기의 관약(管籥)과 같은 모양이기 때문에 이 글자를 쓴다고 한다(『예기』 「월령」에 대한 공영달의 주). 그러므로 본문의 관·약은 각각 빗장과 자물쇠를 가리킨다.
『방언』은 산해관 서쪽에서 '약'이라는 글자를 썼다고 하였으므로 '약'을 쓰는 백서본은 산해관 서쪽에서 편집된 것이다. 산해관 서쪽에는 진나라밖에 없다. 이 판본이 세상에 유행하면서 다양한 사정에 맞춰 수정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약'은 대륙 중심부에서 주로 사용했던 '건'이라는 글자로 바뀌었다. 백서의 '약'과 통행본의 '건'의 상위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계(啓)'는 '개(開)'와 같은 말이고, '묵(纆)'은 '승(繩)'과 통하는 글자다. 하지만 '묵'은 새끼 두세 가닥을 꼬아서 만든 새끼줄이기 때문에 '승'보다도 더 굵다고 한다. '약(約)'은 묶는다〔束〕는 의미로 보기도 하지만(초굉) 밧줄〔索〕로 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오징)
『장자』에 이와 연관되는 글이 있다.
무릇 곡자나 먹줄, 그림쇠나 자를 가지고서 남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 본성을 해치는 것이고, 새끼줄이나 아교를 가지고서 든든하게 만드는 것은 그 덕을 훼손하는 것이다. 몸을 굽실대면서 예악을 찾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인의를 찾아 천하의 마음을 위로하려는 것은 언제나 그런 모습을 잃는 것이다(「변무」).
지금 『노자』도 역시 자연에 따르는 것을 설명하고 있으므로 서로 뜻을 보완해준다고 하겠다.
이 때문에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여 그들을 버림이 없고, 물건에는 재물을 버림이 없다. 이것을 총명함을 가린다고 한다
是以聖人恒善救人而无棄人, 物无棄材. 是謂襲明
"물건에는 재물을 버림이 없다"는 구절은 통행본에 대부분 "항상 물건을 잘 구제하여 물건을 버림이 없다"라고 되어 있다. 「도응훈」은 이 구절을 공손룡의 고사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공손룡은 "사람이면서도 능함이 없는 자하고는 더불어 노닐지 않겠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날 소리를 잘 지르는 사람이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했다. 이 쓸모없어 보이는 재주에도 불구하고 공손룡은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얼마 있다가 공손룡은 연나라에 유세를 하러 가게 되었다. 그런데 강을 건너려고 보니 배가 이미 멀리 떠난 뒤였다. 소리 잘 지르는 공손룡의 제자가 앞으로 나서서 소리를 지르자 강심에 가 있던 뱃사공이 그 소리를 듣고 배를 돌려 공손룡을 태웠다. 쓸모없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도 제자로 맞아들인 공손룡의 도량이 그런 좋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을 버림이 없고, 물건에 대해서는 물건을 버림이 없다〔物無棄物〕." 통행본과 약간 다른 부분에서 「도응훈」은 백서와 같은 문장 형식을 취하고 있다.
위에서 『노자』는 자연을 따르는 것을 말했다. 자연을 따르지 않고 억지로 길을 가거나 빗장·자물쇠·새끼·밧줄 등을 사용하여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하면 언제나 사람이 원망하고 재물이 낭비되지만 자연을 따르면 그런 원망과 낭비를 방지할 수 있고, 따라서 사람도 재물도 버려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노자』가 여기에서 "성인은 항상 사람을 잘 구제하여……"라고 한 것이다. "대개 억지로 구하려고 하는 바가 있으면 반드시 버려지는 바가 있으니 가령 구한 사람이 백천만 사람이고 백천만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바깥에는 반드시 버려져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오징)." 왕진의 관점에서도 이 문장을 설명할 수 있다. 곧 뛰어난 전략가는 전쟁에서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전쟁을 방지하는 사람이며, 그러한 사람은 사람과 재물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습명(襲明)'은 크게 볼 때 세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밝은 도를 이어받는다고 보는 것이다(성현영·왕진·덕청). 이때 '습'은 이어받는다 또는 이어서 사용한다는 뜻이고, '명'은 밝음 또는 밝은 도라는 뜻이다. 둘째는 밝음을 더한다고 보는 것이다(설혜). 이때 '습'은 거듭한다〔重〕는 뜻이다. 셋째는 본문처럼 총명함을 감춘다고 보는 것이다(임희일·오징·임계유). 이때 '습'은 가린다는 뜻이며, '명'은 총명하다는 뜻이다. 자연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사람과 재물을 구제하는 것은 자신의 총명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총명함을 믿고 자기 고집대로 행동하면 사람과 재물을 모두 상하게 된다. 이 문장이 "빛을 사용하되 그 밝음으로 되돌아가 몸에 재앙을 남기지 않을 것이니 이것을 감추고 또 감춘다고 한다(52)"는 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아 세 번째 해석을 택한다.
