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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51. [역경의 열매] 김진호 <1-14> 가족 잃은 아픔 보듬어주라는 말씀에 순종 6년째
막내아들 일찍 떠나보낸 동병상련… 홀사모 자녀 위해 장학금 전달 나서
김진호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 대표가 13일 서울 종로구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들려주고 있다. 전호광 인턴기자언젠가부터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꼽으라면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를 들곤 한다. 멜로디도 좋지만 노랫말이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너희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 주가 위로해 주시리라/ 아침 해같이 빛나는 마음으로/ 너 십자가 지고 가라….’
나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 대부분이 그러하듯 나 역시 쉽지 않은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찬송가 가사처럼 ‘마음에 슬픔이 가득할 때’가 많았다. 슬픔과 절망의 시간은 수시로 찾아왔다.
나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유년기를 보냈다. 청소년기에는 고아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대학생이 돼서도 삶은 팍팍했다. 고학(苦學)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남들처럼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한 건 목회자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다. 수많은 교회를 부흥시키는 데 성공했고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감리교단 최고 지도자인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목회자가 된 뒤 시련이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5년 전, 당시 30대 중반이던 막내아들이 뇌가 세균에 감염되는 질병인 뇌농양으로 세상을 떠난 일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아픔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참척(慘慽)의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래 고민했고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아,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을 보듬으라는 하나님의 메시지구나.’
나는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를 만들어 2010년부터 홀사모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많지 않은 액수지만 아버지를 잃은 아이들에게 격려와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국민일보로부터 ‘역경의 열매’ 시리즈를 연재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 잠시 망설였다. 나의 인생역정을 소개하는 일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평생을 산 한 목회자의 인생 스토리라고만 여겨주셨으면 좋겠다.
우선 나의 출생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회사원인 평범한 가정의 장남이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가족 중 아무도 없었다. 평탄했던 유년기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1949년, 아버지가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부터다. 당시 나의 나이는 열 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경기도 수원에서 한의원을 하던 할아버지로부터 연락이 왔다. 가문을 이을 장손이니 조부모인 당신들이 직접 나를 키워야겠다는 전갈이었다.
결국 나는 어머니 품을 떠나 수원으로 갔다. 그리고 1년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나는 조부모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고모들이 살던 경기도 화성으로 갔다. 화성에 있는 야목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듯 나 역시 엄청난 고생을 했다.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팠다.
전쟁이 한창이던 52년, 성탄절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로부터 마을에 있는 비봉감리교회에 가면 떡을 준다는 말을 들었다. 음식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시기였기에 곧바로 교회에 달려갔다.
떡을 먹는 것도 좋았지만 나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든 건 교회 성도들의 환대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품을 떠나 조부모 밑에서 자라던 나는 사랑에 굶주린 소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를 따뜻하게 환영해주는 성도들의 모습은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교회에 출석하며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이 있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의 신앙생활은 이렇게 시작됐다. 하나님을 만난 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정리=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진호 <1> 가족 잃은 아픔 보듬어주라는 말씀에 순종 6년째
* [역경의 열매] 김진호 <2> "장손, 예수쟁이 안된다" 할아버지 회초리로 혼내
* [역경의 열매] 김진호 <3> 주일성수 하느라 전국웅변대회 불참해 정학 위기
* [역경의 열매] 김진호 <4> 高2 SCM 수련회서 가슴에 불길 이는 성령 체험
* [역경의 열매] 김진호 <5> 서울∼수원 약품 배달 고된 알바하며 신학대 마쳐
* [역경의 열매] 김진호 <6> 목회자 부족해 주일이면 교회 3곳 자전거로 순회
* [역경의 열매] 김진호 <7> 33세에 교인 500명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은혜
* [역경의 열매] 김진호 <8> "어려운 교회가 원하면…" 전국 각지 다니며 목회
* [역경의 열매] 김진호 <9> 러 선교여행 중 우리 부부만 공항서 '낙오' 위기
* [역경의 열매] 김진호 <10> 학원폭력 지킴이로 지역사회 섬기기 새로운 도전
* [역경의 열매] 김진호 <11> '빛을 발하라'… 한 말씀 붙들고 200번 넘게 설교
* [역경의 열매] 김진호 <12> '아들 잃은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명령
* [역경의 열매] 김진호 <13> 홀사모 섬기기·미자립교회 돕기… '은퇴 없는' 사역
* [역경의 열매] 김진호 <14·끝> 수많은 고난 뒤에 남은 건 '주님에 대한 감사함'
◇약력 △1939년 서울 출생 △감리교신학대 졸업 △목원대 신학대학원 졸업 △도봉감리교회 원로목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 대표(현)
***[역경의 열매] 김진호 <2> “장손, 예수쟁이 안된다” 할아버지 회초리로 혼내
종아리 맞을 때는 “안가겠다” 빌고도 주일만 되면 할아버지 몰래 교회 나가
김진호 목사(앞줄 가운데)와 고교시절 교회 친구들이 10여년 전 김 목사의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찍은 기념사진.경기도 화성 비봉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며 좋은 사람도 많이 만났다. 특히 교회학교에서 우리를 가르친 최귀윤 선생님은 내 신앙생활의 은인과도 같은 분이다. 그는 나를 친동생처럼 여겼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하나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비행 청소년으로 사춘기를 보내다가 결국엔 비뚤어진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최 선생님은 나를 따뜻한 미소로 대해주셨다. 교회에서 성극을 올리거나 찬양대를 꾸릴 때면 언제나 나를 행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곁을 떠나 조부모 밑에서 살던 내게 최 선생님은 부모나 다름없었다. 이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지금도 교회학교 교사들의 막중한 책임을 자주 생각하곤 한다. 이들로 인해 철부지 어린이들도 신앙인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절 나의 신앙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매사에 엄격했던 할아버지는 내가 교회에 나가는 걸 강하게 반대했다. 할아버지는 회초리로 손자의 종아리를 때렸다. 하나뿐인 집안의 장손이 ‘예수쟁이’가 돼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조상에게 죄를 짓는 거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가 종아리를 때릴 때면 “다시는 교회에 안 가겠다”면서 손이 닳도록 싹싹 빌었다. 하지만 주일만 되면 교회가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복음의 심오한 내용을 이해한 것도 아니고 기독교 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닌데도 교회가 가고 싶었다. 주일이면 할아버지 몰래 집을 빠져 나와 교회로 향했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 3개월쯤 지났을까. 