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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지마을.귀농.산골 원문보기 글쓴이: 프라나
오지마을을 찿아서
11.의성 "금봉리"
해발 843m인 청학산의 정수리께에 자리잡은 경북 의성군 옥산면 금봉리의 "소미기" "의방이"
"물랭이골" 마을은 물질 문명과는 먼 거리를 두고 사는 곳 으로 오지 여행을 나선 이드에게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모여 살고있는 곳
청학산의 모진 산바람이 합세하여 금봉리 사람들을 가두고 있다. 금봉리를 가려면 의성에서 버스를 타고 미골로 먼저 들어가야 한다. 의성에서 읍의 외곽으로 나서는 순간부터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버스꼬리를 물고늘어지는 먼지와 함께 오지여행의 기분은 한층 긴장감을 갖게 된다.
비포장 자갈길을 l시간 이상 달리면 전홍동을 지나며 그간 주변에 펼쳐졌던 과수원과 작별하고 좁은 협곡으로 들어선다. 옥산면의 느리미와 새뜸을 지나면서 민가가 없는 계곡이 한참 이어진다.
평범하던 산세가 제법 눈길을 끌 만한 기암이 하나둘씩 나타난다. 삼거리에서 남쪽 고샅으로 돌아서면 저수지가 나오고 버스는 미골의 골 어귀에 다다르게 된다.
옥산 저수지를 반쯤 돌아섰을 때 버스에서 내려 산길로 들어서야 한다. 숲길은 저수지에서 소미기골 뒷산의 고갯마루로 곧장 뚫려 있어 상당히 가파르다. 등산하는 기분이 난다. 그런 숲길을 40여분 가야 고갯마루가 나오고 소나무와 전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선 숲을 빠져나가는 고원더기가 펼쳐진다.
한없이 이어지는 약초밭. 그 아래쪽에 소미기골이 있다. 마을 주민은 3가구다.
소미기 주변에는 괭이골과 물랭이골, 의방이 등 네 곳의 산촌마을이 있는데 괭이골은 주민이 모두 떠나 텅빈 마을이 되었다.
네 마을 중 물랭이와 괭이골은 골짜기에 들어서 있으며 소미기와 의방이는 청학산 산마루에 높이 솟아올라 있어 세상을 외면한 채 산상세계를 이루고 있다. 골짜기가 워낙 협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다른 곳과 반대로 평지를 만나려면 산 위로 올라가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소미기골과 의방이는 해발 700M 이상의 고지대에 자리를 잡고 누대에 걸쳐 약초를 재배하고 있다. 시호, 방풍, 작약, 대황, 당귀, 두충 등 약초와 더덕, 도라지 등의 산채를 주로 재배한다.
주민들이 경작하는 고원 약초밭은 5만여 평. 최근 주민 수가 더욱 줄어 밭을 묵히는 형편이다. 마을 주변은 모두 약초밭 이어서 소미기는 청학산을 넘어오는 거센 산에 무방비인 채 노출되어 있다.
그 강풍을 견뎌내기 위해 건새를 얹은 소미기 집들은 모두 야트막하다. 낮은 지붕에 비해 문턱은 아주 높고 방바닥은 굴곡이 심하여 가만히 앉아 있기 힘들 정도다.
물랭이골은 70년대부터 주민의 이주가 시작되어 현재는 빈집이 많다. 청학이 산다고 해서 붙여진 청학산. 그 산에 청학이 산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사는 오지인들의 삶은 이곳을 쉽게 떠나지 못하게 그들을 붙잡아두고 있다.
▶찾아가는 길
의성군에서 금봉리까지 하루 세번 시외버스가 다닌다. 미골을 경유하여 북동쪽으로 뚫린 계곡길로 들어가는 것이 가장 편하다. 미골의 화전민 집단 거주촌에서는 청학산의 골마루를 헐어내고 조성한 의방이 약초밭이 보인다. 미골에서 의방이까지나 소미기까지 올라가는 데는 1시간이면 충분하다.
산 위에 자리잡은 별세계를 보려면 옥산 저수지에서 그 동쪽산을 넘어야 더욱 실감이 난다.
버스가 옥산 저수지의 둑으로 올라선 다음 한굽이를 돌아설 때 내리면 왼쪽 기슭으로 올라붙는 협곡이 나온다.
오른쪽 능선 위에 소미기골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1시간 정도 등산을 하면 신천지로서의 소미기골이 나타난다. 등산을 겸한 오지여행을 하고 싶다면 의방이에서 미골로 되돌아오지 않고 청학산을 넘어 안동군 길안면의 유곡이나 명곡으로 내려서면 된다.
의방이에서 출발하여 명곡까지는 3시간 정도. 민박의 경험이 없는 곳이므로 숙박비를 얼마나 받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감사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물건으로 성의를 표한다.
12.봉화 "홍점 마을"
경상북도 봉화군 소천면. 경상북도 최고의 두메, 봉화군에서도 가장 외진 벽지로 알아주는 곳이다.
