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異端의 追憶 #117, 동방교의 사람들(Ⅰ)
‘이단의 추억’기록중에서 여러군데에 흩어져 있는 세칭 동방교의 인물들에 관련된 기록들을 한군데 모았다. 세칭 동방교=좁은길에 몸담고 있던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관통하는 초기의 인물들에 관하여 아는 대로 기록된 ‘이단의 추억’속에 등장하는 글들을 모았는데 그들은 지금 흐르는 세월과 함께 사라져갔고, 세칭동방교는 제도권 교회인 것처럼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로 위장했다가 실정법상의 허다한 범죄사실들과 종교적 만행으로 인해 대법원의 확정판결에 의해 해체되었지만 남겨진 재물의 터전위에 다시 잔존세력들이 대한예수교 장로회라는 간판을 달고 복마전같은 그 속의 일개 교단으로 위장하여 인간의 영혼들을 사냥하고 있으니 현재의 위장된 자칭 좁은길=세칭 동방교를 이끌어 가고 있는 인물들의 내력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소상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한 인간의 발자취는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냉엄한 역사적 기록속에서 조명되고 심판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을 우롱하고 거짓으로 그 영혼을 사취(詐取)하는 그런 자들을 하늘은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의 엄숙한 교훈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리석었고 우매했던 그 일을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것은 불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진실을 가려내어 역사의 심판대 앞에 세워 두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래 노광공-자칭 좁은길, 동방교의 창립교주
父:노군청(盧君淸), 母:조군명(趙君命)의 3남1녀중 차남으로 출생.
兄:노관영(盧觀永), 弟:노관평, 姉(누나):이름 미상(未詳)
1914. 1.13(陰) 평남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 79번지 출생
황해도 겸이포소학교 졸업 (겸이포는 일제치하 황해도 ‘송림’을 말함)
황해도 의명(義明)중학교 졸업
하전관윤(河田觀允)으로 창씨개명
황해도 송림면(松林面) 면서기 근무
장남 노영도, 차남 노영구 출생--모(母)는 미상(未詳)
황해도 겸이포경찰서 고등계 형사 근무
항일독립투사 李能吉, 張金雨목사 등을 체포 투옥시킨 공로로 형사부장으로 승진,
1947년 월남, 용산 제2고녀(현 수도여고) 교사
친일반역 추적자의 정체추적을 피해 경북 안동으로 피신
경북 안동중앙교회 출석, 경북 안동농림학교 교사
1950. 6.25 동란 발발(勃發), 전시(戰時) 군헌병치안대 헌병보조원 노릇을 함.
1953년 대구 동산병원 간호부장 김정선(金正鐥)과 결혼.
박태선장로의 전도 집회에 강단 앞에서 북치는 전위대로 참석,
1956년 감리교 대구지방회 실행부 춘기지방회, 노광공을 만장일치로 제명.
1959.8.13 여신도 간음사건과 재산사취혐의로 구속, 46일 만에 보석금 내고 풀려남.
1964. 3월 신도들이 보는 가운데 가짜 장례식 거행,
1964.10월 노광공의 쌍둥이 형제 노두산이라고 주장하며 영국 캠브리지 대학 유학중
급거 귀국했다고 하면서 다시 나타남.
1965. 6월 동방교간부 김관수의 변사사건으로 수사망피해 잠적
1967.7.26 (陰6.19)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 518번지(동방교 대기처명 ‘큰집’)에서
당뇨합병증으로 사망.
---------------------------------------------------------------------
퍼온글 / [이단/사이비종교]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
출처:seejesus.egloos.com/5856572
그러면 교주 노광공은 누구인가? 1914년 1월 평북 평원군 순안면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안식교에서 운영하는 의명중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일제하에서 ‘하전관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황해도 이포 일본인경찰서 고등계 형사부장으로 재직하면서 민족운동자 이능길, 장금우 목사를 체포하여 투옥시켰던 민족 반역자이기도 하다. 그는 친일파로 활약하다가 해방이 되자 재빨리 서울로 와서 용산 제2고(현 수도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했다고 한다.
노광공은 공산당원들에게 친일민족 반역자라는 명목으로 처형을 당할뻔하다가 위기를 넘기고 곧 바로 안동으로 내려가 안동농림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안동중앙교회에 출석하였다고 한다. 그 뒤 초등학교 교장을 하면서 CIC(미국수사대)요원으로 가장하고 권총을 차고 다니며 양민들을 조사한다고 공갈 협박으로 괴롭히다가 부락민들의 원성으로 당시 안동경찰서에 입건된 일까지 있었다.
이렇게 혼란스런 생활을 접어두고 1953년부터 박태선의 전도관을 다니면서 박태선이 설교를 하면 북을 치며 따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같이 있던 M씨에 의하면 노광공이 박태선이 하는 모습을 보고 “됐다. 됐어. 저렇게 하면 되는 거야”라고 하면서 탄성을 연발하더라는 것이다. 같이 있던 M씨는 노광공이 탄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고 한다. 얼마 후 느닷없이 전국 사방 곳곳에 부흥집회를 하러 다녔다.
(세칭 동방교의 노광공, 그는 누구인가? 중에서)
노광공의 정혼녀(正婚女)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그의 재혼녀(再婚女) 김정선에 관한 기록은 상세히 남아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퍽이나 평탄치 못했던 것 같다. 김정선여사가 1952년 동산병원 간호부장으로 있을 당시 노광공을 만나 1953년 5월16일 결혼후 많은 갈등이 있었으며 별거했다고 한다. 노광공은 동방교의 교주로서 1959년 사기및 미성년자 간음의 혐의로 부산지검에 미결수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이후 1960년 6월16일 허위로 사망신고, 1964년 노두산이란 이름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은신함으로 노광공의 소재와 생사가 불분명하여 1967년 이혼심판 청구하고 1968년 이혼심판에 의해 이혼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정선여사는 1906년생이고 노광공은 1914년 갑인생 범띠이니 김정선여사는 노광공에 대하여 약 8년의 연상이 되는 셈이다. 노광공과 김정선은 1953년에 결혼했으니 노광공의 나이는 40세가 되고 김정선의 나이는 48세가 되는 해이다. 그리고 당시 노광공에게는 영도(동방교의 명명-아바)와 영구(동방교의 명명-아브넬, 노광공의 사후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로 성자 하나님으로 떠받들려지는 인물)라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1941년 신사생 뱀띠인 노영구(아브넬)는 노광공이 김정선과 결혼하던 1953년이 되면 중학생이 되는 13세의 소년기 나이가 되고 노영도는 그보다 몇 살 더 위의 고등학생 정도의 나이가 된다. 장성한 두 아들을 데리고 있는 마흔살의 유부남이 8세나 연상인 마흔여덟살의 처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 부자연스럽다. 어떤 꿍꿍이와 노림수가 숨어 있었을까... 김정선의 자필 서신 가운데서도 '하나님앞에 잘못된 것은 물론이고 민간의 도의상으로나 법률상으로 큰 죄인 중혼과 사기결혼'이 언급되어 있으니 전후 사정을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 아니할 수 없다.
(異端의 追憶 #106, 노광공과 결혼했던 ‘김정선’의 통한(痛恨) 중에서)
아브넬 노영구-노광공의 차남, 세칭 동방교의 2대 교주
아바와 아브넬, 즉 노영도와 노영구의 생모도 누군인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떤 사람을 일컬어 말할 때 부모중 그 어느 한쪽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근본을 알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집안의 내력이 자못 요상하다.
노광공이 누구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내가 아는 한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아무도 없다. 2대교주 노영구의 생모에 관하여 세칭 동방교내에서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일본의 재벌기업 스미토모 집안의 여자, 이름은 ‘스미토모 사나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마져 말짱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아마 일본 여자라고 해 놓아야 생모의 비밀을 영구히 숨길 수 있지 않았을까
(이단의 추억 # 2, 세칭 동방교의 주요 용어설명 중에서)
노영구는 사실상 노광공 창업교주와 사주목사, 사주장로의 눈 밖에 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큰 아들 노영도는 바람둥이요 작은 아들 노영구는 발음도 어눌하고 시원찮아 어줍짢은 청년에 불과했다. 오히려 아버지의 교주 행각에 반항심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 각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에 산재해 있는 연단선님들과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에게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모르겠다고 도망가라고 회유할 정도였다.
