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건국전쟁 대한민국의 탄생 관람기
2024년 2월 1일에 전국 145개 상영관에서 개봉된 다큐 영화 《건국전쟁-대한민국의 탄생(The Birth of Korea)》을 관람했다. 2024년 3월 7일 현재 누적 관객수는 1,110,791명으로 집계된 이 영화는 대한민국 건국의 1세대들이 고군분투하며 오늘의 대한민국을 세운 이야기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국가의 가치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산다는 자부심을 마음속에 깊이 간직할 수 있었다. 우리의 근대역사는 나라가 망했고 남북분단의 아픔 속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을 치렀던 역사였다.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세계를 놀라게 한 위대한 국가로 우뚝 설 수 있었던 자랑스러운 내 나라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국가 천년대계를 세우고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던 건국 1세대들의 혜안이 늦어지만 이제라도 빛을 보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 중심에 있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가 오늘날 대한민국이 자유와 민주국가로서 우뚝 설 수 있도록 수고했던 흔적을 찾느라고 3년 동안 동서분주(東西奔走)한 김덕영 감독의 노고가 고마울 뿐이다.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삼리 능안골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과 어머니 김해 김 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조 이성계의 18대 손이자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 16대 손이다. 그는 성년이 되었을 때 감리교회가 설립한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면서 신문학을 접하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했다. 대한제국 시절에 우남은 관직을 맡았다.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 퇴위 음모에 가담하여 5년 7개월 동안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1904년 러일전쟁 후 사면되었고 1905년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지냈고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광복된 조국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주도하면서 초대 국회의장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2년 제2대, 1956년 제3대 직선제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했다. 대통령 임기 중에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실시, 한미상호방위조약체결, 대대적인 학교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국민의 반발을 샀다. 1960년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발발한 4.19 학생 혁명에 대해서 모든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下野)했다. 그 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말년을 보내다가 1965년 향년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겨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 영화는 그동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이승만을 바로 알리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 시 한강철교를 폭파하였고 3.15 부정선거의 주역이라는 주장 등이다. 영화는 1945년 해방 이후 남북한은 70여 년 동안 달려온 남북한의 극명한 차이점을 보여줌으로써 시작한다. 인공위성에서 잡은 한반도의 야경이다. 가난하여 전기가 절대 부족한 어둠의 나라 북한과 세계 6위 경제 부국답게 밤을 밝고 환하게 비치는 빛의 나라 대한민국과의 선명한 대조가 인상적이다. 이런 빛과 어둠의 차이는 바로 대한민국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건국 설계도를 그린 이승만을 비롯한 건국 1세대들의 숨은 공로의 결과였다.
1945년 해방 후 한반도는 민주와 공산이념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남한에는 북한의 공산당 세력이 득실거렸다. 당시는 공산당이 얼마나 나쁜 지를 모르고 많은 국민들은 공산주의가 이상향을 향해 나가는 문으로 인식하였다. 신탁통치의 찬반으로 표출되었던 이념의 대립은 국토의 분단 못지않게 한 민족의 분단을 고착화시켜 놓았다. 한국전쟁이 휴전된 지 3년 뒤 1956년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30%가 공산당 조봉암 후보를 지지한 것만 보더라도 자유 대한민국에는 공산세력들이 이미 침투하여 국가 전복을 기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와중에서도 대한민국이 민주국가로 세계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만큼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동력은 전적으로 우남이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몸소 깨닫고 국가 천년설계도를 작성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 좌파 세력들은 우남의 공을 깎아내리는 데 혈안이 되었다.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가르쳤고 그 이후 세대들에게 이승만은 독재자, 부정축재자, 전쟁 중 제 살길을 찾아 도망한 런승만(run承晩)으로 인식시켰다. 그러나 사실에 입각한 이 영화는 기록문서와 영상을 각색하지 않고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이승만을 비롯한 건국 1세대들의 숨은 공로를 진실되게 밝혀 준다.
