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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에서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도 관람하고
<문화탐방>이란 거창한 명제를 걸고 벌써 4번째 발걸음을 하고 이렇게 졸문을 끄적이게 됨에, 그렇지 않아도 머리 복잡한 연말에 님들에게 문자공해를 보태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필자의 글을 읽어주고 격려해 주는 소수의 독자를 위해서라도 고집스럽게 올리니 부디 나무라지 마시기 바란다. 이번에 중앙박물관을 택하게 된 데에는 뼈속부터(?) 추사를 흠모하는 벗 田옹의 첩보와 사전답사로 추사의 세한도(歲寒圖)가 특별전시된다는 걸 알게된 때문이다. 지난달 고궁박물관을 관람하던 날 갑자기 불어닥친 한파에 적잖히 당황했는데, 이번(12월 22일)에도 심술스럽게 강추위가 엄습했다. 그러나 문화계를 지켜야 한다는 굳은 신념하에 우리 독수리4옹은 추호의 흔들림 없이 탐방을 강행하였다. 항상 부지런한 K옹이 먼저 도착하였고 약속시간인 2시가 좀 지나자 또 다른 K옹이 특유의 웃는 얼굴로 등장했다. 그리고 보통 제일 먼저 오는 B옹이 '군고패션(군고구마 장사 털모자 쓴)'으로 나타났는데 아마도 중무장의 엄청난 하중(?) 때문에 좀 지체된 듯하다.
중앙박물관 1층은 늘 하던대로 고조선 부터 조선 후기까지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 서화관엔 글씨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중 한켠에 '중국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2011년 10월 27~2012년 1월 15일). 이번 전시는 사행단에 속해 중국의 예술과 문화를 직접 접하고 수용하면서 활발하게 교류하였던 畵家들을 특별히 조명하고자 기획된 거란다. 사행을 다녀온 화가들은 새로운 문화를 직접 접하여 사행의 여정과 문화교류의 결실을 그림으로 남겼다. 화가가 사행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는 크게 세 가지였다. 도화서(圖畵署) 소속 화원화가(畵員畵家)들은 선발과정을 통해 사행단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그들은 주로 사행의 여정을 그리거나 입수가 어려운 그림과 지도를 베껴 그리는 일 등을 맡았다. 강세황(姜世晃, 1713-1791)처럼 화원이 아니어도 정사(正使)나 부사(副使)의 직책으로 다녀왔던 문인화가들도 있었다(국립중앙박물관 홈피 참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
그런데 여기에서는 이 특별전시회의 백미라 할 수있는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를 중심으로 다소 깊이있게 다뤄보도록 한다. 아래 내용은 관람하면서 본 것에 유흥준이 지은 '김정희'와 이상국의 '추사에 미치다'(이상 田옹이 빌려준 책) 그리고 인터넷이 올라와 있는 것들을 간추려 쓴 것임을 밝혀둔다.
세한도(歲寒圖)의 구성
세한도는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온지 5년째 되는 해인 1844년 수묵으로만 간략하게 그린 문인화(文人畵)로 길이 69.2cm 폭 23cm로 비교적 작은 그림이다. 제주도로 귀양 온 후에도 변치않고 연경(지금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 이상적(李尙迪)을 위해 김정희가 그려 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가의 발문이 그림의 왼쪽에 있으며, 이어서 이 그림을 받고 감격한 이상적의 글이 적혀있다. 그리고 화면 왼쪽엔 1845년 이상적이 북경에 가서 그 곳 명사 장악진(章岳鎭)ㆍ조진조(趙振祚) 등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가, 화면 오른쪽엔 우리나라 김준학(金準學)ㆍ 오세창(吳世昌)ㆍ이시영(李始榮)의 배관기(拜觀記)가 붙어 있어 긴 두루마리를 이루고 있다. 가운데 본 그림의 오른쪽에 '歲寒圖'라는 화제(畵題)와 우선(藕船 : 이상적의 호) 이상적이 완상하라는 '우선시상(藕船是賞)'과 '완당'이란 관지(款識)가 적혀있고, '정희(正喜)'와 '완당'이라는 도인(陶印)이 찍혀 있다. 그림 자체는 단색조의 수묵과 까칠한 마른 붓질과 고담한 필선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졌다. 옆으로 긴 화면에는 집 한 채와 소나무와 잣나무가 두 그루씩 대칭을 이루며 지극히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을 뿐, 나머지는 텅 빈 여백으로 남아있다.
