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1. 20.
인류사회를 윤택하게 만든 천재들을 연구하면서 내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본 대목이 있다. 어느 순간에 누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었느냐 하는 점이다.
사람의 재능은 얼굴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제각각이다. 재능을 드러내는 시기 또한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재능을 일찍 드러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아주 늦게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또 어떤 경우는 재능이 진흙에 묻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경우 누군가 재능을 가리는 진흙을 털어내고 깨끗하게 닦아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능은 그대로 시들고 만다.
우리나라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재능을 타고나기만 하면 저절로 모든 게 이뤄지는 줄 아는 경향이 있다. 그 사람이 재능을 발현하기 위해 남모르게 어떤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아산 정주영(1915~2001)을 보자. 네 번째 가출해 인천과 서울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우연히 쌀가게 배달직원으로 취직한다. 얼마 후 쌀가게 주인이 배달 청년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을 알아보고 그에게 장부 정리를 맡긴다. 그리고 다시 주인은 청년에게 가게 인수를 권한다. 쌀가게 주인으로부터 '근면과 성실'을 인정받은 것이 아산이 맨주먹의 신화를 일으킨 밀알이 되었다. 아산도 훗날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쌀가게에서 성공한 것이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우리는 살면서 고비마다 은인을 만난다. 은인이 내민 손을 잡고 일어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 은인은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배우자가 될 수도 있다. 학교 교사가 될 수도 있고, 사회에서 만난 사람이거나 연인이 될 수도 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나도 그 재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거나 재능을 발휘할 환경이 주어지지 않으면 재능은 활짝 꽃피지 못한다.
▲ 윤여정의 데뷔 영화 '화녀' 포스터
영화감독 김기영(1919~1998). 영화계 종사자들과 영화 마니아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회자되던 이름이다. 김기영을 불러낸 것은 배우 윤여정이다. 윤씨가 지난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에서 김기영 감독을 언급하면서 그가 다시 조명되었다. 윤여정은 자신을 발탁해 1971년 스크린에 데뷔시킨 김기영 감독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천재성이 있는 김기영 감독은 배우의 잠재적 능력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었고, 윤여정에게서 그것을 발견해냈다. 배우 윤여정은 평생 그걸 가슴에 새겼다. 김기영 감독의 가르침이 윤여정의 오늘을 만들었다.
아마데우스가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들 아버지 레오폴드가 있었기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될 수 있었다. 레오폴드는 본인이 탁월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동시에 뛰어난 교사였다. 레오폴드는 18세기에 아마데우스를 데리고 그랜드투어를 감행했다. 이탈리아를 포함해 서유럽의 거의 모든 대도시를 여행하며 아들의 감성과 견문을 넓혀 주었다. 모차르트 음악이 갖는 시공을 초월하는 보편적 감성은 이때 형성되었다. 이런 열정적인 뒷바라지는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시도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가 강연에서 자주 하는 말이 이것이다. 백남준이 괌에서 태어나 그대로 괌에 머물렀다면 미디어아트 창시자 백남준이 있었겠느냐? 일본 도쿄대를 거쳐 독일로 가서 요셉 보이스와 존 케이지를 만나고 다시 뉴욕으로 건너갔다. 크로스오버의 도시에서 조지 머추나스, 오노 요코, 머니 커닝엄, 존 케이지와 같은 쟁쟁한 아티스트들과 어울렸기에 새로운 예술 장르를 꽃피울 수 있었다.
▲ 오노레 드 발자크 / 사진출처=위키피디아
29%의 좋은 환경과 가르침
이인식 지식융합연구소장의 저서 '마음의 지도'를 읽다가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발견했다. '전문 지식과 전문가 수행에 관한 케임브리지 편람'이 2006년에 나왔다는 사실을. 이것은 천재를 연구한 논문들을 최초로 집대성한 책이다.
이 책의 편집자가 앤더스 에릭슨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심리학과 교수. 에릭슨 교수는 "천재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과학자들은 천재가 1퍼센트의 영감, 70퍼센트의 땀, 29퍼센트의 '좋은 환경과 가르침'으로 만들어진다고 분석했다.'(59쪽)
내가 강연에서 하는 말과 100% 일치한다.
'소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의 어린 시절을 보자. 부모는 여덟 살인 그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회 기숙학교에 보냈다. 성벽으로 둘러쳐진 감옥 같은 분위기였다. 방학도 없고 부모들의 면회는 특별한 경우만 허용되었다. 신부들이 교사를 맡았다.
교사들은 소년 발자크에게서 어떤 저항감을 느꼈다. 가혹한 형벌이 끝없이 가해졌다. 툭하면 독방에 갇히는 감금처분을 받았다. 2년 동안 겨우 엿새만 자유로웠던 적도 있었다. 감정적인 체벌도 수시로 자행되었다. 심지어 족쇄까지 찬 적도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어서였다. 다른 학생들도 똑같이 속도를 맞추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제도권 교육과 규율에 맞지 않는 캐릭터였다. 평범한 교사들은 그의 내면에서 어떤 비상한 힘이 꿈틀거리다가 불쑥불쑥 튀어나온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발자크는 이런 환경에서 7년을 보낸다. 그에게 소설가의 길로 인도해준 이는 어머니 같은 베르니 부인. 스물두 살 연상의 베르니 부인이 그를 부드럽게 부추기면서 발자크는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다.
