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연신청 공지 *
1. 사연은 선정되어 방송에 나가게 됩니다.
방송에서 읽어드리지 못한 사연에는 루시아가 댓글로 코멘트를 달아드립니다.
2. 사연이 방송에 나가기까지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이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3. 익명을 원하시는 경우, 루시아의 이메일(whitepowder94@daum.net)로 사연을 보내주시면 됩니다.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고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스포츠인 축구, 그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라이벌전, 더비 매치입니다. 오늘은 가장 유명한 더비 매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루시아님께서 방송에서도 언급하셨던 바로 '엘 클라시코(El Clásico)입니다.
엘 클라시코란 바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경기를 두고 쓰는 용어입니다. 영어로는 The Classic으로 말 그대로 '전통의 승부'입니다. 아래서 더 자세하게 이야기 하겠지만 두 클럽의 연고지인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극도로 적대할 정도로 지역 감정이 심한 지역입니다. 단순히 축구만 따져도 세계 최고의 축구 스타들이 펼치는 축구 전쟁입니다.
엘 클라시코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선 스페인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스페인은 하나의 왕국으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과거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왕국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오늘 살펴볼 마드리드는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바르셀로나는 바르셀로나 백작령(이후 아라곤 왕국과의 연합 왕국으로 변화)이 통치를 하고 있었죠.
카스티야 연합 욍국 국장(左), 아라곤 연합왕국 국장(右)
1469년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세자인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후계자 이사벨 1세가 결혼하면서 양국은 동군연합이 되었고 사실상 스페인 제국의 시작을 알리게 됩니다. 이 때 카스티야의 왕은 이사벨 1세의 오빠인 엔리케 4세였는데 후계자인 이사벨이 자신이 원하는 프랑스, 포르투갈의 후계자가 아닌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세자 페르난도 2세와 결혼했다는 이유로 후계자 교체를 선언하면서 왕위계승전이 펼쳐졌는데 이사벨 1세가 승리하면서 카스티야, 레온, 아라곤, 시칠리아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이사벨 1세의 카스티아갸 아라곤 보다 영토도 3배, 인구도 4배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카탈루냐 지방이 지중해 무역권을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아왔지만 오스만 제국의 대두로 재정적으로 크게 축소 되었고 반면에 카스티야 왕국은 아메리카 식민지 개혁으로 막대한 부를 누리게 됩니다. 단적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지원 한 것이 스페인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론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의 독단에 의한 것이었기에 그로인한 이익은 오로지 카스티야가 차지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자 아라곤 연합 왕국의 왕인 페르난도 2세 마저도 카스티야로 이동하고, 카탈루냐에는 부왕을 두고 통치하면서 사실상 카탈루냐는 스페인의 일개 지방이 되었습니다. 카탈루냐 입장에선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던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후 1512년 카스티야와 아라곤은 동맹을 맺고 나바라 왕국을 침공해 병합합니다. 1516년 페르난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셋째 딸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로스 1세가 외조부의 모든 땅을 상속 받으며 스페인 왕국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몇백년 전의 역사에서부터 이 두 지역의 이야기는 시작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은 흘러 두 지역의 감정을 더욱더 악화 시킨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스페인 역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손꼽히는, 스페인을 피로 물들인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입니다. 1936년 스페인에선 내전이 발생합니다. 이 내전에서 승리를 거둬 권력은 장악한 인물이 바로 프랑코입니다. 프랑코는 자신이 이끌던 아프리카 파견군, 모로코 현지인들로 구성 된 용병부대 레굴라레스 등의 정예 부대를 통솔하고 있었기에 장악에 성공합니다. 스페인의 철권통치자가 된 프랑코는 군총사령관, 유일한 합법정당인 국민운동당 당수, 국가원수, 내각수반을 모두 겸임하며 헌법도, 국민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는 폭압적 체제의 수장으로 40년간 군림했습니다. 그의 권력엔 어떠한 제도적 한계도 없었고 마음대로 법을 만들어 권력을 행사하게 됐습니다.
