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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리파 또는 알비파, 순수파는 막달라 마리아 추종자들로서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프랑스 남부의 알비와 툴루즈를 중심으로 생겨난 기독교 교파이다.
이들의 교리는 이원론과 영지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가 영지주의자였기 때문에 알비파, 즉 순수파는 예수의 진정한 추종자들이었다.
11세기에 주로 랑그도크지역에 전파되었으며 12세기에서 13세기까지 교세를 확장하였다.
카타리 신자들에 대한 화형
카타리파의 교리는 아르메니아의 바오로파와 보고밀파의 영향을 받았다. 궁극적으로는 이 두 교파의 합병으로 카타리파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들은 마니교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중세의 다른 많은 교파와 마찬가지로 카타리파 역시 내부에 다양한 사상적 편향이 존재했다.
영지주의에 경도된 분파나 이원론에 경도된 분파와 같이 카타리파 내부에서도 각자의 주장하는 바는 조금씩 달랐다. 일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수용하기도 하였다.
그들의 독특한 교리인 이원론은 사랑과 권세가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이원론에 입각하여 카타리파는 총체적으로 존재하는 하느님이 아닌 동등한 지위를 가진 둘로 된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렉스 문디(라틴어: Rax Mundi→세상의 왕)이라 불리는 악마가 물질적 세계를 만들었으며 그가 육체를 전유하고 혼돈과 권세를 지닌다고 믿었다. 이에 반해 순수한 영혼이며 오점이 없는 사랑과 평화, 질서의 하느님이 그들을 구원하리라 믿었으며 그를 숭배하였다.
카타리파의 일부 분파에 따르면 지구에서 인간의 삶의 목적은 물질적인 것과의 연결을 끊고 권력을 포기하여 사랑의 법칙에 합치하는 것이라 주장하였다. 또다른 분파는 인간의 목적은 물질적인 것을 반환하고 이를 영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카타리파의 교의가 하느님의 전지전능함과 선함을 부정하는 것이자 육체를 갖춘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완전성을 부정하는 것, 물질로 된 세계를 창조한 것은 본질적으로 악한 권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12세기 교황청은 알비파를 이단으로 파문했고, 1209년 알비파 탄압을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일으켰다. 결국 카타리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으로 1350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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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비 _ 막달라 마리아 십자군 전쟁 ⊙⊙
1. 카타리파(순결파, 순수파)의 등장
중세 시대 교회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메뉴 가운데 하나는 교회의 부패와 자정운동이다. 당시 교회는 큰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세속 사회에도 지대한 간섭을 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세속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고 마는 속성이 있다. 막대한 재산을 사심없이 관리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모두가 계속 그럴 순 없는 법이고 결국 이와 같은 재산이 투명하고 공정하게만 관리될 순 없는게 세상사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세 시대 지금 같은 회계 감사가 있던 것도 아니고 성직자 선발 기준도 모호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교회 권력이 부패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교회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개혁운동에 뛰어들었다.
한편 중세 교회는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 신앙 체제를 이룩하고 있기는 했으나 교황의 명령이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에 따르려 하지 않는 이단들이 항상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앞서 언급한 교회의 부패를 질타하는 것은 물론 수많은 신자들의 영혼을 구제하지 못하는 당시 교회의 무능을 비판해서 큰 인기를 끈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분파들은 12 세기 전까지는 주로 작은 집단에 불과했다. 12세기에 중세 사회가 좀 더 고도화 되고 도시와 교통이 발전하면서 이들 이단 종파들도 점점 그 크기가 커지게 된다. 그리고 교회와 영주가 지배하는 중세 사회에서 이들을 부양하면서도 이들로부터 외면받고 고통받은 농민들이나 혹은 새롭게 생겨난 도시 주민들이 기존의 종교 질서를 거부하고 이단 종파들을 지지하면서 점차 그 세력이 커졌다.
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왈도파 (Waldensian) 과 카타리파 (Cathar) 였다. 알비주아 십자군의 무대가 되는 카타리파는 남서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분파였다. 카타리파는 새로운 마을이나 도시화된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운 종파로 12세기 불가리아에서 유래한 보고밀파라는 종파와 아르메니아의 바울파(마라 마리암네)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났다.
Cathar 는 그리스 어의 순수를 뜻하는 καθαρ?? = katharos 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이들의 교리상의 특징은 영지주의 (靈智主義) 로 번역되는 그노시즘 (Gnosticism) 과 이원론 (Dualism) 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카타르파나 혹은 청정무구를 주장했다고 해서 청정파라고도 한다)
영지주의는 "지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그노시스에서 나온 것"으로 자신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고 자신의 자아와 하나님 신성은 한 가지라는 교리(일신강충, 성통광명)로서 자칭 정통 다수파로부터는 인정받기 힘든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교리는 삼위일체론이 정통으로 인정 받은 4세기 이후 이단으로 탄압받았지만 후세에 등장하는 이단 종파에서 가끔씩 다시 등장한다.
삼위일체론이 정통으로 확립되기 이전에는 이 영지주의파가 진정한 교리로 추정된다. 왜냐면 예수도, 미그달(탑) 마리아도, 가룟 유다도 모두 영지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이원론은 세상에 두가지 신. 즉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이 물질적 세계와 속세의 권세는 렉스 문디 (Rex Mundi 라틴어로 세상의 왕이란 뜻) 라는 악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그가 육체와 권세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반면에 선한 신인 하느님은 순수한 영혼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들은 이런 배경에서 육식이나 결혼, 재산소유를 배격하고 순수한 영혼의 구제를 믿는 엄격한 금욕주의가 특징이었다.
그러나 법률상으로만 금욕주의이고 사실상으로는 금욕주의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도 막달라(=미그달=탑) 마리아와 사실혼을 해서 아들 유다를 낳았기 때문이다. 탈피오트의 알파 오메가 예수무덤을 통해 그 동안 소문만 무성했던 내용이 진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1980년 예수 가족묘가 발굴된 탈피오트는 이스라엘말로 최고 중의 최고라는 뜻이다.
