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언어는 몇 도입니까?>
“너무 억지로 억누를 필요 없어.”
제자훈련을 마치고 이제는 사역훈련생으로 훈련을 받으라고 했더니 “의미 없어요.”라고 무심히 던진다. 석식 시간을 맞추어 학교로 가서 카톡을 했다. “ 지수야. 라면묵자.” 녀석을 태우고 三丁目로 갔다. 녀석은 톤코츠라멘 세트로 난 쇼유라멘을 부탁했다. 숙주를 잔뜩 넣고 라면 한 젓가락을 건져 올리는 녀석에게 “너무 억지로 억누를 필요 없어.” 무심을 가장한 속내를 던진다. 엄마랑 헤어진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아버지가게에서 주말 밤 일을 돕고, 밖으로만 도는 여 동생과 늘 싸움을 한다. 웃음기 잃은 지 오래다. 교회에서는 늘 졸기 바쁘다. ‘녀석아 말 안 해도 알아. 너무 참지 마. 울고 싶으면 울어도 된다. 내가 손잡아 줄게’ 이 모든 속내가 36.5부의 체온을 타고 전해진 까닭일까? 녀석은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했다. 라면에서 피어오른 김이 감정 표현이 서툰 녀석의 눈물을 감추어 주어 참 고마웠다.
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는 이기주작가의 <언어의 온도>를 읽었다. 3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편집의 배려가 탁월한 책이다. 술술 읽혀진다고 내용마저 가볍지는 않다. 삶의 곳곳을 세밀한 눈으로 살피고 내면 깊은 성찰의 고백들이 때로는 깊은 공감을, 때로는 눈시울 붉어지는 감동까지도 이끌어 낸다. 또한 그는 단어의 어원을 찾아 풀이하듯 써내려가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사과를 뜻하는 단어 apology는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 이라는 뜻이 담겨있는 그리스어 apologia에서 유래했다. 얽힌 일을 처리하려는 의지와 용기를 지닌 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승리의 언어가 사과인 셈이다.''p54
''어떤 학자는 사랑이 살다. 의 명사형의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할 사(思)와 헤아림을 의미하는 한자 양(量)을 조합한 사량(思量)에서 사랑이 유래했다는 설을 가장 선호했다.''p120
과연 기자출신답게, 전 대통령의 연설문작성자답게 이 책의 소제목들은 마치 카피라이터가 쓴 것처럼 인상적이고 단문이지만 중문이 가질 수 없는 묵직함과 가슴에 온기를 전해준다. 틈 그리고 튼튼함. /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사람들./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 긁다, 글, 그리움./ 모두 숲으로 돌아갔다./ 이기주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남자. 쓸모를 다해 버려졌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쓰는 남자. 가끔은 어머니 화장대에 은밀하게 꽃을 올려놓는 남자다. 그의 글이 정직하게 오는 봄처럼 따뜻하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한 가지 가슴에 남겨진 따뜻한 말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잊혀 지기 원하지만 잊혀 지지 않는 가슴을 후벼 판 얼음송곳 같은 말 한마디도 있는지 모른다. 또한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변화시킨 한마디도 있지 않은가? 오늘도 우리는 마주하는 그 누군가와 언어의 바다를 유영(遊泳)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그 누군가에게 건네는 그 한마디. 그 언어의 온도는 과연 몇 도일까? 바라기는 내가 건네는 한 마디가 개화(開花)를 기다리는 꽃 봉우리를 벙그러지게 할 봄 햇살과도 같기를 소망해본다
첫댓글 마치 소설 한 편을 읽는 느낌이었어요. 후우카님의 언어의 온도는 매우 따뜻!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