할아버지도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시절 나는 왜 그렇게 교회에 나가는 걸 좋아했을까. 돌이켜보면 교회는 내가 유일하게 따뜻함을 느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주인공’이 되는 장소였다. 성탄절에 성극을 무대에 올릴 때면 나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곤 했다. 자존감이 무엇인지 처음 실감한 시간이었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나는 비봉감리교회 조피득 목사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조 목사님은 “김군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며 “일생동안 주일 성수만 잘해도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다. 주일에는 꼭 교회에 와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나는 주일을 반드시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6·25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54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고모들이 모시기로 했다. 나로서는 살 곳이 없어진 셈이다. 동생들을 데리고 대전에 살던 어머니에게 갈 수는 없었다. 어머니 역시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방학 때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전쟁이 발발하기 전 할아버지와 살았던 경기도 수원으로 향했다. 수원에서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숙식은 전쟁고아들로 바글대던 삼일고아원에서 해결했다.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 전 나는 평범한 초등학생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전쟁을 겪은 뒤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나는 조숙한 청소년이 됐다. 돌이켜보면 그런 시련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남들보다 조금은 빨리 성숙하게 만드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수원으로 거처를 옮긴 뒤에도 신앙생활은 계속했다. 수원에서 출석한 교회는 이병설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던 영화교회였다. 교회는 사실상 나의 집이었다. 그곳에서 좋은 친구를 많이 만났다. 교회에 있을 때만큼은 혼자가 아니었다. 외롭지 않았다. 신앙적으로도 성숙해진 시기였다. 목회자가 돼야겠다는 꿈을 처음 품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부터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3> 주일성수 하느라 전국웅변대회 불참해 정학 위기
“목사 될 사람이 주일 안 지켜서야”… 담임목사 말씀 큰 울림으로 다가와
김진호 대표가 1965년 감리교신학대 졸업을 앞두고 찍은 사진. 김 대표가 간직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진이다.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서 학업을 계속하기는 쉽지 않았다. 사실상 나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내가 자신할 수 있는 건 체력밖에 없었다. 경기도 화성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매일 8㎞를 걸어서 통학하며 기른 체력이 유일한 자산이었다. 경기도 수원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나는 학교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이면 언제나 매점으로 달려와 장사를 했다. 수업이 끝난 뒤 매점을 정리하는 일 역시 나의 몫이었다.
당시 내가 머물던 삼일고아원에서도 편하게 쉴 수만은 없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고아원에는 전쟁고아들이 많았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관리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공부하고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저녁에는 고아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고교 시절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꼽으라면 웅변과 관련된 일들을 들 수 있다. 나는 일찍부터 웅변에 소질이 있었다. 수원에서 웅변을 제일 잘하는 학생으로 소문이 나면서 전국 고교생들이 겨루는 웅변대회에 출전한 적도 있다. 특히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원시 주최로 열린 전국고교생웅변대회에 참가한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대회는 수원극장에서 열렸다. ‘반드시 1등을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갑자기 토요일에 열리기로 예정돼 있던 대회가 일요일 오전 10시로 하루 연기되는 일이 벌어졌다. 나는 학교 대표, 나아가 ‘수원 대표’였기에 대회에 꼭 참가해야 했다.
하지만 주일에 교회를 빠질 수는 없었다. 중학생 시절 세례를 받을 때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화성 비봉감리교회 조피득 목사님은 세례를 집전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은 꼭 지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민 끝에 나는 주일을 못 지키게 되었으니 주일에 새벽예배라도 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날 새벽 출석하던 영화교회로 향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병설 목사님이 담임목사님이셨다. 나의 사정을 들은 목사님은 정색하셨다.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이 주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주일을 못 지키는 일 때문에 고민하던 중에 목사님이 강하게 해주신 이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학교에서 어떤 처벌을 받더라도 웅변대회에 나가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주일에 나는 대회장에 가지 않았다. 교회에서 봉사하며 하루를 보냈다.
월요일에 학교에 가니 난리가 났다. 한 교사는 교직원회의에서 이런 말까지 했다고 한다. “김진호 학생은 학교의 명예를 떨어뜨렸다. 정학시켜야 한다.” 다행히 교장 선생님의 배려로 정학의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가 미션스쿨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불러 왜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는지 물었고 나는 주일성수 때문이었노라고 답했다. 교장 선생님은 내 사정을 듣더니 “믿음의 학교에서 주일에 교회 나가기 위해 다른 일을 포기했다면 이 학생에겐 벌을 줄 게 아니라 오히려 포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사건은 학교에서 큰 화제가 됐다.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고교 시절에 기른 웅변 실력은 훗날 목회자가 돼 설교를 할 때 큰 도움이 됐다.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키우기 위해 그 시절부터 나를 훈련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중학교 시절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은 막연한 바람이었다. 하지만 고교 시절 나는 목회자가 반드시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목회자가 되는 게 나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4> 高2 SCM 수련회서 가슴에 불길 이는 성령 체험
법학과 권유 뿌리치고 감신대 진학… 하지만 고학생으로 힘든 나날 보내
김진호 대표(오른쪽 세 번째)가 서울 감리교신학대 재학 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고등학교 2학년 때 주일성수 하느라 웅변대회에 못 나갔던 일은 10대 시절을 추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다. 특히 끝까지 제자의 편에 섰던 차중은 교장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뒤인 2003년 4월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으로 일하고 있던 때였다. 감독회장실에서 업무를 보는데 비서실장이 들어와 “할아버지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면회를 오셨다”고 전했다. 바로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원로장로님으로 서울 청량리중앙교회를 섬기고 계셨다. 나는 너무 놀라고 반가워서 얼른 선생님을 사무실로 모셨다. 선생님을 마주하니 40여년 전으로 돌아간 듯 한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간곡한 부탁으로 스승과 제자의 위치로 돌아가 나를 위해 눈물 섞인 기도를 해주셨다.
당시 선생님은 나를 보며 어린아이처럼 크게 기뻐하셨다. 선생님은 “웅변대회를 포기하면서까지 주일을 철저히 지키더니 결국 김군이 감리교단 최고 어른이 되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이후에 나는 선생님 자택도 방문했다. 내가 시무하던 서울 도봉감리교회로 초대해 교인들 앞에서 선생님을 소개한 적도 있다.
