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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길
제1장 목회자론
제1절 섭리역사에 소명받은 자들
1. 노아
역사적으로 보면 아벨의 핏줄을 통해서만이 탕감의 인연이 맺어지기 때문에 노아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기 전에도 많은 탕감을 받아 나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120년에 걸쳐서 조건물을 세우려 할 때 사탄의 공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놈 잘하는구나. 얼마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보자. 네가 120년 동안 배를 짓게 되는가 어디 보자' 하고 사탄이 시험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배를 강가에다 짓는다면 모르지만 산중에 짓는다니 이것은 근본적으로 틀리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반대받을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절대 정상적으로 봐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노아가 배를 지으러 갈 때, '오늘 점심을 먹고 산보 좀 하다가 올라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산에 올라갔겠습니까? 아닙니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하며 배를 지으러 산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120년 동안에 배를 지으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셨지만 120년의 그 기간을 단축시켜야겠다는 심정을 가지고 밤이나 낮이나 전심전력을 다했던 노아였습니다. 그렇게 천성의 절개를 세웠던 것입니다. (18-156)
여러분, 노아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봤어요? 노아는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습니다. 평지면 몰라도 산꼭대기에서 배를 지었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선, 상식을 넘어설 뿐만 아니라 도가 넘어도 형편없이 넘은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보게 될 때, 정상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노아는 미친 사람에 가까운 행동을 한 것입니다. 배를 지으려면 강가에 지어야지, 산에다 지었으니 그것은 상식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것을 명령한 하나님은 농담으로 했겠느냐? 아닙니다. 참기 어려운 길을 생애를 바쳐서 가야 하는 것이 노아의 노정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수난길보다 평탄한 내용을 가지고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조건으로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을 바라시는 마음을 가지고 노아에게 120년 동안 수난길을 가라고 명령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비참하였겠습니까? 말할 수 없이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아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 하는 긴장된 순간에 있어서 노아가 순응하는 입장을 취할 때, 노아보다 더 기뻐하신 분이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노아보다 더 슬퍼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그렇듯 기쁨과 슬픔을 책임질 수 있는 그런 주인의 자리가 아니고는 하나님의 자리가 못 되는 것입니다. (48-69)
노아는 자기 일신을 정복하고 자기 가정을 정복하기 위하여 120년 동안을 싸웠습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120년 후에 이 땅을 심판하겠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노아는 '일년이 지났으니 이제 119년 남았구나' 하며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뜻을 품고 큰 뜻을 대하고 나오는 사람 앞에 한 번 약속한다는 것입니다. (19-237)
승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사탄세계에 들어가서 맞아야 됩니다. 야곱이 사탄세계를 대표한 라반가정에 들어가서 열 번이나 속임을 당했다는 것은 열 번을 맞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하늘 뜻 앞에 설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아 할아버지도 120년 동안 참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120년 후에 이 세상을 심판할 것을 통고하시면서 노아에게 아라랏산 꼭대기에 배를 지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셨겠는가? 이 명령은 상식적으로 볼 때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배를 만들려면 강변이나 바닷가에다가 만들어야 될 것인 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산에다가 배를 지으라고 하셨는가? 그것은 그시대의 수많은 백성들, 즉 전체가 반대할 수 있는 자리에 노아를 세우기 위한 작전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 중에는 노아를 말로써 심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노아 할아버지가 120년간 방주를 만드는 것을 보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미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발길로 차고 별의별 짓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탄으로 하여금 하고 싶은 것은 상징적으로나 형상적으로나 다할 수 있는 입장에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고 하나님이 세운 사람은 사탄세계에서 먼저 때리게 합니다. 사탄세계에서 먼저 때리면 사탄세계를 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딸을 먼저 맞게 한 다음에 사탄을 치는 것입니다. 노아도 그랬고,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터전을 마련한 야곱도 라반의 집에서 속은 다음에 빼앗아 왔고, 모세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14-112)