(이단의 추억 #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중에서)
‘아브넬’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왕 사울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을 두고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과 불화하여 배신하였다가 다윗의 장군 요압의 칼에 배가 찔려 살해당한, 배신으로 인하여 결국은 배신당한 비극의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의 이름이 왜 여기에 붙어 있는지 자못 궁금하다. 창립교주 노광공의 사후, 사생활이 문란했던 장남 노영도를 제치고 2대교주가 된 노영구는 젊은 나이에 할아버지라는 어휘가 부담스러웠던지 시간이 갈수록 그의 호칭은 ‘아브넬 할아버지’에서 ‘선교사님’으로 변경되어 후기의 세칭 동방교 신도들은 모두 그를 그렇게 불렀다. 또 어떤 부류의 신도들은 ‘어르신’이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후에 동방교의 어느 여신도와 동거로 시작하여 두 아들을 두게 되나 모두 정상적이지 못하였고 수사당국의 지명수배등 어려움을 당하다가 도피하다시피 미국으로 가서 국내의 동방교 조직을 원격조종하면서 지냈으나 동방교의 뚜렷한 후계자를 세우지 못하여 세칭 동방교 분쟁의 불씨를 남긴 채 많지 않은 나이에 이국땅에서 지병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노영구는 1941년 신사생 뱀띠, 2003년 63세의 단명으로 미국에서 사망했다.
(이단의 추억 # 2, 세칭 동방교의 주요 용어설명 중에서)
‘청해(靑海)’는 세칭 동방교의 창설교주 노광공의 호((號))이고 ‘부남(夫南)’은 노광공의 둘째아들인 2대교주 노영구의 호(號)이다. 언제부터인가 2대교주 노영구는 ‘부남(夫南)’이라는 호((號))를 지어 사용했다.
(이단의 추억 # 7, 위장, 그 외양과 내부 중에서)
2대교주가 된 차남 노영구는 내세울 만한 풍채도 아니고 생김새도 빈상에 가까운데다 눈꺼풀은 늘 껌뻑껌뻑 거렸다. 말을 할 때의 음성도 이상했고 발음 자체가 어눌한 눌변(語訥症-어눌증)이라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억센 세칭 동방교의 간부들을 다스리고 세칭 동방교 전체의 조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행적이나 카리스마는 전혀 없었다. 대구에서 당시 줄만 서면 들어가는 모 대학을 다니긴 했는데 리포트를 쓸 줄 몰라서 대신 써 주었다고 세칭 동방교 목사인 누군가가 늘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단의 추억 # 12, 김인경 입다목사 중에서)
노영구의 기도자세는 좀 특이하다. 세칭 동방교에서 신도들의 기도하는 자세는 성화 속에 그려진 어린 사무엘의 기도 자세를 연상하면 된다. 양쪽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에 모으고 다소곳이 고개를 약간 숙이고 기도를 하는 그런 자세다. 그런데 2대교주 노영구는 좀 특이했다. 그는 무릎을 엉거주춤 세운 자세로 두 손을 합장하여 가슴에 모으고 고개를 숙이지 않고 머리를 반쯤 하늘로 향하여 눈은 감은 듯 만듯, 속눈썹을 달싹달싹하면서 입을 반쯤 벌리고 입술을 움직거리기도 하고 가끔은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는 모습이다. 위를 쳐다보고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기도 하고 위에서 누군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모습으로 옆에서 보면 꼭 무슨 신들린 모습이다. 그것이 성신이든 잡신이든 신이 들리지 않고서야, 그리고 그것이 이단이든 삼단이든 어찌 한 종교를 이끌어 갈 수 있으랴 싶기도 하다. 그가 보통 3-5분정도의 기도를 마치고 나면 꼭 무슨 지시를 받은 듯한 언행을 하곤 했었다.
(이단의 추억 # 25, 신생활이라는 것 중에서)
그리고 낙원상가에서 운현궁방향으로 가는 인사동의 외곽길, 안국역 5번 출구에서 나와 낙원상가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대로변에 대지 약250여 평, 연건평 1200평이 넘는 규모의 지하2층 지상10층짜리 ‘이양원빌딩’이라는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 있는데 역시 세칭 동방교 소유 건물이다. 이 빌딩에는 ‘부남미술관’(관장 홍 춘 * )이라는 갤러리가 개설되어 있다. 빌딩과 미술관 개관 등에 따르는 자금력의 바탕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부남미술관’을 소개하는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미술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부남(夫南)선생'이라고만 지칭하고, 미술관 설립자의 삶에 있어 많은 인생의 가르침과 지도, 편달을 해 주셨던 스승님, 그 스승님의 호를 빌어 갤러리를 개관했다고 하는 그 스승님의 실명은 공개되어 있지 않다. 세상에 드러내기 껄끄러운 이름인 것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알아줄만한 자랑스러운 이름도 아니다. 부남(夫南)선생, 바로 이 사람이 세칭 동방교의 교주 노광공의 둘째 아들인 2대교주 노영구를 말한다.
(이단의 추억 # 46, 그리운 선님들 중에서)
세칭 동방교의 2대교주 노영구는 피해 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때 노영구는 서울의 J 여고와 E 여대를 다닌 얼굴 반반한 여신도 한사람(세칭 동방교의 명명은 유스도)을 빈집초월(무단가출)시켜 동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일반 기독교 집안 장로의 딸이었다. 세칭 동방교에 전도되어 출입하던 그녀를 노영구가 눈여겨 보아오면서 좋아하던 사이였고 후에 불러내어 동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감히 누구의 명이라고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이단의 추억 #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중에서)
노영구는 교주가 되기 이전부터 세칭 동방교에 출석하고 있던 몇몇 여신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미가라는 여신도와 유스도라는 여신도가 있었다. 세칭 동방교의 나이 많은 여자 장로중 한 사람인 S장로가 미가를 사귀지 말고 유스도를 사귀라고 노영구에게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유스도와 같은 J여고를 졸업하고 중앙대를 다니던 서로 친구 간이던 미가는 같은 세칭 동방교의 장로인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 즉 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요엘이라는 여신도의 딸이었는데 얼굴도 예쁘고 무용도 잘하고 세칭 동방교의 춤인 성무도 잘하고 교주 노광공의 귀여움도 받았으나 성질이 새침떼기였고 유스도는 예배당 다니는 집안의 딸이기는 하나 아이가 성격이 괜찮으니 유스도를 사귀라고 충고를 했다.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 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이 땅의 창조주 하나님(?)이요 재림의 구세주라고 그동안 쉬지 않고 줄기차게 신도(성민)들에게 세뇌시켜왔고 수없는 이적기사를 행했다고 주장하던 동방교의 창립교주 노광공이 하나님이 아니라고 그의 둘째 아들 세습 2대교주 아브넬 노영구가 1990년대 어느 날 소사 집회에서 정식 선포를 하여 선을 그어놓고 뚱딴지같은 인도 바바지신의 수석제자라고 난데없이 떠벌렸고...
(異端의 追憶 # 92,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Ⅱ) 중에서)
온갖 몸부림 끝에도 자신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 2대교주 노영구는 세칭 동방교의 뚜렷한 후계자를 세우지 못한 채 파킨슨병으로 2003년 63세의 단명으로 사망, 그의 부인 유스도 김 여사를 비롯한 가족은 현재 미국 뉴저지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들의 사이에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아들 둘이 모두 온전치 못하여 결혼에 이르지 못하는 불행한 가족사를 안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인간의 지혜밖에 장치된 하늘의 섭리, 하늘의 이치는 과연 신명스러워 두려워 할만하다.
(이단의 추억 # 74, 두 장의 사진 중에서)
아바 노영도-노광공의 장남
노광공의 큰아들 노영도는 대구 계명대 출신으로 얼굴도 핸섬하게 생겼고 풍채도 있었다.
