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한시감상
동산재에서 매화를 보고 짓다 기미년(1739, 영조15)
〔東山齋 觀梅花作 己未〕
동지섣달 추위가 몹시 매서운데 / 季冬正栗烈
매화가 어찌 그리 일찍 피었는고 / 梅華何其早
서둘러 그윽한 약속 지키려 오니 / 薄言赴幽期
높은 대청 벌써 깨끗이 쓸어놓았네 / 高館淨已掃
아 내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손은 / 嗟我賞心客
좋은 계절에 오래 수척한 모습이라 / 良時久枯槁
경물이 아쉬워 술잔을 들고 / 惜景申羽觴
시절에 느꺼워 마음을 졸이네 / 感物耿中抱
피고 지는 것은 각각 때가 있는 법이나 / 榮落各有辰
근심하는 바는 큰 길에 있나니 / 所憂在周道
이 시서의 학업 돈독히 하여야 하리 / 敦此詩書業
도의 연원 기울고 또 거꾸러졌으니 / 淵源傾且倒
사장이 비록 아름답다 하지만 / 辭章縱云美
은미한 이치는 진실로 궁구해 볼 만한 것 / 理微誠可討
세월은 한바탕 쏜살같이 지나가니 / 歲月一犇駛
노력하여 나의 몸을 아껴야겠네 / 努力以自好
[주-D001] 기미년 :
1739년(영조15)으로, 강한의 나이 31세이다.
[주-D002] 수척한 모습 :
수척하고 말라 있으면서 기품 있는 매화의 모습을 칭송한 말이다.
[주-D003] 나의 몸을 아껴야겠네 :
원문은 ‘自好’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자기의 몸을 팔아서 자기 임금을 이루게 하는 일은 시골의 자호(自好)하는 자들도 하지 않는 법이다.〔自鬻以成其君, 鄕黨自好者不爲.〕”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주(注)에 “자호(自好)는 그 자신을 아끼는 사람이다.〔自好, 自愛其身之人也.〕”라고 하였다.
낙전의 집에 있는 오래 된 매화 그림 족자 두 폭에 제한 시 / 계곡 장유
[題樂全家古梅二障]
늙어서 더욱 새로워라 교차해 엇갈린 매화 가지 / 交柯錯榦老逾新
강변 하늘 눈 속의 봄을 독점하고 있고녀 / 獨占江天雪裡春
이 그림 속에 내 시 붙여 빛을 내려 한다면 / 欲向丹靑覓顔色
물속의 명월이요 거울 속의 사람일레/ 水中明月鏡中人
두세 가지 가로 비낀 성긴 그림자 / 橫斜疎影兩三枝
고산 처사의 시야말로 적격이로다 / 好入孤山處士詩
원래 시인 묵객과 인연이 깊은 나무 / 元與騷人有契分
진위(眞僞) 여부 떠나서 한껏 자태 뽐내누나 / 未論眞假自多姿
[주-D001] 물속의 …… 사람일레 :
당체(當體)의 진경(眞景)을 적시(摘示)하지 못한 채 허환(虛幻)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이라는 뜻이다.
[주-D002] 두세 가지 …… 적격이로다 :
이 그림에는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유명한 송(宋) 나라의 은자(隱者) 임포(林逋)의 시가 들어가야 격에 어울린다는 뜻이다. 고산 처사(孤山處士)는 임포의 호이다. 천고(千古)의 절창(絶唱)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시 ‘산원소매(山園小梅)’에 “얕고도 맑은 물에 비친 가로 비낀 성긴 그림자,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 그윽한 향기 떠도누나.[疏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라는 표현이 있다.
