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5. 26
R씨(로즈 R.)를 줄곧 보살펴온 병동의 할머니 간호사도 이렇게 말했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에요. 그 여자는 내가 알아온 30년 동안 하루도 늙지를 않았어요. 우리는 늙어가는데, 로즈는 그대로라니까요.” 정말이었다. 예순한 살의 R씨가 칠흑처럼 까만 머리에 주름살 하나 없는 서른 살로 보여서 마치 가수(假睡) 혹은 혼수 상태가 그녀에게 마법을 부린 듯했다. -
- 올리버 색스 ‘깨어남’에서
▲ 올리버 색스는 기면증뇌염 후유증인 파긴슨증으로 수십 년 동안 몸이 굳은 상태로 지내던 사람들에게 L-도파라는 약물을 투여해 극적으로 활동성을 되찾는 과정을 기록한 책 ‘깨어남’을 집필해 1973년 발표했다. 이를 원작으로 1990년 동명(Awakenings)의 영화가 만들어졌다(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의 기적’이란 제목으로 개봉했다). 영화 속 한 장면이다. / 컬럼비아 픽처스 제공
반년쯤 전에 서울 상수역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일을 마친 뒤 점심을 하러 식당으로 가고 있는데 줄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다.
“무슨 일이죠?” “한정판 신발을 사려는 사람들이야. 1킬로미터도 넘을 걸.”
유명 브랜드의 이곳 매장에서만 판매한다는데 도대체 어떻게 생긴 신발이기에 이 난리인가 싶었다. 얘길 들어보니 이런 한정판을 사면 인터넷에서 몇 배 가격으로 되팔 수 있다고 한다. 선뜻 수긍이 안 갔지만 오십 대인 필자가 이삼십 대 젊은이들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지난주 휴대전화에서 한 인터넷서점의 광고문자를 받았다(앱을 깔 때 부주의로 광고수신(선택)에 동의했나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의 한정판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젠 책도 한정판인가...’라며 혀를 찼지만 워낙 유명한 작가(올리버 색스)의 책이라 연결해봤다. 이 서점 단독 양장 리커버(새 표지 디자인) 한정판이라는데 책값은 그대로다. 그래서인지 과학분야 판매 1위에 올랐다!
소장용으로 살까 하다가 집에 책이 있는데 또 사는 건 아닌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이제는 갖고 있는 물건도 하나씩 버려야 할 나이다). 그러고 보니 색스가 세상을 떠난 지도 만 5년이 다 돼 간다. 인생무상이라는 문구가 가슴에 와 닿는다.
파킨슨증 환자들은 시간이 멈춘다
▲ 최근 한정판 마케팅이 유행이다. 올리버 색스의 대표작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표지(좌), 양장 리커버 한정판 표지(우). / 교보문고 제공
1985년 출간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색스의 대표작이지만 필자에게는 그의 책 가운데 1973년 나온 ‘깨어남’이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65년 신경과 전문의로 뉴욕 베스아브라함병원에서 일하게 된 색스는 그곳에서 특이한 환자들을 봤다. 1915년부터 1926년까지 10여 년 동안 유행한 수면병(기면성뇌염으로 바이러스 감염이 원인인 것으로 추정된다)에 걸려 후유증으로 수십 년째 식물인간에 가까운 무력한 상태로 입원해 있는 사람들이다. 이 무렵 ‘L-도파’라는 파킨슨병 치료제가 나왔고 색스는 환자들의 증상이 파킨슨병과 비슷하다는데 착안해 이 약물을 투여했고 그 결과 환자들이 수십 년 만에 깨어나는 장면을 목격했다.