(이단의 추억 # 12, 김인경 입다목사 중에서)
첫째 아들은 노영도(세칭 동방교의 명명-아바)라는 인물인데 키도 훤칠하고 인물도 잘 생겼으나 교주인 아버지의 돈으로 무위도식하며 세칭 동방교와는 거의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었고 복잡한 여자관계 때문에 아버지 노광공의 눈 밖에 나 있어서 후계는 둘째아들이 물려받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31, 교주와의 동행 중에서)
소위 성자 하나님이라고 떠받들던 ‘아바 할아버지’ 노영도도 발가벗겨 구타당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그 현장을 목격했던 어느 목사는 “우와~, 노영도하고 요나단목사가 발가벗겨서 이상래한테 두드려 맞아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데 요나단목사는 불알하나는 엄청 크더라이. . .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노영도는 대기처의 여신도 대기자중 예쁘장하고 깜찍하게 생겼던 AR을 건드린 일이 대기처내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는데 그 일과 더불어 동방교의 돈으로 무위도식하지 말고 정신 차리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던 것이다. 세칭 동방교에서의 심판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 후 노영도에게 당했던 대기자 여신도 AR은 세칭 동방교를 떠났고 그 일이 스스로 가책이 되어 결혼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렸는데 그 후의 일은 더 이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노영도와 정재덕 요나단목사에게 육체적으로 얼마나 심한 고난과 모욕이 더 주어졌는지는 상세히 알 길이 없지만...
노광공의 장남 노영도의 여성 편력이 상당히 복잡했다는 것은 세칭 동방교내에서도 알려진 주지의 사실이었다. ‘누구누구가 아바 할아버지(노영도를 지칭)에게 당했다더라’라는 소문은 대기처 신도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 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충청북도 괴산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벌써 경기도 소래의 성지(?)에서 이장한 노광공을 위시하여 노영도, 노영구, 즉 <성부, 성자, 성신? > 삼위일체 3부자의 묘지가 조성되어 있으나 비밀에 부쳐져 있으며 세칭 동방교내의 신도들 중에서도 극소수에게만 알려져 관리되고 있다.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 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요한 노영무-노광공의 손자, 노영도의 아들
첫째 아들 노영도 즉, ‘아바 할아버지’에게서는 그 생모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은(사실은 세칭 동방교의 대구지방 신도였던 김옥희라는 여인과 노영도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벙어리 아들이 있었는데 이마져도 ‘요한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그의 본명은 정무(正武)이고 세칭 동방교의 충성스런 신자인 어느 할머니가 보살피며 키우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도 자라서 어린 소년기를 지나 건장한 청년이 되었으리라, 2대교주 노영구의 가족들과 더불어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그의 조상들을 어떤 시각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름들은 세칭 동방교내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그리고 아바와 아브넬, 즉 노영도와 노영구의 생모도 누군인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어떤 사람을 일컬어 말할 때 부모중 그 어느 한쪽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의 근본을 알 수 없다고들 말한다.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집안의 내력이 자못 요상하다.
(이단의 추억 # 2, 세칭 동방교의 주요 용어설명 중에서)
요한의 생모는 대구의 세칭 동방교 신도였던 김옥희라는 여인이다. 요한은 김옥희라는 여인과 노영도 사이에서 출생했으나 이후 김옥희라는 여인은 세칭 동방교를 떠나버렸고 어린 핏덩이의 요한을 데려와 동방교의 나이 많은 할머니 여신도가 키웠다는 것만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 요한은 어느 정도 자란 소년기에 그의 삼촌이 되는 2대교주 노영구가 독일의 어느 농아학교에 보내 공부를 시켰고 지금은 결혼하여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요한의 생모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려고 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며 누구도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이단의 추억 # 71, 유스도, 김 여사에 대한 소고(小考) 중에서)
사주(四柱)들
네 명의 기둥이라는 뜻인데 두 명의 남자목사(정재덕 요나단목사, 양학식 베드로 목사)와 두 명의 여자장로(오인숙 헤레나 장로, 김숙자 사로멘장로) 도합 4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 3명, 오인숙 헤레나장로는 일찌깜치 동방교를 떠나 버렸고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악령으로 심판을 받아 낙향했고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동방교의 비리와 관련되어 체포된 후 재판을 받고 복역 한 후 사라져 버렸다. 두 명의 사주(四柱) 여자장로 중에 오인숙 헤레나장로는 여자로서 인품도 있고 얼굴도 미인이었으므로 교주 노광공의 총애를 받았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녀보다 인물은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젊었던 김숙자 사로멘장로에게 노광공교주의 총애를 빼앗기게 된 것이 동방교를 떠나게 된 사유가 아니었을까... 대기처의 신도들은 그렇게들 짐작만 하고 있었다. ‘잘난 년은 예쁜 년 못당하고 예쁜 년은 젊은 년 못당한다’는 옛말이 어쩐지 생각나는 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오인숙 헤레나장로가 동방교를 떠나야 할 아무런 이유도 발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세칭 동방교를 떠난 오인숙 헤레나장로는, 남편은 사별인지 이별인지 모르겠으나 자식도 없이 부산의 수영에 혼자 거주하면서 1967년 노광공의 사후(死後) 가끔씩 부산의 초량12교회에 얼굴을 내밀곤 했는데 그때마다 동방교의 신도들은 사주(四柱)장로인 그녀의 체면을 세워주고 예를 갖추었으나 한번도 그녀의 속내를 꺼내 말한적은 없었다.
사주(四注)라고 부르는 명칭은 세칭 동방교에서의 최고위직을 일컫는 말이다. 요나단(정재덕), 베드로(양학식), 헤레나(오인숙), 사르멘(김숙자)과 더불어 사주(四柱)라고 부르는데 네 기둥이라는 뜻이다. 당시 세칭 동방교에서의 사주(四柱)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죄(罪)란 무엇인가?’ 를 논(論)할 때 四(四柱)를 非(부인)하는것, 즉 인정하지 않는 것을 대단히 큰 죄(罪)로 가르칠 정도였다. 표의문자(表意文字) 한문을 해석하는 이 얼마나 대단한 기량인가! 둘은 남자(요나단, 베드로), 둘은 여자(헤레나, 사르멘)다. 남자 둘은 사주목사, 여자 둘은 사주장로라고도 부른다.
(이단의 추억 # 24, 고수(高手) 흉내 중에서)
이외에도 4명의 부주(副柱)가 더 있었는데 사주(四柱)를 보좌한다는 그런 뜻이다. 그 중의 한명이 김인경 입다목사이고 나머지 3명은 도중에 동방교를 탈퇴했거나 출석하지 않아 그 존재감이 희미해서 기억할 수가 없다.
요나단목사(정재덕)-사주(四柱)의 한 사람
정재덕, 세칭 동방교에서의 그의 명명(命名)은 요나단이다. 끝날(端)때 요긴(要)하게 쓰이는 인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름의 뜻처럼 요긴하게 쓰이지는 못하고 ‘악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세칭 동방교 집단에서 허무하게 사라져버린것 같다. 사주(四注)라고 부르는 명칭은 세칭 동방교에서의 최고위직을 일컫는 말이다. 요나단(정재덕), 베드로(양학식), 헤레나(오인숙), 사르멘(김숙자)과 더불어 사주(四柱)라고 부르는데 네 기둥이라는 뜻이다. 당시 세칭 동방교에서의 사주(四柱)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죄(罪)란 무엇인가?’ 를 논(論)할 때 四(四柱)를 非(부인)하는것, 즉 인정하지 않는 것을 대단히 큰 죄(罪)로 가르칠 정도였다. 표의문자(表意文字) 한문을 해석하는 이 얼마나 대단한 기량인가! 둘은 남자(요나단, 베드로), 둘은 여자(헤레나, 사르멘)다. 남자 둘은 사주목사, 여자 둘은 사주장로라고도 부른다. 그 중에 교주의 최고 수제자인 요나단 목사는 인물도 잘 생기고 신사다운 인품을 풍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친근감 있는 인물이다. 이분이 척추결핵인지 무슨 병이 있어 허리를 다쳐 요양원에 있을 때 노광공 교주를 만나 신유의 체험을 한 후 세칭 동방교에 입교, 노광공 교주를 그림자처럼 따라 사주(四注)에 까지 오른 사람으로 노광공보다 10여세 아래의 나이다. 평소에도 허리가 좋지 않아 늘 동작에 불편을 느끼곤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분이 성가(세칭 동방교에서 부르는 노래)나 찬송가(일반 기독교의 찬송가도 불렀음)를 부를 때 그 가사에 딱 부러지게 맞춰 기차게 손놀림과 표정을 지으면서 춤을 추는 행위(성무라고도 부름)가 같이 부르는 신도들로 하여금 감흥을 주는 희한한 재능이 있었는데 세칭 동방교 내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였다. 같은 사주(四柱)목사인 양학식 베드로 목사는 성질만 부랑스러웠지 이런 것에는 정재덕 요나단 목사의 발뒤꿈치에도 따라 갈 수 없었다.