산세가 벼랑을 이루며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와 깊은 소가 즐비하다.
태백산 남류맥이 청옥산과 각화산의 지겟가지를 벌리면 그 안쪽에 현동 60릿골이 펼쳐진다.
현동골은 잔대미에서 홍제사골의 물을 보태 10여 리 아래의 현동리에서 낙동강으로 흐른다.
이런 지형적 조건에 소천면이 위치한다. 비탈이 심해 한 면의 넓이가 한 군의 넓이보다 넓다고 하면 이곳 땅의 특징을 금방 알게 된다.
게다가 얼마나 외진 곳이면 춘양면과 경계를 이루는 각화산 기슭의 각화사 어름에 태백산사고를 세웠겠는가. 홍제삿골의 끝마을이 홍점마을이다. 인심 좋기로 소문이 근동에 자자하다.
태백을 벗어나 경상도와 의 경계인 돌고개를 지나서 열목어 서식지라는 백천계곡를 넘으면 길고 긴 흰뱅이골이 나온다. 홍제삿골과 만나는 곳에 작은 학교가 하나 세워져있다.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소천초등학교 황평분교다. 가르칠 아이들이 너무 적어 폐교되는 운명을 맞은 그런 학교다.
예전에는 40여 가구의 주민이 살았으나 모두 이주하고 10여 가구를 밑도는 사람들이 홍제삿골을 지키고 있다. 홍제삿골에서 홍점마을로 가는 냇가에는 기가 막힌 봉우리가 솟아 있다.
'벼락바우'라는 암봉이다. 몇 년전 도깨비에 홀린 어떤 사람이 이 바위 위에서 도깨비와 밤새 술판을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날이 샌 뒤에 보니 간밤에 그토록 마셨던 술이 모두 쇠똥이더라는 것이다.
그바위 아래의 맑은 물에는 피리, 꺽지가 유유자적하며 헤엄을 치고 있다.
이 물줄기을 따라가면 넓은 채소를 가꾸고 벌을 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은 언덕 위에 성황당이 멋지게 자리잡고 있다. 반달형의 명당터에 성황당이 있어 그 품새가 그럴 듯하다.
성황당 옆에 집이 한 채있는데 이곳에서 고시 공부를 한사람들이 모두 합격을 하여 명당의 체면을 톡톡히 세워 준다. 성황당은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낸다. 안을 들여다보면 태백산령 성황지위라는 위패가 있다. 함석집을 지나 왼쪽 골짜기를 1Km 정도 올라가면 신라때 고찰이라는 홍제사가 나타난다.
현대의 건물은 30년 전에 새로 지은 건물이라 세월의 손때를 느낄 수 없다. 절을 뒤로하고 계속 골짜기를 올라가면 좌우 산세가 벼랑을 이루고 있고 곳곳에 크고 작은 폭포와 깊은 소가 즐비하다. 무릉도원의 입구처럼 그 경치가 빼어나다. 애기무덤을 가기 위해 산비탈을 오르면 그야말로 무인지경이 이어지면서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는 그런 느낌을 받게 된다.
10여리 걸으면 당도하게 되는 애기무덤. 양지쪽 산비탈에 있다. 옛날 어느 때인지 몰라도 이 길을 통해 삼척 땅으로 가던 골 원님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데리고 가던 딸이 갑자기 죽게 되었다. 먼 여행길에 노독이 났던 것이다.
원님은 할수 없이 이곳에 딸을 묻고 갔다. 그러면서 누구든지 벌초를 해주면 복을 받게 된다고 했다. 복을 받기 위해서인지 사람들은 가끔 벌초를 해준다고 한다.
13.울진 "왕피리 마을"
경상북도 울진군 서면 왕피리는 오지치고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주민수가 격감하는 것이 오지의 운명인데 이곳만은 유달리 주민수가 줄지 않고 오히려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그런 곳이다길목은 맑고 깨끗한 왕피천이 흐르면 허물어진 굴피집도 볼 수 있다.
왕피리로 넘어가는 길목인 통고산의 박달재는 통곡하며 넘어가는 고갯길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다. 왕피리에서 통곡하며 박달재를 넘는 주인공은 고려의 공민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홍건적을 피해 피난을 왔던 공민왕이 안동과 영양까지 피난을 왔다가 이 고개를 넘으며 통곡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왕피천은 양쪽이 절벽인데다 여러 곳에 깊은 웅덩이가 패어 있어 지나다니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다.
왕피리를 찾는 방법은 봉화행 버스를 타고 불영계곡을 거슬러 오르다가 삼근리에 하차. 두어 시간을 걸어야 박달재에 오를 수 있다. 삼근에서 왕피리까지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차례 밖에 다니지 않는다. 버스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대부분 걸어서 간다.
30리 길을 걸어야 한천마을까지 다다를 수 있는데 험준한 산세가 보여주는 다양한 풍경을 구경 할 수 있다. 직선거리는 불과 20리밖에 되지 않지만 산이 가로막혀 산을 돌아가게 되어 걸어야 하는 거리가 멀어진 것이다.