다만 대개의 기독교 교리에서 그러하듯 이들 사이에도 또 다시 분파가 있어 세부적인 교리는 이들마다 차이가 존재했다.
아무튼 이들은 교회 자체도 물질적 상징으로 여겼고 특히 화려한 로마 교회는 악의 신인 렉스 문디의 화신으로 생각했다. 당연히 로마 교황청은 이들을 매우 위험한 이단 교리로 간주했다. 1140년 이후 본격 조직화된 카타리파는 12 세기 후반 프랑스는 물론 북이탈리아와 서부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까지 확산된다. 전성기 그들은 11개 주교구를 설치했다. 이에 긴장한 교황청은 카타리파 대책마련에 고심하게 되었다.
2. 로마 카톨릭 교회의 대응
카타리파는 유럽 여러지역으로 확산되기는 했지만 가장 성공을 거둔 지역은 툴루즈를 포함하는 프랑스 남부의 랑그도크 지역이었다. 랑그도크는 남프랑스의 옛 지명으로 알비 (Albi) 시가 카타리파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에서 카타리 파의 세력은 매우 커졌다. 특히 랑그도크의 도시인 알비 (Albi) 시는 이들의 중심지여서 카타리파는 다른 말로 알비주아 (Albigensian) 파라고 부르며 십자군에서는 알비주아 십자군이란 명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이 알비주아라고 불린 또 다른 이유는 교회가 이들을 이단으로 명시한 1176 년 칙령을 이 도시 근처에서 발표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당연히 교회에서는 이 이단 종파를 척결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대개 중세 이단 심판하면 생각하는 고문과 화형식 부터 시작한 건 아니었다. 1198 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Innocent III) 는 카톨릭 신앙으로 복귀하지 않는 신도들에게 우선 전도사 부터 파견해서 이들을 회유하도록 설득했다. 아직까지는 대규모 마녀 사냥이나 이단 심문관들이 이단들을 고문한 다음 화형장으로 보내지는 않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 평화로운 해결책은 아주 소수의 길잃은 양만을 정통 신앙으로 복귀시켰을 뿐이었다. 랑그도크 지방에서는 이 이단 종파가 꽤 자리잡아 귀족들까지 카타리파로 전향해서 이들을 전통 신앙으로 복귀시키기 쉽지 않았다. (가진것이 별로 없는 농노들이 아니라 귀족들까지 전향했을 정도면 카타리파가 당시 얼마나 큰 세력을 형성했는지 알 수 있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렇게 현지 영주와 귀족들이 카타리파에 협조적이거나 카타리파였다는 사실이 의도치 않게 프랑스 왕실의 남부 정복의 단서가 된다.)
아무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교황은 우선 카타리파 귀족들부터 파문했다. 그리고 카타리파 억제에 협조적이지 않은 영주들 역시 파문으로 위협했다. 당시 이 랑그도크를 비롯한 남부 프랑스지역은 아라곤 왕국과 툴루즈 백작령등이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의 툴루즈 백작은 레몽 6 세 (Raymond VI) 였다.
레몽 6 세가 있던 당시의 랑그도크 지방은 프랑스의 일부이긴 하지만 워낙 카페 왕조의 영향력이 미약하던 시절이라 솔직히 남프랑스는 거의 독립 영주 국가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필립 2세 시절부터 프랑스 왕권이 서서히 강화되던 시절이라 레몽 6세는 자신의 영지에서의 권한을 지키고 세금을 피하기 위해 주변의 간섭을 매우 싫어했다.
우리가 중세 시대에 대해서 흔히 오해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현대와 같이 고도로 중앙 집권화된 국가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이 착각은 세속 군주는 물론이고 교황에 대해서 마찬가지인데 사실 교황권이 절정이던 시절에도 모두가 교황 명령에 쉽게 복종한 것은 아니었다. 각지의 국왕이나 황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영주들도 교황에 대들던 시절이었다.
후세에 교황권에 절정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던 인노켄티우스 3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단 가장 큰 적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해결되었지만 (이전 포스트 참조 http://blog.naver.com/jjy0501/100132239294 ) 그렇다고 다른 중세 군주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한 양처럼 따랐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자신의 영지의 독립성을 침범하는 문제에는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런 문제로 인노켄티우스 3세와 레몽 6세는 대립하게 된다. 레몽 6 세 자신이 카타리파였는지 아니면 단지 카타리 파에 동정적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아무튼 교황의 간섭에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다. 교황은 이에 자신의 특사인 피에르 드 카스텔뇨 ( Pierre de Castelnau) 를 현지에 파견에 반항적인 영주들을 회유하고 이단을 개종하도록 명령했다.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는 교황의 특사와 1208 년 1월에 면담했는데 둘 사이에는 험악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리고 다음날 피에르 드 카스텔뇨가 암살되자 많은 이들이 레몽 6 세를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했다. 이에 더 이상은 평화적 해결책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인노첸시오 3세는 이제까지 어느 교황도 한적이 없는 방법으로 이 이단들을 해결하기로 했다.