(이단의 추억 # 24, 고수(高手) 흉내 중에서)
두루 주(周)에 학(鶴)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세칭 동방교의 사주(四柱) 중의 한 사람인 정재덕 요나단 목사의 호(號)다. ‘학처럼 높이 날아 세상을 두루 두루 살펴본다’는 뜻이라고 했다. 정재덕 요나단 목사는 교주 다음의 제 2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동방교 내에서는 비중 있는 최고위 중량급 인사다. 인물도 잘 생기고 같은 사주(四柱)인 양학식 베드로목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신사풍의 인물이었다. 당시는 이분이 부산, 경남지방의 순회자로 서울에서 매주 '초량12교회'를 왕래하고 있었다. 그만큼 '초량12교회'는 세칭 동방교에서 서울 용산의 '수원정' 다음가는 중요한 요충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호(號)를 따서 주학교회를 설립했는데
(이단의 추억 # 19, 어느 신고식 중에서)
정재덕 요나단목사와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서로 경쟁적 동지관계였다. 요나단목사는 자기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일 오래 할아버지(노광공)를 모신 사람이라고 공개석상에서 늘 자랑삼아 말했고 베드로목사는 실질적으로 할아버지(노광공)를 제일 오래 모신 사람이 누구냐고 그 말을 반박하듯 이야기하곤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세칭 동방교의 텃밭이라 할 수 있는 부산, 경남지방에 매주 순회차 내려와 금, 토, 일을 상주하다시피 하다가 월요일에 모든 지교회의 지성(헌금)을 보고받아 집계해서 서울로 가지고 올라가는 일을 주로 했으니 주(週)의 절반은 지방에 머문 셈이 되고,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서울에 상주하면서 주로 대기처안에 있는 중간간부들과 대기처 신도들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주관하고 있었으니 실질적으로 할아버지(노광공)를 곁에서 제일 오래 모셨다고 하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서로 동석한 자리에서 서로 다투거나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인일은 없었다. 나이는 동년배라고 기억되지만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한 끗발 아래라고 보는 것이 세칭 동방교내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먼저 세칭 동방교에 입교한 정재덕 요나단 목사가 같은 동향인 마산에서 세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양학식을 세칭 동방교에 입교시켰고 인품으로도 요나단목사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부딛칠만한 일들에는 주로 요나단목사가 선배다운 아량으로 많이 양보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단의 추억 # 22, 주학교회 중에서)
‘거어룩타아’라는 시작 음에 맞춰 양손을 가볍게 주욱 벌리면서 몸체로 십자가의 형태를 만들고 그 다음 ‘십자아성에’라는 가사에 맞춰서는 펴든 양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문이 여얼려’라는 가사에 맞춰 다시 두 손을 이용하여 문을 여는 행동을 연출하고 ‘부우름이여’하는 장면에서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어 손으로 부르는 시늉을 하는 고전무용 비스므리한 동작을 정재덕 요나단 목사는 정말 멋들어지게 잘 해내곤 했다. 그는 세칭 동방교의 사주(四柱)중의 한사람이었으며 그야말로 그런 춤 동작은 그의 전매특허였다.
(이단의 추억 # 24, 고수(高手) 흉내 중에서)
경화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외부에 알려진 것처럼 무슨 체계적으로 기록되거나 활자화 된 경전도 아니다. 그냥 대학노트에 노광공의 설교나 잡설들을 사주(四柱)목사인 정재덕 요난단목사와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메모 형태의 필기로 적어놓은 것이다. 주로 요나단 정재덕 목사가 초창기부터 기록하고 있었는데 대학노트로 여러 권에 달한다. 이것이 외부에 알려지기로는 무슨 경전인양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단의 추억 # 25, 신생활이라는 것 중에서)
우선 장승같이 턱 버티고 있는 사주(四柱)목사(정재덕 요나단목사, 양학식 베드로목사)의 한 사람인 요나단목사에 대하여 심판이 행해졌다. 초대교주 노광공의 수제자요 세칭 동방교내에서는 경화록의 기록자요 인물도 잘 생기고 다정다감해서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었고 설교와 성무에 능해서 많은 신도들이 따랐던 인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악령’이라고 부르면서 심판이 행해졌다. 세칭 동방교의 최고위직 사주(四柱)목사인 그도 중간간부에 속하는 그 험상궂은 나사로 이상래장로등 중간간부들에게 온몸을 발가벗겨 구타당하고 벌벌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심판은 정재덕 요나단목사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노광공의 큰아들, 소위 성자 하나님이라고 떠받들던 ‘아바 할아버지’ 노영도도 발가벗겨 구타당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그 현장을 목격했던 어느 목사는 “우와~, 노영도하고 요나단목사가 발가벗겨서 이상래한테 두드려 맞아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데 요나단목사는 불알하나는 엄청 크더라이. . .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정재덕 요나단목사에게 육체적으로 얼마나 심한 고난과 모욕이 더 주어졌는지는 상세히 알 길이 없지만 여하튼 정재덕 요나단목사, 그는 마산의 산중턱에 있는 그의 초가삼간 집으로 쫓겨 가서 거기서 지내고 있었다. 나도 그분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마산이라고는 하지만 당시의 한적한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간 곳, 주위에 민가가 별로 보이지 않는 곳에 초라한 흙벽돌로 지어 스레트로 지붕을 덮은 방2개와 부엌 한 칸의 삼칸집에 그의 부인과 어린 두 딸이 거주하고 있었고 부인은 보따리 장사를 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기서 매월 차례제가 있는 날 장을 보아 음식을 장만하여 제상을 차리고 혼자서 정성껏 차례식(차례제라고도 하는데 전국의 각 지교회에서 매달 한 번씩 정해진 날에 제사를 지낸다. 이단의 추억 # 19, 자정에 올리는 제사 참조)을 지내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세칭 동방교의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사주(四柱-동방교의 네기둥)의 한사람이었고 그 서열을 논하면 교주 다음이었다는 것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한다. 인품이 신사답고 덕망도 있었던 그도 노광공교주의 사망이후 심판을 받아 세칭 동방교안에서 실권을 빼앗기고 마산에 있는 오두막 같은 그의 거처로 낙향하고 말았다. ‘악령’이라고 낙인찍힌 것이다. 모두가 그를 지칭할 때는 ‘악령’이라 불렀고 세칭 동방교내에서 분위기를 그렇게 몰아붙였다. 아마도 교주의 아들인 2대교주 노영구나 양학식 베드로목사및 그를 추종하는 중간간부들과 마찰이 있었으리라 짐작되지만 그 상세한 내막은 알려진 바가 없다. 권력의 이양기에는 언제나 피바람이 부는 것이 인간세상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던가, 창립교주 노광공이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사망한 후 정재덕 요나단목사는 다음 교주가 되려는 욕심으로 교주의 아들인 2대교주 노영구의 독살을 기도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날 큰집(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중의 한곳, 초대교주 노광공이 사망한 장소이기도 함)에서 창립교주 노광공의 둘째 아들이자 세습으로 2대교주가 된 노영구가 속이 좋지 않아 부엌에서 차려 온 음식을 먹지 않고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 주었는데 개가 그 음식을 먹더니 바로 즉사 해버렸다는 것이다. 요나단목사의 짓이라는 것이었다. 심판을 받고 ‘악령’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쫓겨나서 마산의 초가삼간 자기 집으로가 있던 그가 어느 날 어렵게 장만한 일이천만원 가량의 돈을 들고 서울로 올라와 2대교주 노영구 앞에 와서 지성(헌금)으로 꼭 받아 달라고 애원했는데 2대교주 노영구는 그것을 지성(헌금)으로 받아주기를 거절하고 ‘정 그러면 파고다공원에 있는 노인들에게 가서 식사나 대접하라’고 했는데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부인이 돈이 아까워서 그렇게 안했다고 한다. 한참 세월이 흘러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때 2대교주 노영구는 ‘요나단 목사는 삼팔선 너머 비무장 지대에 늑대로 환생해서 밤마다 울부짖고 있다’고 하면서 ‘그런 생을 몇 번 더 거쳐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다’고 했다고 한다.