주민들은 지름길을 따라 익숙한 발걸음으로는 두 시간 걸린다고 하지만 초행길인 사람들은 찻길을 따라 걷게되면 박달재에 오르는 데만도 두시간이 걸린다. 박달재 일대는 춘양목 자생지로 유명하다.
한 나무에서 전봇대 3개를 끓어내도 아래 위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곧게 자란다는 춘양목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고갯마루를 올라서면 왕피천 오지를 감싼 주변의 산군이 펼쳐진다.
한국이 산이 많은 나라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동쪽의 대령산, 남서쪽의 금장산과 만나서는 태백산맥의 일월산 등이 첩첩으로 싸여 있다. 박달재에서 남쪽 산록의 급사면을 곧추 내려가면 안골마을이 나온다.
이곳부터가 왕피리다. 왕피리의 본 마을은 안골마을에서 내려가는 지류가 왕피천과 마주치는 지점에 있는 거리골이다. 거리골은 오지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이 덜하다. 오지마을의 전형을 보고싶다면 통고산 동쪽기슭에 있는 장재터로 향한다. 능선위로 올라서 고갯마루를 넘으면 장재터가 시작된다.
장재터는 원래 광산촌이다. 그러나 광산들이 폐광되면서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 오지답게 주민 수가 적다. 장재라는 지명은 이 일대에 주석노다지 광이 있어 큰돈벌이 되는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계곡이 협소하고 물 사정이 넉넉지 않아 땅을 일구며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마을의 느낌은 삭막하다. 농토가 없고 대신 분교 운동장의 녹슬은 슬레트 지붕만이 덩그러니 보인다. 왕피리 안쪽에 위치한 동수곡을 가는 길목은 맑고 깨끗한 왕피천이 흐른다. 길가에는 허물어진 굴피집이 있다.
동수곡에서 한천 마을까지는 약6Km 그 구간은 무인지경이의 원시림이 펼쳐진다. 양안은 거의 절벽으로 일어서 있고 통로는 개울 안으로 이어진다. 가끔 넓어지는 곳마다 집터가 있을 뿐 사람들이 전혀 살지 않는다.
한천으로 들어서면 풍경이 완전히 달라진다. 춘양목이 하늘을 가린 고갯마루에 펼쳐지는 양한천 일대의 정경은 한국 오지마을의 전형을 이룬다. 수석 같은 기암으로 이뤄진 하안을 따라 굽이치는 물 맑은 왕피천에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남향에 옹기종기 터를 잡고있는 농가들. 우리네 한국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그리는 그런 마을의 모습을 왕피리는 간직하고 있다. 찾아가는 길 왕피리는 울진읍에서 30Km 정도 떨어져 있다.
울진 보다는 영주를 경유 하는게 편하다. 영주에서 울진행 버스를 타고 서면 삼근리에 하차하면 된다. 삼근에서 왕피리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 한차례 밖에 없다. 도보로 갈 경우 삼근에서 왕피초등학교까지 4-5시간 정도 걸린다. 산으로 들러가지 말고 찻길을 따라 우회를 해야 한다.
삼근에서 동수골까지는 4시간 소요. 삼근에서 박달재를 넘어 학교 건너편 안마을로 들어서 남쪽으로 가로막은 능선길로 들어서면 다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14.정선 "연포,소사마을"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덕천리
우리나라에서 오지 마을이 가장 많은 곳은 정선과 영월 부근이다.
연소,소사마을도 정선에 위치한다. 동강 변의 오지마을처럼 이곳도 지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오지를 벗어나기 힘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있어 오지 신세를 선천적으로 타고 난 곳.
지형적으로 볼 때 동강이 정선에서 시작되고 정선 포구로 유입되면서 끝나게 되는데 이 마을들은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정선 쪽에서나 영월 쪽에서나 모두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적으로 볼때는 정선군과 영월군 그리고 평창군의 경계가 갈라지는 백룡동굴에서 2Km 떨어진 남쪽에 위치한다. 때문에 이마을을 들어가려면 정선이나 영월 평창 어디서건 1시간 이상 시외버스를 탄다음 산길을 서너시간 걸어야 마을에 당도할수 있는 산간오지마을이다. 이 마을을 가려면 신동읍 예미리를 경우해 가는 것이 가장 좋다.
평구나 고성초등학교 앞에서 하차하여 산을 접어들어야 한다. 협곡으로 들러서서 30분 정도 걸어 들어가게 되면 동강과 만나게 된다. 길은 오직 외길. 서쪽으로 흐르는 물길 뿐이다. 강의 양안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세워져 있어 이방인의 기를 한껏 꺾어 놓는다. 서쪽에 험준하게 솟아오른 신병산을 우회할 수밖에 없다.
신병산 동쪽에 원덕천이라는 마을을 경유하여 동쪽 산록을 타고 소동을 지나 2시간 남짓 걸어가면 소사마을 어귀에 다다르게 된다.
