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26
전통적으로 매 선거 때마다 반(反)보수당에 표를 몰아줬던 호남. 그 호남이 이번 대선에서 불현듯 격전지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정치권 안팎에서는 호남이 이번에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과반의 표를 던질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다만 그 수위가 90% 전후의 득표율을 보였던 과거와는 사뭇 다를 것이란 예상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호남 현지의 표심은 수도권과 다른 지역의 호남 원적·본적자 표심과도 연동될 가능성이 높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선거운동 기간 이 지역을 수 차례 찾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특히 지난 24일 문재인 대통령의 이례적인 전북 군산 방문은 여권도 흔들리는 호남 민심을 의식하고 있다는 중요한 반증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전투표를 불과 8일 앞두고 비판 여론이 나올 것을 알면서도 감행한 행보였다. 정치권에서는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단일화, 코로나19 확산, 우크라이나 사태와 더불어 문 대통령의 선거 직전 지방 일정도 선거에 상당한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이 24일 전북 군산에서 열린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재가동 협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사전투표 8일 남기고 文 군산행…“군산조선소 기억해 달라”
24일 문 대통령은 전북 군산을 전격적으로 방문했다.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에서 열린 ‘군산조선소 재가동을 위한 협약식’에 참석하는 게 명분이었지만 정치권 안팎의 반응은 달랐다. 현직 대통령이 공식 선거운동 기간 지방을 찾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북 군산은 여당의 ‘텃밭’인 곳이고 이날은 사전투표일을 불과 8일 남겨둔 날이었다. 이전 대통령들이 차기 대선을 앞두고 지방 일정을 최소화한 것과는 대비되는 행보였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현 정부가 군산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긴 시간 동안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군산을 산업위기대응특별지역·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해 금융 지원을 확대했다”며 “새만금과 연계해 도로와 항만 등 인프라를 확충하고 해상 태양광, 해상풍력 같은 새 산업도 육성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군산조선소 정상화도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며 “군산형 경제 회복 프로젝트는 전국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다”고 역설했다. “군산조선소 재가동에 이르기까지 우리 정부가 함께했다는 사실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신혜현 청와대 부대변인 역시 사전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에게 군산은 ‘제일 아픈 손가락’이었다”며 문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부터 군산조선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을 부각했다. 이와 함께 문 대통령이 취임 직후 이낙연 전 국무총리에게 내린 첫 지시가 군산 지원 대책 마련이었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문 대통령은 그간 군산조선소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했고 재가동 시 방문하겠다는 말도 했다”며 “말년 없는 정부라고 누차 말했듯 방역과 민생 경제는 마지막까지 계속 챙길 것”이라고 말했다.
▲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가 24일 광주 동구 충장로에서 연설하고 있다. / 연합뉴스
尹 호남 공들이기에 사실상 ‘맞불’…野 “텃밭 다지기냐”
문 대통령의 군산 방문은 무엇보다 윤 후보의 최근 호남 공략과 맞물려 여러 해석을 낳았다. 호남은 윤 후보가 2월에만 네 번이나 찾으며 총력을 기울이는 지역이다. 보수당 후보이면서 자신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을 이을 적임자라는 주장도 연일 내놓고 있다. 캐스팅보트 지역인 수도권, 충청, 강원, 제주, PK(부산·경남) 등에서 압도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말이다. 민주당의 후임을 자처하는 듯한 발언에 불편해 하는 정통 보수 지지층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호남 공략에 우선 골몰하는 모양새다. 윤 후보는 지난 22일에도 군산을 찾아 “김 전 대통령이라면 대기업의 호남 진입을 막았겠느냐”며 현 정부를 비판했다.