차 선생님은 2006년 9월 94세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곱씹게 되는 말씀이 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이 말씀이니라.”(사 58:13∼14) 지금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만약 주일성수 하는 나를 선생님이 혼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까.’ 선생님은 나의 신앙이 더욱 견고해질 수 있도록 큰 힘이 돼 주신 분이다.
고교 시절 추억담을 또 하나 꺼내놓자면 기독학생연합회(SCM) 활동을 꼽을 수 있다. 특히 2학년 때 서울 숭실대 강당에서 열린 SCM 수련회는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나는 수원SCM 회장이었다. 수련회는 전국 SCM 임원 500여명이 모인 행사였다.
강사로 나선 고원용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가슴에 불길이 이는 듯한 경험을 했다. 성령을 체험한 것이다. 이전까지 진학담당 선생님들은 나에게 법학과 진학을 권유하곤 했다. 나 역시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성령을 경험하면서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최종 결심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1960년 서울 감리교신학대에 진학했다. 대학생이 됐지만 학비도, 용돈도 없는 고학생이었기에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학업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나의 거처는 여전히 경기도 수원이었다. 출석하던 교회도, 내가 숙식을 해결하는 고아원도 모두 수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 가려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차를 타야 했다. 통학을 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다 보니 고학생을 위해 운영하는 근로장학금 제도의 혜택도 누릴 수 없었다.
군대는 62년에 입대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26사단으로 발령이 났고 포병으로 복무했다. 군대에서도 나의 웅변 실력은 화제가 됐다. 사단에서 웅변대회가 열리거나 누군가 웅변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가장 먼저 내가 차출됐다. 교회에서 다져진 웅변 실력과 고학을 통한 인내심은 훗날 목회자 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5> 서울∼수원 약품 배달 고된 알바하며 신학대 마쳐
4학년 때 시골교회 담임목사 맡아 고학생 시절 기른 뚝심·인내심 도움
1966년 12월 28일 경기도 수원 종로교회에서 열린 김진호 목사와 송복순 사모의 결혼식.감리교신학대 재학 시절 나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면서 생활고에 허덕이는 날이 반복됐다. 학교에 다니고 밥을 사먹으려면 무슨 일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마땅한 아르바이트 자리가 없었다. 매일 나는 경기도 수원에서 서울로 통학을 했다. 통학시간이 너무 길었다.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독특한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서울 종로5가에 있는 대형 약국들에서 약품을 받아 수원에 있는 약국에 배달하는 일이었다. 당시는 약품을 포함해 대부분 제품의 유통이 원활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서울 약국에는 있는데 지방엔 없는 ‘진귀한’ 약품이 많았다.
약품을 배달하는 일은 수원과 서울을 매일 오가야 하는 나에게 안성맞춤이었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상황에서 구한 선물 같은 일자리였다. 이렇게 ‘약장사’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학비와 용돈을 벌 수 있었다. 일을 꾸준히 하다 보니 수원에는 내가 담당하는 단골 약국도 여러 곳 생겼다. 당시 종로5가에 있는 보령약국에서 주로 미제(美製) 약품을 구해 배달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일이 고되다 보니 학업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너무 피곤했다. 수업시간에는 자주 꾸벅꾸벅 졸았다. 장학금을 받은 적도 없다. 그렇다고 낙제점을 받았던 건 아니다. 언제나 B학점 정도는 나왔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대학시절 친구들은 나를 만나면 “수업시간에 매일 자던 친구가 나중에 감리교단 감독회장까지 됐다”며 웃음을 터뜨리곤 한다.
10대 때부터 계속된 고학의 시절이 남긴 유산은 무엇일까. 그것은 뚝심과 인내심이다. 나처럼 고학생으로 한 시절을 통과한 이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목회를 하다가 시련을 만날 때면 항상 힘들고 배고팠던 내 유년기와 젊은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1962년 군에 입대해 1년6개월간 복무했다. 당시에는 대학생의 군 복무기간이 짧았다. 군에서 전역하니 목회자의 길을 걷기 위해 본격적인 준비를 해야 했다. 대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64년 경기도 군포 둔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신학대 4학년 학생이 담임목사로 교회를 섬기는 게 지금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당시는 목회자가 귀하던 시절이어서 나 같은 케이스가 종종 있었다.
둔대교회는 수리산 자락에 위치한 작은 시골교회였다. 교인은 30명 정도였다. 처음 강대상에 올랐을 때 느낀 감흥을 잊을 수 없다. 6·25전쟁으로 항상 배고팠던 시절 교회에 가면 떡을 준다는 이야기에 교회에 갔다가 예수님을 만난 일, 주일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느낀 따뜻한 사랑, 고교 시절 수련회에서 성령을 체험하며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일…. 하나님을 섬기기로 다짐한 뒤 겪었던 수많은 일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교인들은 나를 주님의 ‘어린 종’이라고 부르곤 했다. 돌이켜보면 목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목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교인들은 미숙한 나를 무시하기보다는 항상 품어주고 보듬어줬다. 둔대교회 교인을 생각하면 지금도 고마운 생각부터 든다.
둔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며 품은 초심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었다. 무조건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해 교회를 섬기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는 생각이 강했다.
65년 대학을 졸업한 뒤 친척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성장한 6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1년간 연애를 했고 66년 12월 28일 경기도 수원 종로교회에서 백년가약을 맺었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6> 목회자 부족해 주일이면 교회 3곳 자전거로 순회
전도사이던 이모할머니 중매로 결혼… 가정 속 행복 실감, 목회 책임감도 커져
1974년 김진호 목사가 아내 및 세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쯤에서 나의 아내 이야기를 해야겠다. 6남매 중 막내인 아내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상명여고를 졸업했고 신앙도 깊었다. 아내의 가족은 서울 노량진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아내를 만난 건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하던 해인 1965년의 어느 날이었다. 노량진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던 이모할머니가 만남을 주선했다. 당시의 나는 볼품없는 청년이었다. 가진 것 없는 시골교회의 목회자였고 몸도 왜소했다. 아내는 얼마든지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었을 텐데 나를 선택했다.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고 1년 뒤 경기도 수원 종로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아내와 가정을 꾸릴 수 있었던 데는 장모님의 지원이 있었다. 농촌교회를 섬기는 목회자에게 고명딸을 시집보내는 게 마뜩찮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장모님은 항상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셨고 딸과 잘 되기를 바랐다. 당신의 딸이 영적으로 충만한 크리스천과 결혼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장모님은 최고의 우군이자 우리 두 사람이 결혼에 골인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조력자였다.
