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현전지現前地와 반야바라밀>
-현전지, 지혜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경지
지혜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는 경지를 현전지라 합니다. 여섯 번째 수행의 지위에 이르면 앞서
수행한 다섯 단계의 수행이 합일合一하여 지혜가 현현됩니다. 바로 반야지般若智를 얻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현전지에서 보살은 모든 법은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임을 관찰해야 한다고 설하며,
12연기의 관계성을 상세히 반복 설명합니다. 「십지품」에서 금강장 보살이 해탈월 보살에게
설하는 12연기의 상속相續은 이렇습니다.
‘제일 가는 이치[第一義諦]를 알지 못하므로 무명無明이라 하고, 지어 놓은 업과業果를
행行이라 하고, 행을 의지한 첫 마음이 식識이요, 식과 함께 나는 4온四蘊을 이름과
물질[名色]이라 하고, 이름과 물질이 증장하여 6처六處가 되고, 근根과 경계境界 와 식이
화합한 것을 촉觸이라 하고, 촉과 함께 생기는 것을 받아들임[受]이라 하고, 받아들이는 데
물드는 것을 사랑[愛]이라 하고, 사랑이 증장한 것을 취함[取]이라 하고, 취함으로 일으킨
유루업有漏業을 유有라 하고, 업으로부터 온蘊을 일으키는 것을 나는 것이라 하고, 온이
성숙함을 늙음이라 하고, 온이 무너짐을 죽음이라 하고, 죽을 적에 이별하는 것을 어리석어
탐내고 그리워하여 가슴이 답답한 것을 걱정이라 하고, 눈물 흘리며 슬퍼함을 탄식이라
하나니 5근五根에 있어서는 괴로움이라 하고, 뜻에 있어서는 근심이라 하고, 근심과
괴로움이 점점 많아지면 시달림이라 하나니, 이리하여 괴로움이라는 나무가 자라거니와,
나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짓는 이도 없고 받는 이도 없도다.’ 또 생각하기를 ‘만일 짓는 이가
있으면 짓는 일이 있을 것이요, 만일 짓는 이가 없으면 짓는 일도 없을 것이니, 제일가는
이치 에는 모두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로다’ 하느니라.
12연기처럼 평소 기본적 인식이 세워져 있는 교설을 화엄경 「십지품」에서 확인할 줄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면 이 대목을 메모해 두실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소득이
있습니다. 12연기의 시작은 무명인데 정작 무명은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계십니까?
노사老死와 생生에서 다시 무명이 시작된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 속을 굴리는 것과 같다고,
12연기를 원의 순환으로 설정하여 설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십지품」은 그런
식으로 12연기를 정형화하지 않았습니다. 무명을 제일의제第一義諦를 모르기에 시작되는
식의 작용으로 본 것입니다. 제일의제라는 말은 ‘어떤 조건과 논리로도 파할수 없는 명제’라는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경우에만 쓸 수 있는 고급 용어입니다. 「십지품」에서 12연기를 설하며
제일의제를 거론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순전히 제 개인 생각입니다만, 12연기를 대하면서 중생들에게 이런 ‘걸림’이 장애가 됨은
부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뻔해서 아마도 다음과 같은 부언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래 부언은 부처님이 아닌 21세기 대한민국의 성법이 부처님의 심정을 대변하여 가상의
경우를 전제로 쓴 것이니 행여 「십지품」의 글로 착각하신다면 난 무간지옥행이니
살펴주시길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너희들이 보살 수행의 5지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반드시 성취해야 할 수행의 덕목들을
간곡하고 자세하게 설했다. 그런데 이 6지의 수행에 도달해서 무명의 존재조차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는구나. 내가 애써 법의 이치를 설했건만 너희들을 위해 다시 한번 더 설하니
잊지 말도록 하여라. 마음의 인식에 의한 집착으로 연결고리를 삼는 연기는, 12연결 중 오직
하나만이라도 너희가 이것은 진실이 아니고, 실체가 무아와 공이니 내 마음 어디에도 머물
곳도 머무르게 할 수도 없다는 이치를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일의제인 것이다’
수년 전에 12연기가 언제 형성 되었는지, 붓다의 친설인지 상당한 기간 고민하며 자료들을
살폈습니다. 아함경은 붓다의 깨달음을 온전한 12연기로 단정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붓다께서 5비구에게 설하신 첫 가르침은 12연기가 아니라 4성제라고 생각합니다. 4성제를
‘연기적’으로 설하셨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삶은 고苦다, 고는 갖가지 원인이 쌓여 일어난다[集] 그렇기에 고의 원인 재료들을 없애면[滅]
고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수행을 통해[八正道]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진리를 4성제라 한다.’라는 내용을 설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8정도는 구체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 시간적 제한이 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엄경
「십지품」에 있는 37조도품의 가장 중요한 수행의 덕목으로서의 8정도의 위상을 보면,
대승불교가 일어날때 재가자들의 일상생활 속의 기본 수행 자세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합니다.
12연기의 정립은 부파불교시대를 거쳐 역시 인간 중심의 연기론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붓다의 깨달음은 12연기가 아니라 연기적 ‘제일의제’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4성제와 같이 12연기의 용어들이 붓다의 첫 깨달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나 많습니다. 연기라는 특별한 용어는 용수가 부처님을 공경하며 지은
중론송에서 비로소 연기를 공空과 대등하다고 설파하면서 불교의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언어로 자리 잡게 됩니다.