토벽의 담배 건조막을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소사마을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외지인을 맞는다. 10가구 정도의 주민이 사는 마을은 밭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꾸려 나간다. 전기는 일찍부터 들어왔다. 동강 따라 전신주를 설치하는 것이 용이하여 79년에 전기가 들어왔고 전화는 86년에 가설되었다.
소사마을의 강 건너편에 연포마을이 있다. 마을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이 두 마을 건너다니기 위해 삽다리가 놓여 있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삽다리란 소나무로 만든 다리로 장마 때가 되면 동강물에 휩쓸려 다리가 없어진다. 두 마을 사람들은 두레를 통해 장마가 끝난 뒤 다리를 다시 놓고 하는 식으로 다리를 매년 만든다.
다리가 떠내려가는 장마 때에는 나룻배를 타고 왕래를 해야 한다. 연포에 있는 고성초등학교 연포분교로 통학을 하는 아이들은 배를 타고 등교를 하게된다. 소사의 강변은 풀밭이 아름답게 조성되어 있어 야영을
하기에 더없이 좋다. 유독 굴이 많은 동네라 밤이면 먹이를 찾아 나온 박쥐들이 냇가를 떠돌고 있는 풍경이 이색적이다. 냇가에서 보면 연포마을이 건너다 보이고 초등학교의 뒤에는 세 개의 봉우리에 달이 뜨는 모습은 가히 고혹적이다. 봉우리마다 달이 저마다 떠서 달이 세 번이 뜨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
*찾아가는 길
정선군 신동읍 예미리를 경유하여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예미에서는 운치리까지 가는 마을 버스가 있다. 그 버스를 타고 평구나 고성초등학교 앞에서 하차하여 산길로 접어들면 된다. 좌측에 이정표가 있다. 6.4Km 정도 도보로 걸어 들어가면 마을이 나온다. 이 비포장도로는 지프차의 통행이 가능하다.
15.봉화 두음리 "듬골"
경북 봉화군의 춘양면과 소천면은 춘양목으로 널리 알려진 적송의 원산지이다.
이곳의 붉은 몸체의 소나무는 최고의 건축자재로 각광을 받아 예부터 궁궐이나 사찰 또는 관청은 물론 대가집의 드높은 용마루를 떠받치는 기둥감으로 애용되었다.
이곳의 붉은 소나무는 최고의 건축자재로 각광 받고 있다.
태백산맥의 동쪽 산록인 봉화군의 춘양목 삼림지대는 이곳까지 파고든 낙동강의 물길 덕으로 일찍부터 대처의 고대광실을 짓는 목재를 제공해 온 곳이다. 봉화군과 울진군의 군계를 흐르는 낙동강 상류는 봉화군 내로 유입되며 소찬면을 훑고 지나간다.
두음리 듬골은 태백산 자맥에서 서쪽으로 뻗어 나온 죽미산(907m)과 장군봉(1.420m)의 두 줄기 산 속에 고스란히 갇혀 있다. 이 골짜기를 흐르는 소시천은 들목인 임기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해발 1.000m에 육박하는 고산줄기가 남북에 만리장성인양 장벽을 두르고 있어 두음리는 오지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곳 마을에 사는 주민들은 산골오지이지만 고향이라는 이유하나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다. 춘양에서 임기를 거펴 두음리로 들어가야 한다. 춘양에서 임기까지는 비포장도로로 두시간 남짓 달려야 한다. 임기에서 두음리까지는 버스편이 없어 무작정 걸어야 한다. 10Km의 거리이다. 낙동강에 가로놓인 두음교를 지나 골짜기로 접어든다.
골짜기 입구는 남쪽의 제비산과 북쪽 오송골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맞물려 그곳에 30리가 넘는 긴 골짜기가 들어 있다. 입구 마을인 덕거리에서 보면 양 산자락이 입을 대듯 맞물린다.
길변의 소시천은 콸콸 소리를 내며 세차게 흐른다. 골짜기로 들어서면 인가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다. 주변 산에는 춘양목의 꿋꿋한 기상과는 달리 일반 소나무가 즐비하다. 경운기나 다닐 폭의 좁은 소로 양켠에는 옥수수밭, 콩밭, 고추밭이 연이어 있다.
계곡안을 한시간 반정도를 걸어 들어가면 왼쪽으로 급히 꺾어지는 산굽이 너머에 두음분교가 모습을 나타낸다. 학교 위쪽으로 올라가면 두음리 본통이 시작된다. 4-5가구의 주민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70년대 초 빈집 철거령과 더불어 주민수가 현격하게 격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려나가지만 농사를 지어도 그것을 내다 팔 조건이 여의치 않아 마을 사람들은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정도이다. 주로 이들이 경작하는 것은 고추다.
마을로 길이 나서 오지 신세를 면해 보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한결같은 소원이다. 찾아가는길 두음리 듬골은 그 들목만 찾는다면 쉽게 갈 수 있다. 단지 그 들목까지 가기가 수월치 않을 뿐이다.