결혼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나는 경기도 화성 동탄교회로 파송됐다. 화목한 집안에서 귀하게 자란 아내는 농촌에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아내는 힘들 때가 많았을 텐데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동탄교회 외에도 화성 지역 교회 2곳을 더 섬겨야 했다. 60년대에는 한국교회에 목회자가 부족해 목사 한 명이 교회 여러 곳을 섬기는 일이 흔했다. 주일이면 오전에 동탄교회에서 예배를 집전한 뒤 자전거를 타고 6㎞ 거리에 있는 영천교회로 향했다. 그곳에서 교인들과 다시 예배를 드렸다. 이 지역엔 목내리교회라는 곳도 있었는데 그곳 역시 나의 임지 중 한 곳이었다. 목내리교회 예배는 같은 지역에서 사역하던 다른 목회자와 번갈아가며 집전했다.
첫 아이가 태어난 곳도 68년 이곳에서였다. 아들이었다. 그리고 70년과 75년에 각각 둘째아들과 셋째아들이 태어났다. 외롭고 쓸쓸한 성장기를 통과한 나는 그렇게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막내아들은 5년 전 비명에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겼다. 첫째와 둘째는 결혼해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장남은 현재 한 생수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둘째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아내를 만나 가정을 꾸리면서 나는 처음으로 안정감을 느꼈다. 굴곡진 세월을 통과해 비로소 평범한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행복이고 평안이라는 것을 처음 실감한 것도 이때쯤부터다. 설교를 하고 교인을 돌보는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첫 임지인 경기도 군포 둔대교회에서의 목회는 실습의 성격이 강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신학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탄교회 때부터는 달랐다. 수많은 어린 양을 돌봐야 하는 목자로서의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다.
69년 경기도 안산 능곡교회로 다시 파송됐다. 이때 나는 어머니를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조부모 품에서 자라면서 나는 어머니와 너무 오래 떨어져 살았다. 어머니는 평생 고생만 하신 분이었다. 뒤늦게라도 효도를 하고 싶었다.
그리고 안산에서 어머니를 모시게 됐다. 하지만 1년만인 70년 어느 날, 어머니는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고 말았다. 어머니는 2년간 투병하다 72년 세상을 떠나셨다.
명절 때면 자식들을 데리고 안산에 있는 어머니 묘소를 찾곤 한다. 어머니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 마음이 무거워진다. 나는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 불효자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7> 33세에 교인 500명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 은혜
마산 중앙교회 7년 목회로 영적 성숙… 이후 섬기는 교회마다 부흥 일궈
김진호 목사가 1970년대 초반 경기도 안산 능곡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의 모습.경기도 안산 능곡교회를 섬기던 1970년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세례를 집전했다. 평생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며 살았던 어머니는 아들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했다. 45년 전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너무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고혈압으로 투병하던 어머니는 2년 뒤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만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목회자인 아들로서 나는 너무 큰 후회를 했을 것이다. 뒤늦게나마 어머니를 크리스천의 길로 인도한 일은 목사로서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72년 나는 목회지를 경남 마산 중앙교회로 옮겼다. 돌이켜보면 이때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던 것 같다. 72년 4월의 어느 날, 당시 마산(현 창원시) 중앙교회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앙교회 목사님이 병이 나서 설교를 못하게 됐으니 하루만 와서 교회를 섬겨달라는 요청이었다. 중앙교회는 당시 대전 아래에 있는 우리나라 감리교회 중에는 가장 규모가 큰 교회였다. 교인은 500명이 넘었고 장로님만 12분이 계셨다.
나는 최선을 다해 설교를 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나의 설교가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 이후에 중앙교회는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당시 내 나이는 겨우 서른세 살. 30대 초반의 젊은 목회자가 큰 교회를 섬기게 된 일은 파격 그 자체였다.
중앙교회에서 79년까지 7년간 목회를 했다. 당시 마산은 수출자유지역으로 선정돼 우리나라 산업화의 전초기지 같은 역할을 했다. 지역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했고 교회 역시 나날이 부흥했다. 교인은 조금씩 늘어 1000명 넘는 성도가 출석하는 대형교회로 자리 잡았다.
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은 목회자로서 내 삶의 터닝 포인트나 마찬가지였다. 작은 농촌교회를 섬기던 젊은 목회자가 대형교회 목사로 거듭난 일은 감리교단 내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영적으로도 한 단계 성숙한 시기였다. 교인들 역시 나의 설교를 좋아했던 것 같다. 어린시절부터 웅변으로 다져진 화술은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남들보다 호소력 강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79년 서울 성북구 정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정릉교회 역시 내가 부임한 뒤 성장을 거듭했다. 400여명이던 교인은 내가 이 교회를 떠나던 85년엔 1000명 수준으로 증가해 있었다. 85년부터 91년까지 섬긴 서울 성북구 월곡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부임 초기 400여명이던 교인 숫자는 6년 뒤 1200여명으로 늘었다. 섬기는 교회마다 부흥을 일구는 데 성공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당시는 한국교회의 부흥기였다. 많은 목회자가 한국 개신교의 성장을 이끌었고 교회마다 부흥의 열매를 수확했다. 가끔씩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한국교회가 다시 그 시절의 부흥을 재연할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을 회개하고 무엇을 개혁해야할까.
한 교회에 오래 머물지 않고 계속 목회지를 옮긴 건 나의 신념 때문이었다. 30대 때부터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특정 교회에 안주해 머물러 있지 말자, 6∼7년간 한 교회를 섬겨 부흥을 일군 뒤에는 다른 교회로 옮기자. 대신 교회를 바꿀 때마다 최선을 다해 하나님과 교인을 섬기자.’
이 같은 생각을 한 이유는 평생 한 교회만 섬기는 목회자 중 매너리즘에 빠져 나태해져버리는 케이스를 종종 봐왔기 때문이다. 목회지를 옮길 때마다 힘든 일도 많았지만 언제나 내 곁엔 주님이 있었기에 그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젊음이 지나갔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8> “어려운 교회가 원하면…” 전국 각지 다니며 목회
52세에 ‘마지막’ 각오로 도봉교회 부임… 새 성전 지으며 하나님의 역사 경험
2000년 6월 완공된 서울 도봉교회 모습.1979년 서울 성북구 정릉교회에 부임한 뒤 내 삶은 한층 더 안정되고 여유로워졌다. 설교를 하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익숙해졌으며 교인들 역시 나를 잘 따랐다.
