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무아(諸法無我)의 뜻 - 삼법인 강의(6). 법상스님
앞에서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의 ‘제행(諸行)’이 ‘모든 존재’, ‘모든 행’을 말한다고 했는데,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의 제법(諸法) 역시 ‘모든 존재’라는 의미를 지닌다. 제법(諸法)에서의 법(法, dharma)은 ‘존재’, ‘일체(一切)',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흔히 법(法)은 ‘진리(眞理)’ ‘진리(眞理)의 가르침’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법(法)’이라는 용어는 ‘진리(眞理)’ 외에도 불교에서는 ‘존재’, ‘일체(一切)', '모든 존재’라는 의미로도 쓰여 진다. 예를 들어 삼법인(三法印)에서의 ‘법(法)’은 ‘진리(眞理)’를 뜻하며, 제법무아(諸法無我)에서의 ‘법(法)’은 ‘존재’를 뜻한다.
무아(無我)는 ‘나라는 것의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무아(無我)‘에서의 나(我)’는 나 개인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포함해서, 일체(一切, 이 세상 모든 존재를 뜻한다. 여기에는 고정된 실체로서의 본질적인 나도 포함된다. 즉 이 우주법계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하는 본질적인 자아도 사실은 실체가 없음을 뜻한다.
이렇게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데 왜 무아(無我)라고 하는가. 앞서 설명했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 따라 잠시 잠깐 만들어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일체 모든 존재는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할 뿐이다. 항상 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면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지금의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因緣) 따라 잠시 잠깐 이런 모습으로, 이런 성격으로, 이런 몸뚱이를 받아 이번 생에 나왔을 뿐이다. 지금의 나의 모습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인연(因緣)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는 억겁의 세월의 흐름 중에 찰나의 모습에 불과하다. 그러니 연기(緣起)의 이치(理致)에 의해 운행되는 이 세상에서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한 가운데 피어나는 일체의 모든 존재는 무아(無我)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연기(緣起)하기 때문에 무상(無常)이며 무아(無我)이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연기(緣起)에 대한 공간적(空間的)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연기(緣起)에 대한 시간적(時間的)인 해석이라고 보았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보기에는 항상 할 것 같던 모든 존재들이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언젠가 소멸(消滅)될 수밖에 없는 실상을 보여주는 가르침이었다면,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간적으로 살펴보더라도 모든 존재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공(空)한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저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 서로 다른 모든 존재들과의 상호연관과 연기적인 도움을 통해서만 지금 있는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연기(緣起)의 공간적인 관점을 제법무아(諸法無我)는 보다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세상, 이 우주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한 마디로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 ‘있는(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것,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因緣) 따라 잠시 잠깐 연기(緣起)되어진 존재로 인연가합(因緣假合)으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란 의미다. 인연가합(因緣假合)이란 인연(因緣) 따라 합쳐진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 모양이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으로 있는 것을 의미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이처럼 거짓으로 인연(因緣)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이라 인연(因緣)이 다하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무아(無我)를 말 뜻대로만 보고 무아(無我)를 ‘나’ 혹은 ‘사람’에게만 한정하여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나아가 유정물(有情物 : 생각이 있는 사물) 정도로 확대하여 해석하는 경우가 있는데, 무아(無我)에서의 ‘아(我)’는 그야말로 우리가 사는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생명 있는 것 생명 없는 것 모든 존재를 포함하여 그 존재의 행위나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일, 감정, 사건 등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한 마디로 ‘일체 모든 것’에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도 무아이며, 인간이나 나무나 풀이나 돌이나 지구, 태양, 우주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무아(無我)이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 사건들,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온갖 일과 사람들의 감정들까지 모든 것이 고정적인 실체를 가지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다.
예를 들어 자전거가 한 대 있다. 사람 눈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존재하는 자전거이지만 연기(緣起)에서는 자전거 또한 무아(無我)라고 한다. ‘자전거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자전거는 인연(因緣) 따라 존재하는 것이기에 실체(實體)가 없어 공(空)한 것이란 뜻한다. 시간적으로 보더라도 자전거는 언젠가는 녹슬어 사라질 것이며,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바퀴와 체인과 의자와 바퀴살과 모든 부속품들을 따로따로 해체해서 떼어놓는다면 그 순간 자전거는 자전거로써의 기능과 이름을 잃게 된다. 그렇게 해체된 자전거는 더 이상 자전거가 아니라 각각의 부속품들일 뿐이다. ‘자전거’라는 이름이 있기 위해서는 각각의 부속품들이 인연(因緣) 따라 조화롭게 화합하여 서로를 붙잡아주고 서로를 의지해 줌으로써 각각의 부품이 있어야 할 곳에 서로에 의존해 있어야만 한다. 상호의존, 상의상관이라는 연기적인 모임이 없고서는 자전거가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 앞에 있는 자전거는 있기는 있되 실체적(實體的)으로 있는 자전거가 아니라 연기적(緣起的)으로 있는 자전거이다. 이것을 일러 무아(無我) 또는 공(空)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