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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옛길 체험
- 위 치 : 평창군 횡계면, 강릉시 성산면
- 높 이 : 832m
<단체기념사진>
Ⅰ. 개황(槪況)
1. 일 시 : 2014. 4. 10. 08:00
2. 장 소 : 대관령옛길 - 경포대도립공원
3. 참석인원 : 45명(새내기 7명)
4. 등산코스 :
▶ 1부 : 대관령마을주차장 - 국사성황사입구 - 국사성황사갈림길 - 반정 - 쉼터 - 주막터 - 원울이재 - 대관령옛길주차장
▶ 2부 : 경포일원 경포벚꽃잔치 소요
5. 교통정보
- 빠른 길 찾기 정보
▶ 검 색 지 : KBS춘천방송총국 ⇨ 대관령마을휴게소
▶ 거 리 : 146.4km
▶ 소요시간 : 1시간59분
- 다녀온길 : 중앙고속도로 횡성IC - 영동고속도로 새말IC, 횡계 - 경강로 -
대관령마을휴게소
- 동원차량 : 강원 70바 1737 김 주 일
6. 날씨예보상황
- 기 준 : 2014. 4. 10. 05:00기준
- 개 황 : 오전 흐림, 오후 구름 많음
▶ 비 올 확 률 : 오전 30%, 오후 10 ~ 20%
▶ 기 온 : 8 ~ 14℃
7. 활동상황
○ 08:00 --- KBS춘천방송총국앞 출발(횡성휴게소 경유)
○ 10:10 --- 대관령마을휴게소 도착
○ 10:19 --- 선자령입구
○ 10:25 --- 국사성황당입구 일정안내
○ 10:27 --- 단체기념사진촬영
○ 10:28 --- 들머리진입
○ 10:31 --- 능선갈림길
○ 10:43 --- 한국공항공사강우너항공무선표지소 경유
○ 10:45 --- 국사성황사, 선자령, 반정, 대관령마을휴게소 갈림길
○ 10:51 --- 김시습시비
○ 11:02 --- 한원진시비
○ 11:15 --- 반정
○ 11:33 ---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
○ 11:46 --- 쉼터(쉼터 ~ 주막터 어간 팀별 점심식사)
○ 11:57 --- 주막터
○ 13:33 --- 산불감시초소
○ 13:34 --- 우주선화장실
○ 13:37 --- 바우길 2구간갈림길
○ 13:44 --- 원울이재
○ 13:53 --- 대관령옛길주차장
○ 13:56 --- 대관령박물관
○ 14:05 --- 대관령옛길주차장출발
○ 14:25 --- 경포대주차장도착
○ 15:20 --- 경포대주차장출발
○ 15:40 --- 주문진해안공영주차장도착
○ 15:50 --- 주문진수산시장 자유 투어
○ 17:15 --- 주문지해안공영주차장출발
○ 19:50 --- KBS춘천방송총국 앞 도착(평창, 홍천강휴게소 경유)
Ⅱ. 지역특성
<대관령옛길표석>
1. 지역유래
- 오늘은 제1부 대관령옛길체험, 제2부 경포일원 벚꽃잔치 소요를 병행하여 일정을 잡은 관계로 1. 2부 행사가 속한 관할지역을 살펴보고자 한다.
- 평창군 횡계면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신라의 삼국통일(616년)후 지방을 9洲 5小京으로 개편시 溟洲(지금의 강릉)에 속하였으며, 그후 역사의 변천에 따라 행정변화를 거듭하여 조선 고종 43년(1906) 정선군에 편입. 1931년 4.1 정선군에서 평창군으로 이관ㆍ 1973년 7.1 행정구역 개편(대통령령 제5542호)으로 호명 1,3리 봉산리를 진부면 이관ㆍ 1977년 5.1 면사무소의 소재를 유천리 748-1번지에서 지금의 횡계리 335-1번지로 이전 ㆍ1989년 1.1 대통령령 제1145호 및 지방자치법 제4조 3항에 의거 호명리를 진부면으로 이관하여 오늘에 이른다. 지역특성은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대관령은 평균고도 750m의 산간고랭지대로 년 평균 적설량이 2m에 달해 용평리조트, 알펜시아리조트 등의 휴양시설이 위치해 있으며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고 있다. 북쪽으로 동대산(1,433m), 황병산(1,407m), 소황병산(1,329m), 동쪽으로 매봉(1,173m), 곤신봉(1,128m), 대관령(832m), 서쪽으로 장군바위(1,140m), 싸리재(800m), 그리고 남쪽으로 발왕산(1,458m), 옥녀봉(1,146m) 등으로 둘러싸인 산간분지 지형으로 동양 최대의 목초지인 대관령 삼양목장과 양떼목장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 강릉시 성산면은 본래 강릉군 지역으로 보현산성이 있어서 성산이라 하여 건금, 위촌, 구산, 송암, 관음, 서원, 제민원의 7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에 송암, 위촌, 구산, 금산, 오봉, 관음, 어흘, 보광등 8개리로 개편 관할하였고, 1983년 2월 15일 "읍면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구정면 산북리가 편입되어 현재는 9개리로 되어 있다.마을은 동쪽으로는 구정면, 강릉시내, 서쪽으로는 평창군 도암면, 남쪽으로는 왕산면, 북쪽으로는 사천면과 접해 있다. 성산면은 강릉의 중서부에 위치하고 면 소재지는 구산리로 옛날 이곳에 역이 있었다. 옛말에 구산지상, 오계지중에 피난지가 있는데 성산은 강릉의 서쪽에 좋은 피난지가 있다. 강릉향언에 "생어모학산이요 사거성산지라"는 말이 있는데 대관령에서 동북쪽으로 뻗어내린 성산주령에는 옛부터 명당자리가 많아 보광리, 송암리, 위촌리에는 묘가 많이 있다. 그래서 성산주령에 묘자리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집안 가문의 세를 측정 했다. 성산주령에 묘를 써야 집안이 출세 할 수 있을 정도라 하니 이곳이 지방민들에게 얼마나 좋은 묘자리로 선호되었는가를 알 수 있다. 이곳은 토질이 좋아 물이 잘 빠지고 삽으로 땅을 파도 쉽게 파진다. 성산은 영서지역에서 강릉으로 오는 관문으로 명주산성, 대궁산성, 제왕산성, 명주군왕의 왕릉이 있다. 마을 서쪽에는 대관령의 험준한 산이 남북으로 뻗어 영서와 경계를 이루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가 골을 이루고 마을을 이루고 있다.