아, 정말 믿거나 말거나. . .
(이단의 추억 # 36, 악령, 그리고 환생 중에서)
베드로목사(양학식)-사주(四柱)의 한 사람
나이는 동년배라고 기억되지만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한 끗발 아래라고 보는 것이 세칭 동방교내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먼저 세칭 동방교에 입교한 정재덕 요나단 목사가 같은 동향인 마산에서 세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양학식을 세칭 동방교에 입교시켰고 인품으로도 요나단목사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부딛칠만한 일들에는 주로 요나단목사가 선배다운 아량으로 많이 양보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나단목사의 소개를 받고 원래 천주교 신자였던 양학식이 노광공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몇가지의 질문을 준비해 갔는데 이것만 속 시원하게 풀어주면 세칭 동방교인 좁은길에 들어오겠다고 결심하고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몇 가지의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 질문내용을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바람에 탄복하고 그 자리에서 바로 세칭 동방교에 입교하기로 하고 노광공의 제자가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22, 주학교회 중에서)
특히 눈이 억수같이 내려 쌓인 그날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양학식 베드로목사와 히스기야(연단선님출신 여신도)가 부산의 '초량12교회'에 특별히 오신 날이기 때문이다. 노광공 교주가 세상을 떠난 후 그분이 다시 재림해서 베드로목사와 히스기야에게 임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래 음양(陰陽)의 양성(兩性)을 다 가지고 계신 분인데 양(陽)의 현신은 베드로목사이고 음(陰)의 현신은 히스기야라는 것이다. 이 히스기야라는 여신도는 원래 나와 같은 '사상8교회' 출신으로 믿음이 솟아나서(특출하다는 세칭 동방교식 표현) 서울 대기처로 불려 올라가 일등선님으로 열심히 껌을 팔아 세칭 동방교에 지성금을 바치는 얼굴이 희고 덩치가 작은 예쁘장한 처자였다. 죽은 교주가 양성(兩性)으로 나뉘어 이 둘에게 현신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신앙 그 자체인 세칭 동방교의 노광공이 육신으로 현신해 왔다니, 모두가 그들을 하늘같이 떠받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수작이지만 그때는 그것을 일말의 의심도 없이 믿었고 그것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그 밤이 정녕 거룩한 천국잔치의 밤이었던가,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광란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그 사건이후 히스기야와 같이 서울로 귀환 한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또 다른 여러 가지 구실들이 더해져 세칭 동방교의 악명 높은 ‘심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어느 날 정재덕 요나단목사가 세칭 동방교에서 ‘악령’이라고 지칭되면서 제거된 후 양학식 베드로목사도 이렇게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는 다시 2대교주 노영구의 부름을 받아 세칭 동방교의 일선에 잠시 나서게 되었다. 그래도 세칭 동방교내에서 그만한 인재가 없었던 모양이다. 신도들을 얼러고 후려치고 이끌어 몰고 가는 그런 인재 말이다. 내가 세칭 동방교 상부의 부름을 받고 서울 '수원정' 대기처로 올라 갔을 때는 그는 거의 옛날과 같은 실권을 회복하고 있었고 히스기야라는 여신도는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수 년 후 양학식 베드로목사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인터넷검색 자료 #2, #3)되어 복역 후 출소하는 그를 그의 아들 양수언이 곧 바로 차에 태워 어디론가 잠적한 후 다시는 세칭 동방교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아직까지 생사의 여부도 소식도 알려진 바가 없다.
(이단의 추억 # 35, 천국잔치 중에서)
양학식 베드로목사의 칼바람 부는 훈시가 시작되면 바짝 긴장하게 된다. 잠깐이라도 눈동자가 흐릿하거나 깜빡 졸게 되면 어느새 무엇인가 날아와 머리통을 후려갈기게 된다. 쌍소리는 예사고 심지어는 예배볼때 성경과 찬송을 올려놓는 조그만 탁자를 양손에 불끈 잡고 금방이라도 집어 던질 듯이 들었다 놓았다 하는 일은 예사다. 세관에 근무하던 공무원이었는데 세칭 동방교 초창기에 노광공에게 전설 같은 감화를 받아 동방교에 들어와 교주 다음에는 제일 높은 자리인 사주(四柱-네 사람의 기둥)목사까지 되었는데 우락부락하기가 그지없다. 씨발, 씨발 하면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대기처 신도들을 닦달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가 스스로 열이 올라 신이나면 밤12시 전후에 시작한 예배가 밤 1시도 넘기고 2시도 넘기기 예사다. 스스로 기분이 고조되면 울기도 하고 신경질도 부리고 폭력도 행사하고 한참동안 난리법석을 떠는 것이다.
(이단의 추억 # 40, 야밤에 춤추는 빳다 중에서)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로 들어간 스불론도 남자 선님으로 사서 고생을 뒤집어쓰고 있었고 양학식 베드로목사에게 얻어맞아 고막이 파열되어 평생 고생했던 아모스도 남자 선님이었다. 남자 선님들의 순회는 주로 우락부락한 김태문 삼손목사나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담당했다. 당연히 점수를 채우지 못하는 날은 엄청 얻어 터졌으리라.
(이단의 추억 # 44, '수원정'에서의 하루(Ⅰ)-순회자의 길 중에서)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서울에 상주하면서 주로 대기처안에 있는 중간간부들과 대기처 신도들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주관하고 있었으니 실질적으로 할아버지(노광공)를 곁에서 제일 오래 모셨다고 하는 말도 틀린말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서로 동석한 자리에서 서로 다투거나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인일은 없었다. 나이는 동년배라고 기억되지만 굳이 서열을 따지자면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한 끗발 아래라고 보는것이 세칭 동방교내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먼저 세칭 동방교에 입교한 정재덕 요나단 목사가 같은 동향인 마산에서 세관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던 양학식을 세칭 동방교에 입교시켰고 인품으로도 요나단목사가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부딛칠만한 일들에는 주로 요나단목사가 선배다운 아량으로 많이 양보하는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단의 추억 # 22, 주학교회 중에서)
헤레나장로(오인숙)-사주(四柱)의 한 사람
그즈음 세칭 동방교에서 사건하나가 터지게 된다. 서울에서 세칭 동방교를 뛰쳐나간 사람들이 모여 피해 집단을 결성하고 진명, 숙명여고 출신의 세칭 동방교 신자들과 헤레나장로(오인숙, 사주(四柱)장로의 한사람)의 큰언니 등이 세칭 동방교는 엉터리이고 신도의 재산을 갈취한다는 등의 폭로가 이어졌고, 매스컴을 타게 되면서 2대교주 노영구는 고발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게 되고. . .
(이단의 추억 # 59, 한창 시끄럽던 그때 중에서)
당시 내 친구 D는 전술(前述)한대로 부산의 어느 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A는 세칭 동방교의 사주(四柱)장로중의 한사람인 오인숙 헤레나장로(여성으로서 인물이 특출했으나 친아들이 없었던 헤레나장로는 짐작은 가지만 무슨 연유인지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사유로 일찌감치 동방교를 떠났고 부산에 거주하면서 가끔 초량12교회에 얼굴을 나타내곤 했었다)를 모시고 부산 수영의 헤레나장로집에서 노년의 할머니가 된 그를 보살피며 살고 있었는데 미국에 있는 헤레나장로의 양아들이 와서 집이 탐이 났는지 자기들이 모시겠다고 나가라고 해서 맨손으로 나와서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에서 대기자로 만나 결혼한 같은 동방교 신도인 그의 부인과 조그만 식당을 운영하면서 생활하고 있었고 H는 이것저것 손대는 사업마다 실패하여 의기소침해 있던 시기였다.