한편 화엄경에서는 4종법계四種法界연기, 중중무진重重無盡연기 등 대단히 고차원적인 법계
전체를 대상으로 삼는 연기 사상을 설하고 있습니다. 12연기는 일인一因, 일연一緣,
일과一果의 아주 단순하고 업을 강조한 일차원적 인과에 중점을 둔 것이어서, 화엄의
법계연기와는 비교가 민망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납니다.
불교 경전들은 인류의 어떤 사상의 집합보다도 심오하고 방대합니다. 경전의 해석서인
논서를 제외한다 해도 불멸 이후 거의 천년 이상 셀 수 없이 많은 수행자들이 경험한 경지를
경전을 통해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엄경이나 법화경처럼 많은 품으로 이루어진
대경大經들은 거의 300년의 편찬 기간을 거쳐서 완성된 경집經集들입니다.
말이 300년이지 이 정도의 시간이면 인간의 근본 가치관이 충분히 변하고도 남을 만한
시간입니다. 화엄경의 경우도 「십지품」을 시작으로 각 품이 더해지는 300년 이상의 편찬
과정을 거치기에 각품의 ‘관점’과 ‘깊이’의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러한
차이가 경전의 핵심 사상을 흐리게 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만, 접근 방식의 다양화로
내용이 다소 중복되고 반복되는 측면은 있습니다.
600부 반야경의 경우 그 정도가 심해 완독을 하려면 엄청난 인욕바라밀을 해야 합니다.
화엄경의 경우 법의 성품과 보살도, 깨달음의 궁극의 경지에 대해 대단히 정교한 문장과
수려한 게송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바라밀’에 대한 부분도 상당히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10바라밀은 「십지품」 이후에 편찬된 80화엄경의 몇 개의 품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80화엄경의 39품을 중심으로 하면 「십지품」은 제26품에 해당되는데, 「십지품」
외에 제18 명법품, 제21 십행품, 제38 이세간품, 제39 입법계품 등에서 10바라밀이
설해지고 있습니다.
「십지품」의 현전지 부분에서 12연기의 상속을 소개하며 느닷없이 경전의 구성에 대한 장황한
보충 설명을 하는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현전지에서 얻는 경지가 반야지般若智인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십지품」에서는 반야지를 12연기를 잘 이해하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한편 ‘반야’라는 개념의 주인인 반야부의 경전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무려
600권의 분량으로 우리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600권 반야경의 주장을 기가 막힐 정도로 짧게 축약시켜 반야심경이 되었습니다. 반야심경은
12연기의 시작과 끝인 무명에서 노사까지를 다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라고 누누이
강조합니다.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도 없고 무명의 다함도 역시 없고 내지는 무명의 다음 단계인 행에서 노사의 전단계인
생까지의 열 단계를 생략한 것입니다,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의 다함도 역시 없다,
이렇게 말입니다. 게다가 시작은 아예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으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닦는 수행은
오온이 공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전제를 해버립니다.
「십지품」의 내용과 반야경의 ‘반야지’가 사실상 정면충돌하는 것입니다. 이런 충돌의 해소를
어떻게 하느냐가 반야지일 정도로 난감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경전의 이해에는 언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많은 난제들이 있습니다. 흔히 한역본보다 산스크리트나 팔리어 원전의
우리말 직역본이 불교 이해에 필수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부처님께서 주로 사용하신 언어는 자신의 출신국 언어인 마가다어였고 제자들에게는
전법할 때 현지의 언어를 사용해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산스크리트어는 고대 인도의 표준어로 그 범위가 매우 넓고, 팔리어는 인도 서부 지역의
언어로 아쇼카왕 이후 불전의 기록에 주로 사용되어 스리랑카 등 상좌부 경전의 주 언어로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범어梵語 역시 부처님
재세 시 언어와는 차이가 없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말 범어 직역본들은 이미 한국적
대승사상으로 ‘물든’ 후의 번역이라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습니다.
사실상 대승의 언어로 원전을 해석하려는 ‘무의식’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2000여 년이라는
시간의 벽을 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언어적 문제가 해소된다 해도 오래 이어져 내려온
전통과 관습, 문화적 환경 등의 이해는 거의 극복이 불가할 정도입니다. 경전 또한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언어의 기술記述이기에 입체적인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십지품」의 반야지에 대한 12연기가 오류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후대 반야부 경전의
‘반야바라밀’의 제일의제인 법의 실체는 공空이라는 단정이 더 발전된 불교의 논리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화엄경 역시 반야경에 앞서 아공법공我空法空을 드러낸 곳은 수없이
많습니다. 확인해 드리면 앞의 이구지 부분에서 제가 십행품의 “온갖 법이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여 잠깐 일어났다 잠깐 없어지는 것이요, 견고하지 못하여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요술
같고 변화함과 같아서 어리석은 이를 의혹케 하는 것이니라”라는 내용을 소개하며 금강경을
보는 것 같다고 지적한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명법품에서 법혜보살이 설한 「십지품」의 12연기와는 전혀 다른 반야바라밀을 설한
본문을 옮겨드리겠습니다.
‘여러 부처님께 법을 듣고 받아 지니며, 선지식을 친근하여 섬기고 게으르지 아니하며, 항상
법문 듣기를 좋아하여 마음에 만족함이 없고, 들음을 따라 이치답게 생각하며, 참된 삼매에
들어 모든 사특한 소견을 여의며, 모든 법을 잘 관찰하여 실상의 인印을 얻으며, 여래의
공용功用 없는 도를 분명히 알며, 넓은 문의 지혜를 타고 온갖 지혜의 문에 들어가서, 영원히
휴식함을 얻으면, 이것이 반야 바라밀다를 청정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