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李瑚燮 (이호섭)
1941 동경예술대학 .우에노 음학학교 졸업 청주사법 음악선생님으로 발령된후 서울대,수도여사대,숙명여대, 경희대 중앙대에서 음악교수역임. 저서로는 "현대피아노 독주법"."이호섭 가곡집". "이호섭 어린이동요곡집" 1975년 30년간 모은 가곡집 <피리>에 12곡 출반, 노래는 테너 김금환 바리통 김부환, 소푸라노 박노경, 엘토 이정원에 반주는 작곡가가 직접 했다. 작품으로는 건설의노래, 자장가,국화 옆에서, 무덤, 울음, 임의노래, 접동새, 피리, 옛날은 가고 없어도, 기다림, 눈 오는 밤에, 나뭇잎 하나, 나그네의 노래, 모란이 피기까지는, 파랑새, 등이 있다. -1975년 5월 27일 오후 7시반에 이호섭 가곡발표회가 명동 예술극장에서 열렸다. 이날 발표는 교향시 <가을의단상>과 .합창조곡으로 <자유>. 실내악과 피아노및 가곡등으로 편성되였는데 자장가,기다림, 옛날은 가고 없어도, 어부의 노래, 건설의노래, 임의노래, 등 18곡을 소프라노 채리숙, 정영자. 테너 엄정행.바리톤 김박열씨의 협연으로 성황을 이루었다. 1991년 1월 18일 숙환으로 별세
-내가 이호섭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인연은 1964년 봄. 내가 26세일무렵 그때 나는 군을 갓 제대고 다니던 대학에 복교해서 대학을 다니면서 한편으로는 공무원 시험을 치루고 서울경찰학교 직원(경사=서무반장)으로 발령받은 상태여서 신분이 대학생도 되고 경찰관도 되는데 복덕방 아저씨는 날보고 신분은 대학생으로 해달래는것이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그집 주인 내외가 모두 대학 교수이므로 경찰은 별로 안좋아 한다는것. 하기야 그때나 지금이나 경찰관에게 문간방을 빌려주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것이다. 내자동 217번지는 골목 깊숙하게 들어앉은 한옥인데 "ㅁ" 자형으로서 전형적인 한옥인데 대문을 역도 들어서면 행랑방이 있고 안채와 사이를 막는 중간문이 있다. 안채에는 이댁 가족들이 산다. 내가 얻은 방은 행랑방이라 그집에 드나드는 사람은 내 방을 거쳐야 안채로 갈수가 있으니 어찌보면 내방에 사는이의 신뢰가 주인댁으로서는 시경이 쓰였을것이다. 예술가 내외라고 귀띔을 했다. 나는 바싹 호기심이 땅겨 "혹시나?" 가족상황을 물었더니 큰아들은고1, 둘째는 딸인데 중학생 막내는 아들인데 미취학이란다. 주인양반이 피아노를 치는분이라 좀 시끄럴건데.. 복덕방은 묻지도 않는데 내 비위도 마추려고 했다.
대문 초인종을 누르자 이미 전화로 연락을 해서인지 그집 식모가 중문까지 열고 기다렸다가 우릴 안으로 안내했다. 안채 대청마루에 앉있는 이집 주인인 듯 한 미녀 여인이 날 한참 보면서 대뜸 묻는다는 말이 학생이 맏느냐는 것이였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의아스러운듯 말을 하지안않고 머묻거리자 눈치를 챈듯이 복덕방이 아 이분은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에 복학을 해서 나이는 들었을겁니다. 그리구 대머리때문에 나이가 들어 뵈는군요. 싱글이구 대학생이구 고향이 충청도구 이름도 우리영감님괴 비슷하네
1965년 시절 이호섭교수과 이화용교수
주인 마님은 웃었다. 인상이 너무좋네요. 우리 한식구로 지내요. 호호호 하자 조바심 고객을 노칠세라 긴장했던 복덕방은 길게 탄식을 하면서 얼른 준비해온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나누어 주고는 도망치듯 사라지고. 그제사 안방 미다지 문뒤에서 밖에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던 대머리 투성이 영감도 기지게를 펴며 미다지문을 재키고 걸어 나오더니 헤헤헤 하며 내 손을 덥석 끌어 잡고는 나 이호섭이라 합니다. 하고 인사를 한다. 그이가 바로 이호섭 교수다. 내가 지금부터 회상의 글을 쓰려는 너무나 그리운 분이다.
