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앨범 유감 / 양선례
초등학교 동창들이 모인 밴드에 긴 파일이 올라왔다. 퇴직하고 조금은 한가롭게 보내는 친구가 학창 시절 졸업 앨범을 하나하나 스캔하여 영상으로 만든 거였다. 우리 반 1번이던 덕자가 맨 앞줄에 앉아 있다. 아홉 살에 입학했지만 키가 유난히 작았던 덕자. 동글동글한 얼굴이 눈에 아른거린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대도시 공장에 돈 벌러 갔다는 그녀를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와 친했지만 졸업 후에는 소식이 끊긴 정숙이도 있다. 장학사인 아버지를 따라서 잠시 우리 학교에 전학 온 그녀. 아마도 아버지의 임기가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갔겠지? 체구는 작지만 친절해서 걔네 집에 자주 놀러 갔다. 그러면 가정주부인 정숙이 엄마가 항상 간식을 챙겨 주었다. 그게 부담스러워 곧 발길을 끊었지만. 키가 크고 노래도 잘하던 효선이도 선생님 옆에 서 있다. 첫아이를 임신한 선생님이 키 큰 효선이를 방패 삼아 부른 배를 가리고 있다. 효선이는 당시 최고의 히트곡이던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를 담임 선생님께 가르쳐 주었다. 동요나 부르던 내 눈에 그런 그녀가 한참 언니로 보였던 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다.
나는 두 번째 줄, 한가운데에 자리잡았다. 결혼하지 않고 지금껏 홀로 늙은 미자가 오른쪽, 여수로 시집가서 간간이 소식을 듣는 연희가 내 왼쪽에 있다. 나는 긴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줄무늬 스웨터를 입었다. 안경을 쓰지 않을 때라 내가 봐도 낯설다. 앨범이 없었더라면 거의 반백 년 전의 일을 이렇게 세세하게 기억하진 못할 것이다.
며칠 전 우리 학교 6학년 학생들이 이틀에 걸쳐 앨범에 들어갈 사진을 촬영했다. 더위가 누그러지고 벚나무에 단풍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면 어느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연례 행사 중 하나이다. 한껏 차려입은 아이들이 맘에 드는 교정의 건물이나 나무 앞에서 폼을 잡는다. 교직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작은 학교에서는 그 당연한 것도 하기 어려웠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서 들어오려는 업자가 없다. 전남은 전교생 60명 미만의 소규모 학교가 과반에 이른다. 그러니 한 반의 학생 수도 많아야 채 열 명이 되지 않는 셈이다. 학교 장터에서 주문하고 제작이 이루어지니 개당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릴 수도 없다. 언제부턴가 소규모 학교끼리 묶어서 지자체에서 앨범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학교 앨범에는 군수와 면장 등의 행정직 공무원 얼굴이 들어간 적도 있다.
6학년이 170명이나 되는 우리 학교는 그런 걱정은 없다. 지난 4월, 학교운영위 안건으로 앨범 제작 건이 올라올 때만 해도 순조롭게 추진될 줄 알았다. 그런데 그사이 세상이 달라졌다. 지난 8월 말에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딥페이크(deepfake) 때문이다. 딥 러닝(deep learning)과 가짜(fake)의 합성어로 허위합성물을 뜻하는 딥페이크가 성범죄에 활용되면서 10대 청소년과 교원을 대상으로 한 피해가 늘고 있다. 별다른 죄의식 없이 놀이처럼 불과 몇 초면 뚝딱 만든단다. 내가 근무하는 지역에서도 피해가 생겼다. 딥페이크의 더 큰 문제는 이미 인터넷상에 퍼진 허위 영상물을 삭제하기도, 게시자를 찾아내기도 어렵다는 데 있다. 인공 지능 사회의 부작용이 아닐 수 없다. 때마침 교원 단체에서도 각 학교의 앨범 제작 실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만드느냐, 그러지 않느냐부터 시작해서 단체와 개인 사진 탑재 여부를 세밀하게 물었다.
그 불똥이 우리 학교까지 튈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진사가 학교를 방문한 날, 여섯 명의 6학년 담임 선생님이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했다. 개인 사진은 물론이고, 단체 역시 아이들만 찍는단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게 된 세상이라 당혹스럽기만 했다. 작년 앨범을 펼쳤다. 교장의 상반신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한쪽, 집무 장면과 학생회 임원과 찍은 사진이 각각 반쪽씩 차지하여 교장 혼자서만 무려 두 쪽을 썼다. 교감 역시 비슷한 장면이 위아래로 배치되어 한쪽, 행정실장도 그랬다.
앨범을 만드는 목적이 무엇인가. 내 친구, 우리 선생님, 우리 학교를 오래도록 기억하려는 게 아닌가. 관리자 얼굴 보려고 앨범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뭔가 주객이 한참이나 전도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담임 선생님이 들어가지 않는다면 관리자도 그래야 할 것이다. 쪽수가 늘어날수록 가격만 올라간다. 나이가 든 사람은 딥페이크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여 의사조차 묻지 않은 것인가. 관리자는 그렇다 치고 꽃보다 이쁜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어야 형평성에 맞지 않나?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쳤다. 진정으로 걱정된다면 차라리 학운위 심의를 무시하고 앨범을 만들지 말지, 처음부터 다시 조사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결국 우리 학교는 교직원 개인과 단체, 6학년 담임 선생님의 독사진과 학년 단체 사진을 모두 없앴다. 학급 소개 옆에 실리는 명함판 크기만 예년처럼 살리기로 합의했다. 또 여러 쪽을 차지하여 가격만 올리는 관리자 사진도 한 컷만 넣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사진기를 빌리고, 한 장에 몇백 원을 주고 현상하여 잘 나온 것만 추려 앨범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일은 이젠 정말 추억이 되고 말았다. 여행 한 번 다녀오면 수백 장의 사진과 영상이 쌓인다. 풍경을 눈에 담는 서양인에 비해 한국인은 카메라에 담는다. 2억 화소도 거뜬한 휴대폰은 달그림자까지 선명하게 보여 준다. 브이, 하트, 볼하트, 파이팅 등으로 단체 사진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어른도 아이도 언제, 어디서든 셔터를 누를 수 있다.
굳이 앨범이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고 말았다.