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www.everyday01.com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예배당 서핑 대신 성도찾기>의 줄거리:
서핑(surfing)은 파도타기를 뜻합니다만, TV의 채널을 계속해서 돌리거나 또한 인터넷에서 이곳저곳 사이트를 돌아다니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인터넷 서핑이라고 하지요. 기독교인이 현저히 줄면서 함께 나타난 현상이 소위 '교회' 서핑, 정확히는 '예배당 조직 서핑'입니다. 그 대신 같은 열심으로 내 주변에서 성도 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예배당 서핑 대신 성도 찾기
(마태복음18:15~20)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예배당 서핑 대신 성도 찾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예배당 서핑 대신 성도 찾기’
서핑(surfing)은 보드에 올라타서 파도를 타는 스포츠입니다. 한편 TV를 볼 때에 관심 있는 채널을 찾지 못하고 계속해서 채널을 돌리는 것을 서핑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터넷을 할 때에 관심거리를 찾아서 이런저런 사이트를 힐끔거리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쇠락하면서 나타나게 된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지역에 있는 예배당 조직들을 서핑 하듯이 기웃거리는 것이 문화적 현상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교인들이 한 예배당에 머물지 않고 어느 예배당이 좋고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잘 하는지 찾아 헤맵니다.
이러한 현상 속에서 전체 교인 수는 수직 하강하고 있음에도 정작 교인들은 이를 체감하지 못합니다. 이목과 주의가 집중되는 몇몇 대형 예배당 조직에 교인들의 관심과 시선 또한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기독교가 얼마나 심각한 상태에 처해있는지에 대해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확언하건대 지금과 같은 상태가 지속되면 머지않은 기간에 대형교회 안에서도 지금 기독교에서 일어나는 일이 똑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교회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교회라는 말을 사용할 때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둔 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통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에 앉으신 역사적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오직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이 역사적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느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에 머무르게 된 사람과 머무르려고 하는 사람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모든 교인들의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모여 있습니다. 다만 교회는 그 본질적인 특성상 이 세상에서는 모임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마음이 하늘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모임을 땅에서는 교회라고 부릅니다.
다만 우리는 그 모임이 어떤 것이냐에 대해 오해하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세상에 드러나기 위한 필수적 존재방식인 모임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20절을 보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임의 가장 전형적인 모델입니다.
세상은 교인들의 모임을 통해서 교회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모임의 목적은 만남입니다. 만남은 단순히 한 장소에 모이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만남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바로 말하기와 듣기입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열차에 서로 모르는 사람이 같이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만남은 아닙니다. 공간적으로 가까이 앉아있지만 말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만남의 성립은 공간적으로 함께 있느냐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같은 관심사에 대해 말하고 들을 수 있느냐가 만남의 요소입니다.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만남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마음이 하늘에 가있는 사람들 전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하나의 교회 안에서 모임이 필요한 이유는 말하고 듣기를 위한 만남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충만하게 채워져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또 마음이 관심하는 대상에 대해 듣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그 관심의 대상이 예수님과 예수님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에 대해 말하고 싶고 듣고 싶어서 만남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관심거리에 대해 말하고 듣고 싶어 합니다. 교인의 관심의 대상은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입니다. 예수님께 관심이 있다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에 앉으심으로 마음이 가득 찼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교인이라면 이러한 사건들을 말하고 싶어 함이 당연합니다. 또한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학교의 이름으로 만나면 동창회이고, 골프의 이름으로 만나면 골프동호회입니다. 헤어스타일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면 미장원이고, 성적 올리기라는 이름으로 만나면 학원입니다.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만나면 병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이들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음이 충만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시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충만해지면 하나님과 성령님에 대해 말하고 싶고 듣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 모임의 본질적 이유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두세 사람이니 나를 빼고 나면 한두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배당 조직이 아니라 한두 사람의 진정한 교인 즉 성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교회의 성도가 되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잘 했다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이제 마음을 채우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 말하고 들을 사람을 찾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모임은 커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를 제외하고 한두 사람이라도 충분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교회가 존재하는 방식으로써의 모임이 이루어지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입니다.
교회의 모임은 말하고 듣는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나와 함께 말하고 들을 한두 사람의 성도를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꼭 예배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조직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모임은 말하고 듣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더 많은 사람이 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여러 사람 앞에서 말하더라도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하는 사람과의 일대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듣는 입장이 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리해봅니다. 교회는 지구 위에 단 하나뿐입니다. 교회의 생존방식인 모임은 만남을 위한 것인데 이 만남의 목적은 말하기와 듣기 위함입니다. 내속에 충만한 하나님을 말할 수 있고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가진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 들을 수 있다면 모임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입니다.
맘에 드는 목사나 예배당을 서핑 하듯이 찾아다니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모임은 나의 삶의 현장에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고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들을 수 있는 한두 사람이 있다면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모임은 완벽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모임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예배당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미 존재하는 예배당 조직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저는 그 예배당 조직을 교회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그 조직 안에 모인 사람들이 과연 성도인가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도를 확인하는 방법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십니다.