또 프랑코는 카스티야 지역 즉, 마드리드 지역 위주의 정치를 펼쳤는데 그러면서 타 지역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3년 6월 13일 코파 델 레이 준결승 2차전에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르셀로나에서 펼쳐진 준결승 1차전에서 바르셀로나가 3-0으로 레알 마드리드에 승리하면서 결승 진출이 유력 했으나 레알 마드리드가 충격적이게도 11-1로 승리를 거두면서 큰 의혹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경기 이후 카탈루냐 언론들을 통해 경기 직전 스페인 국가보안부장이 라커룸에 찾아와 "당신들이 마음 놓고 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정권이 그것을 눈 감아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증언 했으며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이를 진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 제대로 된 경기를 치를 수도 없었고 이미 전반전에 8-0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후반전을 불참 하려 했지만 압박에 의해 후반전도 마저 치르면서 11-1의 결과가 나오게 되었죠. 이는 큰 파장을 일으키며 양 팀의 구단주가 스페인 축구 협회의 권고로 퇴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후에 레알 마드리드의 구단주가 되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이 경기에 대해 바르셀로나에 정식으로 사과 했으며 이 경기 결과는 스페인 축구 협회에 의해 무효화 됐습니다.
故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 동상
또 다른 사건은 레알 마드리드와 세계 축구계의 전설로 손꼽히는 故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의 영입 사건입니다. 내전이 끝난 이후 1945년, 1953년 사이에 5회의 우승을 경험한 바르셀로나와 달리 레알 마드리드는 1953년까지 14년 동안 프리메라 리가(스페인 리그)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953년 바르셀로나는 콜롬비아의 명문 팀인 CD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활약하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와 이미 이적에 합의한 상황이었습니다. 디 스테파뇨는 원 소속 팀인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이적 허가를 하기도 전에 독단적으로 콜롬비아를 떠나 스페인에 입국 하면서 법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때문에 스페인 축구 협회가 바르셀로나로 이적 하는 것을 일시 중지 시켰는데 이 와중에 레알 마드리드의 구단주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개입해 디 스테파뇨의 영입을 시도 했습니다.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법적 문제가 해결 되지 않은 이상 디 스테파뇨와 바르셀로나와의 계약은 유효화 되지 않았기에 다른 클럽으로 이적 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5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1953년 9월 15일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구단주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와 엔리크 마르티 카레토가 협약을 맺었는데 협약의 내용은 다음 4년 동안 1시즌씩 양 팀에서 번갈아가면서 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결정은 바르셀로나 팬들 사이에서 정부와 스페인 축구 협회가 레알 마드리드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냐며 강한 불만을 자아냈고, 여론을 의식한 카레토는 디 스테파뇨가 완전히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하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디 스테파뇨는 레알 마드리드와 4년 계약을 맺게 됐습니다. 디 스테파뇨는 이후 1953년부터 1964년까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282경기 216골 득점이라는 엄청난 활약을 했고 은퇴한 이후 감독으로서도 1982~1984년, 1990~1991년 2번에 걸쳐 레알 마드리드를 지휘 했고 레알 마드리드 명예 회장직을 지내다가 2014년 7월 7일 88세의 나이로 작고 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또 다른 내용도 있는데 글 전개 상 요약 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는 위와 같은 사건들에 관련 되면서 프랑코의 팀, 프랑코의 비호를 받은 팀이라는 이야기 속에 바르셀로나는 '저항 정신을 상징하는 클럽', 레알 마드리드는 '왕가와 프랑코의 비호를 받는 부패한 클럽'이라는 이미지로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이는 확실한 근거가 없는 이야기고 사실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 더불어 프랑코가 정권을 잡게 된 결정적 계기인 스페인 내전 당시 끝까지 대항했던 도시이며 두 도시를 이간질 시키기 위해 축구를 이용했다는 분석이 더 정확합니다.