우리는 120년 동안 산에서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행동에서 또 다른 예(例)를 보게 됩니다. 그는 그 긴 기간 동안 사탄과 싸워 나왔습니다. 노아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 이웃과 친척들로부터 배척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의 나라로부터 그리고 온 세상으로부터 조롱과 반대를 받았습니다. 한번이라도 그 일을 포기하려고 했더라면, 그는 또다시 사탄의 침범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의 사명을 완수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사탄과 대항해 싸워서 자신을 사탄으로부터 분립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거하게 되면, 하나님은 그를 사탄세계에 내보내어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서 그 자신을 희생하게 하십니다. 물론 그를 단련케 하려는 이유도 있지만, 전세계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려는 그를 통하여 하나님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의인이었고, 정직한 사람이었고, 선한 사람이었던 노아는 항상 슬픔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해야 했습니다. (52-52)
노아 할아버지는 핍박이 심하고 어지러운 환경 속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했기 때문에 그 환경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 앞에 자식으로서 충효의 도리를 다할 뿐이라는 겸손한 마음을 갖고 나갔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환경의 비정함을 느끼고, 서러움을 당했으나 그런 때일수록 노아 할아버지는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갔기에 그가 가는 길을 막을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120년 동안을 지내 온 노아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노아 한 사람을 놓고 사탄세계는 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고 반대할 수 있는 대로 반대했지만, 하나님이 중심으로 세운 그 기준에서 노아는 추호도 어긋남이 없었습니다. 그 기준은 천주의 절대적인 중심으로 세운 것이요, 우주의 정의의 인간으로 세운 것이요, 참의 승리자로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기준에 반대되는 모든 원수의 요소들을 청산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끝까지 맞고 나면 멋진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18-159)
2. 아브라함
아브라함을 보자구요. 아브라함은 우상 장사의 아들입니다. 잘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야 ! 아브라함아, 너의 집에서 나오너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두말도 하지 않고, 어디 가면 잘산다는 보장도 받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고향산천인 갈대아 우르를 전부 다 버리고 떠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됐냐 하면 국경을 넘는 집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오라면 나오는 것입니다. 나온 후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나온 것을 후회하거나 하나님을 대해서 원망하면 안 됩니다. 원망하면 또다시 타락한 아담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담보다도 더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하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아무리 끌고 다니고 그래도 원망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으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사랑하시고 그에게 '너의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알과 같이 번성하리라'고 축복해 주신 것입니다. (53-43)
아브라함을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우상 장수인 그의 부친으로부터 그를 분립시켰습니다. 그는 가족, 조국, 물질적인 부 그리고 모든 것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사탄세계로부터 그를 단절시킴으로써, 그는 가나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단련시키고,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민족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 심지어 원수를 위해서도 울 수 있게 하시면서 섭리를 발전시켰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조국을 떠나 타국으로 가게 하면서 이 일을 하셨습니다. 그는 집시처럼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는 항상 간절한 심정으로 울며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바라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이라고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고, 그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랑하는 가족, 조국, 물질적인 부, 그리고 기타 모든 것을 뒤에 남겨 두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미지의 땅으로 가서 항상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눈물 흘림으로써 사탄으로부터 자신을 분립해야 했습니다. 그는 민족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했으며 나라를 위해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한 조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울 수 있었으며, 수많은 후손이 번성하도록 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하셨던 것은 그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2-53)
아브라함도 노아와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장수의 아들 아브라함은 사탄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똑똑하고 사랑스런 그 아들을 빼앗아 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망하던 세계는 그 아버지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원수의 아들이긴 했지만 생각하는 것이 그 아버지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가정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이스라엘을 염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빼앗아 왔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자라날 때는 그의 환경과 친척이 내편인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이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우기 자기 나라와 종족을 이탈하고 자기 부모를 반대하고 나선 아브라함이 갈 수 있는 집이 어디 있으며, 친척이 어디 있으며, 나라와 세계가 어디에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혼자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가는 곳곳마다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었던 것입니다. 애급에 갔을 때는 바로 왕이 그의 부인을 빼앗으려고 했고, 어디를 가든지 몰림받는 집시의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18-160)
