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릴 때 만 해도 70까지만 살아도 사람들은 망자를 가르켜 호상이라 했다.
상여도 화려하게 만들어 상주를 꽃 상여에 태우고 조문객들은 그 뒤를 따르며 망자를 가뿐한 마음으로 보내 드렸다.
그 보다 10년을 더 살고보니 건강도 활동력도 예전 만 못함을 느끼게 된다.
그와 함께 생각하는 것이 요즘 유행되는 well-dying이다.
그 말의 시작은 사형수들이 고통없이 죽을수 있는 방법을 찾다보니 생긴 말이다.
그러나 인간 수명이 늘다 보니 잘 살다 잘 가는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 속 뜻은 물리적인 죽음이라기 보다 영적 의미가 더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 된다.
100세 시대라지만 통계적으로 100세 까지 사는 어르신들은 알고보면 0.5%도 채 않된다.
80이 되니 그러기에 죽음이란 단어가 결코 남의 일이 아님을 느끼게 된다.
결국 하루 하루를 장담 할 수 없는 입장이라면 준비도 업이 갑작기 그런일이 닥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종교적인 문제는 각각 그 믿는 대상은 다르지만 추구하는 목적은 극락이요 천국이 아닌가?
잘 죽는 길은 그리로 가는 티켓을 확보하는 일이 아닐까 ? 준비 없이 살다 이대로 어느 부인처럼 치매라고 걸리면
그게 well-dying이 아닐 것이다.
선친께서는 지금으로부터 90 년 전
내가 태어난 고향에 예배당을 세우셨던 어른이셨다.
말이 예배당이지 전기도 없는 깡촌 시골에 우리나라 후기 농경 시대와 다를바 없는 모습이었다
나이 4~5세 때 쯤,
우리 집에 2~30명이니 되는 부모 없는 고아들로 북새통을 이룬 기억이 난다.
영문도 모르고 나는 고아들과 함께 먹고 자며 자랐다.
철이 들고 나서 그때 그 고아들이 누구였나며 알고 싶었으나 마땅히 누구 한테 물어 볼 사람이 없었다.
댓마지기 논과 서너 마지기 밭이 전부인 우리집 형편에다 더구나 할아버지를 모시며 장가 안 간 삼촌 2명과 우리 8남매를 합치면 13명 식솔이 있었기에 무엇을 믿고 그런 결단을 내렸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그 휴유증으로 2년 전에 작고하신 세째 형님이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입장이었다. 초등학교 6년을 수석으로 졸업한 우리집 인재였지만 결국 걸어 지척에 있는 중학교 조차 두어 달 다니다가 중도 포기해야 만 했기 때문이다.
가장 아쉬워 했던 분이 당시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다. 우리집에 너 댓 번씩이나 찿아와 어머니를 설득하려 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결국 학교를 그만 둘수 밖에 없었음을 지금도 안탁깝게 생각하고 있다.
선친께서 결단한 일과 또 결단을 따르는 어머님의 용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부터 유래된 것일 까 ?
언젠가 그 선례를 아내에게 이야기 하면서 만약 당신이 그런 경우라며 어떻게 했겠냐며 물을 때가 있었다.
아내는 단호하게 말한다. 그 건 아니라고....
그 고아들이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터지고 그때 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가 무려 650명 (동광원 통계)
그중 일부 였다는 얼미전 그 사실을 알게 되니하루도 아닌 또 한 달도 아닌 1.5년정도 인고의 세월을 사랑으로 승화시킨 두분의 희생.
나라까지도 전쟁 고아를 도울 시스템이 전무한 상태로 생계 전체가 부모님 몫으로 그때 형편이 짐작이 간다 .
등이 휘도록 죽어라 일만 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님.
맨발의 성자로 일컫는 동광원을 세우신 이현필 선생님 뜻을 순종으로 받아드린 아버님께도....
돌아 가진지 어언 30여년
믿음안에서 천국으로 가셨을 부모님의 소천이 요즘 말로 well-dying의 표상이 아닐까 자식으로 서원 해 본다.
올 여름 살인 더위를 이겨낸 그 용기와 건강으로 영혼까지도 well- being에서 well-dying까지 주님의 사랑이 넘쳐 나소서.. 아멘
첫댓글 https://www.youtube.com/watch?v=wDWHwgo_K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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