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小傳」 편집자 윤상홍 글 퍼옮(예안중 15기 카톡방 금창석동기 올린글 다운받음 2020.11.20)
<12회>退溪小傳
■生活人으로서의 退溪
언젠가는 제자들이 선생의 뜻을 어기고 생일잔치를 베풀려고 술잔을 올리니 퇴계는 제자
들의 술잔을 굳이 사양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어머님이 생존해 계실 때에 집이 가난하여 생일잔치를 한 번도 차려드리지 못
했었는데, 어머님이 돌아가신 지금 와서 불효막심했던 내가 무슨 면목으로 그대들의 축하의 술잔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대들의 성의만은 고맙게 여기나 양심이 괴로워서 이 술잔만은 받지 않기로 하겠다.」
그렇듯이 효성이 극진한 퇴계였었다. 아니 아들로서 효성이 극진했을 뿐만 아니라, 지아
비로서도 성실하기 그지 없는 남편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제자들에게 항상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조강지처불하당(糖糠之妻不下堂)이라는 옛 글이 있기도 하거니와 누구나 정처(正妻)를 반
드시 소중히 여겨야 하는 법이다. 세상에는 자기 아내를 박대하는 사람이 간혹 있는데 내외간의 정의(情)가 어찌 그래서야 쓰겠느냐 부부란 모름지기 서로 도(道)로서 대하며 예(禮)를 잃어서는 못 쓰는 법이다.」
퇴계는 21살 때에 김해 허씨(金海 許氏)에게 첫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인 허씨댁은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다. 그 당시 퇴계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끼니를 이어가기가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처가의 재물을 넘겨다본 일이 없었다. 어쩌다가 처가에 갈 때에도 항상 여원을 타고 다녔다.
처갓댁에서 그 점을 매우 가긍(可矜)
하게 여겨서 살찐 말을 한 필 내주면서
[자네가 타고온 말은 너무도 여위어서 볼품이 없으니 이제부터는 이 말을 가져다가 타고 다
도록 하라.」
하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퇴계는 그 말을 끝끝내 받지 아니 하고 집에서 기르는 여윈 말을 타고 다녔으니 그
한 가지 사실만 보더라도 그가 재물에 얼마나 청렴결백했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자식들에게 대한 아버지로서의 퇴계의 태도는 어떠했던가.
그는 서울에서 벼슬을 살고 있을 때 고향에 있는 큰 아들 준(寯)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속에 나타나 있는 아버지로서의 퇴계의 참된 모습을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아들에게 공부를 권장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부를 하는데 어찌 때와 장소를 가리겠느냐. 서울에 있으나 시골에 있으나 사람이란 오
직 학문을 닦아 뜻을 바로 세우는데 있을 뿐이니 모름지기 너는 날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귀중한 시간을 헛되게 보냄이 없도록 하여라. 너는 본래부터 공부에 뜻이 착실하지 못하다.
만일 공부를 아니 하고 세월을 헛되게 보내면 나중에는 공부를 아주 폐하게 될 것이니 모름지기 너는 조카 완(完)이나 또는 독실한 뜻을 가진 친구와 더불어 책을 짊어지고 절에 들어가 한겨울동안 부지런히 공부하여라.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빨라 한 번 가면 따르기 어려울 것이니 천만 번 마음에 새겨 함부로 하지 말지니라. 하기는 너는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여가에 제사도 받들고 살림도 돌아 보아야 하므로 마음이 흔들리고 정신이 흐트러짐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임을 나도 짐작은 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먹고 어떤 경우에도 뜻한 바 본심을 허트려서는 안 된다. 만일 세상의 속된 일에 얽매어 공부할 뜻을 포기해 버린다면 마
침내는 쓸모없는 사람밖에 못될 것이니 어찌 경계하지 않겠느냐.」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공부에 힘써 주기를 당부하는 정성이 여실히 나타나 있는 편지다.
어떤 편지에서는 공부하는 방법까지 이렇게 알려 주었다.
