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의 따분한 밥상을 확실하게 구원해주는 음식이 쌈이다. 상추, 쑥갓에 식은 밥을 싸서 볼이 터지도록 우걱우걱 삼키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왕성한 식욕의 변함없는 상징이다.
쌈은 국, 찌개, 김치 따위와 함께 우리나라 밥상을 대표하는 독특한 식사 풍속으로 꼽힌다. 딴 나라에도 이와 비교해 볼 식습관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처럼 다양하고 적극적으로 쌈싸먹기를 발달시킨 곳은 없다.
쌈의 발달은 채소가 풍부하고 신선한 우리 산천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밭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산과 들의 무진장한 나물들을 훌륭한 먹거리로 발굴해 낸 조상들의 활홀한 안목이 그런 독특한 섭취방법을 개발한 것이다.
쌈의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유구하다. 조선 영조 때 한치문이 적은 '해동역사'에 의하면, 무와 함께 이 땅에 상추를 처음 들여온 이들은 고구려 사람. 고구려 사신이 수隨나라에 들어갔다가 상추씨를 구입했는데. 어찌나 비싼 값을 주었는지 '千金菜천금채'란 별명이 붙었으나 나중에는 고구려 특산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흔히, 쌈하면 상추, 쑥갓, 깻잎, 배춧잎, 김 정도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이는 모르는 소리. 유구한 역사에 걸맞게 훨씬 더 다양한 종류를 자랑한다. 앞에 든 것들 말고도 취, 미나리잎, 머윗잎, 산 씀바귀, 고춧잎, 소루쟁이(또는 소리쟁이)잎, 아주까리잎, 콩잎, 우엉잎들이 있고, 살짝 데친 미역이나 다시마도 맛난 쌈 재료로 정평이 나 있다. 사실 땅에서 나는 채소중에 잎사귀가 좀 크다 싶으면 모조리 쌈 재료로 동원되었다고 해고 지나친 말이 아니다.
계절도 여름에만 국한되었던 게 아니다. 요즘에야 온실 재배로 무의미하게 되었지만, 원래는 쌈도 철을 가려 해먹는 엄연한 時食이었다. 초봄에는 봄동배추, 시금치 막 따다 싱싱한 것이 입맛을 돋구었던 쌈이요, 지금은 국이나 RMfg여 먹지만 소루쟁이나물 넓적한 잎 데친 것도 이 무렵에 잘 해먹는 쌈 재료였다.
쌈 재료가 다채롭게 흐드러지기 시작하는 것은 늦봄에 다가서면서이다. 사우러부터 칠월까지 취, 머윗잎, 미나리, 우엉, 산씀바귀와 같은 산나물, 들나물들이 나타나는데, 상추, 쑥갓들도 이때가 전성기이다. 팔구월로 접어들면 고춧잎, 깻잎, 호박잎, 콩잎같은 쌈 채소들이 기다린다. 이것들 중에서 사시장철 가장 흔히 먹는 쌈 채소가 상추와 들깻잎, 밥도 싸먹지만 고기를 먹을 때도 필수로 등장한다.
앞에서 잠깐 설명한 상추는 연한 연두색부터 진한 녹색과 자색 도는 놈까지 종류가 매우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우리가 자주 먹는 상추는 잎상추와 흔히 서양상구라 부르는 결구 상추이다. 상추처럼 기특한 식품도 없다. 빨리 자라고 추위에 강하며 벌레도 안낀다. 돌보아주지 않아도 저 혼자 쑥쑥 잘 크고 아무 때나 잘라 먹어도 군말없이 또 키를 늘인다. 그래서 베란다 화분에다가 길러먹는 도시 주부들도 많은데, 한방의 칭찬에 따르면 이 흔해빠진 채소가 변비, 빈혈, 기침, 산모들의 젖 부족에 효험이 있으며, 피를 맑게하는 비범한 재능도 있다는 것이다.
상추와 관련된 유명한 속설이 불면증 치료에 좋다는 것인데, 충분한 과학적 근거를 얻지는 못하였지만 이런 설명이 있다. 상추쌈이 오르면 평소보다 밥을 더 많이 먹게되고 상추에 함유된 셀룰로오스 때문에 위액 분비가 활발해져서 신경이 위에 집중되기 때문에 식후 식곤증이 심하다는 것이다.
