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을 향한 인종차별]
혹시 인종차별을 겪었거나, 행했거나, 사례를 접한 적이 있는가? 나는 인종차별의 범주가 사람에게 직접적인 차별을 하며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그들에 대한 혐오심을 느끼거나 몰래 표출한 것까지도 해당한 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코로나가 중국 우한에서 시작되며 특히 서양에서 동양인을 상대로 한 무자비한 차별이 대두된 적이 있었다. 이에 따라서 서양이나 미국 쪽에서 학업에 전념하고 있는 한국의 많은 유학생이 다시 모국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또한 약 십년 전쯤 ‘살색’이라는 표현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인종의 피부색을 우리의 색깔만이 옳다는 무의식중의 차별을 야기시키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연주황색’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살색이 연주황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으며, 어린이집 선생님이 색연필 색을 살색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해서 반 애들이 놀랐던 기억이 있다. 이렇듯 우리 주변에는 알게 모르게, 인류의 역사 속에서도 ‘인종차별’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솔로몬 노섭의 ‘노예 12년’은 미국의 1800년대에 흑인들이 노예로 취급받으면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는지 본인의 경험과 더불어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가 대다수의 피부가 하얀 사람들에게 뇌리 속에 깊게 박혀있었고, 흑인들은 그들에게 말, 소, 돼지 보다는 똑똑하고 값이 나가는 짐승 정도로 취급되었다. 피부색만으로 한 인격체를 판단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였다. 솔로몬은 흑인으로 이미 노예제도가 폐지된 뉴욕주 미네르바에서 태어나 자유인의 몸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1840년 언저리에 불법적으로 노예 상인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에는 자유인을 노예로 파는 것이 철저하게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악랄한 버치의 손에 넘어가고 참 기발한 고문 도구들과 함께 가축 대우를 받는다. 이때 미국의 북부 사회에서는 노예제도가 아직 남아있었기에 꽤 많은 백인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 흑인들을 북부 쪽으로 납치해 많이 팔아넘겼다.
솔로몬 노섭은 노예 ‘플롯’으로 불리게 된다. 백인들은 그의 개인사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멍청하고 개 같이 일을 해줄 사람이 맞는지만 판단한다. 그가 자기 노동력을 제공한 첫 번째 주인 포드는 앞으로의 주인들보다 꽤, 아니 많이 과분하도록 친절한 사람이었다. 자기 노예들을 아껴서 그들의 능력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고 사람대우를 해 주었다. 그들을 위해 안식일에는 쉬게 해주고 본인이 직접 설교도 해 노예들의 신앙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인으로서의 단점은 노예제도가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플롯이 온 지 일 년 반이 되었을 때 재정 상태가 나빠져 이상한 주인들에게 보내야만 했다는 것이다. 노예들도 재산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들도 팔아야 했다.
두 번째 주인은 티비츠와 포드의 친척이다. (포드의 친척이 플롯을 빌려 가면서 사용했기에 주인을 두 명으로 치겠다.) 티비츠는 괴팍한 목수로 플롯이 더 솜씨가 좋다는 이유로 채찍질하기도 하고 모든 흑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대놓고 무시했다. 포드의 친척은 자기 노예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일삼았고 흥미로운 점은 포드와 마찬가지로 설교를 해주었는데 결론은 항상 본인에게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마지막 주인 에르윈 엡스이다. 주인들이 다 도긴개긴이긴 하지만, 내가 보았을 때 얘가 제일 악질이다. 노예 플롯이자 자유인 솔로몬 노섭이 증언하기를, 이 사람 밑에서 일하면서 채찍 소리가 들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한다. 아들이 노새를 타고 다니며 죄 없는 노예들을 때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어린 노예를 겁탈하는 더러운 인간이다. 그래도 평소에는 조용하고 소심하게 지내는 편인데 술만 마시면 사람이 완전히 돌변하며 눈에 불을 켜고 노예들의 일을 지켜보거나 춤을 죽을 때까지 추도록 요구하거나 등에 평생 흉이 지도록 때린다. 집안의 수많은 물건을 깨는 건 기본이다.
노예제도는 1863년 1월 1일, 애이브러햄 링컨에 의해서 폐지되었다. 그때까지 노예들은 인간으로 취급되지도 않았고 항상 부당한 처사에도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나서도 흑인들에 대한 백인들의 차별은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몇 년 전 백인 경찰이 도로에서 흑인을 체포하다가 죽여버린 일이 일어났다. 체포할 때 행하는 행동보다는 훨씬 폭력적인 자세로, 주변 시민들이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두 무릎으로 흑인의 머리를 누르다가 결국 그 흑인은 사망했다.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2000년대에도 계속해서 흑인을 향한 차별은 계속되었다. 노예제도는 사라졌지만, 인종차별 문제에 대한 인식개선은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흑인에만 한정되지 않고 동양인에게도 인종차별을 한다. 미국과 서양의 역사에는 피부색이 검고, 개발되지 않은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노예로 다루었다.