그것은 이단을 대상으로 하는 십자군의 조직이었다. 후세에 알비주아 십자군이라고 알려진 이 십자군은 결과적으로 남북 프랑스 귀족의 대립으로 변질된다. 처음에 이 십자군에 흥미를 느끼지 않던 프랑스 왕실은 결국 여기에 끼어들어 가장 큰 전리품을 챙기게 된다. 파문당한 툴루즈 백작 레몽 6 세 본인은 다시 교황에 복종하는 제스춰를 취해 먼 훗날 파문이 철회되긴 하지만 알비주아 십자군은 수십년간의 전화로 이어지게 된다.
http://blog.naver.com/jjy0501/10014322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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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십자군의 모집
교황이 십자군 모집을 선언하자 예상과는 달리 꽤 많은 기사와 영주들이 참전 의사를 밝혔다. 당시에 많은 기사들과 영주들은 십자군에 참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살았는데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 저 멀리 수년간 살아서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성지까지 가는데 부담을 느끼는 영주나 기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이 프랑스 남부에서 이단 해결을 위해 십자군을 모집한다고 하자 많은 기사와 영주들이 여기에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는 지금과는 다른 중세시대로 죽고나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을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이 꽤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교황이 생전에 지은 죄를 은사해 주는 다양한 특전을 제공하기로 하자 여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집된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인간세상이라는 게 그러하듯이 모두가 그와 같은 순수한 이유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이들도 있기 마련인데 가까운 곳에서 대규모 약탈의 기회가 보이기 때문에 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나중에 대거 참여하기에 이른 프랑스 왕실에게는 무엇보다 반 독립적인 프랑스 남부의 영주들을 왕령에 귀속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1209 년 십자군의 모집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십자군 모집을 위해 교황이 파견한 특사는 바로 시토회의 수사인 아르노 아말릭 (Arnaud Amalric) 이었다. 아직 이단 심문관 (Inquisitor) 이라는 제도가 설립 되기도 전이지만 그는 잔인성이나 극단성에서 초창기의 이단 심문관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사실 이단 심문관이란 제도가 바로 이 알비주아 십자군 이후로 생겨난 것으로 무방한데 다만 그 본격적인 제도로써의 설치는 1231 년 교황 그레고리오 9 세 부터였다.
이전의 모든 십자군이 그러하듯 본질적으로 교회가 군대를 소유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 군사 작전에는 기사와 영주 뿐 아니라 세속의 사령관도 필요했다. 이 일에 적합한 인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사람은 4차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다시 프랑스로 귀국한 시몽 드 몽포르 (Simon IV de Montfort, Seigneur de Montfort-l'Amaury, 5th Earl of Leicester ) 였다. 그는 나중에 영국 의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시몽 4세, 아들이 시몽 5세임. 일반적으로 국내에는 다 시몽 드 몽포르라고 번역하지만 영어로는 아버지는 Simon de Montfort the elder, 아들은 Simon V de Montfort 라고도 부른다 )
알비주아 십자군은 1209 년 중순 프랑스의 리용에서 집결했다. 대략 그 병력은 1만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주로 북프랑스 지역의 기사와 영주들이 주축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툴루즈의 레몽 6 세는 재빨리 태도를 바꿔 카타리파를 탄압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십자군은 그대로 진행되었고 레몽 6 세 역시 파문이 풀리지 않았다.
남부 랑그도크 지역의 귀족들은 이 군사 행동에 매우 당황했다. 처음에는 간섭을 거부했던 지역 영주들도 당장에 자신의 영지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하자 이단 척결에 동참하기로 했다. 따라서 초반에 베지에 까지는 알비주아 십자군은 그다지 피를 흘리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다.
십자군은 우선 알비와 카르카손 (Carcassonne ) 방향으로 향했다. 카르카손은 지금도 아름다운 고성들이 남아 있는 프랑스 지방 도시로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십자군은 지역 영주인 레몽 (Raymond Roger Trencavel) 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그는 알비, 카르카손, 그리고 베지에의 자작이었는데 처음에는 협조할 뜻을 보였으나 이내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십자군에게서 영지를 방어할 목적으로 카르카손의 방어를 강화했다.
레몽 자작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었던 십자군은 일단 그의 영지에서 이단들을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가는 길에 일부 이단을 그래도 평화롭게 처단한 다음 이단 심문의 역사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도시중 하나인 베지에로 향했다. 여기서 부터 중세 이단 심문의 피바람이 몰아친다는 말은 약간 감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 적절한 이야기였다.
4. 베지에 학살 (The massacre of Beziers )
베지에 (Beziers ) 역시 아름다운 고성과 동화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알려진 남부 프랑스의 소도시이다. 13세기 초반에는 다른 랑그도크 지역과 비슷하게 이곳에 카타리파가 꽤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카타리파 신자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정통 카톨릭 신앙을 믿는 신자 역시 상당수 존재했다.
(역시 중세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소도시인 베지에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Sanchezn)
십자군은 이 도시로 향하기 전에 사절을 보내 그곳에 있던 정통 카톨릭 교도들에게 카타리 파와 운명을 같이 하고 싶지 않으면 그곳을 모두 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마도 설마 자기들까지 어떻게 하겠냐는 생각을 했는지 대부분 카톨릭 신자들은 재산과 집을 놔두고 가기를 거부했다.
1209 년 7월 21일 십자군이 이 도시에 도달하자 많은 십자군들이 대체 카타리파와 평범한 카톨릭 교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르노 아말릭은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7월 22일 도시를 공격할 때 그는 나중에 이단 심문에서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Neca eos omnes. Deus suos agnoscet" (Kill them all, God will know His own.)
"그들을 모두 죽여라 그러면 신께서 알아볼 것이다."
한마디로 그냥 다 죽이란 말이었다. 결국 그날 베지에의 모든 시민들 - 심지어 카톨릭 교회 신부들과 교회로 피신한 이들까지 - 이 모두 학살당했고 도시는 거의 파괴되었다. (현재 있는 베지에시는 이 대학살과 파괴에서 재건된 것으로 1215 년부터 15세기까지 재건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당시 시몽 드 몽포르에 의하면 약 2만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베지에 자체의 인구가 그정도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5000 - 6000 정도 되는 인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인구 2만이면 꽤 큰 도시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극악무도한 행위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전범으로 재판을 받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만 중세 시대 기준으로 봐도 좀 심한 것이었다. 대개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과 학살을 하는 경우가 드물진 않았지만 별 저항도 하지 않은 도시를 전부 파괴하고 시민을 모두 학살한 행위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베지에 이전에도 이단에 대한 심판이나 혹은 처형이 간혹 있었지만 이단이란 이유로 (일부는 이단도 아니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인명을 학살한 건 처음이었다. 차라리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4차 십자군이 그래도 도덕적으로 덜 비난 받을 만 했다.
