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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백수(白水)의 노래 (2)
3월 초하룻날이 되었다. 회맹일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자 제, 송, 진, 채, 주(周나라가 아님) 다섯나라 군주들은 3층 제단 아래로 모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제환공(齊桓公)이 앞으로 나서며 뭇 제후들에게 말했다.
"오늘 이 모임을 가진 목적은 모두 힘을 합해 주나라 왕실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일을 해나가려면 반드시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먼저 모임을 이끌어나갈 맹주를 뽑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모두들 그 의견에 찬성했다.
그러나 누구를 맹주로 뽑느냐가 문제였다. 주왕실로부터 받은 관작 서열대로라면 공작의 나라인 송환공(宋桓公)이 가장 높았다. 그러나 이번 모임을 주도한 것은 제환공(齊桓公)이었다. 서로들 눈치를 보며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선공(陳宣公)이 일어나 의견을 내었다.
"천자께서는 이번 모임을 제환공에게 부탁했습니다. 따라서 이 모임의 맹주 역시 제환공(齊桓公)께서 맡아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제환공이 아니면 이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여러 제후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환공은 여러 차례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듯 제단 위로 올라가 맹주가 되었다. 그 다음 자리에 송환공이 서고, 이어 진선공, 채애공, 주자(주나라 군주)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그들은 서로 절을 올려 예를 취하고, 술잔을 교환하고, 송환공을 정식 송나라 군주로 인정하는 예식을 치렀다. 이어 입술에 피를 발라 동맹을 맺음과 동시에 제나라 대부 중손추가 앞으로 나서 동맹 서약서를 낭독했다.
모년 모월 모일에 제(齊)의 소백, 송(宋)의 어설, 진(陳)의 저구, 채(蔡)의 헌무, 주의 극(克)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북행 땅에 모여 함께 왕실을 돕고 약한 자를 원조하기로 맹세하노라. 만일 맹약을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열국은 함께 그를 정벌하노라.
이로써 제(齊)나라를 중심으로 한 다섯 나라의 동맹은 성립되었다.
<논어>에 의하면, 제환공은 재위시절 모두 아홉 차례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합을 가졌다. 이 해에 가진 북행 회맹은 바로 그 아홉 차례 회합 중 첫번째 규합이었다. 제환공(齊桓公)으로서는 상당히 의미가 깊은 회합이 아닐 수 없었다.
공자(孔子) 역시 이 회합에 큰 의미를 두어 칭찬하고 있지만, 좀더 냉정한 시각에서 본다면 북행 모임은 실패한 회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원국으로서 강대국이라 할 수 있는 노, 정, 조, 위나라가 모두 불참했기 때문이었다. 진(秦)과 진(晉)나라는 거리상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가 아직 교통로가 제대로 뚫리지 않는 때였다. 참석하고 싶어도 참석할 수가 없다. 그러나 노(魯), 위(衛), 조(曺), 정(鄭)나라는 바로 황하 주변에 위치한 중원국이 아니던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 거리다. 그런 그들이 불참했다는 것은 정면으로 이번 회맹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을 어찌 제환공이나 관중이 알지 못하겠는가.
제환공(齊桓公)은 웃고 있기는 했지만 굳은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고, 관중 역시 보다 강한 제나라의 의지를 천하에 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각오를 하기에 이르렀다.
회맹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별안간 관중(管仲)이 제단 위로 올라와 여러 제후에게 말했다.
"노, 위, 정, 조나라 등은 천자의 명을 거역하고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왕실을 모욕하는 행위임과 동시에 천하 평화를 깨뜨리는 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군후들께서는 이번 기회에 그들을 토벌하여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살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제환공(齊桓公)은 기다렸다는 듯이 네 나라 임금을 향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제(齊)나라는 비록 병차가 충분하지 못합니다만, 온 힘을 다해 천자의 명을 거역한 제후들을 토벌하는 데 앞장서겠소이다."
진(陳), 채(蔡), 주나라 임금은 찬성했다. 그러나 송환공(宋桓公)만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날 밤이었다. 송환공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대부 대숙피(戴叔皮)를 불렀다.
"오늘 제환공(齊桓公)은 관작의 서열을 무시하고 자기 스스로 맹주가 되었다. 이 어찌 아니꼬운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더욱이 여러 나라 군사들까지 이용하려 하니, 자칫하면 앞으로 제나라의 종노릇이나 하다 말겠구나."
대숙피(戴叔皮)가 송환공의 기분을 눈치채고 맞장구쳤다.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나라도 꽤 많습니다. 아직 제나라가 세력을 잡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이번 참석한 나라 중 가장 큰 나라는 우리 송(宋)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모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나머지 세 나라도 자연 흩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제(齊)나라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우리의 목적이 군위를 인정받는 데 있었던만큼, 이제 목적을 달성했으니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송환공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날 새벽, 송환공(宋桓公)은 아무런 통보도 없이 수레를 타고 송나라로 돌아가버렸다. 날이 완전히 밝아서야 이 소식을 들은 제환공(齊桓公)은 불같이 화를 내었다.
"당장 달려가서 그놈을 잡아오리라."
관중(管仲)이 그런 제환공의 소매를 붙잡았다.
"지금 송환공을 추격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천자의 명으로 쳐야만 명분이 섭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오?"
"송나라는 멀고 노나라는 가깝습니다. 더욱이 노(魯)나라는 왕실과 친척간이니 먼저 노나라를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송나라는 자연 허리를 숙일 것입니다."
제환공(齊桓公)은 관중의 말뜻을 알아듣고 화를 가라앉혔다.
"노나라를 굴복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좋겠소?"
"노나라 동북쪽에 수(遂)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수나라는 노나라의 부용(附庸)입니다. 주공께서는 먼저 왕명으로 수나라를 공격하십시오. 수나라는 작고 약해서 우리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항복해올 것입니다. 수(遂)나라가 항복하면 노나라는 겁을 먹을 것이요, 그때 노장공의 어머니 문강에게 편지를 보내십시오. 문강(文姜)은 원래 우리 제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노나라가 제나라와 동맹 맺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재촉과 우리나라의 위협이 동시에 있게 되면 아무리 노장공(魯莊公)이라도 허리를 굽혀 동맹을 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송나라를 공격하면 모든 것이 뜻한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중보(仲父)의 말씀이 백 번 옳소."
제환공은 어느새 송환공의 일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