이 전략과 관련해서는 20~30대에 대한 자기 영향력을 확인하려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구상도 상당 부분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윤 후보보다 더 자주 호남을 찾는 이 대표는 이 지역 목표 득표율을 30%까지 끌어올렸다. 이 대표 입장에서는 이번 대선의 승부 지점이 ‘지역’이 아닌, ‘세대’가 돼야만 정치적 이득을 최대한 누릴 수 있다. 승부처가 무엇이 됐든 이기기만 하면 되는 윤 후보와는 입장이 사뭇 다르다. 다른 지역의 경우 득표율이 상승해도 대중들이 이 대표 효과로 해석하지 않지만, 호남만은 이 대표의 업적으로 인정할 수 있기에 그렇다. 광주복합쇼핑몰, 흑산공항 논쟁도 윤 후보 본인보다 이 대표가 더 적극적으로 이슈화를 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군산 방문은 사실상 윤 후보에게 ‘맞불 전략’을 놓은 것으로 해석됐다. 윤 후보가 띄우는 ‘호남 홀대론’을 우회적으로 반박하며 이 후보를 측면 지원한 꼴이 됐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도 22일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 호남의 20대 남성 지지율 부진을 우려하면서 호남 상주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 개인적으로도 2016년 4월 총선에서 ‘반문 정서’로 정치 생명이 끊길 뻔한 경험이 있다. 문 대통령은 당시 광주에 내려가 “호남이 지지를 거둔다면 정계를 은퇴하고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며 지키지 않을 공언까지 했다. 문 대통령은 2017년 대선에서도 안철수 후보와 표가 갈려 민주당계 대선 후보로는 처음으로 호남에서 50~60%대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허은아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24일 논평에서 “호남 여론을 달래고 다시 한 번 텃밭을 다지려는 정치적 의도”라고 비판했다. 호남 민심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 탓이었는지 야당의 비판 수위도 여느 때보다 낮았다.
▲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가 지난 18일 전남 목포 평화광장에서 열린 '김대중 대통령님, 그립습니다' 유세에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이재명도 ‘난색’…文 “원전 빨리 가동” 등 계속 변수
흥미로운 것은 임기 말까지 쉬지 않는 문 대통령의 지방 일정을 윤 후보는 물론 이 후보조차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라는 점이다. 정치권에 따르면 이 후보 측은 최근 선거판에서 존재감을 키우는 문 대통령 행보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 후보의 존재감을 지울 수 있는 데다가 문재인 정부와의 차별화를 꾀하는 전략과도 배치되는 탓이다. 이달 초중순 문 대통령이 윤 후보와 ‘적폐수사’로 직접 설전을 벌인 것도 결론적으로 이 후보 지지율에는 큰 도움이 안 됐다는 평가가 많다.
이 후보는 최근 윤 후보 진영을 제외한 모든 세력에 손을 내밀며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사실상 단일화에 준하는 효과를 노려보겠다는 속셈이다. 윤 후보, 안 후보 간 단일화 논의가 결렬된 틈을 적극 비집고 있다. 반문(반(反)문재인) 정서는 이 후보 입장에서 극복해야 할 최대 장애물로 삼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선대위 미디어특보단장인 최민희 전 의원은 24일 유튜브 채널 ‘박시영 TV’에서 “아주 극히 일부 ‘극문(극도로 문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들) 똥파리’라는 분들만 제외하면 이제 거의 다 뭉치고 있는 분위기”라고 현 판세를 진단했다.
반면 청와대의 판단은 이 후보 측과는 다소 달라 보인다. 선거개입 논란은 최소화하면서 정권 재창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임기 말 문 대통령 지지율이 윤 후보, 이 후보보다 높은 40~50%에 달한다는 점이 자신감의 최대 근원이다. 대통령의 임기 말 지방 순방은 대선을 넘어 6월1일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효력을 볼 수 있다.
이 후보, 윤 후보 간 지지율이 박빙 양상을 보이는 가운데 문 대통령 일정은 선거 직전까지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3월1일 3·1절 행사에서 나올 대(對)일본, 차기 정부 메시지부터 관심사다. 지방 일정을 추가할 가능성도 있다. 선거가 임박한 시점에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얼마나 늘어날 지 여부도 청와대의 대응 영역이다. 확진자가 하루 20만~30만명까지 늘면 이는 선거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는 숫자다. 정치권에선 대체로 투표율이 올라갈수록 윤 후보에, 내려갈수록 이 후보에 유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 문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사태로 에너지 공급에 비상이 걸리자 25일 갑자기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 원자력발전소를 거론하며 “그간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기준 강화와 선제적 투자가 충분하게 이뤄진 만큼 가능하면 빠른 시간 내에 단계적 정상 가동을 할 수 있도록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선거를 앞두고 탈원전 기조도 뒤집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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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