이와 같은 자비를 모르는 대량 학살은 분명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리스도는 분명 사랑을 가르쳤는데 그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대량 학살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더구나 베지에 학살은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한 일이 아니라 분명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말릭의 지시였다.
하지만 베지에는 사실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많은 이단 심판과 종교 전쟁에서 서로를 이단으로 지목하고 아무 죄책감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일이 수백년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지에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중세 이단 심문의 피바람과 화형장의 연기가 피어오른 셈이었다.
베지에의 학살이 일단락 된 후 그들은 아직도 남아있는 수많은 이단들을 척결하기 위해 카르카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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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비주아 십자군의 초반 전세 (1209 - 1212 년)
일단 베지에 학살 이후 오히려 십자군의 활동은 편해졌다. 이 극악 무도한 행동을 보고 겁먹은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지 않거나 그냥 항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첫번째로 베지에 이후 목표로 설정한 카르카손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1209 년 8월 1일 카르카손에 도착했는데 카르카손의 수비를 강화한 레몽 자작과 시민 모두가 적극적인 저항의지가 없었으므로 유리한 조건에서 항복을 고려했다.
(요새화된 카르카손 성채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Jondu11 )
사실 카르카손 자체는 베지에와는 달리 잘 요새화된 도시로 십자군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식수를 구하기 힘들다는 큰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십자군은 8월 7 일 이 도시의 식수원을 차단했다. 이후 도시가 항복한 것은 8월 15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빨리 항복한 이유는 무리하게 저항하다 베지에 같은 운명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이 카르카손에서는 대량 학살은 없었다. 영주인 레몽 자작도 포로 신세가 되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십자군은 이 도시에서 모든 카타리파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알몸인 채로 성문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르카손에서 카타리파 추방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시몽 드 몽포르는 이 도시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주변의 도시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베지에 같은 운명이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싸우지 않고 항복했으므로 알비, 카스텔노다리, 카스트르, 리무 등 주변 도시들이 쉽게 손에 들어왔다. 그해 가을은 싸우지도 않고 가을걷이 하는 식으로 도시들을 점령했으므로 이 때 상황만 보면 십자군 원정이 조기에 마무리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알비주아 십자군은 예상외로 질질 시간을 끌게 된다. 그 이후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십자군의 새로운 목표는 프랑스 남부의 라스뚜르 (Lastours) 와 카바레 (Cabaret) 주변부였다. 이 시기에 랑그도크 지방 영주들은 레몽 자작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절치 부심 십자군에 대항할 채비를 했다. 이 십자군이 아무래도 단순히 이단만 척결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영지와 전리품 같은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영주와 귀족들은 그 자신이 카타리파였다.
1209 년 12월 카바레의 영주 피에르 (Pierre - Roger de Cabaret) 은 성공적으로 십자군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그 이듭해 십자군이 병력을 새롭게 보충해 공격에 나섰으므로 십자군이 다시 승기를 잡았다. 1210 년 봄 브람 (Bram) 이 함락되고 잘 요새화된 도시인 미네르브 (Minerve) 역시 1210 년 7월 22일 함락되었다. 이 도시는 오랜 공성전 끝에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미네르브 함락 직후 카타리파에게는 개종을 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매우 신앙심이 강한 140 명을 제외하곤 개종을 택해 화형장에서 불태워지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슬슬 시대적 배경이 화형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에 적합한 상황으로 무르익어 가는데 결국 이 필연적인 결과로 이 전쟁이 종료될 때쯤 이단 심문관 (Inquisitor) 라는 직책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가 서양 중세 시대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기사, 농노, 영주, 그리고 성일 것이다. 당시 워낙 전란이 잦다 보니 중세시대의 성채들은 꽤 견고한 요새들로 건설되어 있어 잘 요새화된 성채들을 함락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점은 랑그도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알비주아 십자군은 1210 년의 나머지 시간을 테르메스 (Termes) 의 요새를 공략하는데 바쳐야했다. 이 요새는 12월에 되서야 함락되었다.
1211 년, 알비주아 십자군 3년차에 아르노 아말릭과 시몽 드 몽포르는 랑크도크의 유력 영주인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비롯한 주요 영주들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카바레의 피에르는 그해 봄 항복했다. 그리고 여름까지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면서 역시 수백명의 카타리파 이단들이 화형대에 매달려 불태워졌다. 이렇게 시작된 화형장의 불길은 향후 500 년은 더 타오를 예정이었다.
1211 년 6월경 알비주아 십자군은 가장 강력한 이단의 근거지 중 하나인 툴루즈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과거 1 차 십자군의 유력 영주였던 레몽 4세의 근거지 답게 툴루즈는 방비가 매우 튼튼했다. 여기에 보급과 병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시몽 드 몽포르는 별수 없이 병력을 물릴 수 밖에 없었다.
1211 년 후반기에는 레몽 6 세가 다시 카스텔노다리 (Castelnaudary) 등의 지역을 접수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 반격은 그해 가을 라스뚜르에서 중단되었다. 하지만 반격은 여기까지 였다. 그 다음해인 1212 년 병력을 다시 추스린 알비주아 십자군은 적의 본거지 툴루즈를 공격해 대부분을 접수했다. 결국 전쟁 4년차에 십자군은 일단 이단을 다 척결하지는 못했지만 남부 랑크도크 지역을 대부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6. 아라곤 왕국의 개입과 1차 전쟁의 종식
사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레몽 6 세 본인은 당시엔 카타리파 탄압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도 아닌데 시몽 드 몽포르와 계속 대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전쟁의 양상이 단순히 이단 탄압보다는 남부 지방 세력과 북부 세력 및 국왕 세력과의 전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양상의 변화는 제사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은 세력이 끼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미 설명한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양상이었다.