그런데 85년 9월의 어느 날, 같은 지역에 있는 월곡교회에 출석하는 장로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내게 월곡교회 담임목사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가 섬기던 정릉교회는 출석교인이 1000명이 넘는 큰 교회였다. 하지만 월곡교회는 교인이 400명 정도밖에 안 됐다. 장로님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전 저희 교회 목사님이 간경화로 투병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 목사님을 청빙해야 하는데 너무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나 모셔올 수는 없잖습니까. 김 목사님이 훌륭한 분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저희 월곡교회를 맡아주십시오.”
‘6∼7년간 한 교회를 섬겨 부흥을 일군 뒤에는 다른 교회로 옮기자’는 신념이 있었지만 정릉교회를 떠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정릉교회 교인들과 많은 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월곡교회는 성전을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어서 예배당은 훌륭했다. 하지만 담임목사 가족이 머물 사택도 없었다. 떠나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주님을 붙잡고 기도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이랬다. ‘교회의 크기가 무슨 상관이 있겠나. 저렇게 어려운 교회가 나를 원하니 가야 한다. 그것이 나의 사명이다.’
결국 월곡교회 담임목사직을 수락했고 나는 그곳에서 6년간 목회를 했다. 목자를 잃고 방황하던 교회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월곡교회를 떠나던 91년 이 교회 교인은 1200명이 넘었다.
91년 서울 도봉구 도봉교회에 부임할 때 역시 고민이 깊었다. 당시 내 나이는 쉰두 살. 50대가 되었으니 전국 각지에 있는 교회를 섬기며 살았던 삶을 끝낼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회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은퇴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섬길 교회를 맡고 싶었다. 그곳이 바로 도봉교회였다.
도봉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겪은 일 중 기억에 남는 사건은 새 성전을 건축한 일이다. 때는 바로 IMF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늘고 기업들 부도가 속출하던 98년이었다. 성전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비용은 건축비 35억원, 대지 구입비 15억원 등 총 50억원에 달했다.
바야흐로 은행 금리가 치솟던 시기였다. 성전 건축을 발표하고도 공사 계획을 접는 교회가 속출하던 때다. 성전 건축을 추후로 미루자는 목소리가 나올 법했다. 하지만 건축 연기를 주장하는 교인이 많지는 않았다. 만약 모든 교인이 성전 건축에 반대했더라면 포기했을 것이다. 성전 건축은 하나님의 사역을 이행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성전 건축을 강행했다. 일을 시작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은 채워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98년 10월 공사가 시작됐고 착공 20개월 만인 2000년 6월 새 성전이 완공됐다. 3966㎡(1200평) 대지에 세워진 지하 1층, 지상 4층 규모의 건물이었다. 20개월간 인부 1만명(연인원)이 공사에 동원됐지만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 주민의 민원이 접수된 적도 없다.
건축회사 관계자는 이렇게 순조롭게 성전 건축을 완료한 케이스는 처음이라고 했다. IMF 외환위기 때 공사를 강행하면서 뜻밖의 혜택을 보기도 했다. 건축경기가 위축된 덕분에 예상보다 비용이 덜 들었다. 도봉교회 새 성전을 지으면서 나와 교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9> 러 선교여행 중 우리 부부만 공항서 ‘낙오’ 위기
티켓 탓 5일 후에나 귀국 가능한 상황… 간절한 기도 응답 이륙 직전 탑승 ‘기적’
김진호 목사(뒷줄 왼쪽 세 번째)가 1997년 복음형제회 회원들과 러시아 모스크바 크렘린궁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삶은 인연의 연속이다. 돌아보면 소중한 인연이 참 많았다. 그중에서도 동료 목회자를 통해 나는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지금은 작고한 고 김우영(경기도 성남 만나교회) 목사님이 주축이 돼 1980년대 중반 결성된 ‘복음형제회’는 영성의 요람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복음형제회 회원은 나를 포함해 총 7명이었다. 우리는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에 모여 기도를 드린 뒤 머리를 맞대고 성경공부를 했다. 특정 본문을 바탕으로 7명이 제각기 설교를 준비해 서로 공유하면서 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말씀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성경 속 이 비유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구나.’ 나의 신학을 가다듬고 영성을 키우는 시간이었다.
‘성경 스터디’가 전부였던 건 아니다. 우리는 연초가 되면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초대해 세미나를 열었다. 복음형제회 회원이 돌아가며 강사로 나섰다. 세미나에서 걷힌 헌금은 미자립교회 후원에 썼다. 우리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받드는 비정치적인 목회자들의 모임이었다.
복음형제회 회원들과 97년 러시아를 방문한 일은 내 인생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당시 우리는 부부 동반으로 14일간 선교여행을 떠났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경유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우리는 관광지를 둘러보고 현지 선교사들의 초청으로 러시아 곳곳에서 집회도 인도했다.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오랜 공산주의의 영향으로 사회 질서가 불안정했다.
하지만 여러 곳을 방문하며 선교의 바람이 러시아에도 서서히 불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행하는 틈틈이 성령의 바람이 북한 땅에도 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14일간의 여행이 끝나던 날이었다. 어느 목요일 저녁 6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모스크바 공항에 도착, 귀국 수속을 밟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티켓 예매가 잘못돼 일행 중 2명은 5일 후에나 귀국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명단을 보니 ‘낙오자’는 나와 내 아내였다.
우리 부부를 제외한 일행은 “미안하다”면서 어쩔 수 없이 비행기에 탑승했다. 나는 러시아어 통역이 가능한 고려인 가이드를 통해 재차 항공사에 티켓 구매가 가능한지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좌석이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사고무친의 땅에서 어떻게 5일을 보내야 할지 눈앞이 깜깜했다. 나는 비행기가 활주로를 벗어날 때까지 기도를 하자고 결심했다.
