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俯溪堂 百一歲宴 詩軸序(癸丑)
(부계당 백일년주연 시축서 1973)
「昔晉獻文子成室而張老作頌以賀之君子以爲善頌善禱盖以其不爲虛過而得其實也夫俯溪堂惟我先祖祭室而凡四度修矣然頹敗荒落患無以處之也族大父茶嵒公以豪傑之姿出入全齋任先生門恢恢有幹局一日唱于宗曰吾姓之盛素稱南州而惟此一室不可任其傾頓欲復舊物必自建此堂始何不思所以重建之策耶乃以癸酉春着役而獨任賢勞至冬落之盖堂搆之制用工字形成之也中三間燠室之左右八間凉軒之但割右半而室焉一堂之成而齋宿之室聚族之堂肄業之所於是而具備矣若其爲景東臨滄溟西對天冠几席間呑吐灝氣岳色則胸襟爲之開豁而爽然且前赴長川曲曲泓潭靑淸照人雨後如萬雷裂壑又如垂珠噴雪南土人屈指佳水必以此爲先夫謂之吾魏長占之物亦非過語也往癸酉堂成之一周甲也其時且設周甲之宴而無文字可以考跡焉今則一鄕之士林與吾姓參是宴者可至千人或歌呼以樂之或頌詩以賀之各志當日之所懷輒成卷軸且夫習讀公子姓之居邦內者各以其誠捐金以資宴費而又有羨額聯名結冊以爲壽傳計鳴呼此堂之廢興存亡實是吾門之盛衰係焉惟願吾宗每思祖先所以肯構之意與夫所以敎戒之訓儕宿以誠聚族以和肄業以勤燕賓客以豊厚永保家門之聲名則不患堂之不修而惟患心法之不守也然則將以嗣宴來百傳之千歲庶可執算而待之矣鳥可以爲寥寥一冊子而棄之堆紙之中不思所以寶藏之哉今百一歲之宴茶嵒公之曾孫容喆尸其事而謂余有一日之長請一言弁之迺書此以備堂中故事且復勉諸族言」
<해설> 옛적에 진나라 헌문자(獻文子)가 집을 이루매 장로(張老)가 송(頌)을 지어 하뢰하니 군자가 말하기를 선송선도(善頌善禱)라 하였으니 대개 그 허찬(虛贊)이 아니고 그 실(實)을 얻음이로다. 무릇 부계당은 우리 선조의 제실(祭室)인데 그동안 네 차례 닦았다. 그러나 퇴패하고 황락하여 유지할 수 없을까 걱정됐다. 그런데 족대부 다암공이 호걸로 전문 중에 출입하여 넓고 넓은 간국(幹局)이 있었다.
어느 날 종족에게 선창하기를 우리 성씨의 흥함은 본래 남주에 알려졌는데 이 일실을 그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공은 재실을 놔둔 채 보수해가지고는 안 되고 새로 짓는다는 정도로 중건(重建)할 계책을 세우자며 계유년 봄에 착역(着役)하여 홀로 현로(賢勞)를 맡아 겨울에 이르러 낙성을 마쳤다. 당의 구조는 공자형(工字形)으로 만들어 가운데 3칸은 환실(煥室)로 만들고 좌우의 8칸은 양헌(凉軒)으로 하였다.
그렇게 하되 오른쪽 반을 나누어 방을 만들었으니 1실이 재숙(齋宿)의 실과 취족(聚族)의 당과 이업(肄業)할 곳이 갖추어졌다. 부계당의 경관도 참으로 수려하다. 동쪽으로 창명(滄溟)에 임하고 서쪽으로 천관을 대하여 궤석간(几席間)에 호기(灝氣)와 악색(岳色)을 분토하여 흉금이 개활(開豁)하고 상연(爽然)하다. 또한 앞으로 달려간 장천은 굽이굽이 흐르고 담수는 맑아져서 사람을 비추며 비 온 뒤에는 만뢰가 골짜기를 찢은 듯 하고 혹은 구슬을 드리워 흰 눈을 뿌린 것 같으니 남주의 인사들이 가수를 손꼽아 으뜸을 삼는다.