- 성산면 어흘리는 1914년에 가마골, 문안, 반쟁이, 굴면이, 망월이, 제민원을 합쳐 어흘리라고 했다. 어흘리는 대관령을 끼고 있는 비교적 넓은 지역으로 정상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의 모습이 넓고, 기다랗게 물건을 늘어놓은 것처럼 되어 있다. 어흘리는 주위의 여러 지역을 총칭한 지명인데 "어울리다, 만나다"라는 뜻인 느느리, 느러리 라는 말을 음차한 것이다. 그리고 於屹이라는 것은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수하는 곳의 지명이다.
- 강릉시 경포동은 1998년 10월 1일 강릉시 조례 288호에 의해 유천동, 죽헌동, 운정동, 저동을 하나의 행정동으로 합친 동으로, 동의 면적은 23.21 ㎢이고 19개통 91개반이 있다. 유천동은 강릉군 정동면 지역으로 1914년 죽오리를 병합하여 유천리라 하다가 1955년 9월 1일에 강릉시에 편입되었다. 유천은 다시 상유천(윗느릅내)과 하유천(아랫느릅내)으로 나누는데 상유천은 땅재봉을 중심으로 서쪽마을이고, 하유천은 북동쪽 마을이 된다. 지변동 또한 강릉군 정동면 지역으로 1914년 池前理와 池後理를 합하여 지변리라 하고 1955년 9월 1일에 강릉시에 편입되었다. 예부터 이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저녁에 前洞사람들과 後洞사람들이 망우리를 돌리다가 달이 뜨면 탱주나무거리에 있는 다리에 와서 횃불을 들고 다리밟기를 하고, 또 죽헌마을 사람들과 횃불싸움을 했다. 다리를 먼저 밟는 동네가 농사 풍년이 든다고 하여 주민들간에 치열한 다툼이 있었는데 ,동네 전체 주민이 횃불싸움에 참여했고, 큰 사고없이 싸움이 끝나면 마을로 돌아와 막걸리를 마시며 흥겹게 놀았다. 죽헌동은 강릉군 정동면 지역으로 1914년 백교리를 합하여 죽헌리라 하고 1938년 정동면이 경포면 개칭 당시 죽헌리, 대전리로 경포면에 편성되어 있었으나 1955년 9월 1일 강릉읍, 경포면, 성덕면을 병합하여 강릉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동을 합쳐 죽헌동으로 개칭하여 오다 1998년 10월 1일 경포동에 합쳐졌다. 운정동은 강릉군 정동면에 딸린 지역으로 1914년 선교리를 병합하여 운정리라 하다가 1955년 경포면이 강릉시에 편입될 때 난곡동과 합쳐 행정동을 이루다가 1998년 10월 1일 경포동에 합쳐졌다. 경포면이 정동면이였을 때 유천리, 대전리, 조산리등 3개리가 있었으나, 일제때 하남면을 없애면서 하남면을 반으로 갈라 저동리, 안현리는 정동면에 편입시키고,산대월리, 방동리는 사천면에 편입시켰다. 그후 조산리는 없애고 운정리를 만들었다. 조선조 중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漁村 沈彦光이란 분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살아서 그후부터 운정리라 했다. 저동은 원래 강릉군 하남면 지역으로 1914년 저동리라 하여 저동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정동면이 경포면으로 개칭 당시 저동리, 안현리로 경포면에 편성되어 있었으며, 1955년 9월 1일 강릉시에 편입되었다. 마을에 모시가 많이 자라 모시골이 한자로 되어 苧洞이 되었다.
2. 대관령옛길 살펴보기
<국가지정 명승 대관령옛길 안내도>
- 대관령옛길은 우리 모두산악회에서 최근 2011. 8. 18 체험한바 있다. 2년6개월여 만에 다시 찾은 곳이다. 본인은 2011. 6월에 강릉 경포에서 강화도 창후리 까지 걸어서 국토횡단 제1구간 보행 시 경포에서 이 지점까지 걸어온 후 아흔아홉구비를 힘겹게 넘은바 바 있어 감회가 더욱 새로웠다.
- ‘대관령 옛길’은 오래 전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교역로이자 교통로로, 영동지역민들에게는 강릉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뿐 아니라 강릉의 진산인 경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대관령 옛길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이래 주요 교통로의 역할 뿐 아니라 이 길을 이용한 수많은 민중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기도 하며,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릉 단오제와 깊은 연관이 있는 길로 백두대간의 뿌리인 태백산맥 줄기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더불어 주변 계곡과 옛길의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강릉의 ‘대관령 옛길’이 명승으로 지정됨에 따라 강원도의 명승은 지난 1970년 국내에서 처음 명승으로 지정된 명주 청학동 소금강을 비롯 영월 어라연 일원,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 등 모두 11곳이다.
- 대관령은 강릉시와 평창군 사이의 령으로 높이 832m, 길이가 13㎞나 된다. 예로부터 태백산맥을 넘는 고개의 하나로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이었다. 이 일대는 황병산·선자령·노인봉·발왕산에 둘러싸인 고위평탄면이다.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하여 아흔아홉구비라고도 한다.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문화의 전달로 이고, 자연의 경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관령’이라는 지명을 이 지역 사람은 ‘대굴령’이라고도 부른다. 고개가 험해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구르는 고개” 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 ‘대굴령’을 한자로 적어 ‘대관령’(大關嶺)이 되었다고 한다. 대관령을 분수령으로 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오십천은 동해로 흘러들며, 서쪽에서는 송천의 지류가 발원하여 남한강에 흘러든다. 연평균기온이 약 6.1℃ 내외로 봄·가을이 짧고 겨울에 적설량이 많다. 또한 여름이 서늘하며, 무상기일이 짧아 9월에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언다. 서늘한 기후에서 재배되는 고랭지채소·홉·씨감자의 산지로 유명하며, 넓은 초지를 이용하여 소·양 등을 사육하는 대관령목장이 있다. 북서쪽 발왕산록에는 남한 최대의 용평스키장이 있다. 강릉에서 생산되는 해산물, 농산물들이 이 길을 통해 영서지방으로 넘어갔고, 영서 지방에서 생산되는 토산품이 성산면 구산리의 구산장, 연곡장, 우계[옥계]장 등으로 넘나들었다. 이 물산의 교역은 ‘선질꾼’이라는 직업인들이 담당했다. 그 선질꾼들이 넘나들던 길도 바로 이 대관령 옛길이었다. 또한 개나리 봇짐에 짚신을 신고 오르내리던 옛 선비 등의 역사적 향취가 어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은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사람 한둘이 간신히 다닐 정도 였으나 그후 조선 중종 때 강원관찰사인 고형산이 이 길을 사재를 털어 우마차가 다닐수 있도록 넓혀 놓았다고 한다. 대관령 옛길은 령의 중간에 위치한 반정(半程)에서 내려가는 코스와 대관령박물관이나 가마골에서 올라가는 코스가 있다. 내려가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 50분 정도이며 올라가는 데는 2시간 2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다. 옛길은 산세가 완만해 가족단위로 등산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Ⅲ. 산길여정
<대관령옛길 안내판>
- 2014. 4. 9. 17:00기준 강릉일원 날씨예보는 오전 흐리고 가끔 비가 온 후 오후 흐릴 것이라고 예보하였다. 비올확률 오전 30%대 이었기 때문에 우장을 갖춰야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일 아침 05:00기준 날씨예보는 오전 흐리고 오후 구름이 많겠다고 예보하였다. 밤사이 상황이 반전된 것이었다. 매우 고무적인 분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좋은 산행환경을 예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대관령옛길체험 참가신청은 한마디로 근래 보기 드문 호황이었다. 일찌감치 30명 선을 넘어섰었고 일주일전부터는 40명 선을 육박하면서 급기야 접수 마감하고 대기자로 접수하는 희열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버스 한 대 정원을 놓고 취소와 추가신청이 반복되면서 신청률이 오락가락하는 바람에 애를 태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출발 당일 자연스럽게 버스 한 대 정원에 딱 맞게 조정되는 우연의 일치를 맛보면서 쾌재를 불렀다.