그집의 내 위치는 정리가 안된다. 하숙생도 아닌데 아침 세면부터 화장실 까지 이집 가족과 함께 사용하고 TV도 안마루에 들어가 함께본다. 그리되고 만것이다. 아들 장균이가 문제였다 이집 식구들수를 맞출수가 없었다 이호섭씨는 호형호재로 하자는데 장균이 녀석은 날 꼭 형~ 하고 부르니 말이다. 그럴때 마다 이화매 여사가 핀잔을 주건만 날 형이라고 불러대는것이다. 장오와 성혜는 깍드시 아저씨라 불렀다. 하기야 나도 이화매 여사를 형수님이라 부를수가 없어서 네짱(누나)로 불렀으니 누구 나무랠수야 없다. 성혜는 엄마와 아빠를 조화롭게 닮아서 예쁘고 상냥했는데 장균이는 이집안 의 돌연변이같았다. 건방지고 아는게 많아 고3같지가 안았다.
겨울이 되자 총각은 늦게 퇴근하여 방에 들어가면 안집 식모가 요를 깔아놓고 연탄불을 갈아준 덕에 방바닥은 언제나 따듯하다. 연탄불이 꺼지면 시연아줌마는 자기식구인양 불을 갈아준다. 고독한 총각신세 .그집에서는 충청도 귀한 양반 총각이 객지에서 공부하는라 고생한다고만 생각하는지 무척 신경을 쓴다. 첫눈이 내린 어느 겨울밤이다. 그날 따라 객지의 고독감에 휩싸여 나는 일찍 들어와서 누어 있는데 안 주인이 들어오다가 내 방문을 열더니 요밑에 손을 넣어 따뜻한가 확인을 하고는 문을 열어주려고 나온 시현아줌마(식모) 에게 연탄불을 잘 챙겨주라거 당부하면서 들어간다. 나는 잠을 자지 않고 있었지만 자는척하고 있었다.
1961년 10월 군에서 제대하기 직전 사귄 여군간호장교 신중위가 1963년 가을에 양수리 부대안에서 스스로 자진하는 바람에 나는 심각한 허탈감에서 헤어나질 못했다.그런 와중에 이화용 여사의 맛선권유는 나로서는 달가울수가 없었다. 경황이 없이 보내는데 전몰군경유가족회의 김여사 소개로 알게된 박길자양이 217번지 문간방을 자주 드나들고 곂쳐서 대학 한반의 여친이 자주 드나들게 되자 이여사의 나에 대한 신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하루는 동급생 여친 희승이가 밤 12시가 넘도록 집에도 가지 않고 내방에서 계속 술을 마시며 올나이트를 하려 하자 이여사가 중문을 열고 나오더니 아들인 고등학생 장균이를 불러 희승이를 집에 데려다 주게 했다. 중문으로 막혀저서 내방은 별채나 같건만 이여사의 신경을 건드려서 결국 쫓겨나 장균이는 들여 보내고 내가 통금 넘은 광화문에서 경찰관 신분증 덕으로 심야 택시를 잡아 태워 보낸 이후로는 대학을 안가니까 소식이 끊겼는데 바로 희승은 시집을 가버렸다. 길자는 희승이와 만나는 줄 오해하더니 미련도 없이 대구로 시집가고 나는 다시 고독한 세월을 못 이겨 다시 책을 들고 사무실 창고안에서 틀어 박혀 책과 싸웠다 어느날인가 이른새벽인데 내방의 외창문을 똑똑똑 하고 노크하는 사람이 있었다. 일어서서 창을 열고 밖을 내다 보니 어둠이 덜 가신 골목 담밑에 한 소녀가 서있다. 내가 내다보자 그녀는 대문 좀 열어 달라는것이였다. 누구냐구 물었더니 이집 조카란다.용모로 보아 귀한 집 소녀임에 분명했으나 그래도 이른아침에 아무에게나 문을 열수도 없어 망서리고 있는데 마침 내방 연탄불을 확인하려고 나온 이집 시현아줌마가 알아보고 문을 열어주었다. 이 소녀가 40대가 된 1980년대에는 세간에 이름을 날린 사채시장의 여왕인 장영자 바로 그였다. 