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그늘
- 김기산
먹다 남은 와인병을 보고 있다
토스카나 포도밭 별들이 붕붕거리고
양파처럼 생긴 수도원 지붕 아래로
금발의 수도사가 걸어나온다
포도알의 선명한 결기 속으로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고
눈을 무섭게 뜨고 가는 햇빛과 바람
세상을 빨갛게 칠하고
머리수건을 한 여인들의 종아리가 뽀얗다
누군가의 입김에 스르르 가라앉는
한없이 떠내려가는
붕붕거리며 다시 하늘을 나는 시간
<해설> 한경
붉은 와인의 매력에 취해서일까? 시인은 먹다남은 와인병에서 피렌체의
토스카나 지방을 여행하고 있다.. 이 한 편의 시에는이탈리아 피렌체를 중
심으로 한 유명한 와인 생산지 토스카나의 포도밭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
다. 자잘한 덩굴장미꽃이 어우러진 포도밭에는 벌과 나비가 꿀을 따느라
분주하다. 저 멀리 양파처럼 생긴 수도원의 지붕과 수도원을 감싸고 있는
물푸레나무, 하얀 물푸레 꽃향기는 싱그럽고 달콤하다. 뾰족 탑의 종각에
서 종을 치는 젤라바를 입은 중세의 수도사의 얼굴이 언뜻 보이는 듯도 하
고 기도처럼 포도밭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는 경건하다. 뜨거운 햇빛 아래
알알이 익어가는 포도송이 머리띠를 한 금발의 여인들의 하얀 볼도 불게
물들어 가고, 오크통에서 숨을 쉬며 익어가는 붉은 와인은 장미 향과 물푸
레 향과 로즈메리 향과 어쩌면 하얀 찔레향까지 머금고 익어갔을 것이다.
토스카나 와인은 이탈리아 명품 와인중 하나로 산도가 높고 타닌이 많다.
강렬한 태양과 바람과 구름, 비까지 품고 있는 ‘신의 눈물’이라는 붉은 와인
은 어떤 인연으로 시인에 닿아 시인의 마음을 훔쳤을까? 붉은 와인을 머금
고 하늘을 붕붕 나는 시인은 행복하여라. 어느덧 나도 취한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