- 도착예정시간 10:00를 10여분 상당 넘기면서 목적지인 대관령마을휴게소주차장에 도착하였다. 현장 분위기는 너무나도 썰렁하여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우리 일행 분들이 유일한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해발 800m가 넘는 눈의 고장답게 바람기는 쌀쌀하였고 음지구간은 눈이 녹지 않은 채 잔설이 얼어붙어 있어 초겨울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그 바람에 재킷을 벗어 수납하고 간편한 복장으로 입산하려던 분위기가 싹 가시면서 겨울복장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 오늘 들머리는 주차장에서 0,4km 지점 선자령입구와 0,5km 지점 국사성황당입구를 놓고 저울질 하다가 국사성황당입구로 낙점하였다. 2011. 8. 18 대관령옛길 체험 당시 선자령입구에서 입산하여 풍해조림지를 거쳐 국사성황사 경내로 진입하여 능선 국사성황사갈림길로 이어지는 탐방로는 이미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면구간을 우회하는데 따른 소요시간을 다소나마 절약해 보자는 뜻을 반영하였다. 이 상황은 버스 내에서 일정안내시간을 통하여 예고한 바 있다.
<강릉바우길 안내판>
- 10:19 선자령입구 경유
- 선자령입구는 주차장에서 0,4km지점에 있다. 여기서 진행방향 왼쪽 선자령입구로 진입하여 풍해조림지를 거쳐 국사성황사 방향으로 진로를 잡아도 되고, 0,1km 직진하여 국사성황당입구에서 국사성황사 방향이나 진행방향 오른쪽 탐방로로 방향으로 진입하여 임도를 따라 올라가도 된다. 이 지점에 바우길안내판, 등산안내도, 등산로입구 0,1km, 선자령 5,8km, 휴게소 0,4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 여기서 강릉 바우길 2구간인 대관령옛길을 소개한다. 대관령 옛길은 제민원(濟民院) 터와 원울이재(員泣峴)를 비롯하여 기관이병화유혜불망비(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 반정(半程)이 터, 1917년의 도로 준공기념비 등의 유적지가 남아 있으며 현 옛길은 원형이 잘 남아 시민은 물론 전국의 등산코스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또한 삼국시대부터 관련 지명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일원 51만9156㎡ ‘대관령 옛길’이 2012. 11. 15자로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74호로 지정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2010년에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된 길이기도 하다. 신재생에너지전시관 건너편 대관령마을휴게소를 출발해 강릉 시내를 향해 내려간다. 국사성황당을 지나 전망이 좋은 반정에서 잠시 쉰 후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가면 옛 주막터를 거쳐 바우길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종점에 다다른다. 대관령옛길은 신사임당이 어린 율곡의 손을 잡고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오갔던 길이며, 강원도 관찰사 정철이 이 길을 지나며 관동별곡을 쓰고,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던 길이다. 단원 김홍도가 이곳에서 대관령도를 그렸으며, 유네스코 세계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릉단오의 첫 제례가 대관령 산신각과 대관령국사성황당에서 열린다.
<대관령국사성황당입구 표석>
- 10:21 대관령국사성황당입구 도착
- 대관령국사성황당입구가 오늘의 사실상 등산기점이다. 이 지점에 설치된 선자령등산로안내판 앞에서 일정안내와 더불어 단체기념을 남겼다. 평창국유림관리소에서 세운 선자령등산안내도에 강릉 관할 구역인 반정까지 표기하는 아량을 베풀어 주신 덕분에 그냥저냥 일정안내를 마칠 수 있었다. 오늘 점심은 12:00를 전. 후하여 팀별로 자유롭게 먹을 것을 권고하였고, 14:00까지 대관령옛길주차장까지 하산을 예고하고 들머리에 들었다.
<국사성황사갈림길 이정표>
- 10:45 국사성황사 갈림길 경유
- 들머리에 든 후 10:30을 넘기면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 이 지점에 선자령 4,7km, 대관령 0,3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여기서 진행방향 왼쪽으로 올라간다. 여기서부터 차량통행이 가능한 임도로 이어졌다. 임도를 따라 15분 정도 완만한 사면길을 오르면 한국공항공사강원항공무선표지소에 이른다. 무선표지소를 지나자마자 곧바로 사거리 갈림길이 나왔다. 국사성황사 0.2km, 대관령 1.3km, 선자령 3,7km, 반정 1,6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진행방향 왼쪽에 있고, 제궁골 2,2km, 대관령마을휴게소 1,7km, 대관령마을휴게소 바우길 2구간 2,3km, 보광유스호스텔 바우길 2구간 10,9km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임도 오른쪽 반정 입구에 있다. 이 지점에서 반정방향으로 진입하기만 하면 오늘 진로선도는 종치는 셈이다. 안내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고 단일로 이기 때문에 엉뚱한 곳으로 빠져나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 진행방향안내표식지를 깔고 반정방향 내리막길로 들어섰다.
