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ㄴㄷㄹㄹ 한글공부가 아니다. 일본 여행 중에 그렇게 긴 줄은 처음이었다. 콩팥에 지름이 십 센티미터 가량의 물주머니를 두 개나 가진 나는 소변 참기가 쉽지 않은데 긴 줄은 설상가상이었다. 줄 안에 갇힌 처지라 화장실은 군데군데 보였으나 그림의 떡이었다. 마지막 코스를 통과하자마자 급하게 화장실을 찾았다. 손에 들고 있던 여권을 화장실 아기 귀저기대에 놓고는 손가방 두 개만 챙기고 나온 것이다. 곧장 다시 돌아갔지만 항공권도 덤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깜빡해서 두고 온 여권을 누군가 가지고 가버린 것이다.
당신이야 도움을 주려고 가져갔겠지만, 잃어버리고 황망해할 주인공을 한 번이라도 떠 올려 보았다면 남의 것을 쉽게 가져가지는 못했을 거다. 머리가 하얘진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여권을 놓아둔 자리가 눈에 선한 데 가보고 또 가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가슴이 서서히 조여오는 것 같았다. 가방 속에 없는 줄 알면서도 뒤집어 탈탈 털어보았으나 잡동사니들이 내 마음을 더 어지럽게 했다.
들은 얘기로는 일본 여행 중 버스 정류장에 두고 온 가방을 3일 뒤에 가서 찾아왔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하는데 누군가 오지랖 넓은 이가 좋은 일 한다고 가져간 것이리라. 바쁜 와중에 오래전 내 잘못이 갑자기 떠올랐다. 어느 겨울, 울산의 큰 대로변에 흩어져 있던 회계서류들이 바람에 날려 갈까봐 정성껏 정리를 해서 가까운 가게에 맡겨두고 주인이 찾아가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돌이켜 생각하면 잃은 사람이 어디서 잃었을지 모르고 서류를 찾겠다고 다시 그 길을 왔을지 모르는데 그만 가게에 맡겨버렸으니...
나만 옳다는 생각의 미로에 갇혀 남에게 해를 입혔다고 생각하니 끝없는 미안함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가이드를 만나서 전후 사정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전혀 뜻밖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일본에서는 남의 여권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으니 다시 찾아보라”고 일러주고는 바람같이 휙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어려울 땐 누군가 옆자리에 있어 준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 터인데 그가 얄밉게 느껴졌다. 일행에게 가보려니 여러 사람 걱정시킬 것 같고, 혼자 있자니 귀 너머의 소리는 들리지 않아 그야말로 냉가슴 벙어리 신세였다. 일단 와이파이가 열려야 지인들에게 내 상황을 알릴 수 있을 터인데 언어 소통이 되지 않으니 방법이 없었다. 면세점의 불빛은 저희끼리 어울려 맴을 돌고 내 마음도 덩달아 빙글빙글 어지러움만 더했다.
다시 지나가는 가이드를 큰 소리로 불렀다. 여권이 분실물 보관소에 있을지 모르니 찾아가 보든지 구내방송 하는 곳을 찾아보든지 하자고 제안했으나 허사였다. 생존 일본어 외에는 통역이 불가능한 사람이란 걸 알고 나니 더 불안해졌다. 일본에서 일문학을 전공했다는 말은 뻥인 것 같았다. 그때부터 믿는 구석이 없어져 계속 한국의 지인들과 연락했다. 가이드와 소통이 되지 않으면 함께 간 여행사 사장을 찾아보라는 조언을 따랐다. 반갑게 만난 여행사 사장은 나더러 우왕좌왕하지 말고 한자리에 머물라 하고는 동분서주했다. 행여나 내 이름이 방송에 불리지 않을까 노심초사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었다.
6·25때, 서울역에서 가족을 잃은 4학년 어린이가 헤어진 자리에 그대로 기다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이틀을 지나니 부모가 다시 찾아와서 이별을 면했다는 이야기 등, 기다리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져오니 불안의 강도는 점점 세졌다. 일본의 아름다웠던 4대 정원과 염전탐방, 세계적인 미술관 관람 등 소중했던 여행 기억은 점점 줄어들고 미지의 시간이 어둠의 모습으로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여권 재발급을 받으려면 주말이 지나야 한다. 일본에서 몇 박을 더 지내야 할 처지가 되면 어떻게 될까? 단체 여행이어서 일행이 행여 나 때문에 비행기를 못 타게 될 수도 있겠다싶어 자꾸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작은 구멍이 큰 둑을 무너뜨린다더니 순간의 방심이 내 마음을 감옥에 가두었다. 살면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었는데도 근래에 부쩍 건망증이 심해진 것 같다. 냉장고에 음식물을 보관할 때, 해산물 농산물로 분류해서 세분화 해 넣어야 하고, 포장해둔 식품도 일일이 이름표를 붙여 놓아야 하는 처지다. 매일 시간별 일정도 휴대전화에 일일이 메모해 두고 중간중간 확인하지 않으면 잊는 일이 부지기수다. 오래전 기억이나 과거 시어머님께 당했던 억울한 기억은 토씨 하나까지 생생한데 '최근' 일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혹시라도 알츠하이머병은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드디어 여행사 사장이 환한 미소로 다가왔다. 여권과 탑승권을 세관 직원이 가져와 본인에게 직접 전해 주겠다며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시간이 되면 해결될 것을 국제 미아가 되어 등줄기에 땀이 나도록 마음 졸인 걸 생각하면 바보가 따로 없었다.
자꾸만 심해지는 건망증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 노화현상이라 좋다는 약이나 식품을 먹어도 별 효과가 없다. 그렇다면 자연스런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이제부터라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매사에 신경을 더 쓰고 조심하며 급하지 않게 생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랴. 세월의 무상함을 피해 갈 수 없으니 말이다.
첫댓글 네. 이렇게 정리하면 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른 작품 쓰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