예컨대, 첫째 6.25 한국전쟁 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먼저 도망쳐 무수한 국민이 죽었다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당시 경찰의 통제 하에 다리를 폭파하였기에 인명 피해는 없었고 민간인은 다리 아래에 설치된 부교를 통해서 건넜다. 둘째, 스위스 계좌에 재산을 은익 후 망명했다지만 사실 이승만은 자신의 개인 사저 이화장(梨花莊)이 재산의 전부였다. 셋째, 부정선거를 치러서라도 권력을 유지하려는 독재자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3.15 부정 선거는 대통령과 무관한 부통령 선거에서 나온 결과였다. 이를 대통령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4.19 학생 혁명이 일어났을 때 이승만은 4월 27일 대통령직에서 하야하고 하와이로 건너갔다. 국민의 하야 촉구를 전면 거부하고 오히려 무력으로 반대자들을 진압하여 영구 집권에 들어가는 이 땅의 모든 독재자와는 전혀 달랐다. 또한 4.19 학생 혁명의 대학생들은 이미 1948년 건국 이후 초등학생 시절부터 민주주의를 제대로 교육받고 잘 알고 있던 세대들이었다. 독재자는 국민에게 절대로 민주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영화 《건국전쟁》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알고 국가를 세운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남긴 위대한 공로를 다음 4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농지개혁이다. 1949년에 단행한 이 개혁 조치는 토지 소작농을 없애고 만석꾼의 나라에서 개인이 자기 땅을 소유하도록 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이는 토지자본에서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대한민국 기업들이 세계를 상대로 경쟁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지금 대한민국이 IT 강국으로 우뚝 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둘째,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이다. 이는 한미 양국이 한반도 군사적 긴장 상황에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1953년 10월 1일 체결되고 1954년 11월 18일 조약 제34호로 발효된 조약이다. 그 덕에 제2의 6.25 전쟁이 발발하지 못했고 1954년 이후 한반도 내에서는 100명 이상이 죽는 전쟁이 한 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루한 한국전쟁에서 빨리 발을 빼고 떠나려고만 하는 무책임한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끝까지 대한민국 안보를 책임지라고 약소국 대통령이 세계 최강대국 대통령을 협박하다시피 하고 얻어낸 쾌거다. 그 덕에 한반도 전쟁 억제 효과를 톡톡하게 누릴 수 있었고 그 여력을 경제 발전에 쏟을 수 있었다.
셋째, 여성의 참정권을 실시하여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이는 1948년에 프랑스와 스위스보다 먼저 시행했다. 더욱이 집권 11년 8개월 중에 국민 투표만 11차례를 실시하였으니 1년에 한 번 꼴로 국민의 뜻을 물으며 국정을 펼쳤다. 진정 민주주의의 실천이 아닐 수 없다.
넷째, 교육에 투자했다. 가장 가난한 정부가 교육에는 전체 예산 20%를 투자하여 국민 대다수가 초등교육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 결과 문맹률 80%에서 20%로 떨어졌고 전국 78개 대학에서 10만 명의 대학생들이 교육받게 되었다. 대학생 숫자로 볼 때 당시 세계 4위에 해당된다.
다섯째, 원자력 인재 양성에 닻을 올렸다. 원자력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시절에 원자력 전문가를 키우는 국비 유학생 제도를 실시하여 우수한 인재들을 미국 등 원자력 선진국에 보내어 오늘날 세계 1등 원자력 국가가 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을 사랑했던 우남은 북한을 추종하던 좌파 세력들에 의해서 왜곡 날조되어 역사의 능선을 달려왔던 터라 살아생전에 그토록 오고 싶었던 조국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쓸쓸하게 이역만리타국에서 생의 마지막을 맞이했다. 그때 우남은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의 국민들과 후손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나라를 한 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우리 국민들은 잘 알아야 합니다. 불행했던 과거를 거울삼아 두 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우리 국민들에게 주는 마지막 유언입니다.” 영화 《건국전쟁》을 보고난 후 선열들이 땀과 피를 쏟아가며 지켜낸 조국 대한민국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국익을 위하는 애국의 가치 앞에서는 좌우, 여야가 따로 없어야 한다는 교훈이 마음 깊이 각인된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더욱더 소리 높여 외치고 싶다. “너희는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애굽기 19:6).
인공위성에서 잡은 빛의 나라 대한민국과 어둠의 나라 북한의 대조적인 현실
청와대에 걸린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공식 초상화
젊은 날의 우남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한강 철교를 폭파한 후 그 아래에 놓은 인도교로 국민들이 건너고 있다.
외국 정상으로는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우남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미국 시민들
헨리 트루먼 대통령 자택 방문(1954년 8월 5일)
귀국길에 방문한 하와이
살아생전에 오고 싶었던 고국을 죽은 뒤 돌아온 우남 이승만의 유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이하 정부 관료들이 우남의 유해를 맞이하고 있다.
인산인해를 이룬 우남의 장례식 한강철교를 통과하고 있다.
이승만의 업적 원자력
이승만의 업적 경제 성장의 발판
이승만의 업적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이승만의 업적 농지 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