세한도를 그리게 된 이유-발문
앞에 언급한 대로 세한도(歲寒圖)는 제주도로 귀양 온 김정희에게 옛날 의리를 지키기 위해 두 차례나 북경으로부터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3∼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 준 것이다. 그럼 이 내용을 담은 추사의 발문을 원문과 함께 우리말 새김을 여기 붙인다.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지난해에는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藁> 두 책을 부쳐왔더니, 올해는 또 우경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을 부쳐왔구나. 이는 모두 세상에 흔히 있는 책이 아니고 천만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며, 여러 해 걸려 얻은 것이으로 일시에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趨,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稿之人, 如世之趨權利者.
또한 세상의 도도한 인심은 오직 권세와 이익을 따르기 마련인데, (귀한 책을 얻으려고) 마음을 쓰고 힘을 쓰기를 이와 같이 하면서도, 권세와 이익이 되는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고 바다 밖 초췌하고 야윈 사람에게 오는 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는 것처럼 하는구나.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以交疎.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權利之外, 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으로 맺은 자는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귐도 소원해진다”라 했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연히 스스로 도도한 권세와 이익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 것인가, 사마천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 松栢是貫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설추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라고 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4계절을 지내도 시들지 않는 것으로서, 춥기 전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고 추워진 뒤에도 한결같이 소나무와 잣나무다. 그래서 성인께서는 특별히 날씨가 추워진 뒤를 일컬으셨다.
今君之於我, 由前而無加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지금 그대가 내게 대함을 보면 이전이라 하여 지금보다 더함이 없지만, 이후라고 하여 덜함이 없다. 그러면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만한 것이 없겠으나, 이후의 그대는 또한 성인에게 일컬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성인께서 유독 이를 일컬었던 것은 늦게 시드는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 뿐만 아니라, 설추위(歲寒)에 느끼시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阮堂老人書.
아아! 서한(西漢)의 태평세대에서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진이도 빈객들이 시세와 더불어 성하고 쇠하였다. 하비의 방문(榜文) 같은 것은 박절함이 극에 달했도다. 슬프다! 완당노인이 쓰다.
(* 하비(下邳)는 하규(下邽)의 오기이다.)
(참고 : 마지막 단락에 나오는 급암과 정당시, 하규의 방문 이야기는 『사기(史記)』 급정열전(汲鄭列傳)에 나온다. 전한(前漢) 무제 때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라는 어진 신하들이 현직이 있을 때는 손님이 넘치다가 좌천되었을 때는 손님의 발길이 뚝 끊겼다. 사마천은 “급암과 정당시 정도의 현인이라도 세력이 있으면 빈객이 열 배로 늘어나고, 세력을 잃으면 당장 모두 떨어져 나간다. 그러니 보통 사람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라고 평했다. 이어 언급한 적공(翟公)의 사례도 마찬가지로 그 또한 해임되자 집이 한산하다 못해 문 앞에 새 그물을 쳐 놓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여기서 문전작라(門前雀羅), 문전가설작라(門前可設雀羅)라는 고사성어가 유래되었다.)
*추사 발문 딴지걸기*
윗 발문 중 공자님이 말씀하셨다는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설추위(歲寒)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 중 맨 마지막 글짜는 원래 '두드러진다'는 뜻의 彫인데 이 발문엔 '시든다'는 凋로 바뀌었다. 추사같은 대학자가 잘못 썼을리는 없고 아마도 귀양살이 하면서 기가 많이 꺾여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더 깊이 성찰한 때문인지 세상에 변치않는 것(不凋)은 없으나, 그래도 늦게 변하는 것(後凋)은 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렇고 너 이상적도 다만 늦게 변하는 존재일 뿐이라 뜻은 아닐지...
세한도 감상하기
소나무와 잣나무(松栢) : 왼쪽에 잣나무 두 그루와 오른쪽에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그 중 맨 오른 쪽에 있는 소나무는 너무 오래 되어서 잎이 거의 없고 다만 아래로 처지고 휘어진 가지 끝에 약간의 솔잎이 나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소나무는 권력에서 소외되고 늘그막에 귀양까지 온 추사 자신을 그린 거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 늙은 소나무 바로 옆에 바로 붙어있는 소나무는 아마도 의리의 사나이 이상적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왼쪽에 아직 싱싱한 잣나무 두 그루는 누구를 그린 것일까? 추사가 제주도에 귀양왔을 때 찾아와 수개월 같이 지내며 수발을 들어 준 제자, 소치 허련(小癡 許鍊 : 화가1809~1892)이나 역시 제주도 대정현에 몇번 찾아와 같이 지낸 바 있는 막역지우 초의(艸衣 :스님 1786-1866)일지도...