들목에 서는 두시간 가까이 계곡 길을 걸어 들어가야 마을을 만날 수 있다. 춘양을 거쳐 임기까지 가서 그곳에 덕거리 앞 , 낙동강에 놓인 두음교가 들목이다. 그 다리를 건너 덕거리 마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줄곧 주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두음리 듬골이 나온다. 덕거리 분교까지는 8Km로 두시간이 소요된다. 맨 위쪽 듬골까지는 11Km 주계곡을 따라 올라 경운기 길이 곧게 나 있어 길을 잃을 위험은 없다.
16.인제 '설피밭'
열목어는 눈에 열이 많아 그 열을 식히기 위해 늘 차가운 물을 찾아 강물을 거슬러 오르며 사는 냉수어족으로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다. 이 열목어가 살고 있는 마을이 설피밭이다. 이 고기들이 살고 있어 물이 매우 맑고 깨끗하다.
천연기념물로 보호를 받고 있는 열목어가 살고 있는 마을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진동 1리부터 70리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해발 1.424m나 되는 점봉산을 뒷산으로 가진 고랭지 마을인 진동2리에 닿게 되는데 그 중심이 되는 곳의 지명이 설피밭이다.
설피밭이란 눈신의 일종으로 눈에 빠지지 않기 위해 신위에 덧신는 신발이다. 이런 신발을 신어야 생활을 할 수 있는 특징에서 마을의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혹한과 폭설, 그리고 고립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70년대 초, 나라에서 화전금지 조치 후 주민들이 급격하게 줄어 요즘은 빈집이 더 많다.
진동 분교의 경우 학생수가 4명 정도 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주민수가 적다. 다른 농촌이나 산촌이 다 그러했겠지만 이 마을은 유독 이농이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통이 불편하여 생활하기가 어려워서 마을을 뜨게 된 것이다.
이 마을의 생업은 주로 자급자족을 위한 감자, 옥수수의 재배와 나물채취, 토종꿀 등이다.
설피마을은 삶의 막바지에 다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노동력만의 가지고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자 각오하고 들어오는 역할을 하는 마을이다. 설피마을로 통하는 입구는 세 군데이다.
양양군 오색초등학교 앞 개울 건너편 계곡을 10리쯤 거슬러 올라 이르게 되는 단목령을 넘어 들어가는 길이 첫번째 방법. 인제군 기린면 진동1리에서 70리 진동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마지막으로 양양군 서림에서 조침령을 넘는 길이다. 위 방법 중 가장 쉽게 가는 길을 단목령을 넘는 길.그야말로 울고 넘는 박달재 신세가 된다. 설피밭의 집들은 드문드문 흩어져 있다. 맨 윗집부터 맨 아랫집까지의 거리는 20리. 그러나 거리가 멀어도 나누는 정은 따뜻하기만 하다. 서로 의지하고 도와가며 오지의 삶을 정겹게 꾸려 나간다.
오색에서 단목령-점봉산-설피밭-진동계곡에 이르는 약 1백리 길은 등산코스로도 매우 좋다. 자연이 전혀 손상되지 않은 천연의 상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을 서늘하게 식혀준다.
차고 맑은물, 울창한 수림, 아름다운 꽃이 한데 어우러져 오지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그려내는 설피밭은 언제 찾아가도 좋은 그런 곳이다. 찾아가는 길 서울에서 출발을 할 경우 한계령을 넘어 오색에 도착.
오색초등학교에서 개울 건너편 계곡으로 곧장 올라가면 단목령 고갯마루를 만나게 된다.
단목령까지는 도보로 1시간 30분 걸린다. 단목령에서 설피밭까지는 도보로 2시간 걸린다.
17.하동"논골마을"
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논골마을.
하동군 청암면 금남리에서 북쪽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
해발 5백m위에 위치한 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곳.
금남리에서 북으로 난길을 따라 걷다보면 심곡리에 닿는다. 심곡에서 서쪽으로 급하게 꺾어진 우마차로를 5리쯤 걸어가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왼쪽은 사동 마을이다.
논골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 반시간 이상 지속되는 오르막을 모르면 남쪽에 웅장한 칠성봉이 우뚝 솟아 있다. 잘생기고 장송들에서 둘러싸인 고갯마루를 오르면 마을이 내려 보인다. 바깥 세계에 전혀 자신들의 모습을 노출시키지 않고 마을이 웅크리고 있다. 마을뒤편 잔솔밭에 등성이에는 대여섯 그루의 큰 당나무가 솟대처럼 세워져 있다.
마을 주민은 10여 가구 ,젊은 사람들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자식들은 모두 대처로 나가버리고 늘그막에 땅을 부치며 연명하는 전형적인 오지마을이다. 마을의 당나무나 안골 소나무의 수령으로 볼 때 마을이 생긴지가 300년은 되어 보인다.