↓ 레알 마드리드에 대한 오해의 추가 내용
왕가와 레알 마드리드의 관계설 : 레알 마드리드의 앰블럼을 보면 왕관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항상 최고의 선수들만을 영입 하려고 했으며 또 지금까지도 엄청난 최고의 스타 선수들이 모여있기 때문에 '왕가의 지원, 정부의 지원'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나오곤 있는데 레알 마드리드도 바르셀로나와 마찬가지로 '시민 구단'이며 엄청난 금액으로 스타 선수들을 영입하는 것은 뛰어난 비지니스 능력에 기이한 것으로 이러한 구단 운영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도 교재로 사용 될 정도입니다. 앰블럼의 왕관은 본래 레알 마드리드의 클럽 명은 클럽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였으나 1920년대 스페인의 국왕 알폰소 13세에 의해 '레알'이라는 칭호를 수여 받은 것 입니다.(다른 클럽들도 이 때 레알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왕관이 앰블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두 팀은 각각 프리메라 리가 32회, 23회로 최다 우승 1, 2위를 기록하고 있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각각 10회, 5회 우승으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팀들 중 하나 입니다.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실력을 지닌, 세계 최고의 리그에 속한 양 팀의 대결이기 때문에 역사적, 정치적 사건을 제외 하더라도 라이벌 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더욱이 유명한 슈퍼 스타들이 즐비하기 때문에 엘 클라시코가 열리는 날은 전 세계가 양분 된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 입니다.
팀 색깔적인 면에서도 양 팀은 상반 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레알 마드리드는 과거 지네딘 지단, 데이비드 베컴으로 대표되고 현재 크리스티아노 호날두로 대표되는스타 선수들의 영입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전술적으로도 빠른 템포로 역습을 펼치는 경기를 펼치는 반면 바르셀로나는 리오넬 메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세르히오 부스케츠로 대표 되는 유스 시스템을 활용한 선수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전술적으로는 느린 템포의 점유율 위주의 경기를 펼칩니다. 물론 바르셀로나도 스타 선수 영입을 즐깁니다. 최근에 네이마르, 루이스 수아레즈가 대표적이죠.(기본적인 토대는 위와 같지만 스페인 축구 팀들은 회장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팀의 운영 방침이 바뀌는 경우가 많습니다. 현재 바르셀로나의 회장인 조세프 마리아 바트로메우는 스타 선수 영입을 공약으로 내세운 바 있고 실천 중 입니다.) 역대 전적은 72승 32무 69패로 레알 마드리드가 근소하게 앞섭니다.(2016년 4월 7일 기준)
이토록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진 두 팀끼리 특히 알프레도 디 스테파뇨 사건을 겪었던 두 팀이기에 서로간의 이적이 없었을 것 같지만 두 곳에서 모두 활약한 선수들이 있습니다.(곧 바로 이적한 선수들만 포함/레알->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레알)
서독의 주축 멤버로 활약 했던 미드필더 베른트 슈스터는 1980~1988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약 했는데 바르셀로나에서 부상 입었을 때 치료를 제대로 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 하게 되는데 바르셀로나 팬들은 마찬가지고 레알 마드리드 팬들도 탐탁치 않아 했으나 충성하는 모습으로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레알 마드리드의 또 다른 라이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 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2007~2008년 베른트 슈스터는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을 맡았습니다.)
덴마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1990년대의 대표적인 축구계 전설 미카엘 라우드럽은 1989~1994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약 했고 1994~1996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 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에선 준수한 활약을 펼쳤고 바르셀로나 팬들의 엄청난 비난에 지쳤는지 2년 만에 레알 마드리드 생활을 접고 일본의 빗살 고베로 이적 합니다. 경질 되긴 했지만 스완지 시티의 감독으로 기성용 선수를 중용 하기도 헀죠.
현재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펩 과르디올라 이후 또 다른 전성기를 이어가고 있는 루이스 엔리케 감독도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 한 적이 있습니다. 엔리케는 1991~1996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 했고 이후 1996~2004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약 했습니다.