당시 그녀는 서대문 에 있던 국제대학인가에 입학했지만 아저씨가 재직중인 숙대로 옮겨보고 싶어 상담차 이모부를 찾아온 셈이다. 그 녀의 어머니는 이집 마님 이화용의 큰언니 이화애 여사며 이분은 세브란스의대가 연희동으로 이전하자 그 자리에 이엽 이용학교를 차려서 당시 해외 미용기술로 이민가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신 분이다.그 당시는 새마을 운동으로 여성들이 직업을 갖는 것이 일반화 되고 특히 해외이민의 문이 활짝 열린시대여서 이미용 기술은 인끼가 높았다. 그집안 얘기가 나왔으니 몇마디를 더하면 바로 장영자 여사의언니 (성희)는 서울대재학시절에 이규광장군의 부인이 되였다. 나는 비록 경찰에서 월급은 타지만 그당시에는 고시공부하느라 솔직이 경찰내부 일은 잘 몰랐다. 누가 서울시경국장인지 모르던 시절이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날 아침 일찍 찾아온 사람이 있어 대문을 열어주니 짝달막한 신사가 들어온다. 나는 문만 열어주고 내 방에 들어왔는데 창밖으로 정장한 순경들이 몇명 서있는게 보이는것이였다. 나도 명색이 서울경찰학교 서무반장인데 저들이 누군지 궁굼해서 알아보니 방금 들어간이가 정우식 시경국장이란다.나로 말하면 직속 상관을 몰라본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뒤따라 들어갈 수도 없어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가 왜 이집에 왔을가?
좌로부터 김일환의 처. 장균(고3). 성혜 (중3) 나.- 성헤가 안고 있는 애기는 창규( 고 김일환의아들) 자하문에 나드리하며 촬영했다.
다음날 아침에 이화매 여사가 날보고 아침을 안에서 함께 먹자고 하여 안방에 들어가보니까 큰 식탁을 차렸는데 가운데에 낯이 설은 중년 늙은이가 앉아 있었다. 내가 어색해 하는 것을 보고 이교수가 소개한다. 아 이분은 성희 남편이고 그리고 이 학생은 우리집에 같이 사는 대학생이네. 하고 더듬거리며 양편에 소개를 하자 소개가 부족했다 싶었는지 이화매 여사가 나섰다. 군대다녀와서 늦데 대학을 다니는 학생인데 우리식구야. 그리고 화가야. 이이 가곡 발표회를 열때 선전 포스터를 부탁 할려고 해. 예술회관 발표를 나는 그때 처음들었다.하지만 그냥 모른채 넘겨야 했다. 장균이 외할머니로부터 장균,장오, 성혜까지 전 가족이 다 식탁에 둘러 앉아 식사를 마쳤다. 이 인물은 그 뒤에도 그집에서 여러차레 만나고 가벼운 인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이집 친척이려니 생각했을뿐 별다른 생각은 못했는데 하루는 정우식 시경국장이 또 한번 찾아와서 이분앞에 차렷자세를 하더니 거수경례를 하는바람에 그가 과거 헌병소령시절 대령인 이규광 씨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이규광 씨는 5,16 군사 정부의 건설차관이였는데 그 가 모시는 박임항 건설부 장관의 역모사건으로 그까지 연좌문책되여 이곳에 피신을 온중에 내가 만난셈이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그가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음이 밝혀져 광진공사사장이되었고 후에 장영자 사건으로 또 한번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1965년.3월25일 드디어 나는 서대문경찰서교남동파출소장이 되어 외직에 배명된다. 