정감록에 따르면 지리산 남쪽기슭에 3은 3점의 피난처가 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청암면의 고은동(고운동), 오은동(논골)과 묵계의 심은동이 3은동이고 3점리는 풍점리 와 먹점리, 미점리이다.
논골은 6.25와 지리산 빨치산으로 상징되는 역사적인 사건때 마을사람들이 한명도 다치지 않아 명당의 이름 값을 톡톡히 해낸 바가 있다. 20여 만평의 경작지는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함이 없다. 논골이 해발500m 위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면서 한국농촌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은 농토 덕이다. 논골은 행정상으로 청암면에 속하지만 생활권으로는 악양면에 가까운 면 경계이다.
지리산 세석평전에서 남으로 뻗어 내린 남부능선은 삼신봉에 이르러 그 남쪽 산기슭의 청학동과 북계리를 감싸며 좌청룡 우백호의 두 줄기로 갈라선다. 그 좌청룡은 남으로 뻗어 시루봉을 거치며 논골의 뒷산인 깃대봉에 이른다. 깃대봉에 서 남쪽 10여Km 지점에는 칠성봉에 이르는 높은 등줄기는 논골서 악양으로 넘어가는 길목을 가로막은 자연 장벽을 치고 있다.
장을 보러 다닐 때에는 이 장벽 가운데 난 맥시골과 배티재를 통하여 왕복 6시간 길의 악양장을 이용했다. 깃대봉 남쪽의 안골에서 시작되는 논골은 반달형으로 논골 일대에서 폭 2Km 정도 넓어졌다가는 남동쪽으로 휘돌아 사동과 심곡 쪽으로 빠진다.
목계 쪽에서의 들목이 되는 심곡도 묵계골짜기로부터 9Km 정도 떨어진 산골이고 보면 논골이 얼마나 산골 오지 깊숙이 박혀 있는지 짐작을 할 수 있다. 청암초등학교 심곡분교까지는 왕복 3시간이 걸리고 중학교가 있는 청암면까지는 편도로 2시간 반이 걸리는 오지이다.
고갯마루 안골까지 4Km에 이르는 농경지의 여러 곳에는 산제밭골, 잔치평전, 웃장구목, 아랫장구목 등의 지명은 윤번제로 품앗이로 모 심고 추수하며 잔치를 벌였던 옛 두레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70년대 초 지붕개량이라는 정부시책에 발맞추던 시기에 마을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논골의 주민들은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살기 힘들어 늘어나는 빚더미를 어쩌지 못하고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다. 50여 가구의 주민이 10여 가구로 줄게 된 것이다.
당나무가 있는 언덕빼기를 경계로 그 북쪽을 음달땅, 남쪽을 양달땅으로 부르며 동구쪽의 공터는 진틀배기로 부른다. 한국의 전형적인 농가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지의 삶을 살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살아가는 모습에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그런 곳이다.
18.경남 산청 "오봉마을"
툇마루에 누워 산장에서처럼 지리산 자락을 고즈넉이 바라볼 수 있는 마을이 바로 오봉마을이다.
경호강이 맑은 물빛이 산청의 산들을 더욱 맑게 그려내는 곳.
경남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에서 산길을 한시간 걸어 들어가는 오봉마을의 해발500m에 위치한 산골 오지마을의 전형을 이룬다. 산골 오지가 대개 경로당으로 전락한 것에 반해 이곳은 장년층의 건장한 농군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다.
경남 산청군의 이름은 산청군에 솟아 있는 수양산, 기산, 왕산, 팔봉산, 정수산 등의 수려한 외양덕에 붙여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산청군이 가진 강 때문이다. 주변 산을 끼고 흐르는 경호강의 물빛이 맑은 산을 거울같이 그려내며 산청의 산들이 강물 속에 맑게 태어난다.
경호강의 상류는 갈수록 맑기를 더한다. 산청읍에서 생초면으로 거슬러 오르는 동안 경호강은 상류의 임천강으로 이름을 바꾼다.
이 임천강에서 사시사철 변함 없이 해맑은 지리산 계류를 보태는 여러 골짜기 중에 방곡천이 있다. 지리산 북동쪽 끝에 있는 쑥밭재를 주산으로 하고 양쪽으로 뻗어 내린 좌청룡 우백호는 그 소의 산골분지를 감싸며 일대의 산기슭에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방곡천으로 넘겨주고 있다.
그 깔때기 모양의 해발 500m 분지 속에 오봉마을이 깃들어 있다. 오봉이라는 이름은 마을을 향해 사방에서 뻗어 내린 다섯 산줄기에 어원이 있다는 설과 마을 북쪽 산이 다섯 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오봉으로 불렸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오봉마을을 가는 길은 협곡이다. 급경사의 고비를 오르자마자 오른쪽 언덕받이에 집이 나타난다. 동구 밖의 화림사 터를 보아도 조선조에 이미 오봉마을에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10여가구도 안 되는 사람들이 마을 뒷산인 오봉의 남쪽 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산다.