<국사성황사>
- 위 갈림길에서 0,2km 지점에 국사성황사가 있다. 오늘 진로를 벗어난 지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눈 팅이나마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관심 있으신 분들을 위해 관련 자료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대관령 정상에 있는 서낭당과 산신당은 강원도 기념물 제54호이다. 대관령성황당(성황사)은 대관령산신당(산신각) 서쪽 약 30m 거리에 있다. 현판에는 ‘大關嶺國師城隍祠(대관령국사성황사)’라고 쓰여 있다. 당우(사당)는 건평 5평 정도의 기와집이며, 내부 정면 벽에는 국사서낭 신상(神像)이 걸려 있다. 신상에는 백마를 타고 궁시(弓矢 : 활과 화살)를 메고 있는 서낭신과 말고삐를 잡고 있는 시종, 그리고 그 앞뒤에 호랑이가 호위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大關嶺國師城隍大神(대관령국사성황대신)’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다. 당 앞에는 서낭의 심부름을 하는 하위신인 ‘수비’를 모시는 수비당(또는 수구당)이 돌형태로 되어 있다. 현재의 당우는 1944년에 중건된 것인데, 그 역사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어도 천 년 이상 된 강릉단오제의 유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관령국사서낭은 대관령산신과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산신각은 대관령성황사에서 동북쪽에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는 지은 지 40∼50년밖에 되지 않은 것 같으나, ≪임영지 臨瀛誌≫와 ≪동국여지승람≫ 등에 전하는 대령산신(大關山神 : 대관령산신)에 대한 기록으로 보아 그 역사는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 모시고 있는 산신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조선조 광해군 때 허균(許筠)의 시문집인 ≪성소부부고 惺所覆瓿藁≫에 김유신(金庾信)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일반적으로 주민들도 그렇게 믿고 있다. 건물은 한 평 남짓한 조그만 골기와 맞배지붕의 당으로서 현판에 ‘山神堂(산신당)’이라고 쓰여 있다. 왼쪽 기둥에는 ‘應天上之三光(응천상지삼광)’이라고 씌어 있고, 오른쪽 기둥에는 ‘降人間之五福(강인간지오복)’이라고 씌어 있다. 신당 안에는 ‘大關嶺山神之神位(대관령산신지신위)’라는 위패와 함께 백발노인이 옆에 범을 거느리고 있는 산신도가 있다. 제의는 단오제 일정에 의하여 행해지는데, 음력 4월 15일 국사서낭제를 지낸다. 이 날은 대관령국사서낭과 여서낭인 정씨 집 딸이 혼배(婚配:혼인)한 날이기도 하다. 먼저 산신제를 지낸 뒤 서낭제를 지내는데, 홀기(笏記:의식에 대한 여러 절차)를 부르며 헌작(獻爵), 독축(讀祝)으로 유교식 제사를 올린 다음 서낭당 근처에 신목(神木, 신간)을 베러 간다. 그런 다음 신간과 위패를 모시고 요란한 무악을 울리면서 산을 내려와 일행은 중간지점인 구산서낭당에서 간단한 제사를 올리고 굿을 한 다음 국사여서낭의 생가인 정씨가(鄭氏家)에 잠시 들렀다가 강릉시 홍제동 대관령국사여성황사에 도착, 서낭 내외를 합사(合祠 : 둘 이상의 혼령을 한 곳에 모아 제사함.)한다. 이곳에서 5월 3일까지 부부가 함께 있고, 5월 4일부터 5월 6일 소제(燒祭 : 마지막 절차로서 제사상에 있던 신간과 호개등, 지화 등을 태우는 의식) 때까지의 남대천 단오제장에 있다가, 소제가 끝난 다음 다시 국사서낭은 대관령국사성황사로, 여서낭은 대관령국사여성황사로 각각 돌아가게 된다. [참고문헌「대관령성황당 및 태하동성황당」(임동권·최길성, 『문화재관리국민속자료조사보고서』33, 1971)『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강원도편-(문화재관리국, 1977)『한국시가의 민속학적 연구』(김선풍, 형설출판사, 1977]
- 국사성황당에 얽힌 전설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고 있었다. 정씨가에서는 나이 찬 딸이 있었다. 하루는 꿈에 대관령 성황이 나타나 "내가 이 집에 장가오겠노라"고 청했다. 그러나 주인은 사람아닌 성황을 사위삼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어느 날 정씨가 딸이 노랑 저고리에 남치마를 입어 곱게 단장하고 툇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호랑이가 와서 업고 달아났다. 소녀를 업고 간 호랑이는 산신이 보낸 사자로서 그 소녀를 모셔 오라는 분부를 받고 왔던 것이다. 대관령국사성황은 소녀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았다.딸을 잃은 정씨가에서는 큰 난리가 났으며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해서 호랑이가 물어간 것을 알았다. 가족들이 대관령국사성황당에 찾아가 보니 소녀는 성황과 함께 서 있는데 벌써 죽어 혼은 없고 몸만 비로소 떨어졌다고 한다. 호랑이가 처녀를 데려다 혼배한 날이 4월 15일이다. 그래서 4월 15일에 대관령국사성황을 제사하고 모셔다가 여성황사에서 두분을 함께 제사하게 되었다
- 성황사에서 4분 남짓 거리에 능선안부 사거리가 나왔다. 이 지점에 성황사 2km, 대관령 1.3km, 선자령 3.7km, 반정 1.6km를 알리는 이정표와 옛길안내도, 대관령 관문 안내문 등이 세워져 있다. 이 지점에서부터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여기서 영동일원과 선자령, 고루포기산, 제왕산, 발왕산, 황병산 등의 시원한 조망을 만끽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부터는 진로 선도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함께한 일행 분들을 먼저 출발시키고 휴식을 취하면서 후미 일행과 합류하였다.
<대관령옛길 반정(半程)표석>
- 11:15 반정 경유
- 반정은 강릉에서 횡계까지의 절반이라는 뜻에서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국사성황사갈림길에서 내려오면서 김시습 시비, 한원진 시비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흙길을 밟으며 유유자적하다 보니 어느새 반정에 다다랐다. 구 고속도로에 발을 딛는 순간 진행방향 오른쪽에 있는 산불예방대장군, 숲가꾸기여장군이 일행 분들을 유혹한다. 대장군과 여장군 어간이 포토 존으로 기능하고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반정까지 국사성황사갈림길에서 30여분, 들머리에서 50여분 남짓 소요되었다. 후미 팀도 1시간 전에 여유 있게 홈인하였다. 여기서 선.후미 모두가 합류하였다. 오늘 일정의 순조로움을 예고할 수 있었다. 전망대에서 동쪽을 내려다보면 율곡선생께서 손수 세 보았다는 아흔아홉 굽이의 다양한 모롱이와 강릉시 일원과 그 너머로 하늘 닿게 펼쳐 있는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오늘은 시계가 제한되어 마음속에 그려볼 뿐이었다. 이 지점에 대관령옛길 반정 표석, 국가지정 명승 대관령옛길안내도, 전망대, 대관령휴게소 3,8km, 보광유스호스텔 9,4km를 이정표, 간이화장실 등이 설치되어있다. 여기서 반정표석 좌측 단면을 관찰해 본 즉 지난 2011. 8. 18 대관령옛길 체험 당시 진주님의 돌 머리에 부딪쳐 움푹 들어간 자리가 자연치유 되어 잘 마무리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본인께서 당시의 상흔을 어루만지면서 역시 내 머리는 돌 머리야! 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보면서 웃음 짓지 아니할 수 없었다.
