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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곡서당에서 봄 답사로 성재 유중교 선생의 유적지들을 답사한다고 하여
나는 직접 관련은 없지만 가정리 답사에 혹 도움이 되겠다 싶어 권유도 있고 하여
김정기 회원과 함께 참가했다. 김선생은 부인도 서당 출신이라 어린 4남매를 모두
데리고 다 같이 왔다. 춘천역에서 전철로 왔고 나는 남춘천역에서 탔다.
이번 답사는 지곡서당의 태동고전연구소의 과정에 있는 학생들도 참여하였으나
특히 한국고전번역원의 거점번역사업으로 작년부터 성재집을 번역해온 팀원들을
위한 답사로 기획된 것이었다. 소장인 김만일 선생부터 이름만 들어도 한문 분야에선
누구나 알 만한 하영휘, 임재완, 박해당, 엄연석, 노재준 선생들이 참석하였다.
엄연석 선생은 서울대 철학과에서 주역을 전공하고 김만일, 최광현 선생과 같이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강의하는 선생들이다.
하영휘 선생은 고문서계의 거의 일인자라 할 만큼 요즈음 성가가 높으신 분으로
근래 성균관대박물관의 <근묵>을 석문하고 번역하였고 최근 <옛편지 낱말사전>을
출간한 선생이고, 박해당 선생은 불교쪽에 관심을 두고 있으나 주변에서 모두
한문을 가장 빨리 보는 실력자로 부인도 초서 해독의 일인자라고 칭찬이 자자한
선생이다. 말하자면 이번 성재 번역팀은 서당 출신의 소장파 학자들이 참가함으로써
볼 만한 인재들이 화서학파의 문집에 관심을 갖는 첫 사업인 셈이다. 김정기 선생은
마지막 나온 <습재집> 7권을 여러 권 가지고 와서 번역팀에게 나눠주면서 거기 실린
성재선생행장을 참고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한두 번 이상 답사를 가본 곳들이었으나 작년에 가정리를 답사하고 글을 쓴 경험이
있으니 성의껏 돕기로 작정하고 역문연의 작년말 사진전 전시도록 '홍무벽' 설명 페이지를
복사하여 가지고 갔다.
참가인원은 조교를 비롯한 학생을 포함하여 20여 명으로 매번 단골인 대형버스를
대절한 답사였다.
마석역 마당에서 인사를 마치고 9시 40분경 출발, 조교의 일정표를 보니 오늘은 조종암 -
가평 옥계구곡 - 가정리 - 설악의 순서로 짜였다. 금세 청평을 지나 조종리의 조종암으로갔다.
조종암은 화서 생존시부터 학파의 선비들이 찾아와 경배하던 암각자들이 있는 조종천 옆의
바위벽이다. 화양구곡에 암각자가 있는 것과 말하자면 같은 식의 유적인 것이다. 이곳을 정한
이유는 여러 문집이나 <조종암지>에 알려져 있듯, 조종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기 때문
이다. 선조의 글씨인 '만절필동'이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는 말이다.
맨 위의 '조종암' 각자(낭선군 이우 글씨).
명 의종의 글씨라는 '사무사' 각자.
선조필 '만절필동'(중국의 강하는 만번 굽이져 흘러도 반드시 동쪽으로 향한다)과 '재조번방'(임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도움을 거듭 번국의 나라가 되게 해주었다고 표현한 말).
송시열이 쓴 효종의 글귀인 '일모도원 지통재심'(날은 저물고 길은 머니 맘속에 지극한 아픔이 있다).
기실비(1804년) 상단.
견심대 바위(옆면에 '見心亭'이란 각자가 있다).
이어서 바로 가평의 용추계곡으로 갔다.
원래 옥계구곡으로 알려졌던 곳으로, 1876년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성재, 중암과 제자들이 설악
에서 이곳으로 옮겨살았다. 자니대라는 터는 군부대가 자리잡아 터를 알아볼 수 없으나 옥계구곡의
제1곡인 용추폭포에는 '와룡추(臥龍湫)'라는 각자가 있다. 암반 꼭대기임에도 용자 아래는 거의 알아
볼 수 없도록 마모가 되었고, 이번에 다시 가보니 각자 옆에 '신재(信齋)'라는 이름이 보였다.
홍무벽의 각자와 같은 분인 유중식이다. 가평에 살던 분으로 글을 잘 쓰셨다는 분이다.
