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누가복음 15:11~24
제목: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 기독교는 회개를 하는 신앙입니다. 보통 은혜를 받고 처음 믿을 때 하는 회개는 회심이라고 부르고, 이미 회심을 한 성도가 점진적 성화의 과정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는 반복적인 회개는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심은 한번 하는 것이고 회개는 성도의 삶 가운데에서 반복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성도가 성화되었다고 할지라도 현세에서 완전하게 성화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완전한 성화는 영화의 단계에 가서나 가능합니다.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위 말씀의 시제는 과거형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인 구원의 서정으로 보면 미래에 영화(glorification)가 됩니다. 회심은 회개와 처음 믿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고, 회개는 이미 믿고 있는 믿음과 회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회심은 개종이라고도 하는데요. 불신자인 이방인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회개하며 믿기 시작하는 것이므로 여러 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다가 타락을 한 자 중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다시 회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 일시적인 타락은 가룟 유다처럼 완전한 타락이나 배교가 아니라 일시적인 방황을 하고 끝내는 아버지께로 돌아옵니다. 탕자가 일시적 타락과 방황은 하지만 회개를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이유는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는 탕자(蕩子)라는 단어에 죄는 지었지만 아들(子)이라는 의미가 이미 들어가 있습니다. 방탕한 아들도 아들은 아들입니다. 이는 법적 신분입니다.
● 정확히 말하면, 성경에 탕자(蕩子)라는 단어가 그대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읽으면 누가복음 15장11절에 두 아들이 나올 뿐입니다. 집에 아버지와 함께 있는 맏아들과, 아버지와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가서 허랑방탕(虛浪放蕩)하게 살았기 때문에 방탕한 아들을 줄여서 탕자(蕩子)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
영어 성경들은 허랑방탕(虛浪放蕩)을 의외로 밋밋하게 번역을 했습니다.
NIV) squandered his wealth in wild living. KJV) wasted his substance with riotous living. NASB) squandered his estate with loose living. |
NIV와 NASB가 표현한 wild와 loose는 그렇게 강한 뜻은 아닙니다. 그나마 KJV의 riotous가 개역개정의 방탕한 삶에 상대적으로 더 부합을 합니다. 영어로 riotous living은 현대에도 흔히 쓰는 표현이고 방탕한 생활을 의미한다는 것을 영어사전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riot는 반란•폭도의 의미가 있는데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배신을 한 탕자의 모습에는 riotous가 상대적으로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버지와 집을 떠나 나가서 허랑방탕하게 산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근거와 신분은 그가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탕자가 회개할 수 있는 근거와 신분의 말씀은 성도의 신분과 지위를 확고히 설명해 줍니다.
갈라디아서 4: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
두 아들을 키운 아버지에게는 아들 둘과 종들이 있었는데요. 아들이 아닌 종들은 잘못을 뉘우쳐도 아버지께로 돌아올 능력과 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올 권리와 자격은 오직 아들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
아들의 영을 받은 불효자식이 아들로서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게 효력을 발휘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의 인도를 받습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6.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
아들의 영은 양자의 영이시고 성령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은 비록 일시적으로 일정기간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께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탕자에게 돌아갈 마음•회개하는 마음을 역사하신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아들의 영•양자의 영•그리스도의 영 등으로 표현해도 영어성경을 읽으면 전혀 헷갈리지 않습니다. 영어성경에서 성령이 아닌 영에는 소문자 s를 쓰고 성령께는 대문자 S를 썼기 때문입니다.
갈4:6 아들의 영, the Spirit of His Son (NASB) 롬8:15 양자의 영, the Spirit of sonship (NIV) 롬8:9 그리스도의 영, the Spirit of Christ (NIV) |
진정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올바른 회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올바른 회심을 한 사람도 때로는 믿음이 약해질 수도 있고 새 생명의 활동이 미약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자녀들이 회개하여 힘을 얻는 것은 회심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고요. 회개를 하여 침체되어 있는 새 생명이 왕성히 활동하고 신실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자녀들의 권리입니다.