<기관 이병화 유혜불망비>
- 11:33 기관이병화유혜불망비 경유
- 기관이병화유혜불망비 유래는 아래 사진으로 갈음한다.
<쉼터 이정표>
- 11:46 쉼터 경유
- 쉼터에서 반정 3km, 주막터 2,04km이다. 쉼터에는 나무데크로 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 식탁이 놓여 있다. 대관령옛길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어 이 구간 최고의 밥자리로 자리매김한 듯 하였다. 우리 일행 몇 몇 분과 더불어 대관령박물관쪽에서 올라오신 분들이 선점한 상황이기 때문에 눈길만 주고 그냥 지나쳤다. 이 지점부터 점심식사 행렬이 이어졌다. 일정안내시간을 통하여 예고한 대로 삼삼오오 팀을 이뤄 자유롭게 즐기고 있는 모습이 더욱 좋아 보였다.
- 쉼터를 지나 잠시 내려오다 만나는 첫 번째 식탁설치 지점에 밥자리를 잡았다. 점심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히어리님께서 헐레벌떡 내려오시면서 스틱 지원요청을 하시는 것이었다. 영문이 궁금하여 이유를 물어본즉 오늘 동행한 처음 나오신 제니김께서 갑자기 무릎 통증을 호소하신다는 전갈이었다. 본인이 소지한 스틱 한 개를 선 듯 내주었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스틱 두 개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오늘따라 코스를 만만히 보고 스틱 한 개만 가지고 온 것이 화근이었다. 본인과 동행하시던 처음 나오신 고 미 향님께서 스틱 두 개를 선 듯 내주신 덕분에 위기를 넘기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상황파악을 위해 잠시 거슬러 올라가면서 일행 세 분을 만났다. 평소 산행을 즐기셨는데 오늘 갑자기 무릎에 통증이 왔다는 것이었다. 식사 장소까지 내려와 오랜만에 에어파스로 응급조치를 한 다음 주막터로 발길을 옮겼다.
<주막터>
- 11:57 주막터 경유
- 주막터는 성산면 어흘리 719번지이다. 여기서 대관령휴게소 6,7km, 대관령유스호스텔 6,5km 지점이다. 주막(酒幕)이란 시골 길가에서 밥과 술 따위를 팔고 나그네에게 잠자리도 제공하는 집을 일컫는다. 예전의 모습을 재연하여 쉼터 공간을 제공하고자 주막과 주변 환경을 말끔히 복원하였다. 2008. 10. 28일 전통초가집 39,6㎡를 복원하고 그 주변에 정자각, 연못, 물레방아, 식탁, 샘터 등을 조성하였다. 샘터는 이 구간 유일한 급수원이기도 하다. 샘터 옆에는 2013. 11. 5일 실시한 수질검사성적표가 붙어 있다. 내용을 확인해 본 즉 검사결과 적합이었다. 썩 내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적합이란 글귀에 현혹되어 한 바가지 듬뿍 담아 쭉 들이켜고 여유를 부리기도 하였다. 또한 이 지점은 제왕산 등산길 합류지점이기도 하다.
<원울이재(員泣峴)안내판>
- 13:44 원울이재 경유
- 쉼터와 산불감시초소 어간의 계곡 풍광이 절경을 이뤘다. 작은 소와 폭포가 연이어 어우러져 눈길을 사로잡았다. 지근거리 폭포 두 곳은 규모는 작지만 운치는 대승폭포가 서운하다고 할지 몰라도 저리가라 이었다. 산불감시초소를 빠져나오면 마을안길로 이어진다. 마을초입 우주선화장실 외관이 특이하여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 마을안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바우길 2구간 갈림길 직전에서 갈림길이 나온다. 진행방향 오른쪽 계곡의 징검다리를 건너 대관령박물관으로 내려가도 되고 직진하여 원울이재를 넘어 대관령박물관으로 내려가도 된다.
- 성산면 어흘리 대관령박물관 뒤에 있는 고개를 원울이재라고 한다. 어흘리 아랫제명이(濟民院)와 웃제명이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대관령 옛길 입구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에서 오솔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오른쪽에 조그마한 내가 나오는데 그 내를 건너면 야트막한 재가 나온다. 이 재가 원울이재이다. 이 고개를 넘으면 웃제명이다. 옛날 대관령을 오가던 고을원이 이곳에서 쉬면서 울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원울이재는 고을 원이 강릉부사로 발령을 받고 영서에서 강릉으로 올 때 길이 험해 울고, 떠날 때는 강릉의 풍속과 인정에 정이 들고 경치가 아름다워서 떠나기 싫어 울었다는 데에서 유래하였다.
<박물관주차장 전경>
- 13:53 박물관옛길주차장 도착
- 박물관옛길주차장은 대관령박물관 직전에 위치해 있다. 보행에 불편을 느끼시는 분의 보행속도를 감안하여 내려오다 보니 하산예정시간에 맞춰 입성한 꼴이 되고 말았다. 넓은 주차장은 들머리 대관령마을휴게소주차장과 동일한 상황이었다. 우리 일행이 타고 온 버스가 유일하였다. 먼저 도착하신 분들께서는 대관령박물관을 경유하신 분들도 계셨다. 대관령박물관은 외관만 살피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올라왔다. 14:00에 경포대 벚꽃잔치 축제장으로 출발할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대관령박물관 소개는 주요볼거리 편으로 넘긴다.