당시 랑그도크 지방의 일부는 앞서 언급했듯이 아라곤 왕령이었다. 아리곤 왕국의 수장은 페도로 2세 (Peter II of Aragon) 으로 레콩지스타를 이끌던 걸출한 인물중 하나였다. 그는 아라곤 국왕 및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1212 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아랍세력을 결정적으로 격파해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업적으로 카톨릭 왕 (Peter II the Catholic) 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그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토와 바로 이웃한 툴루즈 백작령이 대부분 시몽 드 몽포르에게 점령당한 후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달가울 리 없는 페도로 2세는 그 자신이 카톨릭 왕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교황과 프랑스 국왕의 명령으로 이단을 척결 중이던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에 도전장을 내밀기로 결정한다.
일단 레몽 6세가 페도로 2세의 사촌이자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단 척결을 핑게로 프랑스의 유력 귀족인 시몽 드 몽포르와 필립 2세가 남부 프랑스 영토를 야금야금 집어먹다보면 자신의 영토도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212 년 겨울 피레네 산맥을 건넌 페도로 2세는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끈 알비주아 십자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남프랑스의 뮤레 (Muret) 에 도착했다. 물론 시몽 드 몽포르도 전쟁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1213 년에는 꽤 기묘한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한쪽은 교황의 요청에 의해 불경한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만든 카톨릭의 군대였고 다른 한쪽은 이교도 아랍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앞장서는 카톨릭의 영웅, 카톨릭 왕 페도로 2세의 군대였다.
과연 신이나 교황 모두 누구편을 들기도 애매해 보이는 이 승부에서 승리한 것은 시몽 드 몽포르였다. 1213 년 9월 12일 뮤레 전투 (Battle of Muret) 는 병력 면에서는 아라곤 왕국군이 꽤 우세했으나 이날 벌어진 기마 돌격에서 적은 수라도 잘 무장된 북 프랑스 기사들이 거의 압도적 (당시 기병 전력으로만 870 대 4000 정도로 아라곤 연합이 우세) 인 아리곤 - 남부 프랑스 기병대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마치 영화 같은 양군 간의 기마 돌격으로 승패가 갈린 뮤레 전투 중세 기록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당시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끈 기사들은 중갑으로 무장되어 있고 기량면에서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당시 페도로 2세의 사촌인 레몽 6 세는 적군을 아군쪽으로 유인해 활과 창으로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나 페도로 2세는 자신이 우세하다는 확신에 너무 차있었는지 이를 명예롭지 못하고 기사답지 못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이끌고 나갔던 아라곤 병력은 정확히 페도로 2세가 이끄는 대열을 공격해오는 십자군 기사들의 기마 돌격에 격파당했다. 페도르 2세는 하필 말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후퇴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으며 이후 아라곤 연합군은 지리멸렬하게 패배했다.
다시 한번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이 정의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화였다. 또 경적필패 (輕敵必敗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패배한다 ) 라는 고사 성어와도 잘 맞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이 전투의 승리로 결과적으로 남부 프랑스 지역에 대한 북프랑스 및 카페 왕조의 지배력 강화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1214 년에는 레몽 6세 자신이 영국으로 망명했으므로 이제 전쟁은 거의 종식된 것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면 잿밥에 더 눈이 가듯이, 이 상황에서는 툴루즈 백작령을 비롯한 전리품에 대한 권리를 누가 주장할 것인지를 가지고 새롭게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 일단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1215년에는 툴루즈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1216년에 이르러 눈물을 머금고 필립 2세 (혹은 필리프 2세, 사실 필리프 2세가 더 흔한 번역 명칭) 에게 양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할 수 있지만 사실 중세 초기 프랑스는 과거 프랑크 제국의 파편으로 그 힘이 매우 미약해 현대적 의미의 프랑스와는 비교할 수 없이 왜소한 왕국이었다. 샤를 마뉴 대제 이후 잦은 왕국들의 이합 집산으로 말미암아 카페 왕조의 힘은 극히 미약해 파리를 중심으로 한 북부 및 중부 프랑스 일대만이 실제적인 권력 행사가 가능한 지역이었다. 실로 프랑스의 중세 - 근대 역사는 여러 다양한 세력이 강력한 프랑스 왕권에 통합되는 역사로 그 결과가 현재의 프랑스인 셈이다.
1216년 이제까지 카페왕조의 힘이 거의 닿지 않던 남프랑스 랑그도크에 왕령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카페 왕조 중흥의 군주 필립 2세였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에서 흔히 그러하듯 순순히 각 지방들이 왕의 명령에 복종하려 들지 않았다. 훗날 프랑스 절대 왕정도 사실 이들을 제압한 오랜 역사 끝에 탄생한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랑그도크의 독립 세력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여기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편리한 구실로 알비주아 십자군이 등장했기 때문에 의외로 금방 끝날 것 같은 알비주아 십자군은 더 시간을 끌기에 이른다. 그 첫번째 이유는 레몽 6세가 다시 반란을 계획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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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차 전쟁의 발발
1213 년의 뮤레 전투는 사실 카타리파 대 십자군의 전투가 아니라 서로 카톨릭 세력임을 자부하는 아라곤 왕국과 프랑스 십자군의 전투였다는 점에서는 의외이지만 남북 프랑스 세력의 대립과 왕권 강화라는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납득이 가능한 알비주아 십자군 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였다.