신학자들은 교회를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혹은 가변적 교회와 불가변적 교회 같은 용어를 사용해서 구분하기도 합니다만,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교회 모임의 구분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에 속하는 성도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16~18장에서는 변화산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을 통해 교회의 의미를 드러내십니다.
특히 본문 15~17절에 그러한 내용이 비유를 통해 상세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듣기 위해 모임을 갖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때에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고 듣는 상대가 진정한 성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과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교회의 이름으로 만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교회 안에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로 인해 성도의 만남이 방해를 받을 수 있기에 교회 밖으로 쫓아내야만 합니다. 우리는 성도를 만나기 위한 분명한 기준을 가져야만 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예배당 조직 안에 속했다고 다 같은 교인이고 성도인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배당 조직이 진정한 의미의 교회로써 교인들의 모임이 되도록 기도를 드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에 나온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교인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은 필요합니다. 예배당 조직에 참석하지 않을지라도 교인일 수 있고 아무리 헌신적으로 참여해도 전혀 교인이 아닌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당 조직에 속해있는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이 드러내신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성도일 수 없습니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과 다름이 없으니 교인으로 만날 필요도 없습니다.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전혀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는 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세리는 로마 정부의 앞잡이가 되어 백성들을 억압해서 세금을 착복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로마 정부에 팔아먹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인이 이방인과 세리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세리가 로마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듯이 범죄한 교인은 교회를 세상에 팔아넘기게 됩니다. 교인은 교회에 속한 자로써 세상에 사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했으면서도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를 세상과 똑같이 만들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교인들의 만남을 이루기 위해 진정한 교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범죄는 국가의 법을 어긴 것을 일컫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권고하여 회개하면 무마 될 수 있는 내용임을 통하여 이 범죄가 법률적인 문제가 아닌 영혼의 범죄에 대한 내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범죄의 최고 단계의 판결과 징계는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별다른 징계가 아닌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중세시대에는 교회가 세속의 권력까지 지배했기에 교회에서 파면 당한다는 것이 무서운 일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대에 예배당 조직에서 쫓겨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당장 기분은 나쁘고 자존심은 상할지 모르겠지만 사회생활에 별다른 지장이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권고하여 회개하지 않는 자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모든 단체에는 회원의 자격이 있습니다. 그 자격을 어기거나 기준에 미달이면 단체에서 나가야만 합니다. 교회 또한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는 모임을 통해서 세상에 존재함이 드러나고 모임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때에 범죄란 성도의 기준이나 교인의 기준 혹은 선민의 기준에서 어긋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교회에 속한 교인의 기준은 마음을 땅에 두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만이 마음을 채우실 유일한 대상으로 삼는 자들이 교인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타난다면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범죄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모임에서 정말 죽겠다고 고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도의 기준에서 죽겠다고 고민할 상황은 하나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 것처럼 오직 하나님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괴로워서 죽겠다고 고민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으로 행복하고 기뻐하고자 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그러나 육체로 인해 마음이 자꾸 세상에 끌려가고 포로가 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성도로써 죽겠다고 고민하고 탄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해보니 죽겠다는 이유가 사업이 안 되고 돈이 안 벌리는 것이었다면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성도의 범죄입니다. 자녀가 말썽을 피워서 괴로워 죽겠다고 한다면 이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진정한 교인의 마음상태가 잘 드러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기뻐하시며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입니다. 즉 우리를 지금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건져내 주시는 구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머물고 있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데려가시는 분이십니다. 이 일을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써 마음을 드릴 때에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의 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될 때에 나타나는 대표적 예가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하늘에서의 모습으로 변하신 예수님을 보았을 때에 산 아래 인간세상에서 꿈꾸던 모든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마음을 하늘로 보낸 성도들의 특징입니다. 이것은 기계적인 과정이 아닌 인격적인 대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곤고함으로 인해 탄식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이 세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육체의 근성과 원죄의 체질은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성도가 탄식한다면 이것이 유일한 이유입니다.
참 성도는 사업이 안 됨으로써 걱정하지 않습니다. 사업으로 인해 고민하는 대신에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합니다. 변화산의 베드로와 같은 마음을 갖지 못할까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이라는 사람이 예배당에 나와서 사업에 대한 기도만 한다면 어떨까요? 하나님께 기도해서 사업이 부도나는 것을 막고자 합니다. 직원들 월급 제대로 주고 먹고 사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하나님이 이 일을 안 해주신다고 탄식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범죄입니다. 마음을 하늘에 올려 보내고 하나님으로 채운 교인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 이렇게 세상에 마음이 묶인 교인을 발견했을 때에 권고해야 합니다. 그가 목사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상관없습니다. 목사님도 마음이 예배당 건축에 다 쏠려있으면서 하나님으로 기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인들을 상대로 오직 예배당 건축을 노래하고 있다면 이러한 상태는 성도가 아니며 교인도 선민일수도 없다는 것을 권고해야만 합니다. 예배당 건축은 목사님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면 이루어질 것이고 없다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목사님이 이 땅의 예배당에 마음을 두어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기에 교인이 아닙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기쁨과 만족을 찾고 있는 상태가 성도의 기준이 됩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이해할 수 없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나온다면 그것이 범죄입니다. 성도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재판이 벌어져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다만 우리가 누군가를 교인에서 벗어났다고 여기기 전에 먼저 권고해야만 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의 유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과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지고 사는 인간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세상의 붙잡힘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본문 15~17절을 보면 세 번의 권고의 과정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혼자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두세 사람이 가서 권고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해서 교회로부터 권고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듣지 않고 마음이 땅에 묶였음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는 성도로써의 만남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과는 모임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한편 이러한 자들을 문제시 할 수 없다면 그 모임은 성도의 모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전체이자 하나로써의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모임에서는 빠져 나와야 할 것입니다.