진실로 우리 위씨가 장점(長占)한 물(物)이라 일러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지난 계유년은 당을 이룬지 한 주갑(周甲)이다. 그 때도 주갑의 잔치를 베풀었건만 문자(文字)로 가히 자취를 고증할 수 없었기에 다시 일향의 사림과 오성(吾姓)을 초대해서 잔치를 베푼다. 모두 흥겨워 노래 부르고, 시 지어 당일의 소감을 기록하여 권축을 마련했다. 또한 습독공의 자성(子姓)이 방내(邦內)에 거주한자도 각각 그 성으로서 연금(捐金)하여 연비(宴費)를 도왔다. 선액연명(羨額聯名)의 책자를 만들어 수전(壽傳)의 계(計)로 삼았도다.
명호라! 이 당의 흥폐존망은 실로 오문의 성쇠가 매었으니 원컨대 오종은 매향 조선의 긍구(肯構)하는 뜻과 교계(敎誡)하는 훈을 생각하여 재숙에 성의를 다하고 족을 모으고 화목하여 업을 익힘에 부지런하고 빈객대우에도 애를 쓰라. 그것이 가문의 성명(聲名)을 안보하고 당을 닦지 못할까 걱정이다.
장차 래백(來百)에 사연(嗣宴)하여 천세에 전하고 산(算)을 집(執)하여 하나의 책자를 만들었다. 백일세 연에 다암공의 증손 용철(容喆)이 그 일을 주관하고 나에게 1일의 長함이 있다 하여 弁文을 청하니 전말을 써서 당중고사를 갖추고 다시 청족(請族)에게 권면한다.
■ 長川齋重修後百一年會宴韻 (장천재중수 후 백일년 모임에 노래함)
癸丑年今百一秋 계축년이 이제 백일추가 되어서
四隣車蓋到川頭 사린에 차마들이 천변에 이르렀고
使吾子姪彌昌大 우리의 자질들도 더욱 창성하여
山與同靑水共流 산과 함께 푸르고 물과 같이 흐르리라
■ 登天冠山 (천관산에 올라)
梯空上頂似淸秋 상정에 올라서니 가을바람 불어오듯
望裏渾忘白日流 두루 바라보다 날이 저문줄도 잊었네
誰道三山在天外 뉘라서 삼신산이 하늘밖에 있다 하뇨
左高方丈右瀛洲 좌로는 방장산, 우로는 영주로다
■ 聞倭亡報次蓉山諸名碩韻 (왜놈 망함을 듣고 용산 제명석운에 차운)
日月昭昭出自東 소소한 해와 달이 동쪽에 떠오르니
千門萬戶喜相同 천가만호 모두가 기뻐하였도다
新政廣施全世界 신정부 수립하여 온 세계에 알렸고
舊旗高揚肇秋風 태극기 높이 걸어 가을바람에 휘날리네
己識皇天陰佑上 하느님은 위에서 묵묵히 도와주셨고
更尋雄傑熱誠中 영걸들은 그 가운데 열성으로 움직였도다
昔年節士靈如在 석년의 열사들 영령이 알으신다면
應有歡聲地下通 아마 환호소리 지하에도 통하리라
■ 聞建國報次蓉山諸名勝韻 (건국소식을 듣고 용산 제승우에 차운함)
蟲彼島夷讐我東 무도한 왜놈들은 우리의 철천지원수이니
男兒誓不戴天同 남아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함께 이리
列强賴有米英露 미영로 열강이 힘을 함께 모아서
掃蕩急如雷電風 쾌히 소탕함은 번개처럼 빨랐도다
ㅁ 栢堂公(大煥) 遺稿[ 백당공( 대환) 유고]
초명은 황(煌), 대환(大煥. 1907~1979)의 자는 여방(汝方), 호는 백당이다. 공은 존재공(存齋公) 5형제 가운데 넷째인 서계공(書溪公)의 후손으로 아버지 월암(月庵) 형량(馨良)과 어머니 수원 백씨의 맏아들로 한일병탄 3년 전에 안양에서 태어나 36년간 피지배와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해방공간의 혼란기를 살았다. 공은 그런 시대에 살았으면서도 유교적 전통과 문중의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공헌했다.