▲ 베르니 부인 / 사진출처 = 발자크평전
구로사와 아키라와 토머스 울프
'7인의 사무라이' '라쇼몽' '이키루' 등을 연출한 일본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 필모그래피만 보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드러내 순탄하게 커온 줄로 안다. 소학교 시절 그는 지능발달이 느렸다. 지진아 취급을 받았다. 또래들에게도 왕따를 당했다. 몸도 허약해 픽픽 쓰러져 툭하면 양호실로 실려 갔다. 게다가 울보였다. 무슨 말만 하면 울음을 터뜨렸다. 구제불능의 저능아 취급을 받았다.
어느 날 미술 시간. 학생들이 제각각 그림을 그렸다. 담임선생 다치카와 세이지(立川精治)는 학생들 사이를 돌며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살펴보았다. 구로사와가 그린 그림을 보고 다른 아이들이 놀려댔다. 무슨 그림을 그렇게 웃기게 그리냐. 그런데 다치카와 선생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선생은 구로사와의 창의성을 발견했다. 다른 학생들 앞에서 구로사와를 칭찬했다. 학교에서 처음 들어보는 칭찬이었다.
다음날부터 소년은 미술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른 과목에서도 공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모든 면에서 달라지기 시작했다. 울보 소년이 사려 깊은 다치카와 선생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구로사와 아키라'는….
▲ 죽기 1년 전의 토머스 울프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소설가 토머스 울프(1900~1938)의 경우를 보자. 그의 삶과 문학을 조명한 영화가 '지니어스'(Genius)다. 나는 이 영화를 지인의 권유로 개봉관에서 보았다. 그리고 TV영화로 다시 감상했다. 무명작가 토머스 울프가 1920년대 뉴욕 최고 출판사 '스크라이브너 선스'의 편집장 퍼킨스를 만나 스타 작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사실에 따라 그려냈다. 배우 콜린 퍼스가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 역을, 주드 로가 토머스 울프 역을 각각 맡았다.
울프는 퍼킨스를 만나기 전까지 여러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지만 전부 퇴짜를 당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만연체 문장에 편집자들이 지레 겁을 먹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퍼킨스는 우거진 덤불 숲에 깊이 숨어 있는 거대한 종유굴의 작은 입구를 발견해냈다. 퍼킨스는 독자의 입장에서 울프의 글을 과감하게 자르고 다듬어 나갔다. 그렇게 탄생한 장편소설이 '천사여, 고향을 보라'다. 데뷔작이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울프는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유명해져 버렸다.
▲ 출판 편집자 맥스웰 퍼킨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퍼킨스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울프는 소설가로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뉴욕타임스 기자를 지낸 퍼킨스는 출판사에 들어와 광고영업을 거쳐 편집자가 된다. 그는 기성 작가가 아닌 장래성 있는 신예를 발굴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스콧 피츠제럴드가 모두 그의 편집을 거쳐 스타덤에 올랐다.
쥘 베른과 프란츠 카프카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2만리' '지구에서 달까지' '15소년 표류기'…. 공상과학소설의 원조로 불리는 소설가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 쥘은 스물한 살 때부터 극작가의 꿈을 키웠다. 살롱을 출입하며 알렉상드르 뒤마를 만나고 그의 아들 뒤마 피스와 친하게 지낸다. 습작하며 극작가 데뷔를 모색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법률가를 강요한다.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부자 관계에 위기를 맞았다.
문학의 길을 모색하며 그는 국립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국립도서관에는 과학, 지리학, 발견에 관한 최신 책과 자료들이 넘쳤다. 그는 과학, 발견, 지리학의 서적들을 뒤적이며 시간을 보냈다.
▲ 피에르-쥘 에첼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모험소설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한다. 1862년 처음 쓴 모험소설 '기구 여행'을 편집자 '피에르 쥘 에첼'이 보여준다. 당대의 편집자 에첼은 대대적인 수정과 보완을 요구했고, 베른은 그대로 따랐다. 에첼은 1863년 '5주간의 기구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한다.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다.
베른의 두 번째 작품이 '아테라 선장의 모험'. 에첼은 이 책을 '신비한 여행' 시리즈의 하나로 기획해 출간한다. 2~3년마다 한 권씩 출간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과학적·지리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그의 모험소설은 과학 만능의 시대 분위기와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작품이 나올 때마다 여러 개 언어 번역되어 전 세계에서 읽혔다. 쥘 베른을 이야기할 때마다 탐광자(探鑛者)의 지질학자처럼 언급되는 인물이 바로 명편집자이자 출판인 에첼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이 '좋은 환경'이었고, 에첼은 '가르침'이었다.
▲ 쥘 베른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프란츠 카프카(1883~1924)도 마찬가지다. 카프카가 프라하대학에서 막스 브로트라는 친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의 문학적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글을 쓰도록 독려한 이가 막스 브로트다. 그뿐인가. 카프카가 죽고 나자 그의 작품들과 서한집을 책으로 출간해 그를 '소설가'로 부활시킨 이도 브로트다.
프로야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어떤 팀에서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투수가 팀을 옮기고 나서 팀의 에이스로 발돋움하는 경우다. 팀을 옮긴 후 각성을 했기 때문일까.
KT 위즈의 선발투수 배제성. 2015년 롯데에서 프로에 데뷔했지만 별다른 능력을 보여주지 못한 채 2017년 KT로 트레이드됐다. KT에서도 2년간 1승을 거두는 데 그쳤다. 이강철 감독이 2018년말 KT로 부임해서 배제성의 훈련을 지켜보다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프런트 직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쟤를 그동안 왜 안 썼죠? 몸쪽 결정구가 좋잖아요."
감독이 재능을 인정하자 선수는 달라졌다. 배제성은 2019년부터 2021년까지 3점대의 평균 자책점을 찍으며 29승을 기록했다. 명실공히 KT의 에이스가 된 것이다. 배제성이 이강철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성관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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