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쪽. 이제 로버트와 나는 더 이상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들 삶의 내밀한 사정들을 나누기 시작했다―우리를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 우리가 나누는 이런 대화에는 자유가 있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하는 얘기는 절대 그 밖으로 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콜린에게 언급할 수 없었던 일들을 로버트에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일도, 아무리 우스꽝스럽고 부끄러운 일이어도 모두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그 아파트에서 나누는 모든 말들은 그 바깥의 세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을 듯이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소녀 시절 품었던 환상, 아버지의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들―그러니까 항상 나이가 많은 남자들―이 연루된 환상에 대해 고백할 때면 로버트는 미소를 짓곤 했다. 나는 그때 이미 내 안에 어떤 충동이 있었고, 그런 상사想思의 열병을 고백함으로써 그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이용할 수도 있었을 그 기회를 잡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나의 소녀 시절의 성적 로망을 듣고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사랑했나요?” 그가 어느 날 저녁, 우리가 그의 소파에 앉아 있을 때 물었다. “그런 남자들 말이에요, 누구라도.”
“나이 많은 남자를 사랑해본 적이 있느냐고 묻는 건가요?”
“맞아요. 그런 것 같군요.”
나는 마치 그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처럼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런 다음 그를 보며 그렇다고 말했다. 그의 질문만큼이나 의도적이고 직접적인 대답이었다.
로버트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어때요? 나이 어린 여자를 사랑해본 적이 있나요?”
“아.” 그는 미소를 지었다. “몇 명은 됐었지 싶은데요.” 그는 내게 윙크를 했고, 그러더니 와인을 마저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음반을 바꿔 걸었다.
그것이 로버트가 내게 가장 가까이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는 그가 그 이상 나아갈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희로서 의도된 종류의 희롱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단지, 자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의 일부는 그가 그 순간에 뭔가를―손을 잡거나 키스를 하거나―해주길 바랐지만, 그 편에서 나를 안으려는 의도를 품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나는 로버트가 우리 관계에 대해 나처럼 죄의식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을 다음 단계로 가져가는 것에 대한 그의 양면적인 감정은, 그로 인해 훗날 내가 자신에게 분개할지도 모른다는 깊은 두려움에서 비롯한 것이 분명하다. 어느 날 저녁 우리가 그의 소파에 앉아 있을 때, 나는 그에게 부모님의 새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나는 잠시 후 그가 내 얘기를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야기를 끝마치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슬픈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것 때문에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헤더.”
“무엇 때문에요?”
“이런 만남.” 그가 말했다. "당신이 언젠가 이런 만남을 되돌아보며 나를 미워하게 될까 봐 두려워요.“
나는 그를 보았다.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알아요, 로버트?”나는 그의 손을 만지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미워하지 않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려워요.”
(나의 생각) 최근에 단편 소설집 두 권을 읽었다. 하나는 한국 작가의『안녕 주정뱅이』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 작가의『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다. 뒤의 것은 절판된 책이다. 지난 주 비 때문에 집 안에 있을 날이 많았다. 덕분에 두 권을 한꺼번에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과학 소설일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속의 주인공이 물리학을 전공했다는 것 빼고는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10개의 단편을 모두 읽고 책의 제목이 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라고 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대부분 동성애자라든가, 애인에게 차인 남자나 여자,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 등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이 소재로 등장했다. 모두 소수자 이야기다. 그래서 빛과 물질의 대비를 주목했다. 다수자는 물질이라서 두 발을 딛고 땅에 편하게 설 수 있지만 소수자는 빛이라서 땅을 밟을 수 없고 현실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 아닐까. 단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특히 늙은 남자와 젊은 여자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의식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소재다. 상식에 벗어난 이야기겠지만 무의식까지 ’나‘라고 보면 반드시 몰상식하다고만 할 수 없을 것 같다. 사람들은 차원이 다른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빛과 물질은 정말 차원이 다를까? 2017년 7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