그리고 두 팀 간의 이적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 선수 루이스 피구가 있습니다. 피구는 1995~2000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약 했으며 바르셀로나의 상징이자 감독으로서도 엄청난 성공을 함께한 펩 과르디올라가 주장일 당시 그가 부재 하면 항상 피구가 주장 완장을 달 정도로 신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피구는 활약에 비해 많은 연봉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재계약 협상 지연이라는 문제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바이아웃 금액이 턱없이 낮았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 회장 선거에서 밀리고 있던 플로렌티노 페레즈가(현 레알 마드리드 회장) 루이스 피구 영입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실제로 이적 하게 됩니다. 피구는 이후 인터뷰를 통해 바르셀로나 잔류를 최우선으로 여겼으나 바르셀로나 수뇌부에서 '이적료만 많이 준다면 이적 해도 좋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이적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피구는 2000~2005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 했습니다. 한 편 누 캄프에서 펼쳐진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경기에서 피구 이적에 분노한 바르셀로나 팬들이 온갖 쓰레기를 던졌고 심지어 돼지 머리를 던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들로 피구는 제대로 경기를 뛰지 못할 수준이기도 했죠.
수많은 제 2의 디에고 마라도나 중 한 명이었던 하비에르 사비올라도 2001~2007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활약 한 이후 2007~2009년까지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 했지만 바르셀로나 내에서의 인기나 입지가 피구와 같지 않았기 때문에 그 때 만큼의 충격은 없었습니다.
최근에는 카탈루냐 지방이 분리 독립을 더욱더 본격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실제로 이런 움직임은 엘 클라시코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가장 최근에 실시한 선거에선 분리 독립 반대 의견이 더 많았다는 사실)
역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축구적으로도 세계 최고의 라이벌 매치인 엘 클라시코, 앞으로도 어떤 스토리들이 그려질지 기대 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위에서 이야기 한 내용 외에도 정말로 많은 스토리가 가득하지만 대표적인 이야기들만 적어봤습니다. 처음에 예상한 것 보다 글이 좀 길어졌네요. 다음에는 또 다른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 누락 된 내용이 있다면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응원 횟수 0
첫댓글 축잘알 루시아를 위한 축구이야기 감사합니다!
문화공간의 베리에이션이 또 확장되었군요
빠르시네요 ㅋㅋㅋㅋ 축잘알이라 이미 알고 있을지도 ^0^
@트루블루 축잘알 코스프레라서 아마 모를걸요 ㅋㅋ
검물님처럼 저도 카페 앱 알람 기능을 쓰고 있어서 빠른 댓글이 가능하죠 ㅎㅎ
@[멀티핫산]Weed 추가적인 정보 검색해보느라 글 쓰는 시간이 좀 걸렸네요 ㅎㅎ
다양한 분야의 리뷰들이 점점 늘어나는군요 ㅋㅋ
다음 주제도 생각해봐야겠어요. ㅋㅋㅋ 지금은 레인저스가 재정 악화로 4부 리그로 강등 당했지만 종교적인 이유가 담겨있는 셀틱과 레인저스의 올드 펌 더비도 생각 해봐야겠네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여러가지 사건이 더 있지만 잘 모를 수 있는 역사적인 이야기에 좀더 집중해봤어요. ㅎ
삭제된 댓글 입니다.
호우!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ㅋㅋ
축구를 정말 좋아하는사람으로써
이런 글읽는걸 좋아합니다
나중에라도 많이 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글 주제도 생각나시면 말씀해주세요~! 자료 모아서 한 번 적어볼게요
@트루블루 아이구 그냥 편하게 올려주세요
제가 뭐라고 주제를 부탁하겠습니까 ㅎㅎ
@다목적지구인 아니에요~ 덕분에 몰랐던 사실들도 더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아요. ㅎ
@트루블루 크흠..그럼 좋아하시는 스타플레이어 얘기해주세요(단순)
@다목적지구인 네~ ㅎㅎ 다음에 한 번 적어볼게요 ㅎㅎ 몇명 있어요!
축구 좋아하는 팬으로서 진짜 좋은글이었습니다ㅎㅎ
이렇게 더비에 관해서 좋은글이 올라와서 정말 집중해서 보게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