사실상 이 전투후 툴루즈 백작과 같은 남부 토착 세력을 몰아낸 북부 프랑스 세력은 다시 프랑스 왕실 - 특히 필립 2세 - 의 간섭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랑그도크에서 가장 노른자위 땅인 툴루즈 백작령을 가지고 아웅다웅 하던 도중 중 원래 주인인 레몽 6 세는 같은 이름의 아들인 레몽 (나중에 레몽 7세) 와 함께 다시 툴루즈로 귀환했다. 1216 년 4월의 일이었다. (서유럽에서는 이렇게 부자간에 이름이 같은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이로 인해 기술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문제가 있다. )
그야 말로 반역의 레몽 부자의 귀환이었는데 이는 툴루즈는 물론 랑그도크 지방 전역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많은 토착 귀족들은 자신들을 밀어낸 북부 프랑스 기사와 귀족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고 부득이 하게 잠시 개종한 카타리파 역시 모반의 기회를 노리기는 마찬가지 였다. 여기에 저항의 상징인 레몽 부자가 귀국하자 반역은 마른 벌판에 불길이 퍼지듯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카타리 파의 상징은 노란 십자가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지 저자 Image created by R Neil Marshman 15 June 2006 )
반란군은 프랑스 남부의 도시인 보케르 (Beaucaire) 에서 처음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216 년 5월에 이 도시를 포위한 반군은 3개월에 걸친 공성전 끝에 도시를 함락할 수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 지역 도시와 성들은 꽤 요새화 되어 있어 함락시키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경우들이 많았다.
당시 이 소식을 듣고 시몽 드 몽포르는 급거 보케르 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결국 반군에 격퇴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209 년과는 달리 거의 허를 찔린 상태로 십자군이 이미 해산된 다음이었기 때문에 몽포르 혼자 거느린 군대만으로는 한계가 이었다. 1216 년 당시의 전세는 이렇게 반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 때 보케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를 패퇴시킨 건 약관 19세의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아들 레몽이었다. 후일 레몽 7 세가 되는 그는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2세 (카톨릭 왕 페도로 2세의 전왕) 의 딸과 결혼해 아라곤 왕국에 배경이 있었다. 그는 마르세이유 방면으로 상륙해 보케르를 8월 24일 함락시키면서 그 명성을 처음 알리기 시작했다.
(레몽 7 세의 중세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몽포르는 툴루즈에서 반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역시 그해 말 다시 루르드 (Lourdes) 에서 반군에 다시 패배하면서 고배를 마시게 된다. 사실 시몽드 몽포르는 1215 년 나르본 공작 겸 툴루즈 백작이 되면서 한창 잘나갔던 시기에서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1160 년 생이니 당시 56 세의 프랑스의 가장 유력한 영주였던 그가 19세의 청년에게 패배한 셈이었다) 필립 2세에게 툴루즈를 마지 못해 양도하기로 결정한 1216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실상 이미 툴루즈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젊은 레몽이 툴루즈를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에 다시 시몽 드 몽포르는 굴욕적으로 툴루즈에서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217 년 9월에 툴루즈는 완전히 레몽 의 손안에 떨어지게 된다. 시몽 드 몽포르는 그해 다시 툴루즈를 포위하려 했지만 충분한 병력이 없어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확고한 정통파 신앙을 가지고 이단 (주로 카타리파) 를 산채로 불태우던 시몽 드 몽포르가 없어지자 다시 남부에는 이단 종파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 이들은 툴루즈 성문을 활짝 열고 레몽 부자를 맞이했기 때문에 레몽은 싸우지도 않고 성을 되찾았다.
그럼 왜 이시기에 다시 바로 알비주아 십자군이 1209 년 처럼 대거 소집되지 않았을까 ? 그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 이유는 바로 교황권의 절정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1216 년 7월 16일 승하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이틀 후 콘클라베 (conclave, 잠그는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 에서는 연로한 첸치오 사벨리 (Cencio Savelli) 가 새교황 호노리오 3세 (Honorius III) 로 선출되었다.
한창 보케르 전투가 한창일 때 즉위한 호노리오 3세는 이단 척결에도 꽤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엔 온통 5차 십자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툴루즈에서 발생한 사소한 반란은 성도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십자군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호노리오 3 세가 다시 카타리파 이단 척결에 관심을 가지는 건 훨씬 후에 일이다.
두번째로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알비주아 십자군의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시몽 드 몽포르가 교황과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로 부터 아무 지원도 없이 툴루즈 공격에 나섰다가 전사한 것이었다. 이로써 알비주아 십자군은 한동안 구심점을 잃게 된다.
8. 툴루즈 공방전
1216 년에서 1217 년사이의 굴욕을 갚기 위해 절치 부심하던 시몽 드 몽포르는 1218 년 봄 새로운 툴루즈 본성 공격을 계획했다. 1218년에는 다시 어느 정도 병력을 모은 알비주아 십자군이 다시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뭉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비주아 십자군이 툴루즈를 포위했을 때 시몽 드 몽포르는 실망스런 사실을 발견했다.
몽포르가 이성을 떠난 1217 년에 본래 견고한 툴루즈 성을 훗날 쉽게 공략하기 위해 성벽을 일부 파괴시킬 것을 지시했으나 그가 재차 공격을 시도할 때 쯤 성벽이 모두 무사히 건재한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툴루즈의 백성들이 그의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 견고한 요새가 건재하다면 공성전은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몽포르는 다시 한번 힘든 싸움을 직감했을 것이다.
여기에 이미 수많은 카타리파를 산채로 불태워 증오의 대상이 된 시몽 드 몽포르가 다시 툴루즈를 점령하는 일을 막기 위해 툴루즈의 카타리파와 토착 귀족들은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알비주아 십자군과 목숨을 받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진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게 뻔했으므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각오가 이 처절한 전쟁을 수십년간 더 끌고간 원동력이 되었다.
일단 성주위를 포위한 알비주아 십자군은 수많은 투석기를 설치하고 고양이라고 부르는 이동식 방어장치를 이용해서 성벽을 공략하려 들었다. 이와 같은 시도가 이어질 때 마다 성벽에서는 투석기를 이용해 원거리의 적에 대응 사격을 하고 성벽 아래로 돌을 떨어뜨렸다.
