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경환의 양자역학의 시학 ---정동재의 시 세계
양자역학의 시학
---정동재의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의 시 세계
반경환
정동재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2012년 계간 {애지}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하늘을 만들다}와 {살리는 공부}가 있다. 첫 번째 시집인 {하늘을 만들다}가 상징과 은유, 풍자와 해학을 통하여 ‘새로운 하늘’을 창출해냈다면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살리는 공부}는 그의 ‘삶의 철학’을 통하여 ‘우주’와 ‘인간의 조화’를 역설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시 쓰기(창조)와 삶의 실천, 즉, 이론철학에서 실천철학으로 그의 시 쓰기와 삶의 운행을 진전시켜온 것이고, 따라서, “거리를 벌려준 해와 달/ 거리를 좁혀준 나무와 새들/ 옷깃을 스치고 지나간 인연/ 숨 한 모금/ 모두/ 사랑합니다”라는 [살리는 공부」에서처럼, 그토록 깊이 있고 아름다운 이 세상의 삶의 찬가를 부르게 된 것이다. 모든 시인은 영원한 학생이고, 영원한 학생은 제일급의 시인으로서의 영원한 스승의 길을 가게 된다. 앎의 실천(시 쓰기)은 끝이 없고, 이 앎에의 의지의 극치가 정동재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가 될 것이다.
발자국 쫓다 보면 빛과 빛을 합성하는 작업 중이다
뭔가 큰일 벌이고 있다
DNA가 있어서 천명이 있어서
빛에 싹이 나고 잎이 나는 것을 보라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나는 것을 보라
초록 풀이나 미역 뜯었다는 바닷가 바위 공룡 발자국을 보라
익룡 빼곡했다는 하늘 고개 들어 보라
하루도 쉬지 못하는 태양 숨은 붙은 것인지 확인하여 보라
폐지 한가득 손수레를 끄는 최후의 보루
등골이 다 빠져 활처럼 휜 허우적거리는 걸음걸이
빛의 발걸음을 보라
다 저녁에 이마 땀 한번 제대로 훔치고
하늘 한번 보는
먼저 가신님 허공에 그리고 섰을지도 모를
그렁그렁 한 눈망울 읽어 보시라
빛이 사람이 되기까지
아버님 어머님 우리 고운 님 되기까지
대견한 우리 아드님 되기까지
빛이 어찌어찌 고명하여지는지 눈여겨 보라
빛이 소멸하지 않는 빛님으로 신위神位에 모셔지기까지 또렷이 찍힌 발자국을 보라
환장하도록 고운 저녁노을이 감탄사 외에는 말을 잇지 못하게 한다
빛의 속성이란 그런 것
뭔가 분명 천지개벽시킬 큰일 벌이고 있다
*양자역학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빛 발자국] 전문
태초에 말씀(언어)이 있었고, 전지전능한 신이 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과 우주와 모든 만물들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와 인간중심주의의 대사기극이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태초에는 빛(불)이 있었고, 이 빛에 의하여 만물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물질은 빛(에너지)이고, 빛은 물질이다. 현대 물리학에서 빛은 파동이고 입자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빛은 입자와 입자(원자와 원자)의 총체이며, 그 움직임(파동)이라고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모든 물질은 빛이고, 빛은 파동이고 생명이다. 빛에 의해서 밤과 낮이 생겨나고, 빛에 의해서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가 뜬다. 빛에 의해서 물이 흐르고, 빛에 의해서 물이 증발한다. 빛에 의해서 모든 생명체들이 태어나고, 빛에 의해서 시와 음악과 그림과 생활운동이 일어난다. 정동재 시인이 그의 세 번째 시집 제목을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라고 명명한 것은 그의 시적 주제가 ‘양자역학의 시학’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자역학이란 뉴턴의 역학이론의 반대방향에서 미시적인 세계를 다루는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의 ‘양자역학’은 인위적이 아닌 ‘무위자연’의 ‘삶의 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詩를 시라고 바꿔 쓰고 나면
글로 목탁 소리 낼 수 있어 좋다
글로 찬성 소리 낼 수 있어 좋다
글로 그림 그릴 수 있어 좋고
글로 영화 찍을 수 있어 좋다
수작 한 편 쓴 것 같아 다시 살펴보면
정답 없는 수학 문제를 풀다
정답을 못 찾은 것 같아서 좋다
점 하나 찍은 마침표에서
11차원 우주 물리학 이끌어내는 것 같아 좋고
행간 한 줄로 시작되는
천국의 계단 기하학 연결한 것 같아 좋다
부족한 내가 시 한 편 쓰고 나면
부족한 내가 별 하나 그리고 나면
시가 내게
안부를 묻는 것 같아 좋고
서툰 사랑에
서툴러도 된다고 고백해 주는 것 같아 좋다
시 한 편 쓰다 보면
온전히 나를 이끌어주려 하신다
―「시」([살리는 공부]) 전문
詩를 시라고 바꿔 쓰고 나면 글로 목탁 소리를 낼 수가 있고, 詩를 시라고 바꿔 쓰고 나면 글로 찬성 소리를 낼 수가 있다. “글로 그림을 그릴 수가 있어 좋고” “글로 영화를 찍을 수가 있어 좋다”. 좋은 시 한 편 쓰고 나면 “정답 없는 수학 문제를 풀다/ 정답을 못 찾은 것 같아서 좋”고, “점 하나 찍은 마침표에서/ 11차원 우주 물리학을 이끌어내는 것 같아” 좋다. “행간 한 줄로 시작되는/ 천국의 계단 기하학 연결한 것 같아서” 좋고, “부족한 내가 시 한 편 쓰고 나면/ 부족한 내가 별 하나 그리고 나면// 시가 내게/ 안부를 묻는 것 같아서 좋”다. “서툰 사랑에/ 서툴러도 된다고 고백해 주는 것 같아서 좋”고, “시 한 편 쓰다 보면/ 온전히 나를 이끌어주려 하신다.”