탄식의 비참한 역사를 수습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해 가지고 유랑의 생활을 시키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정든 땅, 고향 산천을 뒤에 두고 행객의 노정을 걷지 않으면 안 될 비참한 운명 길을 가르는 놀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가는 길은 비참한 길이었습니다. 국경을 넘나들어야 했습니다. 집시의 대열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이방에서 나그네 신세를 모면하지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로의 간교한 계교에 의하여 자기의 아내를 빼앗기고 자기 일족이 고립되는 상태에까지 몰려 들어갔습니다. (64-210)
그러나 그처럼 몰림받는 행로에서도 아브라함은 자기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잘사는 것보다 이스라엘 민족이 자신을 부르고 있고, 승리가 자신을 부르고 있고, 행복의 터전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것을 더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집시의 행로에서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오직 하나님 앞에 바랐던 것은 소망의 천국으로 가게 해 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주셨던 것입니다. 그 앞에 닥쳤던 쓰라린 고통과 어려운 환경은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을 불러낸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 입장을 탄식했을 것이나 아브라함은 그런 입장에서도 하나님과 더욱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모셔 나왔기 때문에 그의 앞길에는 행복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18-160)
3. 야곱
하나님은 야곱을 축복하였습니다. 축복받은 야곱은 하란에 들어가서 21년 동안 수난길을 갔습니다. 그는 라반에게 열 번씩이나 속임을 당하면서 핍박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는 서러운 자리에 있었습니다. 고독한 자리에 몰렸습니다. 환경을 중심삼고 볼 때, 탄식과 절망에 부딪치는 자리에 섰습니다. 그러나 절망을 호소하는 야곱이 되었던들, 자기 자신을 중심삼고 자탄하는 야곱이 되었던들, 그는 이스라엘을 대행하는 민족적 권한을 차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2O년이 가중되는 수난길에서도 하늘의 축복이 변치 않을 것을 끝까지 믿었습니다. 환경이 아무리 변해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어떠한 재력이 앞을 막더라도 그것을 뚫고 나갔던 것입니다. 거기에 라반이 다른 것을 제기해 야곱이 가는 길을 막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최후의 승리는 누구에게 돌아갔느냐 하면 라반에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야곱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승리의 날을 이 역사상에 남길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탄식하던 하늘이 승리할 수 있는 터전은 탄식하는 무리가 절망하지 않을 때에 세워 나온 역사인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야곱이 그럴 수 있는 절망의 탄식권에 몰렸지만 탄식을 한 것이 아니라, 절망을 한 것이 아니라 당당히 미래의 축복을 믿고 나서는 자리에 섰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1이스라엘권이 성립된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탄식권 내에 사무쳐 있지만 그 탄식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탄식으로 말미암아 창조이상을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탄식이 강하면 강할수록, 가중되면 가중될수록 심정과 이상을 중심삼아 가지고 창조이상이 성사되기를 다짐하는 내적인 결의를 해 나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가는 길은 탄식권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돌아가지만, 거기에 융합되는 것이 아니라 그 탄식권을 밟고 올라서서 승리의 한날을 개척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탄식권을 대대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과 고통이 극한 자리에서도 하늘을 붙들고 '이와 같은 자리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하나님이요, 낙망하지 않는 하나님이다. 탄식하는 자리에서 자극받는 하나님일 수 없다'고 믿고 나가는 무리에게는 기필코 필승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64-212)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받는 것을 귀하게 여기고 그 축복을 받기 위해 인간 세계에 없는 놀음을 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믿고 하란 땅으로 도망가서 있는 정성을 다하고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21년 동안 싸웠던 것입니다. 아무리 반대를 받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사랑의 자리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53-43)
야곱은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서 종과 같이 지냈습니다. 그는 삼촌 라반으로부터 속임을 당했습니다. 그의 삼촌은 그가 원했던 라헬 대신 레아를 주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취하게 되자, 그곳을 도망쳐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21년에 걸친 어려움의 터전 위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그를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라반은 그를 열 번이나 속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생을 겪음으로써, 그는 하란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를 속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천사와 씨름하였던 그의 행동은 그가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 사탄에 대항해 싸운 행동이었습니다. (52-54)
야곱은 뼈가 이그러지면서도 사력을 다하여 싸웠습니다. '내가 21년 동안 수고한 것이 이 싸움으로 판결되는구나! 오늘 이 한밤의 싸움에 이기느냐 지느냐에 따라 나의 생의 운명이 좌우되고 이스라엘의 축복의 터전이 좌우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생명을 걸고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천사가 와서 농담으로 씨름하자고 했겠어요?