<경포 벚꽃잔치 축제장>
- 14:25 경포도립공원주차장 도착
- 강릉시가 주관하는 벚꽃잔치는 2014. 4. 5(토) ~ 4. 13(일)까지 경포대 일원에서 열리는 중이다. 이상고온 현상으로 개화시기가 10일 이상 앞당겨졌기 때문에 개화시기에 맞춰 당초일정을 상당기간 앞당겨 열리고 있다. 매년 4월초․ 중순경 경포대 일원에서 개최되는 벚꽃축제는 강릉시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하여 매년 많은 국․내외 관광객이 찾고 있다. 경포대(도지방유형문화재 제6호)를 중심으로 경포호수를 둘러싼 4.3㎞ 호수의 아름다움을 이어가는 봄꽃 축제 향연의 장이 펼쳐졌다. 경포대 진입로 3킬로미터에서부터 꽃 축제를 비롯한 각종 경연. 전시 등 다양한 문화예술행사가 함께 열린다. 그러나 축제기간임에도 불구하고 한물간 현장의 상황에 아쉬움을 삼켜야만 했다. 지난주를 고비로 꽃이 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나마 간간히 만개하여 절정에 이른 벚꽃나무가 섞여있어 다행스러웠고 그로인하여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 벚꽃은 벚나무의 꽃이다. 봄에 화창하게 피는 분홍색, 또는 하얀색 꽃잎이 세인의 발길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4월 초, 즉 개나리가 지고 진짜 봄이 맞구나 할 무렵에 피어서 며칠 간 나무를 뒤덮다가 꽃이 떨어지고 잎이 나며 진다. 만발할 때의 거리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워서, 이때를 위해 벚나무를 심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한반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으니만큼 지역마다 벚꽃이 피는 시기가 다르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는 날(1981~2010년 평년값)은 서귀포 지방이 3월 25일경, 부산, 대구, 포항 등지는 3월말, 전주, 대전, 강릉 지방은 4월 5일경, 서울 지방은 4월 10일경이며, 인천, 춘천 등지는 서울보다 2,3일 늦다. 과거보다 닷새 정도 일찍 피는 셈이다. 한편 신의주, 함흥 이북의 북부 지방에서는 4월 25일경, 청진 이북지방은 5월 5일 이후에 피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해발 고도에 따라서도 개화 시기가 다르다. 산간 지역의 벚나무들은 평야 지역의 벚나무들보다 5~10일 정도 개화 시기가 늦다. 벚나무를 한자로 櫻(앵두나무 앵)이라고 쓰는데 이 한자는 앵두나무를 지칭하기도 한다. 한편 벚나무의 열매는 버찌다. 영어로는 체리. 다만 우리나라에서 나는 토종 버찌는 흔히 시장이나 마트에서 사먹을 수 있는 체리보다 더 작고 색도 좀 더 어두운 편이다. 마트에서 사먹는 건 주로 미국산 체리이다. 이는 품종이 다르다. 어쨌거나 벚나무와 체리는 가까운 관계임은 분명하다. 키노모토 사쿠라가 한국판에서 체리로 개명된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벚꽃과 벚나무, 벚꽃나무라는 용어가 혼용해서 쓰이고 있지다. 벚꽃나무는 비표준어이며 벚꽃과 벚나무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한다. 헷갈리기 쉬우니 다시 정리하면 벚나무에 피는 꽃이 벚꽃이고, 벚꽃이 피는 나무가 벚나무이다.
- 벚꽃은 장미과(薔薇科 Rosaceae)에 속하는 낙엽교목이다. 벚나무는 키가 20m에 이르고, 짙은 자갈색을 띠는 수피(樹皮)는 가로 줄무늬를 가진다. 잎은 어긋나는데, 잎끝은 뾰족하며 잎의 기부는 조금 둥글다. 잎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있으며 잎자루에는 조그만 돌기가 양쪽에 하나씩 있다. 흰색 또는 연분홍색의 꽃은 4~5월경 잎겨드랑이에 2~3송이씩 모여 핀다. 꽃잎은 5장이며 수술은 많고 암술은 1개이다. 6~7월에 장과(漿果)로 익는 열매는 버찌라고 하여 날 것으로 먹거나 술을 빚어 먹는다. 흔히 벚나무속(―屬 Prunus) 식물 모두를 일컬어 벚나무라고 부르나, 열매가 핵과(核果)로 열리는 종류와 장과로 열리는 종류의 두 무리로 나누어진다. 핵과로 익는 종류로는 살구나무·자두나무·매실나무·복숭아나무 등이 있고, 장과로 익는 종류로는 벚나무·산벚나무·황벚나무·이스라지 ·귀룽나무 등이 있다. 이들은 다시 꽃이 총상(總狀)꽃차례를 이루는 귀룽나무 종류와 3~5송이씩 모여 달리는 벚나무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종류의 벚나무인지 가려내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가로수나 공원 또는 집에 흔히 심는 종류로 왕벚나무·산벚나무·수양벚나무, 그리고 이들의 겹꽃 무리가 있다.
- 경포대와 경포 벚꽃잔치 축제장 일원에서 1시간정도 소요한 다음 마지막 이벤트 행사장으로 이동하였다. 오늘 깜짝 이벤트 행사는 오늘 참석하신 분들의 뜻에 따라 현장에서 의견수렴을 통하여 성사되었다. 주문진 수산시장 자유 투어를 통하여 오늘 일정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는 보너스 행사로 치러진 셈이다. 오랜만의 바다 정취를 만끽하고자 하는 분들의 취향에 따라 똘똘이횟집 연회 팀과 자유관광 팀으로 나뉘어 1시간 남짓 소요하고 귀로에 올랐다.
Ⅳ. 주요(주변)볼거리
- 오늘 주요볼거리 편은 들머리에서 대관령신재상에너지전시관, 날머리에서 대관령박물관, 경포도립공원 내에서 경포도립공원을 비롯하여 경포호, 경포대, 오죽헌, 참소리박물관을 선정하였다. 관심 있으신 분들을 위해 대강을 소개한다.
<대관령신재생에너지전시관>
- 오늘 들머리는 대관령마을휴게소(예전 대관령하행휴게소)주차장이다. 예전 하행휴게소주차장 한편에 자리한 대관령신재생에너지전시관을 둘러보지는 못하고 지나쳤지만 대강을 살펴보고 넘어간다. 대관령 신재생에너지전시관은 2005년 11월 개관하였다. 구 영동고속도로 하행선에 있는 휴게소 건물을 개축한 것으로 총면적 1,360㎡에 지하 1층 지상1층 건물이다. 풍력발전의 역사와 원리, 우리나라 에너지 현황과 신재생에너지 국내 최대 규모의 대관령 풍력발전단지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전시관으로 주로 풍력 발전 관리 등을 알기 쉽게 설명하는 전시관으로 주로 풍력 발전에 관한내용을 소개한다. 태양열, 곤충, 물, 자동차, 바람악기, 바람농구를 비롯해 바람강도느끼기, 자전거 페달을 이용한 전기 만들기 등을 체험하면서 미래 에너지의 원리를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전시관 외부에는 태양열 발전기가 있다. 관람료는 무료이다.