「…직장에 나가더라도 틈이 있는대로 책도 읽고 글씨도 쓰는 것은 진실로 좋은 일이다. 회암(晦庵)의 책은 다만 베끼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또한 모름지기 깊이 새겨서 궁구해야 할 것이니라. 그래서 혹 모르는 곳이 있으면 표를 해두었다가 남에게 물어보는 것이 옳으니라.」
또 어떤 편지에서는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몽아(蒙兒, 손자)는 아직도 집 안에 박혀 있다니 그래서는 안 된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남자는 열살이 되면 스승에게 나아가 밖에서 살아야 한다는데 이제 그 아이는 나이 열서
너 살이나 되었으면서 바깥에 나가지 않아서야 되겠느냐. 또 들으니 우리 집에 무당이 자주 드
나든다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 가법(家法)을 매우 해치는 일이다. 그와 같은 미신은 어머
니 때부터 전혀 숭상한 일이 없었고﹐ 또 나도 그들이 드나드는 것을 허락한 바 없었는데﹐ 그것 역시 옛 어른들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가법을 존중히 여겼기 때문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네가 어찌 그러한 뜻을 모르고 무당들의 출입을 허락하고
있느냐」
또 재물을 탐내지 말고 정도(正道)를 걸어가야 한다는 것도 편지 속에서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불의(不義)의 물건은 초개같이 버려야 하느니라. 무릇 선비는 일상생활을 소박하게 해나가면서 항상 담담한 마음으로 욕심을 버려야 한다. 학문을 닦고 뜻을 바로 가지는 데는 정성이 없고, 재물을 탐내는데 눈이 어두워지면 그것은 속인들과 다를 바 없으니 그래 가지고서야 어찌 선비의 기풍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물론 사람으로서 살림살이는 하지 않을 수가 없는 열이다. 그리 살림살이를 해 나가면서도 항상 학문을 닦아 선비의 체모를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지금 사람들이 배우는데 별로 힘을 쓰지 아니 하면서도 그런대로 선비의 체모를 꾸려나가는 것은 타고난 재질이 대개 총명하기 때문이리라. 만약 타고난 재질이 둔하면서 공부조차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릴 것이다. 나는 요새 와서 네가 의리를 제대로 분간하지 못함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은 나의 타고난 자질이 너무 편벽된 까닭일 것이다. 내가 이런 애기 하는 것은 너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 스스로가 네 부족한 점을 올바로 깨달아서 공부에 더욱 정진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인 것이다. 가난하고 궁한 것은 선비로서 당연한 일인데 어찌 그런 것을 가지고 마음을 꺼려하느냐. 너의 아버지도 평생에 그런 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일이 많았건만, 오직
굳게 참고 스스로 수양을 해가면서 하늘의 뜻에 쫓아가려고 꾸준한 노력을 기우려 왔을 뿐이로다.」
아들에게 인생행로(人生行路)를 타이르는 훈시의 내용은 추상같이 준엄하면서도 그 표현에는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어서 읽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그러한 편지를 받아보고 어느 아들이 감동을 하지 않을 것인가.
퇴계는 남에게 선물 받는 것을 지극히 꺼려하였다. 그가 안동 부사로 임명되었을 때의 일이다.(사퇴하고 부임은 하지 않았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자기 집에 혼인 잔치가 있었다고 하면서 소고기를 선물로 가지고 온 일이 있었다. 퇴계는 사양을 하다 못해 두고 가라고 일른 뒤에 그 사람이 돌아간 뒤에 곧 사람을 시켜서 돌려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지간에 정으로 주는 선물만은 사양하지 않고 고맙게 받았다.
퇴계가 고향에 있을 때 그의 아들 준이 봉화에서 찰방(察訪) 벼슬을 지내며 아버지에게 여러 가지 물건을 보내온 일이 있었다.
퇴계는 그 물건을 받고나서 심부름군이 돌아가는 편에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써 보냈다.
「여러 가지 보내준 물건은 잘 받았다. 그러나 너의 벼슬은 본래 얕고 구차한 자리여서 설혹
생활하고 남는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다지 많지 못할 것인데, 이제 많은 물건을 보내 주었
으니 내 마음이 매우 불편하구나. 대개 조그마한 음식 같은 것이라면 큰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만약 내게 보내주기 위해 옳치 못한 짓을 했다면 그것은 벼슬하는 사람으로서 깨끗한 마음가짐이 못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습관이 되면 뒷날에 수습하기 어렵게 될까 몹시 걱정스렵다. 요사이 조상의 음덕으로 수령 벼슬을 얻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함부로 행동하여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취하고 백성들의 어려움은 조금도 돌보지 아니 하니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없는 노릇이로다. 민심(民心)이 천심(天心)이라고 백성들은 일견 어리석은 듯 하면서도 옳고 그른 것을 명백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니 너는 그 점에 각별히 경계하여 추호도 양심에 꺼리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너는 부모에게 그릇된 물건을 많이
보내주기 보다도 옳은 길을 걸어나가는 것이 다시 없는 효도의 길이니, 깊이 명심하기 바
란다.」
실로 폐부를 찌르는 듯이 간곡하고도 사랑이 넘친 훈교였다.
<12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