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자 선생님께서 사회자의 파란만장한 과거소개에 눈문을 훔치고있다 .
에어컨 없이 한 여름을 나고, 아무리 바빠도 택시를 탈 줄 모른다. 지방에 내려갈 때는 KTX 대신 고속버스를 이용하며 휴게소에선 손수 싸온 음식만 입에 댄다. 살아있는 자린고비. 지독한 구두쇠 노인. 그러나 이렇게 80평생 한푼 두푼 모은 돈 수십 억원은 후학 양성을 위해 아낌없이 쾌척했다.
여성국극 배우 이소자(84·본명 영희) 할머니 얘기다.
이소자 할머니는 창극의 한 갈래인 여성국극 배우였다. 여성국극은 1940·1950년대 해방과 6·25를 겪으며 가장 지치고 힘들었던 시절에 민족적 애환을 달래줬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1948년 국악원에서 여성들만 떨어져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해 큰 인기를 끈 것이 효시로 알려져 있다.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극이기 때문에 남성의 역할은 남장 여배우가 등장한다. 뮤지컬적인 요소가 일품으로 국악이 표현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일본의 다가라즈카나 중국의 경극과 비교해 결코 뒤쳐지지 않는 예술성을 지닌 문화 유산임에 틀림없다.
이소자 할머니는 남장 여배우로 주로 악역을 소화하면서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던 여성국극 1.5세대 배우였다. 선배인 1세대 배우들을 정성으로 기리고 후학 양성에 투신해 왔지만 외래문화에 밀려 점차 사그라지고 있는 여성국극의 처지를 누구보다 가슴 아파 했다. 올곧은 의지로 여성국극 보존과 계승을 위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이유이기도 하다.
이소자 할머니는 지난 15일 춘향국악대전 행사장에서 평생 모아온 전 재산을 장학재단 설립과 국극 발전을 위한 기금으로 기증했다. 이 자리에 모인 전국 국악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평소 이소자 할머니의 삶을 아는 사람은 가슴 아파 했다. 서울에 작은 빌딩과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지만 단 한번도 자가용을 소유한 적이 없으며, 출장지에서는 돈을 아끼기 위해 찜질방에서 잠을 자며, 독감에 걸려도 되도록 병원을 가지 않는다. 한 겨울에도 난방을 최소화 하는 소박한 삶이었다.
이소자 할머니는 남원국악예술고 이상호 이사장과 친분이 두텁다.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국악의 본향인 남원에 돈을 기부하기로 한 데는 이 이사장과의 신뢰 관계가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후문이다. 이소자 할머니가 기부한 돈 중 큰 부분은 남원국악예술고에서 공부하는 후학들을 위해 공연장 등을 건립하는데 쓰일 계획이다. 이소자 할머니처럼 강단있고, 박력 넘치면서도 섬세함이 살아 있는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춘향골 남원에 춘향 못지않은 이소자 할머니의 그윽한 향기가 가득한 초여름이다.
이 태 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