집 한채 : 어쩌면 너무도 무성의하게 아이들이 그린 것 같은 집, 그것도 원근법 조차도 무시하고... 그러나 이는 어쩌면 추사의 텅빈 가슴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 그림의 주제가 소나무와 잣나무(松柏) 그리고 추위(歲寒)이라고 한다면 나머지는 겻다리일 뿐이다. 그러면 추위는 어디에 나타나 있나?
눈(雪) : 나머지 여백은 비록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지만 눈(雪)을 그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동양화에서는 여백과 과감한 생략을 잘 이용하는데 이 여백은 여기서와 같이 눈일 수도 있고 안개나 구름인 경우도 있다. 이렇게 극도로 생략되고 절제된 요소들은 모두 문인화의 특징으로, 직업화가들의 인위적인 기술과 허식적인 기교주의를 부정하는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 하겠다. 작가의 농축된 마음에서 표출된 필선과 먹빛에 의해 조성된 담박하면서도 고졸한 분위기는 문기(文氣) 또는 문자향을 비롯하여 문인화가 지향했던 형식보다는 내용과 정신을 중요시하는 경향과 서화일치(書畵一致)의 극치를 보여준다. 조선 말기를 풍미하였던 김정희의 문인화 이념의 집약된 경지와 함께 조선시대 문인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蛇足 : 위 세한도 오른쪽 하단에 네모난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데 사진으로 보아서는 잘 인식이 되지 않지만 전각 글씨체로 長無相忘이라고 쓰여있다고 추사를 흠모하는 벗 田옹의 전언이다. 뜻은 '우리 서로 오랫동안 잊지말자' 로 추사나 완당이라는 호 이외에도 이런 전각을 많이 사용한 흔적이 있다.
세한도는 실제 풍경을 그린 그림(진경산수화)인가?
결론부터 말하라면 '아니다' 라는 것이다.
첫째, 여러 고증에 의하면 이 그림은 눈오는 겨울에 그린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한여름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상적이 연경(북경)에서 책을 구해 제주도로 보내고 추사를 찾아간 시기가 여름 쯤 되고, 이 그림을 들고 연경으로 건너가 청나라 대학자 16인의 상찬문을 받은 것이 그 다음해인 1845년 정월이기 때문이다. 요즘 같으면 정월에 제주도에서 그림을 받아다 바로 중국으로 가져갈 수 있지만, 그 당시로 보면 제주도와 연경은 그리 가까운 거리가 아니고 서울로 돌아와 사행단을 꾸려 떠나야 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 가시나무 울타리리로 둘러싸여 좁은 공간에 위리안치된 추사가 무더운 여름 좁은 방안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생각하니 필자 조차도 가슴이 답답해진다.
둘째, 이 그림에 나오는 성냥갑 같은 집은 우리나라 특히 제주도의 집이 아니다. 누구나 잘 알듯이 제주도의 초가는 둥근 지붕선에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새끼줄로 촘촘히 얽어 놓았다. 더욱이 창문이 둥굴게 그려졌는데 제주도는 물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운 창이다. 이에 대해 이상국이 쓴 '추사에 미치다'를 보면 재미있는 해석이 나오는데, 추사보다 연배인 김홍도의 그림 추성부도(秋聲賦圖)에 둥근 창문의 이와 비슷한 집이 나오는데 추사가 이를 본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추성부(秋聲賦)란 송나라 구양수의 한시 제목으로 이를 읽은 느낌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추사가 이 그림을 봤건 안 봤건간에 자신이 직접 중국에 사신의 일행으로 따라가 꽤 오래 머므르며 이런 집들을 많이 보았을 터이고 그 후 청에서 보내온 많은 책과 그림을 통해서도 수없이 보아왔을 것이다.
셋째, 첫번째 이유와도 상통하는 것으로 이 그림은 전형적인 문인화(文人畵)인데, 문인화란 사대부들이 즐겨 그리는 화법으로 전문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공과 달리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을 아주 간략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풍경을 앞에 놓고 그리지 않아도 되고, 한여름에도 겨울의 매서운 추위(歲寒)을 그릴 수 있다.