하지만 내색을 안았으나 내가 배치된 서대문경찰서 교남동 파출소 관내에서 이 집안 화주가 살고있어 오래되지 않아 발각되고 말았다. 이화매(용) 여사는 수년동안을 감쪽 같이 대학생으로 신분을 숨긴 것을 무척 나무랬다. 그래도 얼굴은 밉지 않은듯 금방 칭찬일색인데 친정 막내 남동생 화송이는 나보다 한살위인데도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건달이라며 스스로 대학을 졸업하고 그동안에 파출소장이 가상하다는 극찬이다. 이날 이후 나는 이집 문간방 맨이 아니고 완전한 식구가 되였다. 우선 방세를 안 받고 아침도 이집 식탁에서 함께 했다. 그뿐 아니라 이집 형제들의 관혼상제 모든 행사에는 나도 참석하는 것이 당연시 되였다. 그무렵 숙대 피아노과 여학생들의 졸업 발표회(이호섭 피아노협주곡의 밤)를 명동 예술극장에서 열게 되였는데 날보고 선전 포스터를 부탁했다. 사실은 이호섭 교수의 처남중 서울대 미대출신 처남(이화수 덕성여대 교수) 에게도 부탁했는데 날보고도 그리게 해서 나는 하라는데로 했지만 내것이 결정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며칠후 내 작품이 명동거리 벽에 붙어있어 사무실에서 직원들에게 내가 화가라는 사실을 처음 알렸다. 나는 말은 경찰관이지만 마을 사람들의 나에 대한 이미지는 충청도 선비로 취급했다. 어찌보면 바람직한 일은 안되지만 그런대로 2년동안 내 구역은 무척 조용한 편이였다 거리를 지나다가 동창 이오선을 만났는데 그는 당시 서울시 건설과직원으로 재직했다. 그의 주선으로 구로동에 조성중인 우리나라의 최초 시영주택을 20년간 분활납부하는 조건으로 구입하고 다음해 분양을 받았으나 파출소에서 거리도 멀고 미혼중이여서 단독으로 살 주택도 불편해서 마침 신혼차 방을 구하는 친구 신석태(목사)부부가 들어가 내대신 월입금을 내주면서 살았다.
약혼식때 장인에게 맥주를 따는 이호섭교수
파출소장으로 근무하는 동안은 거이 집에 오지 못하고 야근을 했다. 그래서 제3회 고시를 마지막으로 책은 접어두었다. 이호섭 교수는 원래 원산의 부자집 태생인데 그 형님이 일본 유학시절 이화용여사의 오빠(월북) 와 친구여서 같이 유학생인 동생들 이호섭과 이화매의 혼사가 이루어진것이다. 이호섭씨의 집안은 월남가족이 없는데 이화매 친정은 목포를 거점으로 거부여서 형제와 자매. 자손이 번성했다. 이화매 여사의 형제 자매도 아들다섯에 딸넷인데 아들은화영. 화정.화주. 화수, 화석. 화송과 딸로는 큰딸 화애(장영자모친)화? (인태장모).화용(이호섭부인).막내딸 아가다(천주교 세례명) 등 이다 . 내가 이집 식구처럼 지낼때 이집 가족은 부부말고 친정어머니. 장균.성혜.장오 3자매와 시현아줌마였다. 이집안 여인들은 한결같이 대단히 출중한 미녀들인데 반하면 아들농사는 이에 못 미쳐 보였다. 자매 막내인 아가다는 이른나이에 수녀가 되였으나 동란중에 결혼하면서 환속했는데 미모는 그집안 혈통인지 내 생각으로는 수녀 안하길 너무 잘했다 싶었다.