계곡 입구가 공사중이고 9곡을 다 찾아보기에는 멀고 험하여 1곡만 보고 돌아나왔다. 읍내의 '송원
막국수'집에서 점심으로 막국수를 먹었는데, 춘천의 여느 막국수 맛 못지 않게 면맛이 났다. 물론 가평
잣막걸리도 몇 순배 돌았다. 다음 답사지는 가정리였다.
원래 답사에서는 시간이 되면 가정리까지 간다고 해서 미리 가정리에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
마석역에서 처음 일정표를 보고는 바로 가정리의 류연훈 선생한테 연락을 취하여 주일당이랑 홍무벽을
볼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두었었다. 그런데 예정이던 3~4시가 이제 1시로 당겨진 셈이었다. 미리 연락
하지 못한 미안함을 무릅쓰고 다시 류선생한테 전화하여 1시 넘어 의암유적지에 당도할 것이라고
전화를 하여야 했다. 나는 한림대에서 만난 후배인 최광현 선생과 운전석 뒤에 앉아 그간의 격조를
풀며 그의 학위논문 이야기 끝에 작년까지 <창작과 비평>지에 그 지도교수(김흥규)가 논쟁하였던
글들 이야기를 한참 하였다. 가평에서 관천리로 나와 한치고개를 넘으니 바로 가정리다.
류연훈 선생이 나와 전처럼 친절하게 안내해주셨다. 산소에서 내려오는데 마침 의암 선생의 후손이신
류연창 선생도 오셔서 인사를 나누었다. 류연창 선생은 어버이날이라선지 벌써 얼굴이 불콰하셨다.
전에 내가 그분의 조부셨던 류해동 선생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말씀을 기억하셨던지 유독 자세히
설명을 해주셨다. 해방 뒤 심산 김창숙 선생이 성균관대 초대총장으로 오셔서 일제 아래 망가진
성균관 조직을 바로잡는 작업을 하시며 의암선생의 후손인 유해동 선생을 부르셨던 것이다. 강의도
하셨고 이사직에도 있으셨다고 하였다. <김구고유문>을 찾아낸 이야기라든가 기념관 유물 앞에서는
한문을 모르는 손자인 자신에게 손수 <의암약사>를 국한문으로 지어주셨다는 설명을 해주셨다.
기념관을 나와 주일당으로 가서 참배를 하였다. 원래 약주도 준비하여 갔으나 분향만 하라고 하여
분향재배로 마쳤다. 기념관에서도 그랬지만 묘나 사당을 오니 선생님들 표정이 경건해져 있다.
나는 틈나는 대로 설명을 보탰다. 주일당의 네 분 신위에 습재선생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말도 하였다.
성재, 항와(유중악), 의암, 백범 김구를 모셨으니 당연히 그런 생각이 들 만하다. 이에 대해 류연창
선생은 유림의 제향으로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며 그간 류씨 문중에서 사당에 많은 돈을 들였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해방 뒤의 사정으로 볼 때 왜 그렇지 않았겠는가! 특히 제천으로 간 습재의 후손가는 이곳까지 신경을 쓸 만큼 결코 넉넉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런 결과 마을이나 류씨 문중에서만 신경써 모시는 사당이 되고 말았던 셈이었으니 말이다.
나오는 길에 작년 말에 세워져 아직 제막식을 못하고 있다는 '충의성지발원비'도 사진에 담았다.
길이 좁아 대형버스가 돌기도 힘들었다. 다시 박암리쪽 방향으로 언덕을 올라 옛 가정서사터 아래서
버스를 내려 한참을 걸어서 홍천강가로 내려갔다. 서사터는 이미 건물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강물이 불어서 강가로 걸어가기가 불가능해졌다는 거다!
모터보트를 빌려 타고 가면 5만원을 내라고 했다. 고민 끝에 번역팀 위주로 갈 사람만 가기로 하였다.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는 특공조만 가기로 하였다. 그럼에도 아이들까지 7~8명이 나섰다. 나머지는 두 류선생과 함께 통나무집 의자에 앉아 담소하며 기다렸다.
처음 길은 예전처럼 갔으나 역시 수위가 높아져서 디딤돌들이 많이 물에 잠겨 산으로 올라 비탈길을
타고 가야 하는 험한 길이었다. 물가로 나가면 강에서 수상스키를 타는 바람에 파도가 치면서 발을
덮치곤 하였다. 20여 분 걸리니 바로 당도하였고 밝은 날이라서 전보다 각자가 보기가 더 좋았다.