추사의 일생같이 파란만장한 세한도
추사(秋史)는 그 명성이 20세 전후에 국내는 물론 청나라에 까지 나있었을 정도로 신동이었다. 그가 20대 중반 아버지 김노경의 자제군관(개인호위병) 자격으로 연경에 갔을 때 칠십 고령의 옹방강을 비롯하여 많은 청나라 학자들이 그를 환영했는데, 이는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던 실학자들 특히 스승 박제가의 공이 크다지만 그의 글씨와 글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3,4십대 잘 나가던 그가 50이 넘으면서 외척 안동 김문과의 갈등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게 되는데, 그의 절친 권돈인, 조인영 등의 탄원으로 겨우 제주도에 위리안치 된다. 위리안치란 귀양살이 중 가장 가혹한 것으로 울타리를 치고 그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도록 한 형벌이다. 옛날로 보면 인생황혼의 늙은이가 8년간 외딴섬 그것도 작은 집에 갇혀 살게 되니 그 심적 고통이 얼마였겠는가. 겨우 해배되어 서울로 올라와 용산 한강변에서 별 욕심없이 살고 있는데 느닷없이 절친 권돈인(당시 영의정)과 엮여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된다. 2년 정도 귀양살이를 한 후 돌아와 이번에는 서울에서 떨어진 과천 청계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은둔한다. 그의 나이 71세로 1856년 철종7년.
세한도(歲寒圖)가 지금까지 잘 보관되어 국보로 지정(국보 제180호)되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에 가깝다. 청나라 16인의 찬문을 받은 이 세한도는 이상적이 죽자 그의 제자인 김병선(金秉善)에 넘어가고 다시 그의 아들 김준학(金俊學)에게 넘어가 앞서 언급한 대로 그 감상문을 옆에 적어 놓는다. 그 뒤 이 그림은 평양감사를 지냈고 휘문고 설립자인 민영휘(閔泳徽 : 눈치 빠른 분은 휘문고의 휘자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하시겠지만..)에게 넘어갔다 아들에게 전해지는데, 안타갑게도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스카(藤塚 ,당시 경성제대 교수)에게 팔아 넘긴다. 1943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서예가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이 후지스카가 사는 서울 자택을 찾아가 예의를 갖추고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팔라고 부탁하였으나 거절당한다. 1944년 후지스카는 歲寒圖를 비롯하여 추사 관련 작품을 모두 들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손재형은 일 동경에 있는 집을 찾아가 노환으로 누어있는 그에게 세한도를 넘겨달라 조른다. 그러나 후지스카는 그 역시 좋아하는 추사의 작품이라 단호히 거절하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2달동안 계속 문안 인사를 드리며 부탁한다. 그해 12월 마침내 소전의 열의에 감복해 자기가 죽으면 넘겨주겠다 유언할 것이니 돌아가라 말한다. 그래도 돌아가지 않자 '이 그림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가 보다'고 드디어 넘겨준다. 다음 해인 1945년 3월 추사의 작품 등 그가 소장하고 있던 많은 자료들이소장된 건물이 폭격으로 소실되는데, 이 세한도 만이라도 건지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렇게 돌아온 세한도를 보고 감격한 완당 예술의 제일인자 위창 오세창, 완당 학술 연구의 대가 위당 정인보 그리고 당시 부통령으로 서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성재 이시형이 배관기를 쓴다. 그 후에도 국회의원에 출마해 돈에 쪼들리던 소전이 세한도를 저당잡혀 돈을 끌어다 써서 사채업자에게 넘어갔다 미술 수장가 손세기에게 팔아 넘겼고 그의 아들 손창근의 소유가 된다.
첫댓글 거사님의 끊임없는 탐구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20대 노인이 있고 60대 청년이 있듯......
추구하는 열정에 무슨 나이가~~~
죽기 전 진실한 친구 하나라도 있으면 그 사람 인생이 헛되지 않았다 하던데
김 정희는 정말 훌륭한 인품이었던 듯.....
그 옛날 탐라국까지 가려면 정말 보통 정성이 아니였을 터......
요즘이라도 제주까지 귀한 책을 가져가려면.....
덕분에 좋은 글 잘 일고 감사드립니다~~~
M E R R Y X - M A S ~~~~~~
오자 투성이로 아직 완전히 작성도 하지 않은 글을 읽어주어 감사!
나중에 시간이 되시면 계속된 졸문도 읽어주시길...
겉으로만 보는 탐방이 아니라 심도있게 다루는 문화탐방 해설에 경의를 표함네다.아무나 할수있는 그런 작업이 아니기에.
암튼 님덕분에 내마음양식이 늘어가는것 같아 좋긴한데 ....해설들어도 좀 어렵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