왕필본 앞에 붙어 있는 송 조설지의 서문은 부혁본에 의거하여 통행본의 이 문장(16글자)이 원래 하상공본에만 있고 다른 고본에는 없다고 하였다. 초굉도 부혁을 인용하여 똑같이 말한 것을 보면 뭔가 근거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백서 갑·을본에 모두 이 문장이 나오므로 하상공본에만 있었다는 설명은 잘못이다. 현행 부혁본에도 이 문장이 그대로 나온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스승이요,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을 돕는 자다
故善人善人之師, 不善人善人之資也
통행본에는 이 문장이 모두 "선한 사람은 불선한 사람의 스승이고……"로 되어 있다. 통행본 중에는 백서와 같은 판본이 없지만 『한비자』 「유로」를 보면 백서가 맞다.
「유로」에 따르면 은의 주왕(紂王)이 주 문왕에게 옥판이 있다는 것을 듣고 사람을 보내 얻기를 요구했는데, 문왕은 교격(膠鬲) 같은 충직한 신하가 왔을 때는 그것을 주지 않았고, 비중(費仲) 같은 간사한 신하가 왔을 때 그것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만약 교격이 옥판을 얻어 주왕에게 가져다주었다면 왕의 신임을 얻어 주왕을 보필할 테고 결국 문왕에게 이로울 게 없기 때문이었다. 한편 비중은 옥판을 구해옴으로써 주왕의 신임을 받았고, 간신이 주왕의 신망을 얻음으로써 결국 은나라는 쇠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유로」는 비중 같은 간사한 신하가 결국 은을 무너뜨리고 주 왕조를 개창하게 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므로 불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문왕)을 돕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똑같은 고사가 「내저설하·육미」에도 나오는 것을 보면 당시에 잘 알려진 고사였던 것 같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비중은 문왕을 도운 불선한 사람이 되었다. 한편 태공망 여상은 여기에서 문왕의 스승이다. 여상이 문왕을 도운 것은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의 스승이 된다"는 말의 역사적 사례다. 그러므로 통행본처럼 될 수는 없고, 백서가 옳다.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돕는 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비록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니 이것을 미묘한 요체라고 한다
不貴其師, 不愛其資, 雖智乎大迷, 是謂妙要
대다수 해설은 이 문장을 본문과 달리 해석한다. 가령 육희성에 따르면 이 문장은 "그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그 돕는 자를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니 비록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미혹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을 일러……"라는 식으로 읽어야 한다. 다른 해설도 대개 유사하다. 말하자면 스승과 돕는 자가 귀하기는 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거론한 「유로」나 이 글 자체의 맥락에서 보면 본문처럼 옮겨야 할 것 같다.
스승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돕는 자를 아끼지 않는 것은 자신이 가장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이 글에서 경계하는 총명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스승과 돕는 자를 귀하게 여겨야 하며, 그렇게 해야만 미혹되지 않는다. 하상공도 이런 관점에서 이 문장을 해설하고 있다. "홀로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부릴 사람이 없으니 비록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람은 크게 미혹됨을 이야기한 것이다."
'오묘한 요체〔妙要〕'라는 말은 통행본에 모두 '요묘(要妙)'로 되어 있으며, 그 해석도 갖가지다. 하상공본의 경우 본문에는 '요묘'지만 주해에는 "미묘한 요도〔微妙要道〕를 안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원래 하상공본은 백서와 같았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는 하상공을 따라 '미묘한 요체'로 해석했다.
무릇 곡자나 먹줄, 그림쇠나 자를 가지고서
남을 바르게 하는 것은
그 본성을 해치는 것이고
새끼줄이나 아교를 가지고서
든든하게 만드는 것은
그 덕을 훼손하는 것이다
―『장자』 「변무」
[善行者无徹迹]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