1218 년 6월 25일, 초여름에 성을 공략하던 중 시몽 드 몽포르는 투석기에서 날라온 돌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기록에 의하면 툴루즈 성에서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투석기로 돌을 발사했다고 되어 있는데 시몽 드 몽포르도 여기에 맞아 숨졌다고 한다. 당시 일단 이단이라고 하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죽이던 시몽 드 몽포르 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개종을 하지 않고 버티던 카타리파 입장에서는 여자든 아이든 간에 성이 함락되고 포로로 잡히는 순간 고통스럽게 화형대에 매달릴 것이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투석기든 손이든 잡히는 대로 돌을 집어 던졌고 이것이 반란에 성공한 첫번째 이유였다.
(투석기에 날아온 돌에 맞아 쓰러지는 시몽 드 몽포르 Francois Guizot (1787-1874), The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Year 1789, London : S. Low, Marston, Searle & Rivington, 1883, p. 515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알비주아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쓰러지자 결국 한동안 알비주아 십자군은 구심점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십자군 자체가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다. 일단 시몽 드 몽포르의 세 아들 중 맏이였던 아모리 ( Amaury VI de Montfort) 가 이전 같은 추진력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 알비주아 십자군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단 척결 보다는 남쪽의 영토에 더 관심이 많은 필립 2세 역시 이 과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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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교착 상태
일단 새로운 지휘관인 아모리 몽포르 ( Amaury VI de Montfort) 는 바로 랑그도크 지방의 반란과 이단을 분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이전 아버지가 정복한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레몽 7 세와 대결이 불가피 했다. 1215 년의 반란 이후 실질적인 툴루즈 군의 주도권은 레몽 7세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1218 년이 다 지나기 전 아모리 몽포르는 피레네 산맥의 작은 도시인 벨케어 (Belcaire) 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1219 년 6월에는 마르망드 (Marmande) 를 함락시켰다. 그해 여세를 모은 아모리는 다시 툴루즈를 공략했으나 레몽 7 와 이단 카타리 파는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220 년 이전까지의 알비주아 십자군의 군사적 성공은 그저 랑그도크 변경 지대로 국한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220 년에 이르러 마침내 랑그도크 지역 내 주요 거점으로 서로간에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한 카스텔노다리 (Castelnaudary) 가 알비주아 십자군의 손에 들어갔다. 다시 1221 년에는 몬트리올 ( Montreal)이 레몽 부자의 손에 넘어가는 등 이 지역의 전세는 한마디로 교착 상태로 일진 일퇴의 상황이 반복되었다.
각지에 요새화된 도시들과 마을들을 하나씩 포위 점령하기 위해서 몇개월 씩 지루한 공성전을 벌이는 일이 일상사였다. 초창기 베지에 학살과 이단 화형식은 빠른 속도로 이 지역을 점령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지고 난 후 끝까지 개종을 하지 않으면 화형식이라는 선택지 밖에 없는 카타리파가 극렬 저항을 했기 때문에 쉽게 이 지역을 점령할 순 없었다.
이렇게 예상외로 알비주아 십자군은 계속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5 차 십자군이 끝나고 6 차 십자군 시기까지 이어지게 되며 종국적으론 13 세기 중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알비주아 십자군에 연관된 인물들은 이 십자군의 끝을 볼 수 없었다. 이미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16 년 서거했고 시몽 드 몽포르도 1218 년 사망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레몽 6세가 1222 년 사망하고 아들인 레몽 7세가 완전히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남부 지역을 호시 탐탐 노리던 필립 2세 역시 1223 년 사망하고 루이 8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카타리파 이단을 처리하고 최종적으로는 남부 프랑스를 프랑스 왕실에 귀속시키는 과업은 사자왕 루이 8세와 그 뒤를 잇는 성왕 루이 9세의 몫이었다.
10. 프랑스 왕실의 개입
경건왕 필립 2세 (필리프 2세) 의 뒤를 이은 루이 8 세는 아버지의 숙적으로 불린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비슷한 별명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상징은 사자가 아니라 백합이지만 프랑스 왕이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자왕 루이 8 세 (Louis VIII the Lion ) 는 짧은 재위 기간과 아직 왕자였던 시절에 적지 않은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는 1187 년생으로 이미 20세 도 안된 시점인 1214 년부터 실지왕 존과 전쟁을 벌여 1216 년에는 윈체스터를 함락하고 잉글랜드의 절반을 장악하는 엄청난 군사적 성과를 거둔바 있다. 결국은 해전에서 패배해 램버스 협정 (Treaty of Lambeth) 을 맺고 물러나긴 했지만 실지왕 존의 형인 사자심왕 리처드에 견줄만한 대담함과 무용을 겸비한 왕자였다.
(사자왕 루이 8세의 후세 상상도.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사실 루이 8세가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프랑스 절대 왕정이 더 빨리 등장했을지도 모를 만큼 이 젊은 왕의 군사적 업적은 눈부셨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루이 8 세는 툴루즈 역시 노리고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 십자군을 활용할 계획이었다. 1225 년 11월 열린 부르주 공의회 (Council of Bourges) 는 레몽 7를 파문하는 한편 알비주아 십일조 (Albigensian Tenth) 라는 새로운 세금까지 부과했다.
이로써 알비주아 십자군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루이 8 세는 직접 알비주아 십자군을 통솔해 1226 년 6월 랑그도크 지방으로 향하게 된다. 대규모의 병력으로 프랑스 왕이 직접 남하하자 대부분의 도시는 큰 저항 없이 항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남부 도시들이 순순히 항복하진 않았다. 남부의 아비뇽 (Avignon) 은 당시 이단의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남 프랑스의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프랑스 왕에겐 꼭 필요한 도시였다.