저는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이제까지의 신앙의 여정을 보면 과연 신앙생활이라 부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의문스럽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했던 기간이 길었습니다.
목사님이든 장로님이든 말에서 마음에 들어있는 것들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이 땅에 있는 것인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인지는 5분만 듣다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성도가 성도를 만나는 것은 서로의 세상 문제를 의논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본문 19절을 보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말씀을 오해해왔습니다. 예배당 조직 안에서 두 사람이 합심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해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합심의 헬라어 원문을 보면 심포네오(συμφωνέω)라는 단어입니다. ‘심’은 ‘함께, 같이’ 라는 뜻이고 ‘포네오’는 ‘목소리를 내다’라는 뜻입니다. 즉 심포네오는 동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동의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동의하시겠다니 엄청난 약속입니다. 이 두 사람은 마음이 하늘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 땅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기쁨과 만족과 평강을 하늘에서 찾는 두 사람이 동의하는 이 땅의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동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 문제로 고민하는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때에 우리는 이 분이 땅에 포로가 된 상태에 있음을 두고 권고해줘야만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 마음을 두면 사업은 하나님께서 뜻대로 이끌어 가시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설령 극단적으로 사업이 망하게 될지라도 망해야 하니 망하게 하시는 것임을 가르쳐줄 때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성도로써 합심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잘 되기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잘못된 일이었다고 받아들이고 회개한다면 성도의 합심이 이루어질 수 있고 교인으로써 모임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합심한 문제에 대해 동의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예로 출애굽한 장정이 60만이었습니다. 그러나 40년이 지난 후에 정작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습니다. 나머지 59만 9998명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에서처럼 정말 두 명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여 있었던 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선민이었지만 그 중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이자 교인이었던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뿐이었습니다. 분명히 선민이라는 이름하의 단체에 속해있었지만 나머지 59만 9998명은 성도이자 교인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복지를 하늘나라로 비유해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의 길을 따름으로써 마음을 하늘로 보낼 수 있고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둘 있습니다. 이들이 사업을 하면서도 사업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장사를 하면서도 장사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자녀를 기르면서도 자녀에게서 기쁨을 찾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늘에서만 기쁨을 찾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만나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 듣는다면 교회로써 성도의 모임을 가진 것입니다.
반면 1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이는 예배당이 있습니다. 이 예배당에서 날마다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돈 많이 벌고 형통하고 승진한다는 말씀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최종적으로는 땅에서의 성공을 위해 하늘을 수단 삼고자 했습니다.
진정한 성도인 두 사람이 이 교회의 사람들을 보며 성도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이들의 말에 동의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기다리셔도 하나님만을 기쁨으로 삼겠다고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는 마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모여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따라가려는 마음이 없다면 성도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교인도 아닙니다.
교회의 모임은 만남을 위한 것입니다. 만남은 말하기와 듣기를 위한 관계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또 하나님만을 관심의 대상으로 여기기에 하나님에 대한 말을 듣고자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임의 필요충분조건은 성도입니다. 성도로써 한두 사람이 만나면 그것이 교회의 모임이 됩니다.
우리는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처럼 예배당 조직을 서핑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마음을 하늘에 두고 있는 성도를 찾으려고 해야 합니다. 성도는 삶의 현장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주권의 현장으로 삼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몇 만 명되는 예배당에 나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비록 교인이 몇 명밖에 없는 개척교회에 나갈지라도 성도의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46절에서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진정한 성도로써 한두 사람과의 모임을 이루라는 것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마땅히 힘쓰고 이루어져야 할 모임이 여러분의 삶에 든든히 뿌리내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모임을 통해 말하는 동안에 하나님 부자가 되고 듣는 동안에 하나님 부자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에 앉아계심의 사건이 바로 나의 사건임을 말하고 듣는 동안에 더 확고하게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런 진정한 성도의 모임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락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너무나 많은 은혜를 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허락해주셔서 감사하고, 주님의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만들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으로써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 말하고 싶고 듣고 싶습니다. 그러한 모임을 위해 필요한 성도를 찾기에 하나님께서 은혜위에 은혜를 더하셔서 진정한 성도를 찾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