환자 20명의 사례를 임상일지 형식으로 기술한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이란 존재의 깊고 어두운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전율이 일었다. 책에는 기괴한 사례들이 무수히 나오는데 필자가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가운데 하나가 이 글 맨 앞에 인용한 R씨라는 환자의 사례다. 유행이 끝나가던 1926년 21세에 발병한 R씨는 그 뒤 파킨슨증 증상이 점점 심해져 결국 1935년 30세에 입원해 몸이 거의 마비된 채 30년을 넘게 살고 있었다. 1966년 R씨를 처음 본 색스는 증상의 심각함보다 61세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현실적으로 젊은 외모에 더 놀랐다. ‘몸이 굳으며 시간도 멈춘 게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Y부인(헤스터 Y.)의 사례도 기괴하다. 열아홉에 결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다가 서른 살에 병에 걸린 Y부인은 서서히 몸이 굳어지면서 서른여섯에 입원했는데, 1966년 Y부인을 처음 봤을 때 색스는 ‘사실상 항상 움직이지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서 ‘파킨슨증과 긴장증이 무한히 심각해질 수 있음’을 깨닫고 심한 충격을 받았다. Y부인은 씹고 삼키는 동작의 운동마비가 갈수록 심해져 1969년부터는 유동식만 받게 됐고, 근육이 멈춰 굶어 죽게 될까 걱정이 된 색스는 L-도파를 투여했다.
투약 10일차까지 변화가 없던 Y부인은 11일째 날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병동 끝까지 걸어갔다.’ 점심으로 나온 유동식을 보고 Y부인은 “물컹거리는 건 이제 그만 주시라고요!”라며 “스테이크로 하겠어요. 잘 구워서요!”라고 외쳤다. 스테이크가 나오자 “한껏 음미하며 게걸스레 먹었다.” 그리고 “수십 년간 묶여 있다가 순식간에 해방된 오른손으로 공책에다 처음으로 일기를 썼다.”
뼈에 금이 가거나 부러져 깁스를 한 적이 있는 독자들은 이게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지 알 것이다. 필자도 어릴 때 새끼손가락뼈에 금이 가 한 달 동안 깁스를 한 적이 있는데, 깁스를 풀고 난 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아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색스는 “(다리 골절로 인한 깁스로) 정상 활동의 휴지기를 경험하고 나면 비활성화된 다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잊어버려서’ 다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재학습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러려면 몇 주에서 몇 달까지 걸린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Y부인은 무려 30년 넘게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움직이지 않고 비활성화 상태로 있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벌떡 일어나 걸어 다닌’ 것이다!
이 사례에 깊은 충격을 받은 색스는 “파킨슨증에 대해서 운동능력, 존재, 시간 그 자체에 대해 내가 그동안 생각해오던 모든 것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Y부인에게는 정지 상태 동안 ‘시간의 경과’가 없었기 때문에 재학습할 필요도 없었던 게 아닐까”라고 추정했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달라는 기자들의 요청에 아인슈타인은 “난로 위에 있으면 1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지고 미인 옆에 있으면 한 시간이 1분처럼 느껴진다”고 재치있게 답했다. 즉 심리의 상대성 이론으로 우리도 늘 경험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깨어남’에 등장하는 기면성뇌염으로 인한 파킨슨증 환자들에서 보이는 현상은 ‘생리의 상대성 이론’ 아닐까.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희망사항(R씨의 노화 정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이게 가능한 일일까.
휴면 기간 동안에도 근육 유지
▲ 4~6개월에 불과한 짧은 수명 덕분에 터과이즈킬리피시가 최근 척추동물 노화 연구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 Jenage 제공
학술지 ‘사이언스’ 2월 21일자에는 색스의 ‘깨어남’이 연상되는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담은 논문이 실렸다. 당시 읽어보려다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 한정판 광고 덕분에 ‘갑자기’ 생각났다.
미국 스탠퍼드대 유전학과 앤 브루넷 교수팀은 터과이즈킬리피시(African turquoise killifish)의 휴면 기간 동안 일어나는 전사체를 분석했다. 터콰이즈킬리피시는 아프리카의 민물고기로 수명이 4~6개월에 불과해 최근 척추동물 노화 연구의 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생쥐는 사람과 같은 포유류라는 장점은 있지만 수명이 2~3년으로 노화 연구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터과이즈킬리피시는 알에서 배아발생 과정이 일어날 때 주변 환경에 따라 휴면(diapause)에 들어갈 수 있다. 자연 서식지가 건기에 들어가면 거의 반년 동안 비가 오지 않아 호수가 마르기도 하는데 이때 배아 상태에서 멈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보통 휴면 기간은 5~6개월이지만 길게는 2년에 이르기도 한다. 물론 물이 충분하면 휴면 없이 배아발생이 진행된다.