30분쯤 지났을까. 비행기 이륙시간 15분을 앞두고 공항 직원이 우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좌석이 생겼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비행기에 탑승한 뒤 벌어졌다. 안내를 받아 간 자리는 이코노미석이 아닌 1등석이었다. 추가 요금을 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우리 부부는 최고의 서비스를 받으며 한국에 돌아왔다. 만약 공항에서 좌석이 없다는 말에 모든 걸 포기하고 기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이 같은 작은 기적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을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예레미아 말씀이 떠오른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복음형제회의 좌장이던 김우영 목사님이 2005년 별세하면서 우리의 만남은 뜸해졌다. 80년대 중반부터 20년 넘게 이어진 복음형제회 회원과의 성경공부. 그것은 내가 목회자로서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게 해준 구름판과 같았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10> 학원폭력 지킴이로 지역사회 섬기기 새로운 도전
도봉교회 선교회 순번 정해 동네 순찰… 독거노인 방문 청소·말벗 돼주기도
2002년 10월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제25회 총회에 참석한 김진호 목사(왼쪽)와 송복순 사모. 김 목사는 당시 총회에서 기감 감독회장에 선출됐다.서울 도봉구 도봉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1990년대 이야기다. 나와 교인들은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그중 하나가 학원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벌인 ‘청소년 지킴이 운동’이다. 우리는 도봉 지역 청소년을 위한 사역을 고민하다 이 운동을 시작했다.
도봉교회 근처에는 3000명 넘는 학생이 재학하는 북서울중학교가 있었다. 우리는 이 학교 아이들부터 섬기고 돌보자고 생각했다. 여선교회 회원들은 매일 오후 3∼5시, 청장년선교회 회원들은 오후 8∼11시에 조를 짜서 동네를 순찰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담배를 피거나 약한 학생을 상대로 돈을 갈취하는 학생이 있는지 살폈다. 운동은 90년대 초반부터 7년간 지속됐다.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도봉교회의 청소년 사역은 국민일보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 보도되기도 했다. 주민들로부터 “도봉교회 덕분에 우리 아들, 딸이 학원폭력의 피해를 덜 받게 되었다”는 칭찬도 자주 들었다. 이 밖에 지역 독거노인을 상대로 매주 토요일 죽을 배달하는 사역도 전개했다. 여선교회 회원들은 이들 노인가구를 방문해 청소를 해주거나 말벗이 되어주었다.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은 교회의 사명이다. 신학자 하비 콕스는 ‘교회의 갈길’이라는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가 세상을 버리면 하나님은 교회를 버리신다.’ 교회가 교인만을 위한 곳이 아니다. 지역사회를 섬기면서 모든 이들을 보듬는 곳이 바로 교회다.
2000년 도봉교회 새 성전을 완공한 뒤 나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서울연회 감독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했다. 그때까지 난 이른바 ‘교단정치’와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교단의 학원선교 사업 등을 도운 적만 있을 뿐 목회에만 전념하며 살았다.
선거 출마를 결심할 때부터 나는 감독을 ‘명예’가 아닌 ‘사명’이라고 여겼다. 하나님이 내게 감독직을 허락해주시면 사명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내겐 남들과 같은 선거운동 조직이 없었다. 총회 대의원을 일일이 만나 지지를 호소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선거는 2002년 10월 서울 강남구 광림교회에서 열린 제25회 기감 총회에서 치러졌다. 서울연회 감독 선거에는 나를 포함해 3명이 출마했다. 예상을 뒤엎고 나는 당선됐다. 10개 연회 감독이 선출된 뒤 감독회장을 뽑는 순서가 이어졌다. 현재 감리교단 감독회장 제도는 4년 전임제이지만 당시는 감독회장이 연회 감독과 개교회 담임목사를 겸임하는 게 가능했다. 임기는 2년이었다.
감독회장은 주로 서울연회나 서울남연회 감독이 맡곤 했다. 나는 서울남연회 신임 감독과 감독회장 선거를 치렀다. 1차 투표에서는 서울남연회 감독이 나보다 50여표를 더 득표했다. 하지만 3분의 2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했기에 2차 투표가 이어졌다. 투표 결과는 ‘동점’이었다.
다시 3차 투표가 시작됐고 나의 당선이 확정됐다. 당선자로 호명되자마자 난 엎드려 기도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저의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총대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축하 인사는 “김진호 목사를 감독회장에 세운 건 대의원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말이었다. 선거운동 조직도 없이 감독회장에 선출된 것에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나 역시 내가 잘나서 감독회장이 되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모든 건 하나님의 뜻이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역경의 열매] 김진호 <11> ‘빛을 발하라’… 한 말씀 붙들고 200번 넘게 설교
같은 본문에서 매번 다른 예화 떠올라… 크리스천의 ‘빛과 소금’ 역할 강조
김진호 목사(뒷줄 왼쪽 다섯 번째)가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감독회장을 맡고 있던 2003년 기감 연회 감독들과 중국 선교여행을 갔을 때 찍은 단체사진.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으로 재임하며 주력한 분야 중 하나는 교단 차원에서 전도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당시 우리나라 감리교인은 150만명 수준이었다. 우리는 감리교회 성도를 2배로 늘리는 ‘300만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허황된 슬로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300만 전도운동’이라는 문구에는 그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에 매달리자는 독려와 다짐이 담겨있었다.
그렇게 맹렬하게 전도에 매진한 결과 감독회장에 재임하는 2년 동안 감리교인은 이전보다 10만명 늘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둔 셈이다. 이 밖에 나눔을 실천하는 ‘예수사랑실천운동’도 벌였다. 한국교회가 소외된 이웃을 섬기는 일에 소홀하다고 판단해 시작한 일이었다. 항상 정직한 크리스천이 되자는 차원의 의식개혁운동인 ‘정직운동’도 전개했다.
감독회장 재임 시절을 회상할 때 떠오르는 장면은 감독회장에 당선된 다음날 새벽 기도를 드리고 있던 내 모습이다. 나는 감독회장이라는 직함을 ‘명예’가 아닌 ‘사명’으로 여기겠노라 다짐했다. 그렇게 한참동안 기도를 드리는데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길 바라신다. 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는 주님 앞에 부끄러운 존재가 되고 만다. 하나님이 나를 감리교단 최고 지도자로 세운 다음날 내게 전한 말씀 역시 ‘빛을 발하라’는, 세상의 어두운 곳을 밝히라는 명령이었다.