시는 빛이고, 빛은 빛과 빛을 결합시켜 “천지개벽”의 “큰일”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DNA가 있어서 천명이 있어서/ 빛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그리고 빛이 있기 때문에, “감자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난다. “초록 풀이나 미역을 뜯었다는” 공룡도 그렇고, “폐지 한가득 손수레를 끄는” 이 땅의 할머니들도 그렇다. 빛과 빛의 결합에 의하여 사람이 탄생하고, “아버님 어머님 우리 고운 님”이 탄생한다. 빛의 발자국은 시의 발자국이고, 시의 발자국은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빛님의 발자국이다. 빛은 “환장하도록 고운 저녁노을”이며, “감탄사”이고, 빛은 천지개벽의 대서사시이며, 대우주의 원동력이다.
시와 시인이 하나가 되고, 시와 빛이 하나가 된다. 시인은 빛이요, 파동이며, 생명인 것이다. 따라서 정동재 시인의 ‘양자역학의 시학’은 인위적이 아닌 자연 그 자체라고 할 수가 있다. 그의 양자역학은 삶의 철학이자 긍정의 철학이며, 따라서 이 삶의 철학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비판이 가능해진다. 이것이 정동재 시인의 ‘양자역학의 시학’이자 그 장엄하고 웅장한 위용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쟁기질 중인 저 소는 순백의 화합물이다
등짐을 벗고 화합물에서 벗어난 시간
밤별 외양간에 들이고 앉아
또다시 뿔난 황소의 전진 되새김질이다
염소 질소 수소 산소도 일심동체가 되고 싶었던 게다
사실 소였던 게다
굴레 쓴 소처럼 H2O, CO2, C2H5OH, CH4가 되어
들녘 가로지르는 뿔난 소가 되고 싶었던 게다
미세먼지 가득한 이 도시 저 산야에서
대기를 가르며 올라 구름으로 쟁기 끌었던 게다
하늘 이야기 눈비로 써 내리며
사람 사는 이야기 늘 같이하고 싶었던 게다
*시집-살리는 공부
--[들녘 뿔난 황소처럼] 전문
오늘날의 지구촌의 위기는 자연의 파괴와 대기오염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의 파괴와 대기오염의 중대 범죄자는 우리 인간들이고, 우리 인간들은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지구촌 위기를 해결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고 할 수가 있다. 호랑이와 사자가 자연을 파괴하고, 고래와 코끼리가 자연을 파괴하고 대기를 오염시켰단 말인가? 개미와 꿀벌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풀과 나무들이 자연을 파괴하고 대기를 오염시켰단 말인가? 모든 동식물들은 자연의 법칙의 순응자이며, 산을 깎고 바다를 메우거나 대규모의 산업단지와 공해물질을 뿜어내지는 않았다. 우리 인간들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대악당들이며, 자기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수명연장을 꾀하고 부의 축적을 도모한다. 예컨대,
사랑의 상품화와 귀족화 대타 섭외가 일상인
자본주의의 민낯 보여주는 뉴스 보도
양심 팔아버린 마음자리에 상주한다는 악마들의
일가족 연쇄 살인으로 치닫는 흔해진 현장에
원혼가 악마가 벌여놓은 생생한 생지옥을 통감한다
라는 [이순]이나, 또는
온갖 말, 말이 난무하는 음파 천국에서 호래자식이 되지 않는 법
이론상 간단하지만 고수의 반열에 오르는 일
호래자식 보다 더한 말 들어도 나라는 우주를 원한과 증오
전쟁의 장으로 변질시키지 말아야 하는 일
한순간에 똑같은 사람이 되어버리거나 스스로를 지옥에 빠뜨리지 말아야 하는 일
말에 붙어 따라 들어와 나 아닌 악마가 사는 집으로 문패를 바꾸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라는,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말이라는 주문]을 넘어,