(이단의 추억 # 72, 인연 깊은 친구 D 중에서)
사로맨장로(김숙자)-사주(四柱)의 한 사람
네 번째부터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상래. 사로멘. 양학식. 김순연. 등 계속 심판이 이어졌다. 나는 노영도 심판 때에만 가담하고 그 후로는 심판에 가담하지 않았다. 지금도 노영도를 폭행한 것을 후회하고 회개한다. 지시라고 해도 하지 말아야 했는데. 노광공이가 살아있을 때에 노광공이의 지시라고 하면서 사로멘 장로가 나에게 와서...
(이단의 추억 # 76, 차마 기록하지 못한 이야기들에 대하여. . . 중에서)
입다목사(김인경)-부주(副柱)의 한 사람
세칭 동방교의 부산 '사상8교회' 김인경목사는 세칭 동방교의 명명이 ‘입다’였고 보통 입다목사라고 불렸는데 세칭 동방교의 최고위직인 4명의 사주(四柱) 다음가는 또 다른 4명의 부주(副柱)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분은 시력이 아주 나빴다. 젊은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인데 내가 중학교 2학년의 어린나이에 세칭 동방교 '사상8교회'에 입교하던 당시 30대의 말 혹은 40대의 초반이 될까 말까한 정도의 나이라고 짐작 되었는데 시력은 이미 많이 나빠져 있었다. 한지 종이를 잘라서 책처럼 묶어 거기에 싸인펜으로 글씨를 굵고 크게 쓰서 무엇인가를 잔뜩 기록해 놓고 있었다. 아마 세칭 동방교에서 말하는 ‘진리말씀’인 것 같았다. 노광공의 설교를 메모 한다거나 상부의 지시사항을 받아 적어두고 체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때는 그것을 눈 가까이 갖다 대고 메모된 기록을 보면서 설교를 하곤 했었다.
그 후 김인경 입다목사도 서울 대기처로 올라가게 되었고 나도 입대를 했고 군복무를 마친 이후 세칭 동방교와는 인연을 끊고 살아가고 있었는데 세칭 동방교 안에서 김인경 입다목사를 ‘사사’와 결혼시켰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때는 이미 50대 중반이 된 노총각 입다목사와 30대의 처녀 ‘사사’가 결혼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늙은 총각 입다목사는 젊은 처녀 ‘사사’와 결혼 후 아들 하나가 태어났는데, 유전이었던지 태어난 아들 역시 시력이 나빠서 점자를 배우고 있으며 장성해서는 군대를 못 갔다고 한다. 그 후 입다목사는 다시 부를 때까지 어느 절에 가서 기도하고 있으라는 지시를 받고 사찰로 들어가 기도생활을 했는데 곧이곧대로 하는 그의 성격대로 연약한 체력에 무리하게 기도생활에 정진하다가 그만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세칭 동방교에서 들리는 이야기로는 지시사항에 중도(中道)를 지키지 못하고 자기마음데로 하다가 죽었다고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오호. . . 통제라. . .
그 ‘75년 이봉상 사건’이 터졌을 때 부산, 경남지방에서 그것을 잘 수습하여 막지 못한 책임이 김인경 입다목사에게 있다고 하면서 김인경 입다목사는 지옥에 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다시 지옥에서 건져 올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아. . . , 지옥에 집어넣었다 꺼냈다도 마음대로 하는 재미있는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세계. . .
(이단의 추억 # 12, 김인경 입다목사 중에서)
요셉목사(박민집)
‘영주동2교회’를 맡고 있던 요셉목사, ‘당감동10교회’를 맡고 있던 애훗목사등 몇 사람의 목사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순종적이고 별반 내세울게 없는 어줍잖은 인사들이다. 결핵환자라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한 요셉목사...
이단의 추억 #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중에서)
애훗목사(임능주)
‘당감동10교회’를 맡고 있던 애훗목사등 몇 사람의 목사들이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순종적이고 별반 내세울게 없는 어줍잖은 인사들이다. 결핵환자라 출입이 자유스럽지 못한 요셉목사, 길거리 난전에 앉아 도장이나 고무인등을 파서 생계를 유지하는 애훗목사등은 오히려 그의 말 펀치에 휘둘리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중에서)
마태목사(김*구)
그때 마태목사를 부산지방의 간부들로서는 통제할 수가 없었다. 그는 중학생 시절에 세칭 동방교에 충직하던 그의 어머니를 따라 입교했고 연단(행상)을 통해 어린나이에 많은 지성(헌금)을 동방교에 갖다 바쳤고 교주 노광공을 흠모하며 잔뼈가 굵었다. 징집영장을 받고 훈련소에 입소하여 훈련받고 있는 그를 어떻게 묘수를 부려 정신병자 진단서를 허위 발급받아 훈련소에서 퇴소시켜 ‘앞으로 내가 너를 크게 써야 하기 때문에 군대에 그대로 둘 수 없었다’고 하면서 약관 22세에 노광공교주로부터 목사로 세움을 받았다.
당시 마태목사는 대구에서 발행하는 모 일간지의 기자 신분이기도 했었다. 당시 30대 초반 전후의 나이에 특별히 내세울 만한 학력도 없는 이 양반이 어떻게 해서 대구에서 발행하는 유명 지방신문의 기자 직함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대구에서 발행하는 지방지의 부산 주재기자로서 경찰과 검찰은 관계 기관에 출입하면서 쓰는 기사가 그 신문에 게재되어 자랑스럽게 들고 와서 보여주곤 하던 것들을 내가 직접 보았으므로 부인할 수가 없다. 입담도 좋았고 처세에 능했던 그는 아뭏던 세칭 동방교의 목사이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가 세칭 동방교 당감동 10교회의 충직한 장로 신도였고 그의 어머니를 따라 중학생 시절부터 세칭 동방교의 신도로서 자라난 그는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마태였고 그때까지 미혼이었다.
어쨌든 마태목사는 잡혀갔고 거기서 죽을 고생과 린치를 당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서도 무슨 음식을 잘 못 먹어 설사가 심해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몇 번이나 들락날락거리게 되었는데 처음 몇 번은 감시자가 따라 붙더니 서너 번 이상 화장실을 들락거리게 되자 ‘이 새끼가 뭘 쳐먹었길래 계속 지랄이야’ 하면서 감시자가 방심하고 따라붙지 않더란다. 그 틈을 타서 감시자가 없는 사이에 담장을 겨우 넘어 구사일생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이단의 추억 #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중에서)
전술한 바 마태목사는 노광공의 생일인 (음)정월13일과 사망일인 (음)6월19일, 1년에 두 번 꼭 세칭 동방교의 부산 문현동교회(세칭 동방교의 부산 '초량12교회'가 이전한 곳)를 찾아와 노광공을 기린다고 현재의 세칭 동방교 신도들은 자랑이 대단했었다. 사실이라면 갸륵한 그의 정성이 기특하지만 이제는 신분을 세탁하여 제도권 장로교단의 선교목사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그분의 본의를 가늠하기 힘들다.
(이단의 추억 # 36, 악령, 그리고 환생 중에서)
니고데모목사(이일우)
당시 세칭 동방교에는 길거리 난전에서 도장을 파서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또 한 사람은 바로 '초량12교회'에 소속되어 있는 신도로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을 니고데모라고 부르는 이일우씨다. 이분은 성품이 온순한 분으로 세칭 동방교 '초량12교회' 바로 옆에 있는 고신파 삼일교회의 집사로 있던 분인데...