금주가 매화를 감상한 절구 시 여섯 수를 보내왔기에 차운하여 수답하다 / 계곡 장유
[錦洲有看梅六絶見寄 次韻以酬]
하석이 보낸 시에 내 눈이 번쩍 / 霞石詩來眼爲明
한매(寒梅) 소식 전해 주는 삽상한 하늘 바람 소리 / 天風颯颯送寒聲
그대 쪽엔 매화꽃 내 쪽엔 눈꽃 / 君邊梅蕋吾邊雪
향과 색 양쪽 극진한 뜻 진정코 어여뻐라 / 香色眞憐兩意傾
병중에 새로 돋아난 눈 빛 귀밑머리 / 病裡新添鬢雪明
누워서 듣나니 풍로의 약 끓는 소리 / 風爐臥聽煮湯聲
매화 시 여섯 절구 정말 화답(和答) 어려워 / 看梅六絶眞難和
늙은이 시 보따리 거덜나게 생겼구려 / 老子詩囊爲爾傾
피기 시작한 매화 가지 환히 비치는 눈꽃 송이 / 梅花開映雪花明
그대의 시 그야말로 그림과 음악을 겸했구려 / 詩韻眞兼活畫聲
어쩔거나 오래도록 병석에 누운 계옹 / 無那谿翁長臥病
어느 때나 그대 찾아 술 단지 비워 볼꼬 / 一樽何日就君傾
서재의 창문 밝아오는 그때가 제일 기분 좋아 / 小齋偏愛紙窓明
처마 끝 눈 녹는 낙숫물 소리도 톰방톰방 / 簷雪初融亂滴聲
생각건대 그대의 집 옛 매화 꽃망울 터뜨려 / 遙想君家古梅發
술잔 속에 성긴 그림자 반쯤 기울어졌으리 / 樽前疎影半欹傾
영대를 보중(保重)하여 일촌(一寸)의 단심(丹心) 밝힐지니 / 靈臺珍重寸丹明
귀를 스쳐 지나가는 분분한 만 개의 구멍 소리 / 過耳紛紛萬竅聲
한매에 한마디 붙이노니 부디 몸을 아끼시라 / 寄語寒梅須自愛
봄이 오면 도리로 모두들 쏠리리니 / 春來桃李恐相傾
밝은 이 시대에 허주와 같은 이내 신세 / 虛舟身世託休明
한바탕 풍파가 몰아칠까 두려웁소 / 怕聽風波震薄聲
세모의 재실(齋室) 등잔불만 썰렁할 뿐 / 歲暮齋居燈火冷
마음속 이 근심을 누구에게 토로할꼬 / 幽懷悄悄向誰傾
[주-D001] 금주(錦洲) :
박정(朴炡)의 호이다.
[주-D002] 하석(霞石) :
박정의 또 다른 호이다.
[주-D003] 귀를 …… 구멍 소리 :
조정에 어려운 일이 발생하여 별별 의논과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을 말한다.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큰 땅덩어리가 숨을 내뿜는 것을 바람이라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모르지만 일단 일어났다고 하면 만 개의 구멍이 노하여 부르짖기 시작한다.[夫大塊噫氣 其名爲風 是唯無作 作則萬竅怒號]”라는 말이 있다.
[주-D004] 도리(桃李) :
권세를 장악하고 조정을 좌우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주-D005] 허주(虛舟) :
사공 없이 떠도는 배처럼 의탁할 곳이 없는 처지를 말한다.