바이러스 근접조차 허용치 않는 프로그램 구축이야말로 한 평생 내 영혼의 소명
임금은 임금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선생은 선생답고
라는, [천지인 프로그램 구축하기]의 이 지구촌과 인간성 회복 운동을 하루바삐 실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루바삐 ‘들녘 뿔난 황소’와도 같은 민심을 정화시키려면 ‘인간 70의 인간수명제’를 실시해야 하고, 지구촌의 모든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대청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고 부가가치의 산업은 실버산업이며, 실버산업은 생명공학인 만큼 ‘묻지마식 협박산업이자 폭리산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 생명은 더없이 소중하고 귀중한 만큼 똥과 오줌을 싸고 아들과 딸들을 몰라봐도 좋으니, 단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건강식품과 의약품과 병원비와 요양원비로 다 쓰고 죽으라는 것이 우리 자본가들의 정언명령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지구촌의 적정 인구가 35억 명이라면 70세 이상의 노인들은 다 떠나보내야 하고, 더 이상의 자연과학과 생명공학의 연구를 중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쟁기질 중인 저 소가 순백의 화합물”이듯이, 이 세상의 만물은 생물학적으로, 또는 화학적으로 한 가족이며, 자연의 파괴와 대기오염은 모든 생명체들과 만물들에게 그대로 전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등짐을 벗고 화합물에서 벗어난 시간/ 밤별 외양간에 들이고 앉아” 또다시 되새김질 하는 소, “굴레 쓴 소처럼 H2O, CO2, C2H5OH, CH4가 되어/ 들녘 가로지르는 뿔난 소가” 된 소, “미세먼지 가득한 이 도시 저 산야에서/ 대기를 가르며 올라 구름으로 쟁기 끌었던” 소를, “하늘 이야기 눈비로 써 내리며/ 사람 사는 이야기를 늘 같이” 하는 소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느님께서 화기를 땅속에 묻어 버리시는 일”이고, “지구도 사람도/ 수기가 돌고 지혜가 열려 스스로 화병을 치료하는” 것이고, “하느님 보우하사 대한민국/ 천지 도수가/ 2024년 12월 한파 속” “천국의 맛은 대한민국 한식이라는 불고기 비빔밥 김치처럼 이 땅의 지상천국 만드는 일”([3분 정역])인 것이다.
가만히 보면 *무위이화無爲而化 프로그램을 짜려고 한다
정신 주입하고 머리 몸통 손발을 만들었다
태양이 뜨고 달이 뜬다
오대양 육대주 돛을 펴 바람을 잡고
억겁 세월 우주를 유영한다
마당에는 어미 꽁무니 졸졸 쫓는 병아리 떼 분주하고
구멍 숭숭 뚫린 배추 잎사귀 지렁이 개구리 잡아다가 던져 넣어주는
어렸을 적 유소년이 보인다
화장터에서 한 줌 재가 되어 담기신 어머니 아버지도 보이고
잘난 애비 탓에 만만한 직장 하나 잡지 못하는
오장육부가 문드러질 아들 얼굴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온종일 직장에서 늦은 밤까지 종종걸음칠 딸아이도 보인다
이 또한 잘만 허면 억겁 세월을 유영할 터
나는 무척 잘 사는 법에 대하여 오늘도 역시 되뇌고
매스컴은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한 표 달라고 서로 물어뜯는 모습 재현에 또한 분주하다
지렁이 개구리 병아리 두더지 한 마리까지 정신줄 모아
각각 제 프로그램 운영하느라 모두 분주하다
우리 모두는 허투루 버려지는 존재가 하나도 없다
*무위이화無爲而化-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무위이화無爲而化 프로그램] 전문
하늘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 한다.
빛은 환하다.
사람은 빛이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밝은 빛 되시길 기원한다.