- 풍력발전의 원리는 바람이 갖고 있는 운동에너지를 기계에너지로 1차 변환한 후 다시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것이다. 일정 속도의 바람만 불면 어느 곳에서나 발전이 가능하며,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초속 3m/s이상의 바람만 불면 자동으로 돌아간다. 날개에 의해 변환된 바람의 힘은 동력전달장치를 통해 발전기를 돌려 전기로 변환된다. 또 바람의 세기에 따라 고감도 센서가 풍력을 측정, 발전량을 제어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전기는 전력선을 통해 공장과 가정에 공급되며, 소규모 독립형 전원의 경우에는 축전지에 저장되어 일반 수요자에게 공급된다.
<대관령박물관>
- 대관령박물관은 백두대간 능선을 병풍삼아 대관령 중턱에 자리잡은 박물관이다. 자연과 어울리는 단아한 모습의 이 박물관은 1993년 5월 홍귀숙 관장이 사비를 들여 문을 열었다.
홍귀숙 관장은 일찍이 소장품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었는데, 2003년 2,000여 점의 소장품과 박물관 건물을 강릉시에 기증함으로써 문화재의 사회환원을 실천하였다. 강릉시에서는 기증자의 뜻을 기려 기증 전과 같이 기증자가 수집한 자료로만 박물관 전시실을 꾸며 놓았다. 박물관 전시실은 네 방위를 수호하는 사신의 이름을 따, 청룡방·백호방·주작방·현무방으로 구분하였으며, 현무방과 청룡방 사이에 토기방·청룡방과 주작방 사이에 우리방을 두었다.
<경포대도립공원>
- 1982. 6. 26 경포도립공원으로 지정(면적 9.471㎢, 강원도 고시 제90호) 되었으며 수려한 자연환경과 함께 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특히 보물 제183호인 해운정을 비롯하여 중요민속자료 5호인 선교장, 관동 팔경 중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경포대가 있다. 또한 최고의 문장가(허균, 허난설헌)가 출생한 장소가 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포호수와 우거진 송림, 경포해변을 비롯한 여러 해변이 있어 사계절 관광을 할 수 있는 관광지이다. 호수 주변에는 자전거 도로 및 산책로 등이 있어 바쁜 생활 속에서 지친 현대인의 휴양과 생활의 활력소를 찾는 데에 더없이 좋은 장소이며 주변의 여러 관광지와도 연계가 잘되어 있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항시 관광을 할 수 있는 국내 최고의 관광지이다
<경포호>
- 경포호는 경포대를 중심으로 호반에 산재한 역사적 누정(경포대, 해운정, 경호정, 금란정, 방해정, 호해정, 석란정, 창랑정, 취영정, 상영정)과 경포해변 및 주변에 울창한 송림지대를 일괄하여 일컫는다. 옛날에는 둘레가 12km나 됐다고 하나 지금은 4km 정도이다. "수면이 거울과 같이 청정하다"해서 경포라 하였다. 일명 군자호(君子湖)라고 전하는 것은 인간에게 유익함을 주는 데에서 붙여졌다. 호수에는 잉어, 붕어, 가물치, 새우, 뱀장어 등 각종 담수어가 서식하고 각종 철새들의 도래지이다. 그리고 부새우가 많이 잡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입맛을 돋워 주고 있다. 또한 적곡(積穀) 조개가 나는데 흉년이 드는 해는 많이 나고 풍년이면 적게 난다고 해서 이름 지어졌다. 민초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이며,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을 고스란히 간직한 경포호는 달과 애환을 같이 했다. 그리고 명주의 옛 도읍지가 바로 지금의 경포호 자리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 경포대에서는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다.
► 하나는 하늘의 달이요,
► 둘은 호수의 달이요,
► 셋은 바다의 달이요,
► 넷은 술잔의 달이요,
► 다섯은 님의 눈에 비친 달이 자리 잡는다.
- 옛날 이곳에 모녀(母女)가 살았는데 하루는 노승이 시주를 청하니 철이 없고 성질이 괄괄한 딸이 인분을 떠서 노승이 들고 있는 쪽박에 던졌다. 노승은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받아 들고 돌아섰는데 이 사실을 안 어머니가 허겁지겁 노승을 쫓아가 딸의 무례함을 사과했더니 『너의 집 문 앞에 키가 넘도록 물이 차리라 어서 몸을 피하여라』라는 말을 남기고 노승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해질 무렵이 되니 노승의 말대로 명주도읍지의 일부가 물바다로 변하면서 많은 가축이 떼죽음을 당했다. 물을 피하여 달아나던 어머니가 문득 집에 있는 딸 생각이 나서 물을 헤쳐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몸이 굳어 만들어진 애미바위가 호수 한 가운데 있다. 또한 옛날 경포호 자리에 큰 마을이 있었고 인색하기로 소문난 최부자가 이 마을에 살고 있었다. 한번은 도사(都事 : 지금의 군수)가 사람을 보내어 동냥을 청하니 욕설을 퍼붓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이 소리를 전해들은 도사는 끓어오르는 분을 참고 자신이 중으로 변장하고 최부자 집을 찾아 시주를 청했더니 최부자는 시주 대신 도사를 동구 밖의 나무에 묶어 놓았다. 그런데 최부자집 문 앞에는 여전히 시주를 청하는 도사가 서 있지 않는가? 최부자는 화가 나서 『저 중놈에게 인분 한줌을 주어서 내 쫓아라』하고 소리 쳤다. 심부름꾼이 최부자의 말대로 하였더니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면서 물이 솟아올라 마을이 호수로 변하고 최부자집 곡간에 쌓아 두었던 곡식들이 모두 조개로 변했다고 한다.
지금도 경포호에서 나는 조개를 적곡(積穀) 조개라고 부른다.