니고데모 이일우목사는 원래 길거리 난전에서 도장을 파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으로 생김새가 좀 특이해서 위의 이빨들이 뻐드렁니처럼 모두 앞으로 툭 튀어나와 항상 휑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인상이었다. 빈티가 날 정도로 별로 품새 자체가 없는데 세칭 동방교에 대한 충성심 하나만은 특출해서 2대교주 노영구의 후기에 서울의 대기처로 불러 올린 것 같다. 어느 때인가 보니 총회장 이일우목사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명칭이 목사지 언제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도 알 길이 없다. 얼마나 내세울 만한 인재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2대교주 노영구로서는 온순하고 말 잘 듣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절실하게 필요 했을 듯하다. 그야말로 이름뿐인 꼭두각시 총회장이었지만 그는 그 후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 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이단의 추억 #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중에서)
나사로장로(이상래)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된 위의 기사 중에서 ‘이상래’는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나사로’인데 보통 ‘나사로 장로’로 불렸다. 경남지방의 마산에서 건달같이 지내던 그가 어떻게 세칭 동방교에 전도되어 들어왔는지 알려진 바는 없으나 서울 대기처로 올라가 한때 부산지방에 순회자로 내왕한 경력이 있으며 가늘게 찢어진 작은 눈에 인상이 아주 험상궂었던 그도 동방교의 여러 사건에 연루되어 지명수배를 당하고 곤욕을 치른 후 동방교를 떠났고 그 이후 부산지방에서 얼굴을 알리지 않으려는 듯이 언제나 시커먼 선글라스를 끼고 어느 노선버스를 운행하는 기사로 생활하고 있는 것을 본 사람들의 목격담이 전해지곤 했었다.
(이단의 추억 # 26, 마태목사 탈출사건 중에서)
세칭 동방교의 최고위직 사주(四柱)목사인 그도 중간간부에 속하는 그 험상궂은 나사로 이상래장로등 중간간부들에게 온몸을 발가벗겨 구타당하고 벌벌 기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심판은 정재덕 요나단목사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에 노광공의 큰아들, 소위 성자 하나님이라고 떠받들던 ‘아바 할아버지’ 노영도도 발가벗겨 구타당하고 혹독한 심판을 받았다. 그 현장을 목격했던 어느 목사는 “우와~, 노영도하고 요나단목사가 발가벗겨서 이상래한테 두드려 맞아가지고 벌벌 떨고 있는데 요나단목사는 불알하나는 엄청 크더라이. . .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하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36, 악령, 그리고 환생 중에서)
아모스장로
땅을 파고 그런 탄창을 묻어놓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이 아모스장로라는 분이었는데 카투사 운전병 출신으로 두뇌는 그리 명석하지 못했던지 실세 간부의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우직한 충성심으로 교주 노광공의 자가용을 운전하면서 그의 신임이 무척 두터웠다. 신임하지 않는 사람에게 누가 그런 일을 시켰겠는가, 바로 이분이 ‘질곡의 삶, 애증의 세월. . . 샬롬 요엘’의 저자 문정열의 사수였는데 그도 세월이 흐른 후 세칭 동방교의 사이비 이단성을 간파하고 그곳을 빠져나와 연단선님출신 여신도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와 두 딸을 두었고 부산지방에서 택시기사로 생계를 이어가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껌팔이등 행상을 시켜 긁어모은 연단선님들의 지성(헌금)을 위시하여 곧 닥칠 말세의 공포심을 주입시켜 전국지교회에서 매주일 알토란같이 거둬들인 현금으로 장만했던 세칭 동방교의 부동산중 일부가 충성심 강했던 그의 명의로 된 것들이 꽤 있었는데 그가 동방교를 떠난 이후 세칭 동방교의 관계자가 수십 번 찾아와 부동산의 명의를 돌려주면 어떻게 어떻게 해주고 사후에는 이래 할아버지(노광공교주)의 옆에 안장해주겠다느니 하면서 온갖 감언으로 회유하더니 이전서류에 도장을 찍어준 후 다시는 가물치 콧구멍도 보이지 않더라고 그의 부인은 술회하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33, 거액도난사건, 일가족음독사건 중에서)
갈렙목사
지금은 본명도 잊어버린 이분 내 사수 갈렙목사는 그 당시 아마도 50대 초반의 중년으로서 미군 통역관 출신이라고 소문을 들었는데 한국말 발음이 시원찮아서 말만하면 입가에 침이 튀곤 하던 분으로 인상이 두꺼비 상이었다. 어떻게 해서 세칭 동방교에 발을 디디게 되었는지는 들은바가 없었고 한 번도 영어를 사용하는 것을 목격한 바도 없었다. 이분은 아직도 대기처 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생활비를 드릴 테니 집으로 돌아가 계시라고 해도 가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이단의 추억 # 39, 똥장군 수송 작업 중에서)
용산 '수원정' 대기처내에서의 내 사수는 베드로 목사의 지시에 꼼짝달싹 못하고 순종하는 두꺼비상의 갈렙목사다. 나는 갈렙목사의 지휘감독을 받고 있었다. 아마 베드로목사 보다도 연배는 몇 년 위인 것 같았다. 그러나 세칭 동방교의 대기처에서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직 절대복종만 있을 따름이다. 갈렙목사와 동급이라 할 수 있는 김태문 삼손목사가 있었는데 이 또한 생긴 모습 자체도 조폭 같은데 힘이 장사고 성격도 괄괄하다. 동급이라도 내 사수 갈렙목사는 나이로는 한참 아래인 김태문 삼손목사에게 기싸움에서 이미 한수 아래로 뒤지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40, 야밤에 춤추는 빳다 중에서)
나의 사수 갈렙목사에게 선님들의 지성점수(헌금액수)가 적힌 명단과 돈을 건네는 순회결과보고를 하게 된다. 이분은 미8군의 통역관으로 계셨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고 이분이 영어로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은 없다. 두꺼비 상인데 항상 말을 하면 입에 거품을 물고 침을 튀기고 있었다. 이분은 자기도 다른 몇 곳의 순회를 마치고 '수원정'으로 돌아오는데 나의 결과보고와 자기의 순회결과보고를 양학식 베드로 목사에게 보고하게 되고...
(이단의 추억 # 44, '수원정'에서의 하루(Ⅰ)-순회자의 길 중에서)
삼손목사(김태문)
김태문 삼손목사, 그는 얼굴에 우뚝 솟은 큼직한 코를 달고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성질도 그에 못지않다. 명명(동방교에서 부르는 이름)이 삼손인데 덩치도 크고 힘도 장사라 그 이름에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 원래 부산의 세칭 동방교 '당감동10교회' 출신으로 권병찬 아마샤 전도사(후에 어느 날부터 갑자기 목사라고 불렀다)와 같은 출신이다. 뚜렷한 직업도 없이 힘 하나로 버티던 그는 부산 당감동의 철도공작창 인근에 살면서 야밤에 공작창 울타리를 뚫고 들어가 무거운 고철을 훔쳐내어 팔아먹던 일명 ‘도꾸다이’(特攻隊의 일본식발음)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가 어찌 세칭 동방교에 전도를 받아 들어와 서울 대기처로 올라가 동방교의 중간간부 서열에 올라간 인물이다. 상부의 명령을 받으면 우직하게 밀어붙여서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들에게는 엄청 고역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서울 용산의 '수원정'으로 올라가 일하고 있을 때 주로 양학식 베드로목사가 주관하는 밤12시경 점호성격의 예배가 끝나고 나면 나를 별도로 불러 손가락 두어 개 굵기 만한 막대기로 10여 차례 허벅지를 갈기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의 눈에 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보다. 찍 소리 못하고 얻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수십 군데에 산재한 여러 대기처의 건물이나 농장에 작업이나 보수할 일이 있으면 그가 대기자들을 차에 실어 데리고 가서 목재를 다듬고 시멘트와 모래를 섞어 비비고 바르고 때우는 그런 분야의 전문가였다. 힘쓰는 일에는 장사지만 머리 쓰는 일 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창립교주 노광공이 당뇨합병증으로 54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후 그의 시신을 안양의 어느 공동묘지에 가매장했다가 경기도 소사면 소래리의 성지로 이장한 장본인이기도 한다. 노광공 교주의 묘지가 있는 성지(聖地), 경기도 소사면 ‘소래’라는 지명의 뜻이 원래 성민(동방교 신도를 일컫는 통칭)들이 ‘솟아나서 오라’는 뜻이라고 그때는 한창 말하고 있었다.