---[맺음말]에서
자연은 스스로의 자연이며, 정동재 시인의 표현대로 [무위이화 프로그램]대로 움직인다. 자연은 모든 만물들이 자기 스스로의 생리와 습성에 따라 살면 그 모든 것이 사랑과 평화와 조화를 이루게 만들어 준다. 태양이 뜨고 달이 뜨고 “오대양 육대주 돛을 펴 바람을 잡고/ 억겁의 세월 우주를 유영한다.” “마당에는 어미 꽁무니 졸졸 쫓는 병아리 떼 분주하고/ 구멍 숭숭 뚫린 배추 잎사귀 지렁이 개구리 잡아다가 던져 넣어주는/ 어렸을 적 유소년이” 보인다. “화장터에서 한 줌 재가 되어 담기신 어머니 아버지도 보이고/ 잘난 애비 탓에 만만한 직장 하나 잡지 못하는/ 오장육부가 문드러질 아들 얼굴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온종일 직장에서 늦은 밤까지 종종걸음칠 딸아이도” 보이고, “나는 무척 잘 사는 법에 대하여 오늘도 역시 되뇌고,” “지렁이 개구리 병아리 두더지 한 마리까지 정신줄 모아/ 각각 제 프로그램 운영하느라 모두 분주하다// 우리 모두는 허투루 버려지는 존재가 하나도 없다.” ‘무위이화’, 즉, ‘무위자연’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넓고 넓은 품에 안겨 자연의 혜택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인위는 반 자연적이고 모든 생명체들을 다 죽이는 것을 말하지만, 무위는 자연적이고, 모든 생명체들을 다 살리는 삶의 철학을 말한다.
환한 촛불 속 조금 어두운 빛깔 어둡다 표현하니 어둠 같았다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
생명은 파동이고 빛이라고 적는다
빛에도 어둠이 있어서 인생 파란만장 겪으시고
컴컴한 터널을 지나오신 어르신들
인생 뭐 있냐며 그저 웃음 건네신다
텃밭에 어떤 이는
검게 그을린 얼굴로 삶은 감자 한 덩이 드시고 가란다
측은지심이란 게 역지사지라는 게
누군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도 보고 망해도 봐야 비로소 얻어지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보석이라는 것을 느낀 적 있다
이번 생 가장은 처음이지만
낳아 품에 안고 젖 물리고 등에 업고 홀 서빙하는 일이 그녀도 처음이지만
옹알이할 때 뒤집기 할 때 아장아장 걸을 때
부모는 진땀 범벅이어도 박수갈채와 탄성이 터져 나오는 일이다
내일을 열어갈 빛을 살리고 탄생시키는 일이다
인생 공부 백 점 만점이 어디 있겠냐만
살다가, 살다가 다시 돌아가면
만사 다 제쳐놓고
모두를 살리시는 하느님께 문안 여쭙고 큰절부터 올려야 쓰겠다
---[만점인생] 전문
정동재 시인이 그의 [만점인생]에서,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 생명은 파동이고 빛이라고” 노래할 때, 우리들의 삶은 자연 그대로의 삶이라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의 만물의 창조주가 빛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타인의 불행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역지사지, 또는 타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모든 사리사욕이 누워서 침을 뱉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가 “옹알이할 때 뒤집기 할 때 아장아장 걸을 때/ 부모는 진땀 범벅이어도 박수갈채와 탄성이 터져 나오는 일”이고, “인생 공부 백점 만점이 어디 있겠냐만/ 살다가, 살다가 다시 돌아가면/ 만사 다 제쳐놓고/ 모두를 살리시는 하느님께 문안 여쭙고 큰절부터” 올리게 된다.
양자量子란 무엇이고, 양자역학이란 무엇인가? 양자란 물리량의 최소 단위를 말하고, 양자역학이란 입자 및 입자 집단을 다루는 현대 물리학의 기초 이론을 말한다. 정동재 시인의 시를 ‘양자역학의 시학’이라는 말할 때, 그러나 그의 시는 현대 물리학의 정반대 방향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의 주체로서 우리 인간들의 ‘삶의 철학’을 가리키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친구와 친구, 적과 동지, 이웃과 이웃 등은 우리 인간들이며, 우리 인간들은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양자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양자와 양자의 결합에 의해서 가정과 단체와 정당과 국가의 조직체가 생겨나고 이 조직체의 힘으로 선진사회와 후진사회, 일등국가와 삼등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미시적인 세계, 즉, 양자역학의 세계가 불확정성의 원리에 기초해 있듯이, “임금은 입금답고/ 부모는 부모답고/ 선생은 선생”다운 ‘만점의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고 힘든 일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정동재 시인은 그의 세 번째 시집인 {나는 빛이요 파동이요 생명이므로}에서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려고 하는 데, 왜냐하면 사람이 빛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입자이며 파동이고, 이 양자의 힘으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빛을 뿜어낸다. 빛은 무사무욕한 빛이고, 수명연장을 모르고, 어느 특정 개체나 그 집단을 위해 봉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간이 빛의 일부이지, 빛이 인간인 것은 아니다. 빛을 과다 사용하면 ‘동량의 법칙’에 의하여, 이 세상의 자원부족이나 대기오염, 빈부의 격차와 내전이나 전쟁과도 같은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정동재 시인의 시는 ‘무위자연의 노래’이며, 이 세상의 영원한 ‘삶의 찬가’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