천사가 왔을 때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온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를 망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아니면 복을 주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왔느냐? 물으니 복을 주기 위해서 왔다는 그 대답에 '복을 주려면 주지 왜 못 주느냐'고 하니 그것은 책임분담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냥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야곱이 씨름을 해서 이기지 않으면 복을 못 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으면 못 준다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을 걸고 나섰을 때에 야곱은 '오냐, 좋다. 내 손가락이 빠지고 내 팔이 빠져도 결코 지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칼로 쳐도 놓지 않고 목을 잘라도 떨어지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씨름을 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했겠어요? 밤새껏 했습니다. 네가 죽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했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도 입회하고 사탄도 입회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결정을 짓는 그 마당에서 야곱은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천사가 환도뼈를 치고 다리를 꺾어 버려도 야곱은 놓지 않았습니다. 네가 죽고 내가 죽고 둘 다 죽는다 해도 못 놓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을 했을 것 같아요? 10분? 1시간? 2시간? 7시간 이상했다는 것입니다. (20-229)
4. 모세
하늘이 가는 길이 비참한 길이었기 때문에 모세를 따라가는 사람들도 비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길도 비참하였습니다. 모세가 가는 길도 비참하였습니다. 바로 궁중 40년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편이 되어 나섰던 모세는 궁중에서 쫓겨났고, 이스라엘 민족 앞에 자기의 몸을 나타낼 수 없는 운명에 처해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의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먹고 사는 데 있어서 비참한 생활 환경에 몰렸던 것입니다. (64-210)
그는 궁중을 떠나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는 목자생활을 하면서도 오로지 간직한 하나의 마음은 무엇이냐?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편들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낙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신임을 받을 수 있었던 동기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과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지만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고, 내가 고독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의 고독을 대신 책임지기 위해서 느끼는 것이고, 내가 희생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참을 방어하기 위한 방패로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40년 동안 양을 치며 무리를 끌고 다닐 때 늑대의 습격이 왜 없었겠으며, 독사떼의 위협은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위험이 가중되고 고독과 탄식이 휘몰아치더라도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민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내적인 각성을 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날까지 나는 충성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어받아야 할 이스라엘 민족이 그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내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이렇게 나선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였노라'고 하면서 자주적인 권한을 가지고 민족의 선두에 섰던 것입니다. 수많은 민족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민족 앞에 서기에 당당한, 안팎의 심적 태도가 갖추어진 모세였습니다.
십 년 세월이 지나가고 이십 년 세월을 거쳐 삼십 년, 사십 년 세월이 흘러가게 될 때에, 모세는 바로 궁중의 사십 년 호화로운 생활 가운데 뜻 없이 살던 과거지사를 회상하면서 '바로 궁중을 흠모하는 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자기 앞에 닥쳐오는 수난길이 가중되면 될수록 자기가 바라는 하나님의 소원의 나라, 바로 궁중에서 생활하던 이상으로 하나의 천지를 호령할 수 있는 하나의 궁중를 흠모했을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스라엘 왕권을 중심삼고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는 날, 만민이 드높이 이 권위를 찬양할 수 있는 세계적인 주권국가를 흠모했을 것이라구요.
누구든지 그의 사상에 치리받는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고, 열두 지파의 후손으로 태어났던 이스라엘 민족과 자기 선조들의 전통을 이어받고, 심오한 정성을 옛날부터 이어받고, 특권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들도 모세의 사상과 전통과 그 입장을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모세를 이스라엘의 대표자로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니냐. 여러분이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64-213)
그러면 목자로서의 40년 생활은 무엇이냐? 이스라엘 선민을 거느리기 위한 준비생활이니, 40년 이상의 수난길이 앞으로 부닥쳐 오더라도 그것을 극복할 힘을 기르는 연단(鍊緞)과 시련 기간으로 하나님은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다시 내세워서 이스라엘 민족 앞에 보냈던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모세가 고독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축복의 인연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뭣이냐? 소망의 이스라엘 나라를 사랑하고 소망의 이스라엘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자신의 생활 환경을 넘어 내일의 희망의 돛과 같이 그 마음속에 추구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려운 40년 미디안 광야 생활도 무난히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자기의 지난 일을 생각했다면 바로 궁중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꿈꾸었을 것이니, 그 환경이 그리워졌을 것이고, 자기의 환경과 비교하여 그 차이가 크면 클수록 서러워졌을 것이로되 그것을 꿈에도 생각지 않는 입장에 선 모세였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리에서 다시 이스라엘 민족의 주인의 자리에 불리울 수 있는 인연이 엮어졌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되겠습니다.