들깻잎은 향미도 독특하지만 음뜸 건강식품으로 꼽힐 만큼 영양가도 빼어나다. 무기질, 비타민이 얼마나 풍부하야 하면 들깻잎 우린 물에 들어있는 철분은 시금치의 두곱이요, 비타민 A의 모체가 되는 베타카로틴 함량이 또 당근의 두곱이다. 여기에 비타민 C, 엽록소도 그득한데, 특히 나트륨과 균형을 이루며 몸속 수분량을 적절히 유지시켜주는 칼륨도 풍부하다고 하니, 새삼 달라뵈는 채소이다. 들깻잎은 간장에 조려 갖은 양념을 바르는 장아찌쌈으로도 자주 해먹는다.
찐 호박잎도 잘 해먹는 쌈인데, 더운 한여름 보다는 바람이 선선해지는 무렵이 제격이며, 밥위에 올려 밥김에 찌는 것이 제대로 해먹는 방법이다. 호박잎, 고춧잎, 콩잎, 깻잎들은 열매를 다 거둔 뒤에 따 낸 놈들이 더 부드럽고 맛이 있다. 팔월말에서 구월 중순까지가 제철.
겨울에도 쌈을 먹는다. '동국세시기'에 '정월 대보름날 나물잎에 밥을 싸서 먹는다. 이를 복쌈이라고 한다'는 대목이 있는데, 여기서 복쌈은 김과 취 볶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무렵에 먹는 것으로 아주까리(피마자) 쌈을 보탤 수 있다. 김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조선의 쌈요리'로 일본 요리책에도 종종 소개되는 취쌈과 아주까리쌈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취쌈은 데친 취나물을 간장과 참기름에 무친 뒤에 넓게 펴서 완자처럼 빚는 정갈한 산사 음식. 봄에 야들야들 핀 어린 취로 만들기도 하는데, 특히 오대산과 용뮨산 깊은 골에서 나는 잎 가장자리가 톱끝처럼 생긴 '곰취'의 맛을 으뜸으로 꼽는다. 아주까리는 등불 기름용으로 예전에 흔하던 것. 요새는 시골에 가도 구경하기가 어렵다. 아주까리 쌈은 말린 아주까리 잎을 물에 감갔다 꼭 짠 다음, 갖은 양념에 다진 쇠고기를 볶아서 밥과 같이 싼다. 향은 별 것 없지만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연한 잎의 맛이 일품이다.
쌈 이야기에 쌈장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대개 그냥 고추장이나 된장들을 적절히 섞은 막장을 놓아 먹지만 고추장에 다진 쇠고기를 넣어 볶은 천육찬千肉饌, 천리장千里醬으로 별미를 찾기도 한다. 찐 호박쌈에는 된장을 묽혀 만드는 강된장을 제격으로 친다. 멸치젓을 걸러 만드는 멸장국물이란 쌈장도 있다. 미역 다시마 같은 해조류와 배춧잎, 가을 갓으로 싸는 쌈들에 희한하게 어울린다. 조기 조림을 놓아먹는 방법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의 쌈들과 좀 다르지만 쌈을 먹는 자리에서 빠뜨리지 못하는 음식하나가 보쌈김치이다. 배추 넓은 잎에다 배추속, 까두기, 고추, 파, 마늘, 생강, 배, 밤, 잣 그리고 낙지와 마른 묵어 같은 갖가지 재료를 한보자기에 싸서 익히는 보쌈김치는 가장 정교하고 우아하게 발전한 '쌈 문화'로 추켜세워도 좋을 것이다.
보쌈이란 말에는 뜻이 여럿 있다. 과부를 업어가거나 양반짐 딸 팔자땜한다고 사내를 업어다가 방에 넣어주는 것도 보쌈이고, 양푼에 구명을 둟어 물고기를 잡는 도구도 같은 이름인데, 음식 이름도 된다. 음식으로 보쌈이라하면, 삶아서 뺘를 추려낸 소 대가리나 돼지 대가리 고기를 보에 싸서 눌러두었다가 썰어낸 것을 말한다.
쌈에 대해서 여러 말을 해댔지만 사실 쌈만큼 격식이나 재료에 구애받지 않는 음식이 없다. 비빔밥처럼 주변의 재료나 먹는 사람의 사정, 취향에 따라서 얼마든지 융통성있는 변주가 허락되는 음식이 쌈이니, 어떤 의미에서 쌈은 음식이나 요리라기보다는 '먹는 방법'이라고 하는 쪽이 더 알맞는 표현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식습관을 보고 고려말에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몽고인들이 아무 날채소나 가져다가는 주식(밥)을 척척 잘도 싸먹는 고려 사람들의 '별난' 풍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시詩에다가도 그 신기한 일을 적고 제 나라로 수입해갔다는 재미있는 기록이 실학자 유형원의 '성호사설'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