연구자들은 휴면 여부와 기간이 부화한 뒤 죽을 때까지 성장이나 수명, 생식력 등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봤다. 아무리 휴면이라도 수명에 버금가거나 서너 배 되는 시간이 지나므로 그 후 삶에 다소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을까. 그러나 실험 결과 휴면 여부와 기간은 부화 뒤 터카이즈킬리피스의 삶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았다. 휴면 기간 동안 배아는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됐다는 말이다.
휴면에 접어든 배아는 대사가 극적으로 낮아지는 것일까. 실제 심장박동수를 보면 휴면 상태에서 분당 20회 미만으로 떨어진다(배아발생이 진행될 때는 100회 내외). 그렇다면 배아의 전사체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크게 떨어져 있을까. 휴면 상태의 전사체를 분석해 발생이 진행 중인 배아의 전사체와 비교한 결과 뜻밖에 사실이 드러났다. 많은 유전자에서 발현이 떨어져 있었지만 오히려 늘어난 유전자도 꽤 됐다. 휴면 기간 동안 배아가 시간의 흐름의 영향을 받지 않은 건 생명 활동을 최소화하는 수동적인 전략이 아니라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해 얻은 능동적인 대처의 결과라는 말이다.
휴면 동안 발현이 올라간 상위 10개 유전자를 들여다보자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폴리콤복합체 일원이 셋이나 포함돼 있었다. 폴리콤복합체는 게놈에서 DNA와 단백질로 이뤄진 구조인 크로마틴의 상태를 조절하는 역할을 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폴리콤복합체 유전자의 하나로 전사인자인 CBX7은 특정 영역의 크로마틴을 뭉치게 해 해당 유전자들의 발현을 억제한다. 그런데 휴면 동안 CBX7의 발현이 크게 올라갔다. 그렇다면 어떤 유전자들이 영향을 받았을까.
▲ 터과이즈킬리피시는 배아발생 과정에서 가뭄 같은 악조건에 놓이면 휴면 상태에 들어간다. 최근 연구결과 휴면 기간에도 전사인자인 CBX7 유전자의 발현이 높아 근육이 유지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왼쪽). 유전자편집 기술로 CBX7 유전자를 고장내면 휴면 기간 동안 근위축이 일어난다(가운데와 오른쪽). 빨간색 화살표가 근섬유 소실을 가리키고 있다. / 사이언스 제공
예상대로 대사와 관련된 유전자들이 억제됐다. 그 결과 심박수도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근육 유지와 신경전달 과정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은 오히려 더 활성화됐다. 이는 CBX7이 근위축에 관여하는 UBE2H 유전자를 억제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휴면으로 CBX7이 활성화되면서 UBE2H 유전자 발현이 떨어졌고 그 결과 이의 지배에서 벗어난 근육 유지와 신경전달 과정 관련 유전자들이 활성화되면서 근위축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말이다.
연구자들은 이를 입증하기 위해 게놈편집기술(크리스퍼캐스9)로 CBX7 유전자를 고장 낸 돌연변이체를 만들었다. 휴면이 시작되고 한 달까지는 돌연변이체 배아의 근육도 멀쩡했지만 1~3개월 사이 구조가 꽤 약해졌고 3개월이 넘어가자 현격하게 무너졌다. 그 결과 휴면을 장기간 유지할 수 없었다.
한글판 ‘깨어남’은 1990년 개정판을 번역한 것이다. 책의 부록에서 색스는 “1927년 이래 기면성뇌염 같은 대규모 유행병은 없었다”라면서도 그 뒤 간헐적으로 발생한 여러 유사 사례를 언급했다. 색스는 “분명한 사실은 기면성뇌염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라며 “만약 그렇다면 일정 지역에 국한된 형태로, 아니면 광범위한 형태로 대규모 유행병이 재발할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덧붙였다.
물론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혹시라도 기면성뇌염 후유증으로 R씨나 Y부인처럼 노화 또는 근육의 비활성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현상을 보이는 환자가 세계 어딘가에 지금도 존재하지 않을까. 만일 이런 사람들 있어 이들의 전사체를 분석해 휴면 중인 터과이즈킬리피시 배아의 전사체 데이터와 비교해 본다면 노화와 근위축(또는 근육의 비활성화)을 극복하는데 영감을 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강석기 / 과학 칼럼니스트 kangsukki@gmail.com
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