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출생
출애굽기 1장; 2장 1-10절
출애굽기 12장 40절을 보면 이스라엘 후손이 이집트에서 430년간 머물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창세기 15장 13절과 사도행전 7장 6절에서도 400년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이집트 체류의 실제 기간을 200년이 조금 넘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스베덴보리는 그의 저서 「천국의 비밀 제 1502항」에서 430년이란 기간은 야곱이 이집트로 갔을 때부터가 아닌 아브라함이 이집트로 갔을 때부터 계산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말씀 속의 숫자는 역사적 정확성 보다는 그것에 대한 상응이 더 중요하다.
요셉을 등용한 파라오는 야곱의 가족들이 이집트에 기거함을 환영했고 그들에게 살기 좋은 비옥한 나일강 삼각지를 내주었다. 그러나 요셉이 죽고 난 후 히브리인들의 숫자가 계속 늘게 되자 (기록상으로는 칠십여 명에서 성인 남자만 육십여 만으로 불어났음) 새로운 파라오들은 그들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본문에서 읽는 바와 같이, 파라오들은 결국 아주 강력한 수단인 산아제한 정책으로 히브리인의 남자 수를 줄이려 했다.
말씀 속의 이스라엘의 역사는 주님에 의한 영감으로 기록되었고, 이 역사는 우리와 주님과의 관계나 인간 안에 존재하던 교회의 역사를 표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가족은 흉년이 들어서 이집트로 내려가 양식을 구했고 그들은 요셉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요셉을 이집트의 통치자로 세운 「파라오」는 우리의 외향적 기억들이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질 때를 묘사한다. 흉년을 만나 이집트로 내려간 이스라엘은 우리의 순수한 영적 애착들이 잘 보호되면서 지식을 획득해 가는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요셉은 사후 썩지 않도록 관에 넣어져 이집트에 안치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이기적인 이득을 위한 지식만을 추구하고 그러한 지식들이 우리의 삶에 가지는 영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잊어버린다. 그 결과 세상적인 것들만을 목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그것들을 쫓아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이렇게 삶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세상적인 욕망에만 집착하는 것을 “요셉의 사적을 모르는 (출애굽기 1:8)” 파라오가 등장하는 구절이 상징하고 있다. 이기심과 세상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의 맹점은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그 사람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돈도 벌고 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살아가니까 성공적이고 진취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은 이기심과 욕망이라는 거친 주인 밑에 있는 노예와 같아서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더 큰 욕망을 향해 끝없이 달리게 된다. 돈이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다가 결국은 자신의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어린 시절에 듣던 이야기들이나 어른이 되어서 보는 T.V. 의 드라마에서 아주 흔히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의 속성이 이기심과 세상적인 욕망에 이끌리기가 쉽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기심이나 세상적인 욕망에 끌리는 삶은 결국은 스스로를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강조한다. “주님에 의하여 인도되어 지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진정한 자유를 행사하는 것이다.”
말씀 중에 ‘아들의 출생’은 어떠한 상황에서 있게 되는 새로운 진리의 발달을 상징한다. 신생아들 중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은 세상적인 욕망을 우리 삶의 목적으로 삼을 때 우리의 이기적인 원리(파라오)가 우리의 영적 성장에 필수적인 어떠한 새로운 진리의 발전도 용납하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모세가 구원된 이유는 그가 그의 민족을 이집트의 속박으로부터 구하고, 또한 주님께서 계명을 내리시기 위한 그분의 도구로 쓰여야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세는 하느님의 법을 의미한다. 주일 학교를 다닌 사람이면 어린 시절부터 십계명에 어느 정도 친숙했을 것이다. 십계명을 성경을 통해 배우지 않은 사람들도 간접적으로 그것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세상적 측면에서도 우리에게 닥칠 시험을 극복할 수 있는 모든 질서가 십계명 안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십계명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이집트의 속박에서 빠져 나오도록 인도해 주는 것이다. 모세의 친어머니는 이스라엘 인이었고 양어머니는 이집트 인 이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법은 주님으로부터만 나오는 것이지만 세상적인 것을 얻으려는 우리의 욕망들도 때로는 바람직하게 보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왕골 상자(the ark of bulrushes)를 물 위에 잘 뜰 수 있도록 역청과 송진을 발랐다는 기록 역시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의미를 그린다. 노아의 방주 역시 역청으로 발라져 있는데, 역청이란 우리의 이기심을 표현한다. 우리는 때로 스스로가 받게 될 손해가 두려워서 잘못된 행위를 스스로 금하기도 한다. 그 예로 운전 중 신호등을 지키지 않으면 벌금을 내야하는 불이익 때문에 신호등을 잘 지키는 것이 이와 비슷한 것이다. 나일강의 강가에 자라는 왕골(골풀) 즉 이집트의 파피루스는 진리로부터 비롯된 낮은 차원의 것들을 상징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왕골상자는 말씀의 글자를 의미한다. 이런 시각에서 「파라오」의 딸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는 본능적 열정을 상징하며 그것은 때때로 사람들이 성경을 읽도록 인도한다. 하지만 주님의 섭리로 아기 모세는 이집트의 공주에 의해 구해진 후에도 친어머니에 의하여 보호되고 양육되어진다. 이것은 하느님의 진리는 하늘 아버지로부터 상속된 주님과 그분의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을 수단으로 하여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뿌려진 씨 즉 “남겨 두신 것(remains)”을 소중하게 키우신다는 것을 묘사한다.
모세가 「파라오」의 궁전에서 성장하는 것은 말씀이 세상에서 교육의 한 부분으로 우리 안에서 성장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모세는 우리가 거의 인식하지 못하는 깊은 주님의 섭리 하에 입양되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