1964년의 겨울은 이댁에서 따뜻하게 보냈다. 나이가 차니 이젠 막연하던 걱정이 바짝 다가선다.남들은 장가드는데 나는 어쩌나? 우선 결혼을 해야 한다는 초조감이 들기시작한것이다. 27살이 지금 생각하면 많은 나이도 아닌데 말이다. 그해 다니던 대학도 졸업을 하고 앞당겨 경사승진도 했으니 직업도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군에서 제대하면서 경찰시험을 본 이유는 대학등록금은 벌겠다는 생각이였지만 경사가 되고 나니 이직업에 대한 애착도 생겨났다. 그렇다면 경찰학교 내근직 보다는 남자답게 범인도 잡고 대민봉사도 할수 있는 파출소장을 해보고 싶었다. 벌서 내나이 27세요 시골에 홀로 사는 어머니도 72세 고령이시다. 빨리 결혼해서 어머니를 모시고 안정된 가정을 만들고 싶다. 이런 나를 이집 의 이화용 교수(주인아줌마) 는 섬세하게도 걱정했다. 하루는 자신의 제자를 데리고 와서 나에게 맛선을 보였다. 그 여성은 나와 결혼을 안하면 독일간호원으로 간다면서 선택을 하라는것인데 나는 그무렵 대학의 여학생 둘과도 꽤 깊은 교제를 진행하고 있었는지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여사가 미리 눈치를 채고 제자에게 말해주어 일단 불을 껐지만 이화용 여사에게는 미안의 빛을 남겼다
나에게도 결국 결혼이라는 전환점이 다까서고 있었다. 1965년 파출소 옆에 자리한 해동병원 의 심희선 원장 이 새로 구입한 엠불런스를 몰고와 동승좀 하래서 그찰 탔더니 묻지마 삼선교 평화의원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김순범원장과 그 부인이 응접실에서 우릴 맞아주고 함께 차를 마시고 있는데 2 계단으로 머릴 길게 느러뜨린 처녀가 걸어내려온다. 부인은 처녀를 내 옆자리에 앉히면서 맏달이라며 인살시켰다. 22살.대학재학중인 이집 맏딸 동화였다. 심박사는 김순범원장과 날데리고 팔당에 가서 메기매운탕을 시켜 놓고 그제야 맞선 이라고 했다. 날보고 어떠냐고 묻기에 난 괜찮다고 답변을 했다. 김원장은 날 힐긋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 이후 혼사진행은 이화매 여사의 조언으로 해나갔다. 장인댁에서도 지성미 있고 고품격인 이교수댁 부부를 만난후에는 무척 친근감을 보였다. 이호섭교수 부부를 장인은 여러차례 초대했고 이교수는 흥이나서 피아노 를 연주하여 식구들을 숙연하게 했다. 내가 사귀던 여친을 아는 이화매 여사는 날보고 대박을 잡았다면서 적극 추천이여서 양가는 미루지 말자며 맞선본지 1개월만에 결혼식까지 올렸다..
아내는 이집을 친정처럼 생각했다. 결혼후에 우린 홍제동. 불광동을 전전하며 이사다니느라 아무래도 뜸해졌는데 1967년 내가 용산경찰서에 근무할때 이호섭교수는 숙대 음악 교수로 재직중이고 이화매 여사는 용산 미팔군안의 비유티삽을 운영하여 근무지가 가까이 있어서 자주 만나게 되였다. 이교수는 날 동생이라면서 음대 이흥렬 음악과장 을 소개시켜 주고 제자여학생들과 야유회를 갈때도 방송국에서 발표회를 할때에도 꼭 날 데리고 다녔다. 나는 공직으로 무척 바빴지만 이분이 가자면 따라나섰다.
그런 덕에 나는 이댁의 주변 사람들은 거이 다 친하게 지냈고 크고 작은 행사에는 내가 꼭 끼였다. 이무렵 세검정으로 집을 옮기고 팔당인근에 배밭을 사 노후를 대비했다.
1975년 봄에는 이교수가 정년을 맞는데 30년간 모은 가곡집 <피리>를 내놓았다.
1986?년인가 내가 철원서장으로 근무할 때 작고소식을 들었다. 무언가 예감이다. 그이후 이교수는 건강이 눈에 띠게 안좋아 보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