감독회장으로 일하며 어느 곳에 가든지 대부분의 설교 본문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로 시작하는 이사야 60장 1절이었다. 언젠가 감독회장으로 있으면서 이 본문을 바탕으로 설교한 횟수를 세어보니 204회나 됐다. 나처럼 특정 본문을 오랫동안 반복해 설교한 목회자는 드물 것이다.
같은 본문을 가지고 200번 넘게 설교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목회자 입장에서는 같은 본문을 통해 꾸준히 하나님의 은혜를 전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김진호 목사는 설교할 내용이 없어서 매번 같은 설교를 한다”는 비판을 들을 가능성도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사야 60장 1절을 거듭 전한 이유는 이 말씀에 담긴 의미가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다.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할 때마다 나는 기도부터 드리곤 했다. ‘오늘도 이 말씀이 은혜가 되게 해주십시오.’
신기한 것은 이렇게 기도를 드린 뒤 설교를 시작하면 매번 새로운 예화가 떠올랐다는 것이다. 많은 성도들은 “똑같은 본문으로 설교를 하시는데 그때마다 은혜를 받습니다”고 말하곤 했다.
감독회장 퇴임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한 성도가 내게 도자기 접시를 선물했는데 접시 안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적혀 있었다. ‘興起發光’. 앞 두 글자 ‘興起(흥기)’는 일어나라는 뜻이요, 뒷글자인 ‘發光(발광)’은 빛을 발하라는 의미였다. 이사야 60장 1절을 인용한 문구였던 셈이다. 빛을 발하려면 우선 일어나야 한다. 누워 있거나 주저앉은 자는 결코 세상에 빛을 전할 수 없다. 나는 요즘 감리교회가 빛을 발하기는커녕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상태는 아닌지 우려할 때가 많다.
2004년 10월 나는 2년간의 감독회장 임기를 마쳤다. 도봉교회 담임목사로만 활동하며 다시 교인과 지역 사회를 섬기는 일에 매진했다. 하지만 감독회장 재임 기간 전개한 ‘전도운동’ ‘예수사랑실천운동’ ‘정직운동’은 교회 차원에서 계속 이어나갔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12> ‘아들 잃은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명령
감리교 최고 지도자 내려놓았지만 아픈 자를 돌보라는 새로운 사명 주셔
2010년 12월 뇌농양으로 세상을 떠난 김진호 목사의 셋째 아들 태영씨의 모습.하나님은 수많은 고난과 아픔을 통해 우리를 단련시키신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겪는 고통 중에는 이겨내기 힘든 고통도 적지 않다. 특히 자식을 앞세운 참척(慘慽)의 비통함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픔이다. 내게도 그런 고난의 시간이 있었다.
셋째 아들 태영이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다. 때는 2010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아들은 갑자기 두통을 호소했다. 몸에서 열이 났다. 동네 병원을 찾았더니 감기로 보인다는 진단을 받았다. 미혼이었던 당시 아들의 나이는 서른여덟. 태영이는 부모로부터 독립해 2008년부터 작은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나는 아들이 염려 돼 우리집에 들어오라고 했다.
아들의 병세는 나아지질 않았다. 20일 넘게 우리 부부는 아들 이마에 찬 수건을 올려주며 열이 내려가길 기도했다. 그런데 어느 날, 태영이는 내가 보는 앞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병원으로 이송될 때는 이미 의식불명 상태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병명은 뇌가 세균에 감염된 뇌농양이었다. 12월 11일, 급하게 수술을 받았지만 병을 치료할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들은 숨을 거뒀다. 생떼 같던 자식은 그렇게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겼다.
아들의 장례식을 치르는 기간 내내 눈에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내가 “그만 좀 우시라”고 다독일 정도로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겪은 삶의 가장 큰 고통이었다. 지금도 아들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온다. 아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고 얼굴이 보고 싶다.
아들은 세상을 떠나기 전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 학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내년부터 여유가 생기면 아버지의 사역도 돕겠습니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조의금 중 1500만원이 남았는데 생전에 아들이 했던 이 말이 떠올랐다. 남은 조의금을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었다.
1500만원 중 500만원은 도봉교회 소속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500만원은 조립식 예배당을 짓고 있는 충북의 보은사도교회로, 나머지 500만원은 중국 선교를 하다가 세상을 떠난 한 선교사 가족에게 보냈다. 내가 전달했다기보다는 나의 막내아들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선물이었다.
나의 ‘목회자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렸다. 여러 교회를 차례로 섬기며 매번 부흥의 열매를 수확했다. 감리교단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올랐고 아들이 떠나기 한 해 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은퇴식까지 치렀다. 그런 내게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목회자로서의 내 사역이 끝나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였다. 아픔을 지닌 자들을 돌보고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내가 더 겸허해지길 바라는 주님의 마음이었다.
나처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보듬어야겠다는 생각에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를 만들었다. 남편과 사별한 홀사모들, 그리고 이들의 자녀를 돕는 기구다.
운동본부를 설립하기 전에 시작한 또 다른 사역도 있다. 전국 미자립교회를 돕는 운동이다. 2010년부터 나는 매년 3월과 10월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초청해 ‘신바람목회세미나’를 열고 있다. 세미나에는 교회 부흥에 성공한 목회자 등이 강사로 나서 부흥 비법과 전도법을 전한다. 세미나가 열릴 때면 미자립교회를 섬기는 목회자 수십 명이 행사장을 찾는다.
이런 세미나를 여는 이유는 간단하다. 교회를 개척한 뒤 자립을 하려고 발버둥치다가 영적으로 탈진해버리는 목사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달 됐으면 좋겠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13> 홀사모 섬기기·미자립교회 돕기… ‘은퇴 없는’ 사역
신바람세미나로 작은 교회 부흥 돕고 장학금 받고 기뻐하는 학생 볼 때 보람
김진호 목사(앞줄 왼쪽 다섯 번째)가 2009년 4월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은퇴식을 가진 뒤 참석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목회자 유가족을 돕고 미자립교회를 섬기는 운동을 벌이면서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이들 운동을 왜 시작했는지 설명하려면 2009년 4월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나는 서울 도봉구 도봉교회에서 은퇴예배를 드리고 강대상에서 내려왔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는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은퇴식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때는 나의 목회자 인생이 새로운 길로 접어든 시점이었다.