논이 적어 논농사는 거의 못하고 담배 농사를 주력으로 한다. 수입이 넉넉지 못해 마을은 풍요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 마을은 오지마을 특유의 인심을 잃지 않고 지나는 길손을 반갑게 맞아준다.
-찾아가는 길
서울서 갈 경우는 남원을 경유하여 산청으로 들어가는 것이 편하다. 산청서 마천행을 타고 원기나 절터에 하차하여 임천강을 건너 방곡천으로 들어가면 된다. 방곡천 입구에서 오봉 마을까지는 걸어서 2시간.
방곡리까지는 시멘트 포장길이라 길찾기가 쉽다. 방곡리를 지나 200m 나아가면 계곡이 갈라지는 지점이 나온다. 그 다리를 지나 오른쪽 계곡을 줄곧 거슬러 오르면 1시간 안에 오봉에 닿을 수 있다. 오봉마을을 경유하여 계곡을 계곡 거슬러 유평리 대원사나 추성리 벽송사로 넘어가면 좋은 산행 코스다.
19.단양 "빗재 마을"
6백년 동안 오로지 도자기를 구우며 그 긴 세월을 살아온 마을.
이곳에서 도자기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이 자체 공급된다. 도자기의 재료인 고령토와 모래질 황토뿐만 아니라 질박한 질감을 내는 유약 원료로 쓰이는 묵보래도 멀리서 가져와야 하는 특별한 흙이 아니다.
이 마을 앞마당과 뒷마당에서 발길에 채이는 생활의 터전일 뿐이다. 그리고 이곳의 산지는 1천 2백도 이상의 고열을 내는 재래종 소나무들이 하늘을 가릴 정도이다. 방곡리 일대의 가마들이 가스불을 마다하고 장작 가마를 고수하고 있는 것도 도락산과 황정산 일대에 아직까지 숲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덕이다.
태백산을 벗어나 소백산 기슭에서 만나는 빗재마을. 영동선을 이용해 마을에 가야 한다.
신단양에 내려 점촌이 종점인 버스를 타고 방곡으로 향한다. 방곡행 버스를 타면 단양 8경중 4경을 구경할 수 있다 .길옆에 단양 8경의 하나가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는데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에 드문 일이다.
사인암리의 삼거리에서 서쪽 피리재를 넘으면 가산리를 지나 차창 왼쪽으로 중선암과 상선암이 있다. 단양 8경은 단양의 산수미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시인묵객이 거드름을 피우며 주마간산격으로 돌아다니며 자그마한 기암절벽이 나오면 시한수로 이름을 붙인 단양8경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안내 푯말이 아니면 어느 것이 팔경의 하나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이런 것보다는 단양의 전체 산수미를 감상하는 것이 단양을 제대로 감상하는 것. 도락산을 끼고 시계의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아 방곡리로 들어서면 단양의 빼어난 산수미를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용두산, 도락산, 그리도 황정산 등 1,000m고지의 산들이 태백산의 험산과는 달리 한껏 점잖고 수석같이 단아함을 보인다. 중선암을 지나면 협곡으로 변해 마치 길이 끝나버릴 것 같다.
그러나 그곳을 돌아나가면 평지가 나온다. 벌내에서 남동쪽으로 비포장 도로를 들어서면 문경군의 황정산과 도락산 사이로 난 계곡으로 파고 든다. 이쪽의 경치도 빼어나다.
적당한 크기의 암봉들이 연이어지고 그사이사이는 계절을 잊게 하는 소나무들이 우거져 한 폭의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 마을의 이름은 성내골. 마을주민이 모두 떠나 무인지경으로 비어있다. 이무인지경의 20리 계곡길은 넓은 반석으로 이어진다. 그 위로 흐르는 찬 계류는 인근의 벌내와 방곡리 주민들의 더위를 식혀주는 곳으로 사랑 받고 있다. 단양의 행위예술가 김용문씨가 세운 장승을 만나면 이제부터 오지의 매력이 발산된다.
장승은 방곡의 안녕과 질서를 지키는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인다 .방곡리는 이곳서 10분 정도 걸으면 만나게 된다. 가산초등학교 방곡분교가 있는 방곡리에는 주민수 가 꽤 많다. 방곡리 저잣거리에서 주막 뒤쪽의 북쪽으로 난 경운기 길로 10리를 걸어야 빗재마을에 당도하게 된다.
이 길은 소형차들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길이 확장되어 지프를 가지고 여행을 떠난다면 편하게 마을에 당도할 수 있다. 산길 모퉁이마다 청화백자 파편을 쌓아둔 특이한 돌무덤들이 곳곳에 있다.
그리고 길가에는 질료감으로 파낸 모래 질점토 구덩이가 동공처럼 뚫려 있다. 길가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집은 대개 빈집이다.