명목상으로는 독일 황제의 영토였던 이 도시가 항복을 거부하자 루이 8세는 3개월간의 포위 전 끝에 9월달에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불행히 루이 8세는 남프랑스 정복의 과업을 왕비인 블랑슈 드 카스티야와 루이 9세에게 넘기는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해 11월에 (아마도 이질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39 세 였다.
부왕의 뒤를 이은 루이 9세는 아직 12세였기 때문에 실권은 섭정을 맞게된 모후 블랑슈 드 카스티야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의 딸로 혈통으로 보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의 딸이었다. (즉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의 외손녀)
(블랑슈 드 카스티야의 13세기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외가 쪽인 플랜테저넷 왕조 보다 카페 왕조를 부흥하는데 힘을 쏟았다. 여기에는 물론 루이 8세가 못다한 과업인 남프랑스 정복 사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 남부 프랑스는 거의 독립 국가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카페 왕조의 힘을 남부 프랑스 까지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툴루즈를 비롯한 남부의 왕령 영토가 필요했다.
1227 년에는 루이 8 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블랑슈 드 카스티야에 의해 알비주아 십자군은 남부의 주요 도시를 함락하고 이단들을 화형대에 불태웠다. 그리고 마침내 적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툴루즈와 레몽 7세를 포위했다.
뛰어난 용맹을 자랑하던 레몽 7세도 이 상황에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1229 년 레몽 7 세는 결국 조건부 항복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블랑슈 드 카스티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레몽 7세의 후계자는 딸인 잔느 (Jeanne) 밖에 없었다. 그녀를 루이 9세의 동생인 알폰스와 결혼하게 하고 레몽 7세가 죽으면 그들에게 툴루즈를 물려주는 것이 바로 이 제안의 핵심이었다.
이는 한마디로 툴루즈를 카폐 왕조에 양도하란 것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던 레몽 7세는 다시 카톨릭 신앙으로 돌아와 이단 척결에 동참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투항했다. 1229 년 4월 12일 파리 조약 (Treaty of Paris) 로 레몽 7세가 이 조건을 수락하므로써 마침내 공식적으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조약에는 잔느와 알폰스의 자식이 없을 경우 툴루즈를 프랑스 왕에 귀속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결국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 툴루즈는 프랑스 왕령으로 귀속된다. 결국 알비주아 십자군은 이단 척결로 시작해 프랑스 왕권 강화로 마무리된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단은 다 처리된 건 아니었다.
11. 알비주아 십자군의 유산
1229 년, 사실상 툴루즈가 프랑스 왕권에 포함된 이후 이단 처형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솓아 올랐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 (Gregory IX) 는 1231 년 부터 본격적으로 이단 심문관 (Inquisitor) 제도를 도입하여 이후 수백년간 수백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엄밀히 이야기해서 현대의 상상처럼 모든 이단들이 무조건 잡히는 데로 끔찍한 고문을 거친 다음 마지막으로 자비롭게 화형대에서 산채로 화형당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시대의 이단 심문관들은 길잃은 어린 양들을 자애롭게 교화시켜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오는 감동 드라마를 선호했다. 거짓 신앙과 우상 숭배에 길잃은 영혼들을 구제하는 것이 참된 성직자의 도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카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면 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카타리파와 왈도 파 같은 이단들이 일부는 살기위해, 그리고 일부는 진심으로 정통 신앙으로 복귀했으므로 진짜 감옥에 투옥된 카타리 파는 11% 정도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세 교회의 모순이 이런 감동 드라마로 해결될 순 없는 일이었고 일부는 툴루즈의 투항 이후에도 독립적으로 끝까지 저항했다.
1244 년에 최후의 거항 거점 중 가장 중요한 카타리파 요새인 몽테귀르 (Montsegur ) 가 함락된다. 이후에 남은 카타리파 들이 케피뷔스 성 (Chateau de Queribus ) 에서 저항하다 1255 년 최종적으로 함락되어 카타리파의 모든 저항 거점이 분쇄된다. 이후에도 남은 카타리파들이 간간히 화형되다 1321 년 마지막으로 카타리파 화형이 있었다고 기록된 이후 카타리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몽테귀르 요새 유적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Ceesharp )
(케피뷔스 성 유적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inpin )
하지만 알비주아 십자군의 유산은 - 바로 이단 심문 - 이후 500 년도 더 넘게 살아남는다. 19세기 까지도 이단 심문관 제도는 살아남았다. 이단 심문관들에 의해 과연 얼마나 많은 인명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치 않지만 마녀 사냥 및 종교 전쟁 시절 까지 합치면 아마 수백만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 수치는 연구마다 큰 차이가 있지만)
(스페인의 대 이단 심문관 (Grand Inquisitor) Tomas de Torquemada (1420 - 1498 ) 그는 연평균 40 명, 9일마다 한명 꼴로 무려 50 년간 2000 명을 화형대로 보낸 유명한 이단 심문관이다. 다만 실제로는 기소자의 상당 부분이 미리 도망쳐 목재 인형을 대신 태운 경우도 많았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스페인등 일부 지역에서 이단 심문 제도는 더 무시무시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당시의 교회는 죽은 후 지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면서 이단 심판을 통해 실제 죽기 전에도 지옥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결국 이렇게 종교의 자유를 계속 억압하고 교회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종국적으로는 신구교의 분리와 종교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 이 종교 전쟁을 통해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어리석음이 반복되었다. 사실 중요하지도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갈등으로 인해 같은 기독교 인들끼리 서로 수백만명의 인명을 잔인하게 학살한 행위는 사랑을 가르친 그리스도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오늘날 현대에도 이런 모순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 내가 믿는 것이 정통이고 나와 다르면 이단이라는 믿음이 살아있는 한 아마 역사는 언제든지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미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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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thars (from Greek katharoi or pure) believed that all matter was ev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