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문학관
수주 변영로 시인(1898-1961)의 삶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문학관.
변영로의 호인 '수주'는 부천의 옛 지명. 그만큼 부천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고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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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일 : 2022년 7월 8일 개관
관람시간 : 오전 10:00~16:00
휴관일 : 매주 월요일 및 법정공휴일의 다음날, 1월 1일, 설날, 추석 당일
주소 : 경기도 부천시 오정구 고강동 역곡로56번길(고강선사유적공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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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변영로(卞榮魯)
1898년 6월 27일(음력 5월 9일) ~ 1961년 3월 14일
대한민국의 시인, 교육자이다. 변영만 변호사와 변영태 전 국무총리의 동생, 페미니스트 변진수의 아버지이다. 초명은 변영복(卞榮福), 호는 수주(樹州)이다.
1898년 한성부 회현방(현 서울특별시 중구)에서 태어났고 원적지는 경기도 부천시 고강동이다. 계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사립 중앙학교에 재학하다 중퇴하였다. 이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 과정을 수료하였다.
1918년 청춘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논개 등의 시를 발표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근무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유학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중퇴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동아일보 기자 등을 지냈다.
8.15 광복 후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을 역임하였다. 1953년 대한공론사 사장을 지냈다.
1961년에 후두암으로 타계하였다.
[출처: 나무위키(변영로(卞榮魯))]
서울 재동·계동 보통학교를 거쳐 1910년 사립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2년 체육교사와 마찰이 일어 자퇴하고 만주 안동현을 유람하다가 같은 해 평창 이씨(平昌李氏) 이흥순(李興順)과 결혼하였다.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및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며, 1919년에는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번역한 일도 있다. 1920년에 ‘폐허(廢墟)’, 1921년에는 ‘장미촌(薔薇村)’ 동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신민공론(新民公論)』 주필을 지내기도 하였다. 1923년에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기자, 1934년 『신가정(新家庭)』 주간을 지내다 광복 뒤 1946년에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 1950년에 해군사관학교 영어교관으로 부임하였다. 1953년에 대한공론사(大韓公論社) 이사장에 취임, 1955년에는 제27차 비엔나국제펜클럽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18년 『청춘(靑春)』에 영시 「코스모스(Cosmos)」를 발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당시에는 천재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격적인 활동은 1921년 『폐허』 제2호에 평문 「메텔링크와 예이츠의 신비사상」, 『신천지(新天地)』에 논문 「종교의 오의(奧義)」, 시 「꿈많은 나에게」·「나의 꿈은」 등 5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전개되었다. 1922년에는 『신생활(新生活)』에 대표작 「논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는 창작 활동 초기부터 과작(寡作)주 01)의 시인이었다.
『신생활』·『동명』·『개벽(開闢)』 등을 통하여 한 해에 5, 6편 정도를 발표하였을 뿐이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조선의 마음』이 평문관(平文館)에서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는 「버러지도 싫다하올 이몸이」를 비롯한 28편의 시와 수상 8편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이 시화집은 내용이 불온하다 하여 발행과 동시에 곧 총독부에 의하여 압수되어 폐기처분된 바 있다.
그의 시작품들은 가락이 부드럽고 말씨가 정서적이어서 한때 시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작품 기저에는 민족혼을 일깨우고자 한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의 시세계는 크게 3기로 구분된다. 1기는 시집 『조선의 마음』이 발간되기까지인데, 민족시인으로서의 의식이 표출된 시기이다. 이 무렵의 대표작으로 「논개」를 들 수 있다.
2기는 그 뒤부터 광복까지의 시기로, 자신을 둘러싼 상황인식에서 오는 절망감 속에서도 선비적 절개와 지조를 고수하려는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실제(失題)」·「사벽송(四壁頌)」 등을 들 수 있다. 3기는 광복부터 죽기까지의 시기로 「돐은 되었건만」과 같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우국적 시를 주로 썼다.
시작 활동 이외에도 우리 문단에 영미문학(英美文學)을 소개하고 우리 작품을 영역하였으며, 남궁 벽(南宮璧)의 유고 일문시(日文詩)를 『신생활』에 소개하여 별로 알려지지 않은 시인의 위치를 확고하게 하는 등 시사(詩史)에 공헌한 바가 크다. 1948년에는 서울시문화상(문학부분)을 수상한 바 있다.
저서로 수필집 『명정사십년(酩酊四十年)』(1953)·『수주시문선(樹州詩文選)』(1959)·영문시집 『진달래동산(Grove of Azalea)』(1948) 및 1981년 유족들이 간행한 『수주변영로문선집(樹州卞榮魯文選集)』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변영로(卞榮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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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문학관 전시장 안내
전시장은 4개의 주제로 나누어 구성.
1존 ‘천재의 고향, 펜을 들다’
부천이 낳은 세 명의 천재, 법률과 외교, 문학에서 한국근대사에 지대한 공헌을 한 변영만·변영태·변영로 형제의 이야기를 담았다.
2존 ‘민족의 울분, 기록하다’
가혹한 일제의 폭력 앞에 저항했던 수주선생의 가장 고난한 삶의 순간을 기록했다. 겨례의 독립 정신을 세계에 알리고 손기정의 자리에 관련된 내용을 만나볼 수 있다.
3존 ‘지조의 문인, 마을을 울리다’
수주문학관의 꽃이라 할 만한 공간으로, 수주 선생이 남긴 가장 중요한 문학적 성과인 「조선의 마음」과 생애 가장 중요한 시편들로 채웠다.
4존 ‘수주의 흔적, 정신을 이어받다’
애주가였던 수주 선생의 모습을 통해 ‘인간 수주’의 새로운 면모를 만나볼 수 있다. 그 밖에도 수주 선생의 단골 가게였던 은성주점을 재현했으며, 50여 점의 유물을 통해 수주 선생의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 사진 출처 - 부천시 공식 블로그(https://blog.naver.com/bucheon-city/222832502716)
수주문학관 개관 소식 - 부천포커스(2022.7.13)
http://www.efoc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6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