빗재마을은 5가구 정도의 주민이 마을을 지키고 살고 있다. 빗재의 어원은 피재다. 구황작물, 고갯마루에까지 피를 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방곡리로 차가 다니기 전에는 빗재를 넘어 사인암리와 직치리까지 나가서 대강 장을 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도자기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듬고 세월에 몸을 맡기고 흘러온 마을의 운명. 오지라는 멍에를 안고 있지만 그런 만큼 마을은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20.장수 '신기마을'
청학동 도인들이 새로 이주한 마을인 신기마을은 소백산맥의 맹주인 덕유산이 지리으로 산줄기를 넘기기 전에 무주, 진안, 장수군 일대에 무진장의 산악지대를형성하고 있다.
유교를 숭상하여 옛 선비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곳.
산악분지에 깊숙이 들어앉은 신기 마을은 누대의 농촌 오지가 키워낸 순수한 인심을 자랑하고 있다.
청학동에서 살던 김대중씨가 새로운 이상향을 찾다가 이곳에서 정착하면서 이곳은 새로운 청학동으로 탈바꿈하는 이변을 겪고 있는 곳이다.
무주와 진안, 장수 는 전남과 도계를 이룬 전북지방의 최남단의 세 군의 이름이다. 이 세 군의 앞글자만 따서 부르면 "무진장" 이 된다. 무진장이란 한없이 많다는 뜻인데 이곳에 무진장 많은 것은 후한인심. 이 지방어디를 찾아도 주민들의 후한 인심에 마음이 푸근해진다. 무진장의 산줄기가 발원하는 덕유산의 드높은 산세를 넘으면 장수군에 들어서게 된다.
신기 마을은 장수군의 서쪽 끄트머리를 차지하며 진안군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신기에서 강만 건너면 바로 진안군이다. 장계에 서 신기행 버스는 1일 2회밖에 운행되지 않는다.
신기 마을이 버스의 종점이다. 이 마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유불선합일갱유도라는 민족종교를 선봉하는 김대중씨 때문이다. 유불선이란 60여년 전 강대성 교주 부부와 그 아들이 전북 순창군 회문산 금강암에 입산수도하여 유불선을 하나로 합친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들의 생활방식은 유교를 숭상하여 옛 선비나 다름없는 생활방식과 서당에서 한문 공부식의 교육을 고수한다. 지리산의 청학동이 매스컴에 알려지면서 청학동은 관광지로 전락하여 본래의 취지들이 많이 퇴색되었다. 이런 청학동의 분위기를 떨치고 나와 김씨는 새로운 정착지를 찾다가 신기 마을을 정감록을 통해 발견하고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다.
신기는 정감록이 예언한 10승지의 한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조의 유학자인 유겸암도 겸암록을 통해 이곳의 지리가 호남 제일의 땅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논과 밭을 일구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는 곳이면서 외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특색 때문에 조상들은 이곳을 최고의 땅으로 꼽은 듯하다.
마을에는 당 할머니께 제사를 지내는 당집이 있다. 수 백년 묵은 듯한 아름드리 괴목이 숲을 이룬 자그마한 동산에 당집이 있다. 수백년간 신기 마을의 안위를 지켜온 것이다.
마을 뒤쪽에는 천반산이 있는데 천반산에 오르면 이 지역의 독특한 지세와 경관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한시간 남짓 걸린다. 산 정상에는 감투바위가 하나 있다. 치성를 들이는 장소로 이용되는 바위이다.
감투바위에서 마을을 바라보면 구석구석 굽이치는 신기앞의 금강 상류와 그 강줄기를 둘러싼 주변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신기를 중심으로 사방40리가 모두 산맥으로 막혀 있다. 천반산에서는 산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덕유산에서 뻗어온 산줄기가 진안의 성수산으로 이어지며 신기 마을을 휘감아 부귀산, 대덕산, 천반산, 시루봉 등을 이룬다. 지룡이 둥굴게 감싼 분지 가운데 신기 마을이 들어앉아 있고 그 마을 앞으로는 주변 산을 피해 산태극 물태극으로 휘감긴 금강이 흘러내려 산수가 제대로 어울린 명당 중 명당이다.
마을 지세와 경관이 뛰어난다 해도 이농 현상은 막을 길이 없었다. 주민은 10여 가구 밖에 되지 않는다. 여느 오지와 마찬가지로 교육환경이 열악하여 모두 마을을 뜨고 만 것이다. 이 마을은 아직도 두레로써 함께 산다. 그런 이유에서 인심이 항상 후한 곳이다.
-찾아가는 길
장수에서 북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천천면의 장계리를 경유하면 된다. 장계리에서는 신기 마을까지 가는 버스가 하루 두차례 있다. 천반산 정상은 이일대의 지세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천반산은 별로 높지는 않으나 망벽을 산자락 여려 곳에 두르고 있어 조심해서 올라가야 한다. 당집을 지난 다음 동쪽으로 올라갔다가 능선으로 올라붙으면 옛 천반산의 등산로가 나온다. 3시간 정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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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오지마을.귀농.산골 원문보기 글쓴이: 프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