■ 長興鄕校 柱聯 (장흥향교 주련)
西齋 (서재)
正平言議嘉則 바르고 공평한 말로 의논한 것은 아름다운 법칙이요.
明誠祀享善儀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모신 것은 착한 예의이다.
丹書勿替示後 금석에 새긴 글은 없애지 말고 뒷사람에게 전하고
線陽不墜在玆 실같이 이어 온 유도는 끊어지지 않고 여기에 있도다.
明倫堂 (명륜당)
奚足求己分外 어찌 자기 분수 밖의 것을 구하리요.
常目在帝降衷 항상 하느님이 주신 양심이 있는 것을 눈 여겨 보라.
彛倫萬世不易 윤리도덕은 만대가 되어도 바뀌지 않는 것이고
學宮三代所同 배우는 학당은 삼대(夏, 殷, 周) 때와 같다.
灑落泗水秋月 맑고 깨끗한 곳은 泗水 물가에 가을 달이요
氤氳杏壇春風 훈훈한 생기는 강당 위에 봄 바람이로다
東齋 (동재)
王國克生濟濟 제왕이 다스리는 나라에는 얌전한 선비들이 나오고
元氣穩毓彬彬 천지의 원기는 끼릿한 선비들을 온전하게 기르도다
詩書禮藥以造 시서예악을 배우고 익혀서 앞으로 전진하고
水齊治平必循 수신제가 치국 평천하의도를 반드시 따르자.
(144-109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108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08일차에는 '의재공(석한) 유문'과 '백당공(대환) 유고' 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의재공 유문과 백당공 유고]
(앞에서 이어서, 의재공 유문)/ 무곡
우리 선조의 제실인 '부계당'의 중건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군요. 선조님들의 희생과 헌신덕분에 조상님을 모시고 종중이 모일 수 있는 제실이 건재하는 등 여러 여건이 갖추어진 것으로 보여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 무곡
장흥향교의 '주련'이 눈길을 끌고 있습니다.
위 장흥향교 제42대 오은 위승복 전교의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무곡
장흥향교의 서재 명륜당 동재에 대한 한시가 있네요./ 벽천
위윤기 님
네, 기둥에 게시된 일련의 한시들을 주련이라고 하는가 봅니다./ 무곡
하, 은,주를 삼대 학당으로 꼽는군요./ 벽천
보통 주시대를 이상적인 시대(공자님 등등)로 삼는데,
선조님께서는 하,은,주 시대의 학당도 이상적인 제도의 하나로 보는것 같군요/ 무곡
보통 주시대를 이상적인 시대(공자님 등등)로 삼는데,
선조님께서는 하,은,주 시대의 학당도 이상적인 제도의 하나로 보는것 같군요/ 무곡
장흥향교 주련글씨를 누가 썼는지 몰랐습니다. 수련회 때 향교 방문 당시에 대충 보았었는데 오늘에사 알았습니다. 사진은 이번 수련회 때 찍었습니다. 흐릿하네요. 왼쪽사진이 동재입니다./ 야운
아! 삼성이 신라호텔을 처음 시작할 무렵 주방의 책임자를
일본에 보내 주방일을 배워오도록
했다는데 ᆢ
고 이병철이 당시 그 주방장에게 던진 질문은?
초밥 하나에 밥알이 몇개 인지를 물었다고 합니다.
나름 무엇이든지 질문하라고 자신만만하든 그 주방장은 그 대답을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고 합니다.
생선 15g,, 밥알 무게 15g은 배워왔지만 ᆢ 그것은 못 배웠다고 하면서 ᆢ
그때 고 이병철왈
점심때 식사때는 초밥 한개에는 밥알 320개, 저녁 술과 같이 먹을때는 280개라고 하네요
사람은 항싱 배워야 하는것 같네요
좋아요
아주 잘하고 있어요/ 무곡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