노예들은 잘못이 없는데도 채찍에 시달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하루 안에 목화솜을 100kg 이상 모아오지 않아도 맞았고, 만약 더 많이 모아오면 다음에는 그만큼 모아야 하는 솜이 늘어난다. 100kg의 목화‘솜’, 얼마나 많은 양인지 상상이 가는가? 노예들은 주로 농사나 집안일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했는데, 크리스마스에 최소 삼일 정도 쉬는 것이 그들의 유일하게 온전한 휴식 시간이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농장에는 감독관이라는 직책이 있었는데 같은 흑인들로, 동료 노예들을 감독하며 때릴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제대로 때리지 않으면 감독관이 맞았다. 플롯 또한 이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다. 얼마나 끔찍한가? 동료가 크게 잘못한 것이 아닌 것을 앎에도 때려야 하고 채찍의 고통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동료와 자신을 억누르며 때려야 하는 이 상황이.
플롯은 좋은 백인 목수를 일하면서 알게 되어, 그에게 최측근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다. 그로 인해 플롯은 노예에서 탈출하게 된다. 다시 자유인이 된 것이다. 하지만, 주인 엡소의 집에 동료 노예들을 두고 와야만 했을 때, 솔로몬 노섭은 정말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자신은 탈출했지만 노예 생활을 함께했던 다른 흑인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만약 주인이 에솝이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노예는 악랄하고 교활하고 폭력적인 주인을 섬겨야 했다. 그들을 사용하고 부릴 사람은 에솝이 아니더라도 에솝의 아들, 손주, 증손주까지 이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백인들은 노예를 부리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을 것이다. 계속해서 선조들과 주변인들은 노예를 부렸기 때문이다. 흑인은 가축과 같은 게 당연한 줄 알았다. 피부가 검기 때문에. 본인들의 피부는 하얗고 깨끗하지만 흑인들의 피부는 검고 더러워서 그들을 노예로 부렸다. 백인들은 흑인들을 향한 차별의 시선을 대물림해주었다. 그 차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시키니까 노예를 부렸고, 커서는 본인의 온전한 생각으로 착각하며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마음껏 흑인을 부렸다. 백인들은 악랄하게 흑인을 다루는 것을 자랑하며 지냈고, 노예들이 벌어다 준 돈으로 먹고살았다.
그렇다고 흑인은 차별이라는 이슈에 민감해서 인종차별을 아예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자, 흑인은 동양인을 차별했고, 동양인은 흑인을 차별했다. 최근에 백인은 아일랜드 사람들까지 차별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들이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인종차별의 악순환은 계속된다. 본인과 다른 인종이라는 이유로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면서 차별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인종차별의 악순환은 뿌리 뽑아야 한다. 피부색은 본인이 결정하지 않았는데도 본인의 ‘살색’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차별을 하는 것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솔로몬 노섭의 ‘노예 12년’이 가지는 의미는 크고 대단하다. 이 책은 노예제도를 폐지하자는 폐지론자들을 지지하는 아주 좋은 자료가 되었다. 솔로몬 노섭이 직접 겪고 쓴 글이고, 풍부한 자료가 있기에 진정한 흑인 문학으로 인정받았다. 그 당시의 노예제도에 관해 쓴 글들은 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들이 상상해 쓴 소설이나 백인들의 노예에 대한 이점을 늘어놓은 소설밖에 없었다. 그에 반하여 본인이 직접 겪은 일을 다룬 책은 ‘노예 12년’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책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이름은 가명이 아닌 실명을 사용한다. 저자의 이름도 확실하게 밝힌다. ‘솔로몬 노섭.’
안타깝게도, 흑인을 향한 인종차별은 아직 뿌리뽑히지 못했다. 인종들 간의 차별도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살색’이 이렇게까지 이슈화되어 차별적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게 정당할까? 특히 흑인을 차별하며 막 다루었던 1800년대 미국의 백인 사회를 약자였던 흑인의 입장에서 기록하는 ‘노예 12년’은 본인의 경험을 적나라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한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종차별은 항상 우리와 함께했다. 이제, 인종차별에서 벗어날 때도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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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들이 받았던 대우에 초점을 두다 보니까 줄거리 요약이 많아져서,, 지루해 졌을 수도 있는데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