외적으로 보면 모세는 완전히 때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궁중에서 때를 잃어버렸고,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하늘 앞에 때를 갖지 못한 사나이처럼 고독하게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모세에게는 때를 고대하고, 하늘이 약속한 그날을 고대해 나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 주고자 하는 마음과, 잃어버린 때와 환경을 극복해 넘어갈 수 있는 충렬의 지조가 남아져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다시 묶을 수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를 구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남 모르는 내정적 심정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운 자리에 있어야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 심정을 따라서 동정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숱한 심정적 내연이 배후에 묶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입장에 선 사람은 기필코 하늘을 대표한 하나의 때를 맞게끔 해줘야 되는 것이 하늘의 책임이요, 또 맞아야만 되게끔 되어 있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57-301)
5. 다윗
또한 하나님은 뜻을 대해 나왔던 수많은 우리의 선조들, 특히 비참한 목자인 다윗을 택해 가지고 이스라엘을 지도할 수 있는 자리에 세웠던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는 고독한 한 사람의 목자였습니다. 그 누구와 친구될 수 있는 자리에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민족을 위하여 염려하는 데는 누구보다도 고독한 자리에 섰고 외로운 자리에서 하늘을 흠모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탄식을 염려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대하는 하나님의 염려를 덜어 드리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깊은 심정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되겠습니다.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이 당당한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을 무시하고 나설 때, 이스라엘 군상들이 전멸될 입장에 섰을 때, 다윗은 양치는 목동의 옷을 입고 물매와 돌을 갖고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가 주인으로 삼았던 것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라의 주관을 받았던 것이 아닙니다. 하늘을 주권자 대신 주인으로 세웠던 것입니다. 자기의 선조 누구보다도 하늘을 믿고 나섰던 것입니다. 하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음의 자리에 직면하더라도 하늘이 지켜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 자리에 선 다윗은, 가는 길은 고독하였지만 고독하지 않았습니다. 비참하였지만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탄식을 해소시킬 수 있고, 이들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한을 풀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고 나서는 다윗 앞에 하늘은 같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무리 당당한 골리앗도 다윗 앞에서 하나의 초개와 같이 쓰러지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렇듯 비참한 역사적 사연들을 가려 가지고 나온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비참한 자리에서는 하나님은 지켜 주셨고, 지친 사람들이 또다시 회생하는 것을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64-211)
6. 세례 요한
여러분, 또한 세례 요한을 보라구요. 그도 자기의 사랑하는 집에서 나와 가지고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가정, 세상의 인연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절대시하고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을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아담 해와보다 더 훌륭하고, 하나님을 믿지 못한 천사장 이상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할 수 있는 기준을 인정받을 수 있는 생활을 하도록 내몬 것입니다. (53-44)
예수님을 살펴보기에 앞서, 세례 요한을 살펴봅시다. 세례 요한은 광야로 인도되었습니다. 즉, 그는 집을 떠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분립해서 광야로 나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지냈던 것입니다. 그는 오실 메시아, 하나님, 그의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것이 그가 자기보다 앞서 왔던 선지자들과 다른 점입니다. 그는 메시아가 온 세계를 통치하실 것을 소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기도할 때는 남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나라를 위하여 눈물 흘렸고, 유대 민족이 사탄세계를 다스리시기 위해 오시기를 바랐던 메시아가 오시기를 바라며 눈물을 흘렸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울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는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선지자들은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할 수 없었지만 세례 요한은 오시는 메시아를 위해 그의 갈 길을 곧게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오실 분을 위해 기도를 하지 못했지만, 세례 요한은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그분을 위해 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릅니다. 그가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 자신의 나라의 통치자로서의 메시아를 위하여 기도를 했지만, 반면에 예수님은 전세계의 통치자로 오셨던 것입니다. 요한의 관점은 하나님의 심정과 다소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하나되지 못했던 시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요한의 메시아관은 자리 나라를 위한 메시아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메시아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오실 것이라고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의 규칙이었던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세계를 구하려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야는 더 넓었으며, 요한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시야에는 하나의 국가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을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를 반대했던 이스라엘 민족 편에 서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죽음을 자초하였습니다.
