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따져보면, 앎은 몇 가지 경로를 통해서 실현된다. 대표적으로 인식, 지각, 인지, 기억, 반성 등이 있다. 또한 단순하게 보면, 앎은 ‘알아챔awareness’과 ‘알고있음knowing’으로 나뉠 수가 있다. 이제 ‘모를 수 없는 앎’에 다가가기 위해서, 우선 앎과 관련된 단어들을 임의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
인식과 지각의 대상은 환경이며, 환경은 사물, 현상, 타자를 포괄하는 ‘나’의 외부이다. 인식은 뇌의 작용이며, 지각은 오감의 작용이다. 인지는 인식과 지각을 포괄한다. 인간은 뇌와 오감을 완전히 분리된 채로 환경과 관계맺음이 가능하지 않다. 물론 관계맺음이 아닌 수학과 같은 논리기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는 인식만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 학습에서는 오감이 작용한다. 가령 기후관련 학습을 할 때는 감각경험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또한 배우가 배역에 대한 정보를 숙지할 때도 동일화를 통한 감정이입을 한다.
기억은 자아에 저장된 경험이다. 저장됨은 주로 반복을 통해서 이뤄진다. 또한 순간이더라도 강렬함을 통해서도 기억된다. 기억은 비단 정신활동이라고만 볼 수가 없다. 몸도 기억한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머리로 되뇌며 누르지 않는다. 특히 운동선수들은 몸의 기억을 흔하게 경험한다. 또한 일부 트라우마나 공황장애도 몸의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자아는 자아를 구성하는 부분들의 기계적인 합이 아니라, 총체이다. 자아를 구성하는 부분들은 부분 혹은 부분들로 서로 이어져 있다. 어떤 부분이 더 이상 자아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그 부분은 더 이상 자아를 구성하는 부분이 될 수 없다.
자아는 몸과 몸에 깃든 생명의 총체다. 총체로서 자아는 외부환경과 인지 즉 감각과 인식을 통해서 연결됨을 전제한다. 몸을 몸과 정신으로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즉 정신이 없는 몸이나 몸이 없는 정신은 온전한 자아라고 볼 수가 없다. 손과 발이 기능적 측면에서 구분할 수 있지만, 손도 발도 모두 몸의 부분이고,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기능할 수가 없다. 몸과 정신도 자아로부터 분리되어 기능할 수가 없다. 정신에 가까운 영역에 주체가 있다. 주체는 몸의 행동과 상호간 영향을 주고받는다. 주체는 강화되거나 약화되고, 이러한 주체는 행동을 통해서 드러난다. 행동은 반응과 대응, 행위, 멈춤을 포괄한다. 주체의 변화는 자아의 변화로 이어지고, 이러한 변화는 삶에서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멈춤이라는 행동을 통해서도, ‘나’는 변화한다. 그래서 ‘나’는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반성은 정신활동이며, 사유는 반성의 연장이다. 그래서 철학은 반성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반성은 문자 그대로 ‘돌이켜 생각함’이며, 거울을 통해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러한 일반적 정의는 ‘반성의 드러남’을 반영할 뿐이다. ‘반성의 드러남’에서 반성은 자아의 형식이다. 비유하자면 반성은 자아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플로차트다. 굳이 말하자면 정신은 뇌의 형식이지만, 정신을 마음이라고 할 때 정신은 자아의 형식이 된다. 이때 정신-마음은 반성이 된다.
흔히 정신은 머리에 있고, 마음은 가슴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정신과 마음이 독립적이고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 진리로 향하고, 이로써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릴 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퍼진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명 초의 이집트에서는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 때, 뇌는 보잘것없이 버려졌다. 즉 정신이 뇌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후 히포크라테스는 뇌가 지능과 감정을 관장하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즉 BC 5세기까지도 정신과 마음을 분리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성을 중시하는 철학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이 퍼지고, 그 우월성을 뇌에서 찾는 연구가 진행되면서 정신과 마음을 분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몸과 정신을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할 수 없듯이, 정신과 마음도 그렇다. 정신과 마음을 우열의 속성을 지닌 권력적 관점에서 구분한다면, 이는 분리와 다를 바가 없다. 정신과 마음이 조화로움에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이 둘의 다름에 대한 긍정이 가능하다.
“머리로는 몇 번이고 멈춰야한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아!”
“마음에는 거리낌이 많지만, 머리로는 이 방법 외엔 없다고 생각해!”
이러한 경험은 흔하다. 이는 자아분열이 아니라 내적갈등이다. 머리-정신과 마음-정신으로 구분한다면, 이러한 갈등은 뇌의 형식과 자아의 형식의 대립에서 나온다. 뇌의 형식은 논리이며, 자아의 형식은 직감이다. 이러한 대립은 헤라클레이토스가 주장한 만물의 원리인 우주론적 갈등polemos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갈등은 상호작용의 원리로써 한정된다. 즉 상호작용을 전제하는 갈등은 ‘조화’를 지향할 뿐, 파괴로 귀결되지 않는다.
첫댓글 정신은 한자어이고 마음은 우리말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