은퇴한 뒤 나는 고민을 거듭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가 가장 소홀히 한 분야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목회자 유가족을 돌보는 일과 미자립교회를 섬기는 운동이었다. 이들 두 운동이 나의 마지막 사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목회자 유가족 문제는 한국교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은퇴하고 4개월쯤 지났을까. 어느 날 목회자 남편을 잃은 홀사모들이 나를 찾아왔다. 이들은 나를 붙잡고 고충을 털어놨다.
“목사님, 사는 게 너무 힘듭니다. 남들처럼 자식 교육을 시키려면 돈이 필요한데 너무 곤궁합니다. 저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결국 나는 2010년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를 설립하고 홀사모 돕기에 나섰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 한 오피스텔 건물에 24㎡(7평) 남짓한 사무실도 마련했다. 그해 12월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나는 이 일에 더 애착을 갖게 됐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이들을 섬기기로 결심했다.
운동본부는 매년 2월과 8월, 홀사모 자녀 중 도움이 필요한 학생 30여명을 선정해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대학생에게는 200만원, 고등학생에게는 100만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홀사모 자녀들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문제는 재원이었다. 장학금을 꾸준히 지급하려면 1년에 5000만∼6000만원 정도의 돈이 필요했다. 다행히 나와 뜻을 함께 하는 전국 감리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운동본부에 십시일반 후원금을 기탁해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목회자 유가족을 돕는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운동본부에는 매년 후원금과 함께 따뜻한 사연도 답지하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인데도 오랫동안 매달 5만원씩 기부한 70대 교인, 암 수술을 받은 뒤 받은 보험금 1000만원을 내놓은 50대 남성, 단체 설립 때부터 지난해 소천할 때까지 매년 100만원씩 기탁한 고 나원용 목사….
장학금 전달식에서 장학금을 받고 기뻐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큰 보람을 느낀다. 행사 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열심히 공부해서 누군가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미자립교회 목회자들을 초대해 여는 ‘신바람목회세미나’도 내가 은퇴 이후 추진한 사역 중 하나다. 세미나는 매년 3월과 10월 미자립교회 목회자 70∼80명을 초청해 이들에게 부흥 노하우 등을 전하는 행사다. 세미나를 여는 이유는 미자립교회 문제가 한국교회의 가장 시급한 숙제라고 판단해서다.
한국교회의 60∼70%는 미자립교회다. 이들 교회 목회자들은 패배의식과 열등감에 젖어 있다. 나는 세미나를 통해 이들에게 도전과 격려의 메시지라도 전하고 싶었다.
한국교회의 양극화 현상을 해결하려면 큰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을 가져야 한다. 작은 교회 목회자에게 매달 5만∼10만원씩 후원금을 전달하는 일로는 부족하다.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듯 500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라면 미자립교회에 평신도 가정을 파송해야 한다. 그래야 상생의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진호 <14·끝> 수많은 고난 뒤에 남은 건 ‘주님에 대한 감사함’
역경 겪을수록 신앙·인격적으로 성숙… 욕심 없던 섬김이 지금의 기쁨 가져와
김진호 목사(앞줄 왼쪽 네 번째)가 최근 손자 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누군가 나한테 자가용이 무어냐고 물으면 농담 삼아 “BMW”라고 답하곤 한다. 고급 외제차를 일컫는 게 아니라 ‘버스(Bus)’ ‘지하철(Metro)’ ‘걷기(Walking)’의 첫 글자를 따 조합한 단어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난 여전히 걷는 게 좋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이 즐겁다.
매일 아침 8시면 경기도 의정부 자택을 나와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 1호선 가능역에서 전철로 환승한다. 자가용이 없는 게 아닌데도 이렇듯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아까워서다. 지하철을 타면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볼 수 있지만 차를 몰면 운전을 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게 된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껴 사용하고 싶은 게 요즘 내 마음이다.
서울 종로구 삼일대로에 있는 목회자유가족돕기운동본부 사무실에 도착하면 오전 9시30분쯤 된다. 24㎡(7평) 남짓한 아담한 공간엔 싱크대 책상 책장 테이블 등이 구비돼 있다. 사무실에 상주하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다. 이 운동본부의 ‘대표’인 동시에 ‘급사(給仕)’이기도 하다. 커피를 타 마시고 사무실에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때론 외부일정을 소화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5년 전 셋째 아들이 세상을 떠났지만 첫째와 둘째는 각각의 자리에서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둘째 아들은 나처럼 신학을 공부한 뒤 미국 LA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다. 교회를 대물림하거나 과거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으로 일한 ‘권력’을 이용해 아들이 좀 더 쉬운 길을 가도록 도울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감독회장으로 일하던 시절에도 욕심을 부리진 않았다고 자부한다. 감리교단 최고 지도자로서 연세대나 CBS의 재단이사, 기감 서부연회 감독 등을 겸임할 수 있었지만 감독회장만 맡았다. 나머지 권한은 전부 다른 이들에게 양보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김 목사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자주 들었던 이유는 이런 이력 때문이다.
감리교단은 최근 몇 년간 감독회장 선거가 수차례 혼탁하게 치러지면서 심각한 내홍을 겪었다. 나는 모든 문제 해결은 욕심을 버리는 것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손에 거머쥔 것들을 내려놓아야 누군가의 손을 잡을 수 있다. 갈등을 극복하고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돌아보면 다사다난한 인생이었다. 천애고아나 다름없던 청소년기를 거쳐 고학생으로 고군분투하며 신학을 공부했고 목회자가 된 뒤에는 수많은 교회를 섬기며 큰 기쁨을 느꼈다.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엄청난 슬픔을 느끼기도 했지만 목회자 유가족을 돕고 미자립교회를 섬기는 운동을 벌이는 지금 나는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다. 아내나 자식들은 일을 손에서 놓고 쉴 것을 권하기도 하지만 나는 일을 할 때,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세상을 떠나 하나님 품에 안기는 그날까지 나는 내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것이다.
수많은 역경을 통해 나는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다. 고난의 터널을 통과한 뒤엔 항상 인격적으로, 신앙적으로 더 성숙해진 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만약 어떤 어려움도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믿음이 희미해지면서 옳지 않은 길을 걸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역경을 통해 얻은 열매는 무엇일까. 하나님을 생각할 때 내 마음속에 차오르는 건 주님을 향한 고마움이다. 내게 주님은 인생의 은인이다. 이러한 믿음이 바로 내가 수확한 ‘역경의 열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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