만일 그가 예수님 편에 서서 예수님과 하나되었더라면,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사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과 그리고 세례 요한을 모든 선지자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믿었던 온 민족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52-54)
7. 예수님의 세 제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한 중보적인 화신으로 나타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과 믿음과 사랑을 받아 이 땅 위에 어떠한 악한 사람 앞에도 하나의 소망의 실증체, 믿음의 실증체, 사랑의 실증체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그러한 존재가 되지 않으면 그 어디에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의 기준, 믿음의 기준, 사랑의 기준을 탕감하는 조건을 성립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이 사탄세계 앞에 하나님의 소망,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사랑의 실체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답하지 않으면 아니 됩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소망에 대해 보답할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믿음에 대해 보답할 것이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분적인 사랑에 대해 보답할 것이 아니라 전체에 대해 보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들은 지금까지 그 하나의 기준을 이 땅 위에 찾아 세우고 보답하고자 했지만 전체를 보답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제자를 통하여 그러한 과정형을 나타내고자 하셨음을 여러분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믿음의 결실체로서 나타난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베드로였습니다. 또, 소망의 결실체로서 나타난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야고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결실체로서 나타난 사람은 누구였던가? 이는 요한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한 부분부분을 책임 맡아 가지고 하나되어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오늘날 내가 믿음의 결실을 양보받을 수 있고, 소망의 결실을 양보받을 수 있고, 사랑의 결실을 양보받을 수 있게 되었고, 또 섭리역사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면서 흘러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 사람이 화합하여 하나의 완성체로 완결지어야 할 것이 최후의 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 남기신 최후의 가르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러분들이 최후의 완성자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대신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세 제자를 뿌리로 한 하나의 불변의 실체로 서지 않으면, 세 제자를 세워 놓고 가셨던 신랑 되신 예수님 앞에 나설 수 없게 됩니다. 이걸 생각하게 될 때, 오늘날 우리들은 내 한 자체에서 베드로를 세우셨던 소망의 열매를 내 한 자체에서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요한을 세우셨던 그 사랑의 열매를 내 한 자체에서 거두어야 되겠습니다. (1-92)
8. 베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 골고다 산정의 외로운 길을 거쳐 나갈 때 누구를 다시 돌아보았느냐 하면, 사랑하는 12사도의 대표인 베드로를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뒤를 제일 먼저 따라야 할 베드로의 마음이 변하게 될까봐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염려하는 자신의 마음이 비통함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드로를 돌아보셨던 예수님의 그 시선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다시 느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과 완전히 분리된 입장에 서게 되었으며 예수님과는 관계없는 입장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시는 예수님이셨지만 땅 위의 어느누구 한 사람이라도 죽음의 길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뒤를 사수해 주면서, 마음으로 몸으로 동정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사람을 찾고자 하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수제자인 베드로를 돌아보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의 참사람을 찾고자 하신 뜻이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 사무쳐 있었다는 것을 오늘날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체적인 섭리를 책임지고 오신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될 때 이 이상 슬픈 장면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불신으로 인해 골고다의 길, 죽음의 길을 가는 자신의 사명을 인계받을 수 있는 한 사람을 찾고자 하는 애달픈 심정을 알아주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사무쳤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예수의 애달픈 심정을 알아주셨고, 예수님의 서러운 사정을 염려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30여 평생 오직 하늘의 서러운 사정을 대신하여 걸어 나온 수고의 노정을 회고해 보게 될 때, 인간 대하여 책망하고 싶고, 땅을 대하여 저주하고 싶은 마음이 사무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억누르고 자신의 발걸음을 멈추어 따르고 있는 베드로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내적 심정을 오늘날 여러분들이 느끼지 못한다면 예수님을 중심삼은 하나님의 뜻을 대신 인계받아 만민 앞에 떳떳이 설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을 확실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외롭게 고난의 노정으로 일생을 끝맺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과거 예수님과 맺은 본성의 사랑의 인연을 잊지 못하여 외로운 가운데서 신음하며 말할 수 없이 처량한 입장에 처했을 것입니다. 서러운 예수님을 모욕하고, 죄없는 예수님을 원망하며, 죄없는 예수님을 묶어 끌고 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베드로의 마음도 물론 몹시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전인류를 돌이키기 위한 대표적인 사명을 띠고 오신 메시아인 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제자들을 대신하여 나서지 못하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입장에 서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 처해 있는 베드로 앞에 계집종들이 나와 그리스도의 무리가 아니냐고 질문하게 될 때 세 번씩이나 '모른다'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 일신의 모습이 땅 위의 인간들을 대표한 입장이었음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회고해 보게 될 때,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한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돌아보신 것은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에만 벌어졌던 사실이 아니라 전역사과정이 그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25)