<경포대(鏡浦臺)>
- 강릉 경포대(鏡浦臺)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고려 충숙왕13년(1326) 강원도 안렴사(按廉使) 박숙(朴淑)이 현 방해정(放海亭) 뒷산 인월사(印月寺) 옛 터에 처음 지었던 것을 중종 3년(1508)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현 위치로 이전한 후 영조 18년(1742) 부사 조하망(曺夏望)의 중수를 비롯한 수차례의 중수가 있었다. 앞면 5칸 · 옆면 5칸 규모로 단층겹처마 팔작지붕(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이다. 모두 48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졌으며 마루의 높이를 달리하고, 경포호를 바라보는 정면의 모서리에 2층 누대를 꾸며 상좌(上座)의 자리를 만들어 입체면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익공양식에 2고주 5량 가구(架構 - 여러 재료를 결합하여 만든 구조)이며,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대호(臺號)인 경포대의 전자액(篆字額)은 유한지(兪漢芝), 해서액(楷書額)은 이익회(李翊會)의 글씨이고, 정자안의 「第一江山」은 주지번(朱之蕃)또는 미불의 글씨라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누대 천장에 율곡선생이 10세에 지은 ‘경포대부’(鏡浦臺賦)를 비롯하여 숙종의 어제시(御製詩 - 왕이 직접 지은 시)와 여러 명사들의 기문(記文), 시판(詩板)등이 걸려있다. 경관을 감상하기에 좋은 위치에 맞추어 높낮이를 설정하고, 다양한 행사에 따라 공간을 나누며, 시각의 연속성이 요구되는 곳에 적절히 공간 형태를 부여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 경포8경
1. 녹두일출(綠豆日出)
녹두정에서 동해의 일출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며, 옛 한송정으로서 현 강릉비행장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경포대의 정동(正東)을 가리킨다.
2. 죽도명월(竹島明月)
호수 동쪽에 있는 섬모양의 작은 산으로서 산죽이 무성하여 죽도라고 불렸는데 현 현대호텔자리이다. 동쪽 수평선 너머에서 솟아오르는 보름달의 달빛이 죽도의 대나무 사이를 뚫어 그 빛이 호수에 비칠 때 일어나는 그림같은 장관을 죽도명월이라 하였다.
3. 강문어화(江門漁火)
강문은 경포대에서 동쪽 호수 하구에 있는 곳으로서 호수와 바다를 상통교류 하므로 강문이라고 했다. 오징어 잡는 고깃배의 불빛이 마치 항구의 불빛처럼 휘황찬란하게 보이는데, 그 빛이 바다와 호수에 영도되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4. 초당취연(草堂炊煙)
초당은 호수의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지세가 호수와 바다보다 낮은 듯 보인다. 해가 서산마루 시루봉에 기울어질 무렵이면 집집마다 저녁을 짓는데 이 때 가가호호마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하얀 연기가 노을에 물들어 평화로운 농촌을 연상케 하는데 그 평화로운 아름다움을 말한 것이다.
5. 홍장야우(紅粧夜雨)
홍장은 조선 초기에 석간 조운흘 부사가 강릉에 있을 즈음 부예기로 있었던 여인이었다. 어느 날 모 감찰사가 강릉을 순방했을때 그를 극직히 대접한 홍장은 감찰사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감찰사는 뒷날 홍장과 석별하면서 몇 개월 후에 다시 오겠다고 언약을 남기고 떠나간다. 떠나간 님은 소식이 없고, 그리움에 사무친 홍장은 그만 호수에 빠져 죽게 된다. 이 때부터 이 바위를 홍장암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개 낀 비오는 날 밤이면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전한다. 꽃배에 임을 싣고 가야금에 흥을 돋우며 술 한잔 기울이던 옛선조들의 풍류정신을 회상하기 위한 기념으로서의 일경이다.
6. 증봉낙조(甑峰落照)
해가 서산마루에 기울어질 무렵이면 채운이 시루봉(경포대 북쪽에 있으며, 그 생긴 봉우리 모양이 시루와 비슷하다) 북쪽 봉우리에서 경포 호수에 반영되는 일몰의 낙조가 잔물결에 부서지는 아름다운 광경을 말한다.
7. 환선취적(喚仙吹笛)
신선경인 듯 하면서도, 속세를 떠난 속세인 듯 하면서도 신선경으로 생각되는 곳에 옛신선들이 바둑 놓고 피리불며 즐기던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을 말한다.
8. 한송모종(寒松暮鍾)
한송정은 지금의 비행장 동쪽에 있다. 신라불교의 중흥기에 한송정에서 해질 무렵 치는 종소리가 경포호의 잔물결을 타고 신선이 놀던 경포대까지 은은히 들려오던 옛 정취를 회상한 것이다.
<오죽헌(烏竹軒)>
- 江陵 은 1536년(중종31년)율곡 이이선생이 탄생한 곳으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 사랑채로 우리나라 주거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축물이다. 세종조(世宗朝)당시 공조참판과 예문관 제학의 벼슬에 오른 강릉 12향현 중의 한 분인 최치운에 의해 건립된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별당 사랑채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처음 오죽헌이 지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600여 년 전이다. 오죽헌을 정면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오른쪽 한칸은 온돌방으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 방이 바로 율곡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다. 최치운은 이후 오죽헌을 아들인 최응현에게 물려주었고, 최응현은 다시 그의 사위인 이사온에게 물려주었으며 이사온은 그의 사위인 신명화에게 물려 주었으며 이때 율곡 이이가 태어났다.
<참소리박물관>
- 참소리축음기박물관은 설립자 손성목관장이 소년시절 선친으로부터 받은 축음기가 인연이되어 한평생을 축음기 수집가로서 목숨을 건 위험속에서 세계60여개국을 돌며 수집한 축음기및 뮤직박스, 라디오,TV 4,000여점과 관련자료 15만여점이 전시되어 있는 소장품 규모면에서 세계 최대의 박물관입니다. 1982년 강릉시 송정동에서 “참소리방”으로 설립된 이래 약3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가이드의 안내로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으며, 음악감상실에서는 최신오디오시스템으로 음악 감상을 할 수 있다. 참소리축음기박물관은 1,320여 평방미터 규모로 전시품의 성격에 따라 4개의 독립 전시관과 330여 평방미터 규모의 전용 음악감상실이 있으며 3층에는 경포호수를 감상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Ⅴ. 특기사항
- 주문진 수산시장 자유 투어
► 똘똘이횟집 연회 팀 : 30명(1인당 20,000원 갹출)
► 자유 관광 팀 : 15명 (수산시장 일원소요)
Ⅵ. 산행을 마치고
- 오늘도 지난주에 이어 날씨 덕을 톡톡히 본 일상이었다. 기상상황이 급변하는 바람에 비 소식이 아주 멀리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총무님의 기도가 통했거나 참석하신 분들의 평소 쌓은 덕이 많았던 것으로 그 공을 돌린다. 제1부 대관령옛길 체험, 제2부 경포 벚꽃잔치 축제장 관람을 연계한 행사가 쉼 없이 이어졌지만 예정된 시간대에 무리 없이 모든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음에 감사드린다. 벚꽃잔치 현장의 상황이 여의치 않아 탄성의 외침은 멀리 사라졌지만 요즘의 급변하는 기상상황을 다소나마 이해해 주신 덕분에 숙였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일정운영에 적극 협조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리면서 오늘 일상정리를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