또 매화 일 절에 화답하다 / 계곡 장유
[又和梅花一絶]
마음의 벗을 삼은 남국의 외로운 향화(香花) / 孤芳南國託心期
이별 뒤로 그 누가 매화 일지(梅花一枝) 부쳐 왔나 / 別後誰能寄一枝
경성에선 끝도 없이 꽃과 버들만 좋아하여 / 無限京華好花柳
봄 내내 농염한 자태 사점(私占)하려 다투리라 / 春來競占艷陽私
[주-D001] 이별 …… 부쳐 왔나 :
헤어진 뒤로 소식을 물어 온 친붕(親朋)이 별로 없었다는 말이다. 후위(後魏)의 육개(陸凱)가 강동(江東)의 매화 한 가지를 친구인 범엽(范曄)에게 보내면서 “매화 가지 꺾다가 역마 탄 사자 만나, 농산(隴山)에 있는 벗에게 부쳐 보내노라. 강남에선 보려 해도 볼 수 없는 것, 가지 하나에 달린 봄 한번 감상하시기를.[折梅逢驛使 寄與隴頭人 江南無所有 聊贈一枝春]”이라고 읊은 유명한 시가 전한다. 《太平御覽 卷970 所引 荊州記》
매화 몇 가지가 늦게 피었기에 장구를 지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다/ 고봉 기대승
〔梅花數枝 開亦最晩 吟成長句 用破幽寂〕
처마 모퉁이 찬 매화 스스로 꽃다우니 / 簷角寒梅亦自芳
깊은 밤 와서 보매 의미심장하여라 / 夜深來繞意偏長
달 밝으매 술잔에 엉성한 그림자 비치고 / 踈踈月照尊中影
바람 불면 대밭 가에 은은히 향기 난다 / 細細風吹竹外香
섣달에 벌어진 한 가지 어쩌면 얻어 볼꼬 / 破臘一枝那得見
봄에 뒤진 외로운 나무 가장 애달프다 / 殿春孤樹最堪傷
서호의 병골이라 시도 짓기 어려우니 / 西湖病骨詩難到
내일 아침 술에 취해 미쳐나 볼까 / 准擬明朝醉發狂
또〔又〕
강가 마을 늦봄에 보슬비 내리니 / 江城春晩雨霏霏
한 그루 때늦은 매화 울타리에 비친다 / 一樹殘梅映短籬
꺾어 오려니 지는 꽃잎 가엾기만 하여 / 剩欲折來憐雪落
때때로 구경하느라 연기 헤치기도 하네 / 有時看去亂煙披
창가에 달 비치니 그림자 따르고 / 小窓對月隨晴影
오솔길에 술잔 옮기며 옥유를 마신다 / 幽逕傳杯唼玉蕤
열매 열면 응당 정실에 섞을 만하니 / 着子會應和鼎實
가지 끝에 푸른 꼭지 주렁주렁하구나 / 梢頭靑蔕已離離
또〔又〕
금년은 봄철이 하도 늦어서 / 今年春最晩
삼월에야 매화가 꽃이 피었네 / 三月梅花開
다시 차가운 눈을 만나니 / 更値寒凝雪
이끼에 가득히 떨어짐 시름하네 / 仍愁落滿苔
술 깨니 꽃향기 옷소매에 남았고 / 酒醒香裛袂
잔에 비친 그림자 꿈에도 아쉬워라 / 夢斷影交盃
만 리 먼 그대에게 주고 싶어서 / 萬里思相贈
가지를 휘어잡고 홀로 생각해 본다 / 攀條首獨回
[주-D001] 서호(西湖)의 병골(病骨) :
서호처사(西湖處士)로 불린 북송의 임포(林逋)를 가리킨다. 자는 군복(君復)이고, 인종이 화정선생(和靖先生)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서호의 고산(孤山)에 은거하여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행서와 시에 능하였는데 특히 매화시가 유명하다. 장가를 들지 않아 처자 없이 매화를 심고 학을 기르며 즐기니,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하였다. 여기서는 고봉 자신을 임포에 비겨 말한 것이다. 《宋史 卷457 林逋列傳》
[주-D002] 옥유(玉蕤)를 마신다 :
옥유는 옥의 정화로, 도가(道家)에서 이를 먹으면 신선이 될 수 있다 하는데, 여기서는 매화를 옥에 비유하여 매화나무 아래에서 술을 마심을 말한다.
[주-D003] 열매……만하니 :
매실이 솥 안에 담긴 음식물을 요리하는 조미료로 쓰일 만하다는 말이다. 《서경(書經)》〈열명 하(說命下)〉에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너는 짐의 뜻을 가르쳐서 만약 술과 단술을 만들거든 네가 누룩과 엿기름이 되며, 만약 간을 맞춘 국을 만들거든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한다.〔爾惟訓于朕志 若作酒醴 爾惟麴糱 若作和羹 爾惟鹽梅〕”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