(이단의 추억 # 28, 팔십대의 노인이 된 삼손목사 중에서)
난리법석의 장광설을 늘어놓아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촌놈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어 주눅을 들게 하는 담당은 주로 김태문 삼손목사의 전담특허였다. 할아버지(노광공교주)께서 손자들을 구원하시려고 그 죄를 담당하여 얼마나 고통을 당하셨는지 입에 거품을 물고 침을 튀겨가며 설명하고 이제 곧 세상의 말세가 임박하여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질 것 같은 공포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언어의 조리(條理)나 논리전개의 타당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도 설교랍시고 입에 거품을 튀기면서 공갈협박조의 장광설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단의 추억 # 41, 먹구름을 몰고 오는 그들 중에서)
마지막 집합을 마쳐도 끝이 아니다. 김태문 삼손목사가 구석으로 나를 부른다.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어린아이 팔뚝만한 작대기로 인정사정없이 허벅지를 10여대 후려친다. 아파 죽을 지경이다. 왠지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이유는 모른다, 반항하면 더 두드려 맞는다. 차라리 빨리 두드려 맞고 끝내는 편이 낫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따로 기록해야 겠다.
(이단의 추억 # 45, '수원정'에서의 하루(Ⅱ)-전도사의 길 중에서)
아마샤전도사(권*찬)
기사속의 양학식(베드로)과 권*찬(아마샤)의 나이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실제 나이가 아니고 그의 나이는 한참 아래이다. 또한 그의 이름 권*찬도 사실은 본명이 아니다. 그는 한동안 아마샤전도사로 불리더니 노광공교주가 세상을 하직한 후 2대교주 노영구 시절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아마샤목사로 불리고 있었다. 괄괄한 성격의 소유자인 김태문 삼손목사와는 나이로 서너 살 정도 아래이나 친구 비슷한 사이이며 같은 세칭 동방교의 부산 '당감동10교회' 출신이다. 권*찬 아마샤목사는 경북 안동 태생으로 세칭 동방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부산의 당감동에서 이발사를 했으며 외부에 내세울만한 학력은 없었지만 사람이 점잖은 기질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삼손목사와는 달리 인물도 신사풍이어서 세칭 동방교에서 외부 바람막이용으로 ‘주간 기독교’라는 교계 신문을 창간하면서 아마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듯하다.
이분도 철모르던 젊은 한 시절 아무것도 모른 채 사이비 이단사설에 현혹되어 노광공교주를 하늘같이 모시고 믿었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알게 되는 숨겨진 사실들과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 얽매여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된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었고 세칭 동방교 내부의 실상들을 체험으로 느끼게 되니 세칭 동방교가 이단사이비라는 사실을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세칭 동방교를 떠나려고 결심을 하게 된 어느 날 수중에 돈 한 푼이 없던 그는 주간 기독교의 사장을 하면서 안면을 넓힌 세간의 친구에게 단돈 10만원을 빌려 기차표를 끊어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대기처에서 숙식만 해결하는 동방교의 대기자(가족과 생이별하고 무단가출해서 가족과 연락을 끊고 세칭 동방교 안으로 들어와 생활하는 신도들을 통칭하는 동방교의 은어-隱語)는 그가 누구라도 돈과는 인연이 멀었고 그가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운수회사의 사장이네, 주간 기독교 신문사의 사장이네 하고 어깨를 우쭐거리고 다녀도 대기처안으로 돌아오면 사주(四柱)목사인 양학식 베드로목사에게 잘못을 지적당하고 귀싸대기를 얻어터지는 동방교의 일개 대기자에 불과했고, 동방교는 또 그런 곳이었다. 그는 2대교주 노영구의 시대 초기에 그곳을 떠나 부인과 자식들이 있는 가정으로 돌아와 지금은 천주교에 귀의한지 수 십 년, 부산의 어느 성당에서 돈독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단의 추억 # 33, 거액도난사건, 일가족음독사건 중에서)
아브라함전도사(김*식)
세칭 동방교에서는 파독 간호원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중간간부중의 한 사람인 A전도사를 독일로 보냈다. 연단선님들을 관리하던 순회자 출신이다. 여신도 연단선님들을 다루던 경험이 풍부했고 유독 여신도들을 잘 두드려 팬다고 대기처(천국을 가기위해 이 땅에 임시로 머물며 대기하는 곳, 집을 나온 세칭 동방교 신도들이 집단으로 머무는 곳을 말하는 은어-隱語)내의 신도들 사이에서는 소문이 파다하던 키가 작은 사나이다. 아마도 독일에 가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간호원들을 주욱 세워놓고 연단선님들 다루듯이 ‘차렷, 열중쉬어’를 반복하면서 긴장의 강도를 높이고 일장 훈시를 하면서 손찌검까지 일어났던 모양이다. 이제 벌써 수년의 세월동안 서구의 문명을 접한 간호원들이 세상 물정을 알게 되었고 더 이상 세칭 동방교에 세뇌 당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가 지금 어느 나라이며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한국에서 하던 못된 버릇 그대로 우리를 지배하려느냐는 반항심이 일어났을 것이고, 폭행사태가 신고 되어 그는 추방절차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귀국해 돌아와 세칭 동방교를 살펴보니 왕년의 잘 나가던 그의 위치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는 없어진지 오래라, 흘러간 물로는 다시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는 법,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는지 빈집에 돌아가 있으라는 2대교주 노영구의 지시였는지 그는 세칭 동방교를 떠나 자취를 감추고 잠적해 버렸다.
그(A전도사)는 김인경 입다목사의 부산 사상8교회 출신으로 ‘사상’의 근처 ‘모라’라는 동네 출신인데 그의 모친은 혼자 과부의 몸으로 새벽에 재첩국(경상도 지방의 향토요리)을 한 솥 가득 끓여 머리에 이고 골목 골목마다 다니며 ‘재칫국(재첩국의 사투리) 사이소’를 외치던 부산지방의 그 유명한 재첩국 장사를 하던 분이었는데 나는 그분의 집을 방문할 때 마다 진한 국물의 진짜(진국이라 함) 재첩국을 듬뿍 얻어 먹곤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흔히 ‘사사빼이 이빨쟁이’(무면허 치기공사 정도로 생각되는) 라고 부르는 일을 이곳 저곳 다니며 하고 있던 중에 믿음이 출중하다고 인정되었던지 서울의 대기처로 불려 올라가 노광공교주의 옆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연단선님 순회일을 하는 전도사로 호칭되는 대기자로 있었는데 노광공이 관계당국의 지명수배를 받아 외부 병원의 치료가 어려웠던 시절, 사사빼이 이빨쟁이 하던 시절에 익힌 기술로 이빨이 안좋아 고생하던 교주 노광공의 이빨치료를 해주고 의치를 만들어 씌워 주어 노광공의 총애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였다. 같은 부산의 사상8교회 출신으로 서울의 대기처로 올라가 껌을 팔아 바치는 성적이 월등해서 1등선님으로 있다가 노광공교주의 사후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양학식 베드로목사와 깨춤을 추던(이단의 추억 #35 천국잔치 참조) 김순연 히스기야와는 ‘모라’에 살던 시절 연인관계였다는 소문도 들리고 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초량12교회'가 문현동으로 이전하여 위장 개업한 세칭 동방교의 부산 문현동 한빛교회였다. 동방교의 내밀한 사연을 잘 알지 못한 채 아편 중독 같은 오랜 세뇌에 사로잡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던, 2대교주 노영구의 시대에 동방교안에서 짝을 맞춘 그의 부인이 계속 세칭 동방교를 출입하다가 고희를 넘겨 얼굴에 주름살 깊은 그를 다시 세칭 동방교로 데리고 나왔다고 한다. 참 질긴 인연이다.
(이단의 추억 # 53, 파독 간호원 사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