암각자도 미려하게 번듯하고 주변의 경관도 수려한데다, 성재선생의 당시 통한을 한동안 설명하자니
모두들 힘들여 찾아와 보는 감동이 더한 듯 홍무벽을 가슴에 새겨 담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사실
성재집을 보고 선생의 면모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이 유적의 현장을 어찌 찾아보지 않고 그냥 돌아선단
말인가! 안내하는 처지에서도 가정리의 이 장소에 온 것이 단연코 이번 답사의 절정이 되었음에 흡족한
마음이 되었다. 벽 앞 암반인 천근암에 늘어앉아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도 두서너 사람은 자리를 뜰 줄
몰라 하였다.
돌아오니 왕복에 거의 한 시간 정도 걸린 셈이었다.
두 분 류선생님들께 바쁘신데도 나와주시어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일행은 서둘러 버스를 타고
강촌IC로 들어가 고속도로를 통해 설악으로 향하였다.
설악은 유중교 선생이 어려서부터 사시던 곳으로 화서 선생이 돌아가시자 한포서사를 열어 성재선생이
강의하시던 곳이나 현재는 없어지고 대신 미원서원의 경현단만 유적으로 남아 있다. 미원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나자 위패를 단으로 쌓아 모신 곳으로 처음 1661년(현종 2년)에 주위로
정암 조광조와 정우당 김식을 모시다가 7년 뒤부터 잠곡 김육과 동강 남언경, 청강 이제신,
삼연 김창흡이 몇 년 사이로 추가 배향된 사우였다. 한국전쟁 뒤 파손을 복구하면서 화서, 중암, 성재 등
6분을 추가 배향하면서 명칭을 경현단이라고 하였다. 막걸리를 올리고 재배한 뒤 한참을 담소하며
쉬었다. 처음 금세 찾을 것 같았으나 설악도서관 앞까지 가서 여러 군데 전화를 하고 물어보며 시간을
지체하였다. 맞은편 장돌마을에 있다는 말에도 어디가 어딘지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힘겨이 찾기는
하였으나 준비부족이었다. 좁은 농로로 대형버스가 서슴없이 들어왔다가 버스를 돌려 나가느라
기사분도 힘깨나 들였다. 7~8년 전에 왔던 기억도 소용이 없었다. 설악 읍내의 서쪽 산자락 장돌마을
이라고 기억하면 초행에 도움이 된다.
경현단에는 담이 둘려져 있고 문에는 '미원서원'이란 나무 편액이 걸려 있다. 북쪽으로는 울업산(우읍산)이 건너다 보인다.
아래 경현단에서 멀리 보이는 중앙의 나무 뒤편 논 뒤쪽으로 보이는 도로 저편이 옛 '한포서사' 터이다.
이곳이 답사 마지막 장소였다.
일행은 마석으로 갔고 6시가 다 되어 읍내에서 내려 산채로 유명하다는 '자매식당 '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아주머니가 강원도 산에 가서 직접 따온 산나물(취, 참나물 등)이라 달고 맛났다.
안주는 닭도리탕이었고 소장이신 김만일 선생님이 막걸리를 12병이나 사오게 하였다.
모두 점잖으신 분들이지만 서당 옆에 옮겨와 살며 한문공부를 하신다는 스님도 자유롭게
참가할 만큼 푸근한 분위기와 정이 넘친다.
박해당 선생이 주로 많은 말을 한 것 같다. 이번 답사로 아무래도 가정리의 답사가 시간도 많이 걸렸고 느낀 것이 많았다고 여겨졌다. 박선생은 묘소의 '유명조선'이란 말과 김구 고유문에서 지적한 옛분들의 생각이란 말을 들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는 말을 하였으나, 좀 더 이야기를 풀어서 뒷정리를 할 분위기가 되지는 못하였다.
덕분에 선생님들과 좋은 답사를 하였다는 인사말로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이미 어두워진 밤, 김선생 가족들과 전철을 타고 귀가하였다.
* 지곡서당 학생이 찍은 사진이 전달돼 오면 나중에 더 추가할 예정임.
첫댓글 좋은글 감사합니다.
언젠가 함께 참여하여 현장에서 역사의 소리를
들을수 있겠지요?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답사기를 잘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습재집을 완간한 뒤에 떠난 답사라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정재경 선생님이 답사 중에 좋은 설명을 적시적소에 해주셔서 빛나는 답사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번역자들의 카페에 옮겨 놓아도 될까요?
김선생이 보셨군요!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뒷정리 자리에서 술을 좀 더 마시며 대화의 장을 이어갔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단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오겠지요. 그 까페에도 답사기가 있으면 보여주시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