● 회개의 경륜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들 중 매우 위대한 것입니다. 루터의 탁상담화를 통해서 저는 회개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의 위대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대(大) 종교개혁자의 명쾌한 설명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그분들은 무거운 죄를 범하고 넘어졌다가 하나님의 섭리와 용납하심에 힘입어 회복된 후로는 더 이상 자신들의 고매한 인격과 은사를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더욱 경외하게 되었습니다. 다윗만 보더라도, 우리아를 사지로 보내어 죽게 하고 그의 아내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비방거리를 준 까닭에 자신이 과거에 국가를 바로 세우고 선정을 베푼 일을 자랑하지 못하고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고 자백한 뒤 눈물로 자비를 구했습니다. 욥도 “나는 깨닫지도 못한 말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3, 6) 하고 말했습니다. |
잘못을 범한 후 그것을 쿨하게 인정하고 뉘우치며 회개하는 데에는 믿음과 진정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회개는 믿음의 세컨드 찬스(2nd chance)이지만 어느 면으로는 베스트 찬스(best chance)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아무리 거듭나고 죽었다 깨어나도, 의로운 의인이 아니라,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기 때문입니다(justus 의인, peccator 죄인). 하나님만이 의롭고 의로운 분입니다. 다윗이 지은 간음과 살인 교사의 죄는 그것이 간악하다고 금방 판단이 되는데요. 루터는 동방의 의인으로 일컬어지는 욥도 회개해야 할 죄인으로 정확히 판단을 해서 묵상자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누군가 간악한 궤계로 나불나불 거짓말을 하는 것은 당연한 죄이고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는 것(욥42:3)도 죄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다! 성령을 받았다! 성령충만하다!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분수를 넘고 도에 지나치는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들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겸손한 평신도들에 비해서, 특히 설교를 준비하고 성경을 해석해서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는 사역자들은 더더욱 욥의 회개를 명심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의 안전과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오늘 묵상 본문 눅15:13을 보면 아버지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주신 것들(재능•건강•시간 등등)을 낭비하는 것은 죄입니다. TV시청이나 인터넷 검색은 장시간을 해도 지루하지 않은데 성경은 한 줄만 봐도 지루하다면 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자녀는 눅15:18에서처럼 자신이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이 아들이 아닌 것처럼 살았다고 고백을 합니다(눅15:19). 그러한 진정한 자백과 회개를 하면 아버지는 기꺼이 용서해 주시고 측은히 여겨 주시며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십니다(눅15:20). 이것이 회개의 능력입니다!
첫댓글 "묵상 본문에 인용된 루터의 글은 "루터의 탁상담화 68"입니다.
카페 회원 분이 올린 포스팅에 나옵니다.
https://cafe.daum.net/1107/YrXT/106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었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마지막 문단 중
//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는 것(욥42:3)도 죄입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다! 성령을 받았다! 성령충만하다!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분수를 넘고 도에 지나치는 영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들도 죄가 될 수 있습니다. //
에 관련하여 간접적으로 연관이 되는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도서 7:16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아멘.
명심해야 할 말씀입니다.
좋은 댓글과 성구 제시 잘 참고하겠습니다.
주님 우리를 측은히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해주시는 성령님과 우리를 위해 중재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의 사랑의 품으로 나아가게 해주세요.
아멘!
아멘222
아멘33
회개에 대하여 풍부한 설명과 큰 그림을 보여주는 글로 보입니다.
공감 및 댓글 감사합니다.
공감합니다.
회심과 회개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글이네요. 설명이 너무 잘되어있어 다시한 번 읽어보려고요. 생각나는 분이 있어 그분께도 글을 공유할까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괜찮습니다. 좋습니다^^ 공유하시기 편하도록 공유 허용으로 해놓았습니다.
글 주소를 복사해서 붙여 주셔도 됩니다.
구분해 본다면 회심은 회개의 첫 시작이고, 회개는 회심한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하는 지속적인 죄와의 투쟁에 따른 승리와 실패 사이에서 계속되는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회심은 단회적이나 회개는 지속적인 것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유태화, <개혁신학의 구원론>(크리스찬출판사), p.135.
@장코뱅 감사합니다. 추가글도 큰 도움 됩니다. :)
@장코뱅 좋은 설명을 올리셔서 감사합니다.
부르심에 반응함(회심)
... 이 최초의 회개와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남은 평생 동안 회개와 믿음에 대한 지속적인 마음가짐의 본보기를 제시합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2장 6절에서 한 말을 명심하십시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웨인 그루뎀, <꼭 알아야 할 기독교 핵심진리 20>(부흥과개혁사), p.136-137.
회심이란 두 개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되지 않는 요소들, 즉 회개(repentance)와 신앙(faith)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사건이다.
밀라드 J. 에릭슨, <조직신학 개론>(기독교문서선교회), p.507.
아주 명확한 설명이에요.
회심과 회개를 가능케 해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라는 것을 잘 알게 해주십니다. 아들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아버지에게는 그 자체가 큰 기쁨이 되는 일임을 잘 명심하겠습니다. 루터가 다윗과 욥의 경우를 들어 회개하는 자의 마음 상태를 잘 묘사했는데 다시 여기서 부연설명해주시니 정말 더 절절한 느낌이 듭니다. 회개의 정수, 최고봉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온 둘째 아들, 다윗, 욥의 회개를 잘 새겨서 이 세상 사는동안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살기를 바래야겠습니다.
공감과 댓글 감사합니다.
성령의 유효한 역사의 의해 하나님의 자녀는 회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탕자를 회개하게 하시고 효자도 더욱더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오타가 조금 있었네요. 특히 마지막 문단에서요. 누가복음 // 15장 // 말씀입니다.
오늘 묵상한 성경구절은 "누가복음 15:11~24"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