베드로는 어려운 입장에 서신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예수님은 진정으로 자신의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려움이나 자신의 슬픔, 자신의 사정도 잊어버리시고 돌아보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일대 변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그토록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신의 서러움도 잊으신 채 진정으로 자신을 위해 주고, 자신의 앞길을 염려해 주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의 감정은 폭발되었던 것입니다. 또 주님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옛 인연을 느끼고 순간 베드로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의 뜻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각오하고, 하늘을 향하여 죽음의 길을 가면서도 조금도 인간적인 슬픔에 사무치지 않고 늠름하게 인간 구원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애쓰는 것과 부족한 자신까지 염려해 주시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는 마음으로 부족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즉, 베드로는 오로지 예수님을 위하여 충성을 다 바쳐야 할 제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대신한 예수님의 입장과 예수님을 대신해야 할 자신의 입장을 비교해 볼 때,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예수님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는 천양지차(天壞之差) 가 있음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주님처럼 하늘을 중심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하고 믿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 앞에 몸둘 바를 모를 정도의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즉, 불신의 자아를 놓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하늘을 향한 신앙노정에 있어서 영원불변의 모습으로 우주적인 사명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밀고 나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순간, 베드로의 마음이 일변해서 일생 동안 주를 위해 살아야겠다는 충동감이 일어 났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되겠습니다. 불신의 자아를 깨닫게 될 때부터 베드로는 예수님과 자기와의 관계, 혹은 서로의 생애노정을 비교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더더욱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뜻 나를 위해서, 이 땅 위의 만민을 위해서 자신의 행복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전부를 하늘 앞에 제물로 바치고, 십자가에 끌려가시면서도 원망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세 제자는 자신들의 생애가 너무 개인 중심적이었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를 중심하지 않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제자들은 스스로 자신을 반성하고, 예수님이 늘 소원하시던 뜻을 인계받아 이 땅 위에서 그 뜻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고 맹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다음, 베드로는 어떤 것을 느꼈는가? 자신의 불신을 느끼는 동시에 주위의 불신을 느꼈던 것입니다.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느누구에게 물어봐도 죄 없다고 할 예수 그리스도를, 악한 주위 사람들이 묶어 놓고, 채찍질하면서 기뻐하는 것을 보면서 베드로는 핍박당하시는 예수님의 시선 속에서 예수님의 서글프고도 외로운 마음을 꿰뚫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억울한 입장에서도 하늘길을 지켜 나가는 것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뜨거운 시선 앞에 베드로는 주위 환경의 불손함을 느꼈던 것입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편이 될 수 없는 악한 무리들을 멸하기 위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위의 불손한 세력과 싸우겠다는 정의로운 각오를 했던 것입니다. (2-28)
그 미욱장이 베드로, 야고보, 그들이 사도는 무슨 사도입니까? 베드로와 여러분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기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데도 보고 가만히 있었고, 도망 다녔던 그들보다 여러분은 더하지. 그래도 예수님이 돌아가셨다가 부활한 후 회개했기 때문에 다시 사도의 이름을 준 것입니다. 즉 거꾸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거꾸로 죽었어요. 여러분 기분 나쁘죠? 그러한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종교가 기독교라는 것을 여러분을 알아야 합니다. 배신하였던 그들이 할수없이 결속하여 세운 종교를 믿어요? 선생님은 그들에게 항의합니다. 그들을 만나서 공격을 합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20-91)
9. 스데반
스데반은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모험성이 있고 좀 모자란 듯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생명을 걸 때는 멋지게 결정하고 나서는 기질이 있었다. 이러한 기질이 순교자로서의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써 그는 기독교에서 제1대의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본다면 스데반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18-282)
여러분들 스데반을 다 알지요? 그는 무식한 사람이예요. 아주 미욱한 사람이다 이거예요. 아, 돌에 맞아 죽을 줄 알면서도 들어가니 미욱한 녀석이지 뭐예요. 여러분도 생각해 보라구요. 사람은 다 한 번은 죽는다구요. 여러분도 한 번은 다 죽는다구요. 여러 날 앓아 가지고 고통 받으며 죽는 것보다도 총에 맞아 죽거나 또 공적인 입장에서 매를 맞아 죽을 수 있으면….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구요. 어느 것이 더 편하냐 하면 공적인 일을 하고 죽는 것이 더 편하다구요. 그런 생각을 해야 돼요. (82-L80)
10.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일대를 전도하러 다닐 때 죽음이 동반하는 많은 문제들이 부딪쳐 왔습니다. 자기의 종족이 위협하고, 이방인이 위협하고, 원수들이 위협했지만, 사도 바울은 그 위험을 자기가 응당 받아야 할 선각자의 책임과 개척자의 사명으로 알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자기의 짧은 생애노정에 있어서 역사적인 모든 수난의 행로를 맞이하여, 이것을 규합하고 탕감시켜 나가겠다는 일념 아래서 개척노정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기독교가 수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여러분은 사도 바울에 비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축복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늘의 혈족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을 아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단 하나 자기 개인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해왔던 것입니다. (30-111)
11. 그 밖의 선지자들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은 자기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손을 들라 하면 들어야 하는, 하나님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책임자라도 그와 같지 않으면 하나님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고생에 대하여 동정하기에 앞서 그들을 보내기까지 하나님의 고생이 더욱 컸음을 알아야 합니다. (11-281)
'에스더의 웃는 모습을 가져라. 어떠한 박대를 받아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을 가져라. 슬퍼도 슬프지 않은 모습을 가져라. 억울해도 그 억울함을 잊을 수 있는 모습을 가져라. 분통하고 분통하거든 태어난 것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각오를 하고 참으라'고 하나님은 권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회고해 볼 때 하나님은 오늘날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17-92)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벳새다 근처에 있는 빈들에서 수많은 무리에게 떡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런데 떡을 먹었던 무리들이 어찌하여 다 망하였던가? 말씀을 들었던 그 민족들이 어찌하여 예수를 배반하였던가? 3년 동안 같이 고생하면서 따르던 제자들이 어찌하여 예수를 배반하였던가? 그들이 배반한 이유는 말씀이 그날그날을 위한 말씀인 줄로만 알았고, 주시는 떡이 그날 그 한시간의 배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주시는 것으로만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자기 자신을 통하여 세상 끝까지 옮겨주어야 할 말씀인 줄 몰랐습니다. 예수가 나누어 주는 떡이 자신을 통하여 세계인류 앞에 나누어 주어야 하는 떡인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4-85)
여러분은 중세에 있어서 청빈한 생활을 한 대표자로서의 프란체스코(GIOVANNI FRANCESCO BERNARDONE)라는 양반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청빈을 주장했어요. 그렇게 하면서 어려운 생활, 외적인 환경에서 몰린다고 해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슬퍼하고 고통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느꼈더라면 하늘의 뜻을 이어받을 수 없었지마는 그 고통 가운데서도 감사하고, 고통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고통 가운데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그러한 입장에 섰기 때문에 하나님이 협조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시대를 우리가 거기에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66-41)
우리가 성 프란시스의 성업을 통해 알고 있듯이 만물, 즉 온 피조물이 옹호해 주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물론 그 동안 여러분들은 핍박도 많이 받았을 줄 압니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으니 말입니다. 대신 아버지를 소유하고 아버지의 심정을 소유하십시오. (11-322)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올 때, 토마스(THOMAS) 목사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그 자리에서 기도할 때 '아버지여, 제가 여기에 왔다가 죽습니다. 저는 구원받기 위해 전도 나왔으니 저는 천국 가고 이 민족은 지옥 가야 합니다' 하는 기도를 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 저는 죽더라도 제가 흘린 이 피 대신으로 이 민족을 부활시켜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삼천만 민족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추모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라를 이용하여 자기가 빛나겠다고 하는 사람은 나라와 관계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눈물을 흘려도 세계를 위하여 흘려야 됩니다. 여기에서 국가적인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를 위해 눈물을 흘려야 됩니다. 아직 세계적인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눈물을 그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미래를 향하여 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역사의 뜻 앞에 인연되는 겁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중심삼고 출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삼고 출발해야 합니다. 자신을 중심삼고 출발하면 하나님에게 아픔이 남아진다는 것을 잘 알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반드시 하나님과 같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몰라도 좋습니다. 하나님이 슬프면 자기도 모르게 슬픈 마음이 되며, 오늘같이 날이 이렇게 청명하여 환경에 기쁠 수 있는 내용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기뻐하는 입장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3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